'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142건

  1. 2021.05.22 디오드레베를 조심하라
  2. 2021.05.15 가장 가치 있는 삶
  3. 2021.05.15 침묵에게
  4. 2021.05.08 율법의 역할 2
  5. 2021.05.01 더 큰 하나
  6. 2021.04.24 쉬운 기독교, 어려운 기독교
  7. 2021.04.17 시험하시는 하나님
  8. 2021.04.12 주님과 동행하기
posted by 풀숨 2021. 5. 22. 21:08

디오드레베를 조심하라

 

사도들이 직접 사역하던 시대에도 교회 안에는 다양한 문제들이 있었고, 또 교회들 중에서 각각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교회도 있었다. 신약 성경이 기록되고 있는 과정에 있었기에  오늘날의 우리처럼 전체 성경을 가지고 있지 못했으므로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었고 따라서  더욱 그러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지식과 이해의 부족으로 인해서 발생한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들도 있었는데, 요한3서에 기록된 디오드레베가 일으킨 문제가 그중에 하나다.

 

사도 요한이 디오드레베에 대해 묘사한 내용을 보면, 그는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고 사도와 그 일행을 맞아들이지 아니하며 오히려 악한 말로 사도의 일행을 비방하고, 사도를 맞아들이고자 하는 교인들을 교회에서 쫓아내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약 성경 전체에서 요한3서에  딱 한 번 등장하는 인물이라서 그에 대해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그는 그 당시 집사의 직분 – 오늘날로 따지면 담임 목사보다는 장로 직분을 받았었던 것 같고, 아마도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계급이 있고 경제적으로도 부유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또는 말재주가 좋아서 사람들을 잘 설득하는 재능을 가졌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때가 대강 주후 90년 정도였고 사도 요한이 아직 밧모섬에 유배되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당시에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처럼, 사도들을 포함한 복음전도자들이 여러 지방들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하여 세우고 나서 그 교회가 영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수준이 되면 감독/장로/목사를 세워서 교회를 맡기고 다시 다른 지역으로 전도 여행을 갔다. 복음전도자는 혼자서 다닌 것이 아니라 몇 명이 팀을 이루어 다녔으며 그들은 한 지역에서 몇 개월 또는 몇 년을 살면서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 기간 동안에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며 먹을 것과 지낼 곳 등을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디오드레베가 교인들을 선동해서 사도와 그 일행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복음 전파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기록된 성경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못하고 영적인 선생님이 없는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되는 교회가 아니라 디오드레베의 사조직이 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와 똑 같은 일이 어느 교회서나 흔하게 발생할 수 있다. 카리스마 있고 공명심이 큰 목사나 장로가 이끄는 교회에는 이러한 일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또한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목사의 사조직으로 삼는 일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를 정치단체로 조직화 해서 복음이 아니라 정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목사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실제로 그런 목사를 직접 보지 않았던가! 또 예수 그리스도보다 목사가 더 높아져서 복음이 아니라 목사의 주장에 목숨 걸고 따르는 사람들도 직접 보지 않았던가!

 

교회의 목사, 장로, 권사, 또는 안수집사와 같이 지도자가 되면 필연적으로 한 가지 유혹이 따른다. 공명심(功名心)이다. 명예를 향한 탐욕이 생겨서 어떡하든 공을 세워 자기 이름을 널리 드러내 영향력을 키우고자 하는 욕심에 따른 행동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수십, 수백, 심지어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목사님, 장로님 하면서 떠받들어 주는 것 같고 어느 장소에서든 중심이 되는 것 같고 또 자기 없으면 일이 안 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면서 오직 자기만 뭐든 잘 할 수 있는 것 같고 자기가 하면 뭐든 잘 될 것 같고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가 훨씬 더 뛰어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이제 모두가 자기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 도취되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부패한 심령이 갖는 자연스러운 정서이다. 또는 초신자나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성도가 갖는 어리석은 마음이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이라면 점차 이러한 유혹에 저항하는 힘을 갖게 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조금씩 이겨내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유혹에 더욱 함몰되고 결국에는 디오드레베처럼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에게 장악된 교회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한낱 사조직에 불과할 뿐이다. 그 목적이 개인들의 친목에 있든지 경제적 이익이나 정치적 이익에 있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그 교회는 말만 교회일 뿐이며 교회의 탈을 쓴 사탄의 하수인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라는 탈을 쓰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방해가 되며 사람들이 교회를 오해하고 멀리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교회는 너무도 당연하게 복음을 무시하고 성경의 권면들을 무시하며 자기들의 눈에 좋은 것들을 무대뽀로 한다. 주변의 사람들이나 심지어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이 나서서 쓴소리를 해도 절대 듣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마치 성경에 따라서 하는 것처럼 눈속임을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도 확실하다.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사람들이 교회를 싫어하게 만든다. 사탄이 좋아할 일들만 골라서 하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의 끝나고 우리가 예전처럼 다시 모이기 시작하면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들이 교회에 더욱 많이 나타날 것이다. 팬데믹으로 인해서 교회가 모이지 못하고 활동이 억제되어 억눌린 공명심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게 될 것이며, 그러면 그 폐해는 교회가 고스란히 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 모두는 사도 요한의 경고처럼 우리 교회에 그러한 사람이 있는지 세심하게 살펴보고 그러한 사람이 교회를 망가뜨리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떠나도록 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교회 전체가 조심해서 그러한 사람을 경계해야 하는데, 이는 일부가 동조하기 시작하면 결국 전체가 넘어가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우리 주님이 어떠한 삶을 사셨는지 깊이 생각하고 또한 사도들이 어떻게 교회를 섬겼는지 깊이 묵상해야 한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낮추시며 사람들의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섬기려 오셨고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놓으셨다. 주님을 본받아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고후 1:24). 그리고 또한 이렇게 가르쳤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 2:3).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6).

 

그러므로 아주 잠깐 조금만 생각해 봐도 너무도 확실하다. 우리는 항상 스스로를 성찰하며 조심해서 스스로 높아지려 하지 말고 또한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이 교회에서 교인들을 주관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무엇을 가지고 유혹하더라도 그런 사람에게 동조하고 뜻을 함께 해서는 교회를 망치는 것일 뿐이다. 팬데믹이 끝나면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눈에 띄게 많아질 것이다. 경계해야 한다. 조심해야 한다. 우리 주님의 교회에서는 오직 주님만이 높임을 받아야 하고 우리 주님의 아버지가 영광과 감사와 찬양을 받아야 한다. 어느 누가 어떤 말로든 유혹하면 우리 교회에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경계심을 가지고 살펴보면서 교회 전체가 사조직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디오드레베가 벌인 일은 2000년 전에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다. 지금도 어느 지역에서나 어느 교회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 팬데믹의 후유증으로 인해 더욱 많이 일어날 것이다. 말세지말에 성도를 어떻게 하든지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처럼 달려드는 사탄의 졸개들이 양의 탈을 쓰고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신앙과 위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자씨 비유  (0) 2021.06.13
씨 뿌리는 비유  (1) 2021.05.29
가장 가치 있는 삶  (0) 2021.05.15
더 큰 하나  (0) 2021.05.01
쉬운 기독교, 어려운 기독교  (0) 2021.04.24
posted by 풀숨 2021. 5. 15. 20:07

가장 가치 있는 삶

 

어느덧 1 년이 훌쩍 넘어버린 코로나 팬데믹의 기간 동안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며 또 기대하고 있으며 팬데믹이 종식되고 난 후에는 어떠한 삶을 살게 될까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팬데믹이 우리에게 준 가장 귀한 유익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제공해 주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팬데믹 이전에는 일에 치여서 그리고 사람에 치여서 정신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갔는데 이제 모든 사람들의 활동이 현저히 줄어들고 집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많아짐에 따라서 우리는 자기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해 볼 시간이 생겼다.

 

어느 신학자는 예상하기를, 이번 팬데믹이 끝나고 나면 영적 종교적 진공상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이제 의심하기 시작할 것인데, 만일 하나님이 정말 전능하시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막지 못하셨냐고 할 것이고, 하나님이 그것을 내버려 두셨다고 하면 하나님의 도덕성이 의심받게 될 것이며, 하나님이 바이러스를 막지 못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전능하신 분이 아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가득 차게 될 것이며 기독교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더 이상 기독교를 의지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며,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런 사태를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것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도 많이 달라지며 교회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도 많이 달라지게 될 것은 확실하다. 사람들이 예전에는 직접 모여서 진행하던 것들이 이제는 물리적으로 모이지 않고도 화상회의를 통해서 진행하고, 또 먼 거리에 있던 사람과도 훨씬 더 쉽게 화상회의를 통해서 만날 수도 있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에 모이는 것도 물리적으로 직접 모이는 것만이 아니라 펜데믹이 끝난 후에도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집에서 유투브나 줌 등을 통해서 원격으로 예배에 참여하기를 원할 것이다. 이렇게 달라지게 되는 우리의 삶의 새로운 양식에 적응하면서도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적 핵심 가치를 어떻게 계속해서 지켜나갈 것인지 미리 고민하고 나름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 스스로도 과연 가장 가치 있는 삶은 무엇일까 물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의심으로 가득찬 세상을 마주하여, 그냥 무작정 예수님이 맞으니까 무조건 따르는 것이 정답이다고 하는 것은 아무도 설득할 수 없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모든 위인들과 그리고 실제와 신화를 모두 포함하고 또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있을 모든 사람을 다 포함한다고 하더라도, 영원히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산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분은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사셨고, 가장 가치 있는 죽음을 겪으셨고, 또한 가장 가치 있는 부활을 이루어내셨다. 역사적으로 실재이든 아니면 신화이든 그 어떠한 인물도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예수님처럼 가장 가치 있고 멋지게 이루어내신 분은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온 세상과 모든 사람을 위해서 사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화려하고 멋진 삶을 산 인물도 많고, 멋지고 아름답게 죽은 인물도 많으며, 또 극적으로 위대하게 부활했다는 인물도 꽤 있으나, 자기자신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삶과 죽음과 부활을 모두 이루어내신 인물은 오직 예수님 밖에는 없다. 세상이 인정을 하든 하지 않든, 예수님은 사랑과 공의로 삶과 죽음과 부활을 모두 이루어내신 것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에는 위인들을 동경하며 멋진 인생을 꿈꾸지만 막상 성인이 되고나서는 먹고 사느라 바빠서, 적절하게 섞여 사는 게 잘 하는 것 같아서, 또는 누군가를 돌보고 양육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등등, 그 어떤 이유로든 좀 잊거나 멀리 하며 지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기회가 생겼다. 각자 자신의 상황과 환경과 조건에서 가장 가치 있게 사는 삶은 무엇이며 장차 어떠한 죽음이 가장 가치 있는 죽음이 될 것인지….. 무조건 어느 하나가 가장 가치 있는 삶이라서 모두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성격과 능력과 재능이 다 다르고 또 삶의 정황이 다 다른데 어느 한 삶이 무조건 최고로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할 수가 없다. 예수님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사셨던 분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러한 삶을 그대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그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조금이라도 흉내낼 수 있을까? 그분의 가장 가치 있는 죽음을 조금이라도 흉내낼 수 있을까? 그래서 나의 삶도 가장 가치 있게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나의 삶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이제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만 한다. 예수님이 증명하신 가치가 왜 가장 뛰어난 가치이며, 우리 모두가 그 가치를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지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가치가 팬데믹 이후에도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 가치를 다른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고 지켜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이러한 고민들에 대해서 어떠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가치 있는 일이다. 가장 가치 있는 삶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직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계속 고민하며 생각해 보는 것이 유익하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반드시 개입하실 것이고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도하실 것이다. 이런 기회가 생겼는데도 아무 것도 안 하고 시간만 허비하는 것이 어리석은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고민하는 만큼 유익이 올 것이다.

 

지난 1년 반 동안 엄청난 슬픔과 어려움이 우리 모두를 덮쳤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제 아주 조금이라도 그 끝이 보이는 것 같은 때가 왔다. 우리가 지혜롭다면 그 끝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신앙과 위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씨 뿌리는 비유  (1) 2021.05.29
디오드레베를 조심하라  (0) 2021.05.22
더 큰 하나  (0) 2021.05.01
쉬운 기독교, 어려운 기독교  (0) 2021.04.24
시험하시는 하나님  (0) 2021.04.17
posted by 풀숨 2021. 5. 15. 20:06

침묵에게

 

 

이재이

 

 

말(言)은 숨은 선(線)

그어지는 궤적대로 너와 나를 좌표에 세운다

속마음 깊이 따라

선은 짙은 두께로 공중에 새겨지고

공간이 뭉텅 잘려 나간다

나의 윤곽은 딱딱한 점이 되어

신호등처럼 뒷머리에 판화로 뜬다

암실에서 색칠하고 침대 밑에 넣어 둔 채

다시 웃는 얼굴로

슥슥슥 말(言)을 긋는다

 

창문 여는데

전깃줄에 앉아 있던 까마귀

잘려 나간 공간 속으로 줄 하나 길게 끌고 간다

'자작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울음 총량의 법칙  (1) 2021.07.31
웃, 혼자 선  (0) 2021.05.29
봄날  (0) 2021.04.04
덴버 1700 마일  (0) 2021.02.13
번지점프  (0) 2021.02.06
posted by 풀숨 2021. 5. 8. 05:29

율법의 역할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3:31),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 7:12),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 13:8)

 

교회에서 율법에 대해 얘기를 꺼내보면 대부분 불편해 한다. 사랑, 화목, 천국, 능력 등등, 밝고 희망찬 주제도 많은데 하필 어둡고 불편하고 두렵게 만드는 주제를 얘기하는가 하는 듯한 표정으로 좋지 못하다. 율법 하면 맨처음 떠오르는 생각은 속박과 무거움일 듯 싶다. 그런데 성경은 율법에 대해서 엄청나게 많이 이야기한다. 율법 또는 율법을 의미하는 다양한 단어들, 즉 계명, 율례, 법, 법도, 규례, 말씀 등이 성경 전체에 수백 번이 넘게 나온다. 성경이 이렇게 엄청나게 많이 이야기하는 것을 우리는 교회에서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체로 그 이유는 정서적으로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또한 크리스찬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제 율법과는 별로 상관이 없게 되었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야기해야 한다.

 

성경 전체에서 율법에 대해 살펴보려면, 어거스틴이 했던 말, 신약은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에서 밝히 드러난다고 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해서 살펴야 하기에 사도 바울의 기록들을 중점적으로 보면, 율법은 두 가지 종류가 있으며 성문법으로서의 율법과 불문법으로서의 율법이다. 성문법으로서의 율법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율법, 즉 구약 성경의 처음 5 책에 기록된 법 조항들이며, 불문법으로서의 율법은 우리의 양심에 의해 선악을 구별하는 방식들이다. 이 두 종류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성문법으로서의 율법은 불문법인 양심의 소리들을 구체적이고 문자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다 율법 아래에 있다.

 

율법을 주신 이유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율법이 성문법의 형태로 주어지는 사건이 기록된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며 율법을 주실 때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 19:6),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레 11:45). 따라서 하나님은 세상과는 구별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그리고 또한 이것은 공동체의 각 개인이 하나님을 닮은 인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명시적으로 율법이 주어진 것이었다. 불문법의 형태로 주어진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율법이 주어진 것이었다. 다만 불문법으로 주어진 경우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너무도 희미해져서 도무지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수준까지 타락해 버렸기 때문에 성문법과 같을 수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한 국가의 정체성은 그들의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은 십계명으로 요약되는 율법에 명시되어 있다.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선택된 민족으로서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명을 가진 민족이라는 것이 그들의 정체성이었다. 그러나 헌법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정체성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고, 헌법을 지켜야 정체성이 유지되는 것이기에, 이스라엘에게 성문법으로 율법을 주신 것은 이제 그들이 명백히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닫고 하나님처럼 거룩한 삶을 살고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는 민족으로서의 삶을 살면서 세상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을 증거하고 그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라고 주신 것이었다.

 

율법의 기능

그렇다면 율법은 어떻게 이스라엘이 정체성을 세우도록 기능하는지 살펴보면, 첫째는 율법이 하나님의 뜻과 마음과 성품을 가르침으로써, 둘째는 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셋째는 죄를 억제함으로써,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죄의 형벌과 인생의 비참함을 알게 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특별히 십계명은 하나님이 직접 돌판에 쓰셔서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의 성품에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주어진 것이다. 율법에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과 싫어하시는 것들이 계시되어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물론 시대적 역사적 상황 안에서 주어졌으며 또한 하나님의 영원불변성에 따라서 주어졌다. 그래서 의식법처럼 시대적 역사적 상황에 따라서 폐하여질 것도 있지만 도덕법처럼 영원히 계속될 법이 들어있으며 율법의 정신은 영원불변하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수여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더 뛰어나거나 혈통이 우수하거나 등등의 그 어떠한 자랑거리가 있어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수여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으로 넘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또한 사도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 도둑질 하지 말라는 율법이 있기에 도둑질은 죄라는 것을 알게 된 것처럼 율법은 무엇이 올바른 것이며 무엇이 죄인지 가르쳐 준다. 율법이 있기에 기준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처럼 거룩하며 죄를 범하지 않아야 했으므로 율법은 죄를 억제한다. 단순히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죄를 범하지 않아야 했던 것뿐만 아니라 죄를 범하면 형벌과 저주가 내려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죄를 범하지 않아야 했고, 형벌과 저주에 대한 두려움은 죄를 억제하도록 하였다. 또한 그들이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려면 모든 율법을 온전히 다 지켜야 했는데, 모든 율법을 다 잘 지키다가 하나만 범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고 형벌과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인생의 절망과 비참함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나 율법이 그들을 절망에 가두어놓지 않고 오히려 위로가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율법이 궁극적으로 가르치는 목적이었다.

 

율법의 목적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보면서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주신 것이다고 하였다. 지킬 수도 없는 율법을 주시면서 이것을 지켜라 하고 말씀하실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생각도 완전히 잘못된 생각은 아니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지식과 지능과 힘과 능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완전히 지킬 능력과 실력은 없었고,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완전히 지키지 못하고 단 하나라도 범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는 것(갈 3:10; 렘 11:3; 롬 3:23)이 핵심이다. 게다가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만 해도 지키기 어려운데 율법의 정신을 헤아리면서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완전히 지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율법의 정신을 헤아리면 이제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과 동일한 죄를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율법 안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고 절망하면서도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더욱 찾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음으로 인해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고 또한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해결책이 제시될 것을 깨닫게 된다.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를 오직 바라보며 고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율법은 사람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방법을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하나님의 해결책을 고대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메시야를 고대하는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세워진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처럼 율법과 믿음은 서로 대적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으로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믿음을 대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속죄의 방편을 완성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점을 정확히 지적하였다. 사람이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깨닫고 비참함과 절망으로 인해서 자신에게는 전혀 소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않고서는 크리스찬이 될 수 없다고 설교했던 것이다. 또한 기독교의 역사에서 위대한 부흥이 나타났던 시기에는 율법에 대한 깊은 통찰과 복음적 관점에서 율법에 대한 강조가 널리 선포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복음은 율법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율법이 이제 더 이상 절망의 법이 아니라 기쁨의 법이라는 것을 드러냈기에 기쁜 소식인 것이다. 복음은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여 도무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셨다는 소식이기에, 그리고 그 불가능했던 것은 이제 영원히 폐지되었다는 소식이기에 기쁜 소식인 것이다.

 

칭의의 관점에서의 율법과 성화의 관점에서의 율법

상기한 바와 같이 정리되는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재해석되면 크게 두 개의 관점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칭의의 관점과 성화의 관점이다. 그런데 율법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들이 오직 칭의의 관점에서만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것은 특별히 한국 교회에서 더욱 크게 부각되었다. 칭의의 관점이란 죄인이 어떻게 구원받는가에 대한 관점이고 성화의 관점이란 구원받은 성도가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관점이다. 칼빈은 성화의 관점에서 율법에 대해 논의하면서 이것을 율법의 제 3 용법이라고 칭했으며 모든 크리스찬에게 반드시 적용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했다. 또한  칼빈은 크리스찬의 자유에 대해서 설명할 때에도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자유는 율법 없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기초로 하여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유는 방종이 아니므로 가이드라인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데 율법이 가이드라인의 역할을 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성화의 관점에서 율법에 대해 논의할 때에 반드시 주의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성화의 관점과 칭의의 관점을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화의 관점에서 율법의 역할은,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이미 구원을 받은 성도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항상 명백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혼동하면 율법은 이제 완전히 무익하게 되었다는 율법폐기론이나 구원을 받았어도 끝까지 율법을 잘 지켜야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구원론으로 반드시 이어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재해석된 율법은 구원을 받은 성도에게 있어서 결코 믿음과 충돌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좋은 예들 중에 하나이다. 이렇듯 오히려 율법을 통해 믿음이 행위로 말미암아 증명된다. 이것은 믿음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는 점에서도 기인한다. 믿음은 반드시 구체적 사건이나 행위로 드러나게 되는데 그 사건과 행위가 율법에 합당해야 한다. 왜냐하면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믿음을 통해서 이제 의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역사 가운데 성취된 의를 믿음을 통해서 수납했으므로 믿음으로 인해 나오는 행위는 의로우며 구체적으로 율법에 합당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만 바라보기

크리스찬은 예수님만을 믿고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는 말은 이와 같이 결코 추상적인 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무엇을 믿고 예수님의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지 명확히 해야 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또한 예수님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음을 믿으며 예수님이 사셨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예수님만 바라본다면서 내 맘대로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죄를 대속하심도 율법에 의한 것이고 예수님이 사셨던 삶도 율법에 근거했던 삶이었으므로 우리가 예수님만 바라보며 산다는 것 역시 율법과 무관한 것이 될 수 없다. 다만 유대의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자구(字句)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르쳐주신대로 영으로 이해해야 한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자구로만 이해함에 따라서 율법은 오히려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말았고 믿음을 대적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크리스찬이라면 일주일에 최소한 한번 정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 시간이 없으면 쉽게 길을 잃고 자신의 위치를 낙관적으로 보거나 과대평가하거나 또는 반대로 의기소침하며 불안해 할 가능성이 크다.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께 나아가고,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율법을 통해서 나의 위치를 깨닫고,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 안에서 방향을 잡고,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알게 된다. (율법에 대한 깊은 묵상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종착점으로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복음이라는 그릇 안에 담긴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 안에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본받는 삶이란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셨던 방식으로 우리도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해야 한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신 방식대로 우리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재해석된 율법을 그리스도의 법이라 하는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9~30)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볼 때에, 예수님 안에서는 율법이 더 이상 속박과 두려움이 아니라 반가움과 기쁨이다. 길이 없거나 길을 잘 알지 못하는 곳에서 헤매다가 도로표지판을 만나는 반가움이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행여 죄를 범하더라도 – 율법을 어기는 것이 곧 죄를 범하는 것이다 – 우리에겐 예수님이 계시므로 더 이상 절망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죄를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용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즉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는 것인데 예수님은 항상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용서 받게 되며, 따라서 우리가 잘 하고 있을 때에나 잘못 하고 있을 때에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멍에는 쉽고 짐은 가벼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는 것은 이제 돌이켜 다시 예수님 안에서 율법, 곧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인 것이다.

 

결론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와 율법의 기능 그리고 목적을 살펴보았다. 사람이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켜서 스스로의 능력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인생은 하나님의 영광에 비하면 참으로 비참할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람을 속박하는 것 같고 사람을 죄에 가두기만 하는 것 같은 율법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길, 즉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는 길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렇게 의롭게 되어 저주와 비참함과 절망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이제 율법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위한 가이드라인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가이드라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따르게 된다. 그 사람 안에서 거주하시는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재해석된 율법에 순종하도록 만드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크리스찬은 율법에 대해서 기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크리스찬이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키고 있기 때문에 기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크리스찬을 더 이상 정죄하며 속박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며 크리스찬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에 마음이 불편한 것은 죄에 대한 정죄와 형벌로 인해서 두렵기 때문에 불편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DNA가 죄를 싫어하게 되었으므로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꾸짖어 주시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크리스찬은 율법을 예수님 안에서 묵상하며 자신을 살펴야 한다.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길이 기록되어 있으니 자주 살펴보고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것이 너무도 마땅하고, 크리스찬은 그 길 이외에 다른 어떤 길도 갈 수 없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불편한 마음보다는, 그리고 내가 어제 무엇을 잘 했고 무엇을 잘못 했나 하고 정죄하며 따지기 보다는,  율법에는 하나님의 성품과 뜻이 계시되어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길이 제시되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서로 권면하며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을 누리자. 기독교의 부흥은 율법에 대한 깊은 성찰이 강조될 때에 일어났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posted by 풀숨 2021. 5. 1. 05:46

더 큰 하나

 

우리 속담 가운데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것이 있다. 사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더 빨리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는데, 이와 반대로 목적지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된다는 의미로, 사람이 많으면 오히려 될 일도 안 되는 상황을 가리킬 때에 사용된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 상황을 수없이 겪어봤다. 소수의 사람들로도 잘 되던 일을 더 빨리 마치려고 사람을 몇 명 더 붙였더니 오히려 일이 안 되고 결과도 더 나빴던 경우도 보았다. 우리 인간들의 한계인 것일까…

 

세상의 통념과는 다르게,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는 하나에 하나를 더해서 더 큰 하나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에 하나를 더해서 둘이 되고 또 그렇게 셋, 넷, 열, 백, 천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에 하나를 더해도 하나이고 또 하나를 더 더해도 하나이고 이렇게 백번을 더해도 여전히 하나인, 그러나 맨처음의 하나보다는 훨씬 더 큰 하나인, 그런 하나가 되는 길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성경은 그렇게 하나로 커지는 하나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며 또한 교회라고 부른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이러한 하나를 희미하게 느끼고 체험할 뿐이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면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체험할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지고 대단하고 위대하며 신나는 일이 아닌가! 새로운 하늘과 땅에서 완전히 이루어질 하나됨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가슴이 설렌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우리 크리스찬 각자는 여전히 피조물이라는 한계로 인해서 다른 크리스찬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다 알고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과 배려를 통해서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하며 하나가 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원형이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인류가 잃어버린 원형이었고 예수님으로 인해 회복되었으며 마침내 완성될 우리의 본래 모습이다.

 

이렇게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하나됨에 대한 맛보기로서, 현재의 교회를 통해 우리는 이 땅에서 더 큰 하나됨을 바라본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더 큰 하나됨에 대한 유비를 매주마다 시전하고 있었다. 바로 찬양대의 합창이다. 40 명이 합창을 하든 100 명이 합창을 하든 화음으로 어우러진 하나의 찬양이 나온다. 여기에 100 명을 더하더라도 동일한 찬양이 나온다. 소리가 더 커지고 웅장해지며 감동이 더 커졌지만 모두가 합하여 하나의 찬양을 노래한다. 우리는 주일마다 교회에서 교회가 지향하는 목표를 바라보고 있었으면서도, 그 목표를 너무도 제한해 버렸고 그 목표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 앞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전시하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참으로 눈 뜬 장님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합창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눈을 돌리면 우리의 눈은 길을 쉽게 잃어버린다. 합창으로 보여진 하나됨이 우리의 삶에서는 반목과 질투와 시기와 비판과 경멸과 무시와 억압과 경쟁으로 인해서 깨어지고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각자 혼자인 것처럼 느낄 때가 너무도 많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쉬운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참된 크리스찬이 많아야 교회는 더 큰 하나로 성장할 수 있는데, 교회가 세상에서 쉬워 보였기 때문에 크리스찬이 아닌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를 자기들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조차도 교회는 예수님의 사랑과 공의로 녹여내야 하는데, 교회가 오히려 휘둘리고 있기 때문에 쉽게 분열하고 반목하며 서로서로 비판하기만 할 뿐이다. 여기에서 목회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목회자들 중에서도 크리스찬의 진정성을 의심받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니 교회가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목회자를 중심으로 하여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가 항상 예수님 안에서 더 큰 하나됨을 이루어 낼 수 있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말씀과 모범으로 양육하고 사랑과 인내로 품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 안에서 교회 지도자들을 존경하고 따르며 성장하여 더 큰 하나됨을 누리며 즐거워 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성도들과 연합하는 즐거움이 교회를 넘어서 밖으로 퍼져 나갈 수 있도록 하고, 그 즐거움이 부러워서 교회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도록 해야 한다. 멋지고 웅장한 합창단의 공연에 사람들이 즐겁게 찾아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다. 애초부터 그렇게 되어야만 하도록 만들어졌다. 소망과 능력은 예수님께 있기 때문이고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우리는 여전히 피조물이며 목회자도 사람이기에 교회가 커지면 하나됨을 이루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현실적으로는 100 여명이 한계인 듯 싶다. 그래서 수백, 수천, 수만명이 모이는 교회는 하나됨의 즐거움을 교회 전체로는 누릴 수 없다. 소그룹 모임이나 구역별 모임에서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교회 전체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가 되기는 무척 어렵다. 부목사나 다른 교역자들이 옆에서 보조한다고 하더라도 쉽지 않다. 담임 목사가 부목사들과 하나된 교회를 찾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니 수천,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는 이미 하나됨을 포기한 상태에서 하나됨의 즐거움이 아닌 다른 즐거움을 찾는 모임이 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교회 전체가 하나되는 즐거움을 누리는 교회는 다른 교회와의 연합도 쉽게 이루지만 그렇지 못한 교회는 다른 교회와의 연합 역시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실력 있는 합창단은 다른 좋은 합창단과의 연합 공연도 쉽게 잘 하지만, 어수선한 합창단은 다른 좋은 합창단이 함께 하더라도 여전히 어수선할 뿐이다.

 

성경은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유비를 사용한다. 나무, 몸, 집, 건물 등과 같이 크기와 상관 없이 유기적으로 하나인 사물을 사용해서 설명한다. 몸은 크기가 아주 작아 아기처럼 작아도 여전히 하나의 몸으로서 모든 기능이 가능하며 크기가 아무리 커져도 여전히 하나의 몸이다. 그리고 크기가 커진 만큼 더 큰 힘이 나오고 더 큰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크기가 커졌다고 해서 다리가 팔에게 필요없다고 할 수 없고 팔이 눈에게 필요없다고 할 수 없다. 크기에 상관없이 유기적으로 하나이며 하나로서 기능하고 하나됨의 즐거움을 누린다. 교회는 부부처럼 두 사람이지만 하나인, 그리고 아이가 생겨서 가족이 늘어도 여전히 하나인 것으로 하나님의 가족이며, 또한 교회는 전체가 하나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합창으로 찬양하는 찬양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할 수 있다. 조금 더 인내하고 조금 더 사랑하고 조금 더 웃고 조금 더 안아주고 조금 더 형제의 짐을 나누어 지고 조금만 더 예수님을 닮고자 하면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능력과 실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있다. 더 큰 하나를 이루며 더 큰 하나됨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교회를 통해서 복음은 더 능력있게 역사할 것이다.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이루어질 미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주님도 우리를 참아주시고 계신다는 것으로부터 위로를 얻으며 우리도 서로 참고 인내하며 지금 시작해 보자.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서 역설적으로 교회의 중요성을 찾아낸 우리들은 지금은 팬데믹으로 인해서 서로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지내야만 하지만 다시 얼굴을 마주하며 모일 수 있는 때가 되면 교회 전체가 하나 되는 즐거움을 누려보자. 모두가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겪으면서 깨닫게 된 이 진리를 교회 안에서 실현해 보자. 우리에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있다.

'신앙과 위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디오드레베를 조심하라  (0) 2021.05.22
가장 가치 있는 삶  (0) 2021.05.15
쉬운 기독교, 어려운 기독교  (0) 2021.04.24
시험하시는 하나님  (0) 2021.04.17
주님과 동행하기  (0) 2021.04.12
posted by 풀숨 2021. 4. 24. 21:00

쉬운 기독교, 어려운 기독교

 

크리스찬으로 살면서 때로는 기독교가 쉽게 느껴지고 또 어떤 때에는 매우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크리스찬으로서의 삶, 즉 우리 각자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실현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천편일률적이지 않고, 우리 각자의 삶과 엮여서 다양한 변주와 다양한 비율의 타협이 가능하며 심지어 말로만 믿음을 외치다가 끝나는 경우도 있다. 그 다양함에 따라서 기독교가 쉽기도 하고 아주 어렵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우리는 기독교를 쉽게 느끼는 걸까? 아마도 그 때는사도 바울이 경고한 대로 (딤전 1:6~7), 도덕적 윤리적 선생이 되려고 했던 때로서, 기독교를 머리와 입으로만 아는 경우이다. 그 선생은 이웃과 형제들을 성경말씀을 들어서 정죄함으로써 마치 자신은 그들보다 우월하며 그들과는 다르게 잘 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다. 성경은 이러한 경우에 위선자라고 정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가려져서 그것을 미처 보지도 못하고 그저 자신은 잘 하고 있다고만 ‘믿었던’ 시기다. 표면적인 현상에 대해서는 적극적이면서도 본질과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는 소극적이면서 성경말씀을 들어서 형제들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경멸하며, 자신의 우월성을 형제를 향한 정죄에서 찾고, 또한 우월하기에 자신은 문제가 없다고 느끼는 경우다.

 

자기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비판함으로써, 자기의 ‘아무것도 안 함’이나 ‘그저그런 상태’가 다른 사람의 ‘잘못 됨’ 보다는 더 좋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착시 현상이다. 중간에 있으면 오른쪽에 있는 사람에 비해서 왼쪽에 있는 것뿐인데, 이것이 실제로 왼쪽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착시 현상이다. 그리고 이 착시 현상으로 위로를 얻고 우월감을 가진다. 그런데 성경은 중간에 있는 것이나 오른쪽에 있는 것이나 다 잘못 된 것이라고 한다. 복음은 적극적이며 사랑도 적극적이고 공의 역시 적극적이기 때문에 실제로 적극적으로 행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 역시 잘못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죄성과 연약함으로 인해서 너무도 쉽게 빠지는 착각은, 심판자의 위치에 서면 자동적으로 깨끗해지는 것처럼 느끼는 착각이다. 우리 자신도 심판의 기준에 맞게 살아야,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에 사용했던 기준을 우리의 삶에서 실현해야만 우리가 깨끗한 것인데, 우리는 그저 다른 사람을 그렇게 판단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그와 다르게 깨끗한 것처럼 느끼는 착각에 빠진다. 그리고 그 착각을 실제라고 굳게 믿어버리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착각에 빠지면 좀처럼 헤어나올 수 없다. 그 착각이 주는 우월감과 만족과 평안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우월감과 만족과 평안을 계속해서 느끼기 위해 다른 사람의 잘못을 찾아내어 정죄하고 비판하고 비난하기 시작한다.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소위 말하는, 감투를 쓴 사람에게서 많이 드러난다. 감투 없이 평범하게 지낼 때에는 자신을 돌아보며 조심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감투를 쓰고 난 후부터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면서 심판자의 역할을 하고 선생이 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교회에 있다 보니, 감 놔라 대추 놔라 하고 말하는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서 제시한다. 그러면 뿌듯하다. 다 이룬 것 같다. 다 잘 되는 것 같고 하나님께 영광드린 것 같다.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참 쉽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감투가 없어도 이런 게 가능하다.

 

이것은 굉장히 큰 유혹이다. 초대교회 시기부터 있어왔던 유혹이며 지금도 이런 기독교를 원하는 유혹이 너무도 크고 많은데, 우리는 우리의 본성적 연약함 때문에 이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 그래서 교회에는 이런 유혹에 넘어간 사람과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새 신자와 이 유혹을 이겨낸 사람과 종교성만을 가진 무신자까지 다양하게 섞여 있고, 결국 교회는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이 시끄러움을 이겨내야 하는 것이 지상 교회의 숙명이며, 이겨내는 방법은 이 유혹을 이겨낸 사람이 많아지는 것 밖에는 없다. 윤리적 도덕적 심판자의 위치를 버려야만 한다.

 

이와 반대로 어떤 때에 기독교가 어렵다고 느껴지는 걸까? 바로 인내하고 절제해야 하는 때이다. 우리는 육신의 연약함과 본성의 정욕으로 인해서 인내하고 절제하는 것을 어렵다고 느낀다. 성경 말씀을 지식과 말이 아니라 삶에서의 행함으로 실현해 보려고 하면 성경 말씀이 어렵게 다가온다.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과 손 끝으로 실현해 보려고 하면 잘 안 된다. 그래서 삶의 지혜에 대한 사도 바울의 많은 가르침들이 ‘인내’와 ‘참음’과 ‘견뎌냄’으로 연결된다.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정의하는 사랑의 첫번째 속성이 ‘오래 참음’이다. 우리 크리스찬은 잘 해도 참아야 하고 잘못해도 참아야 하며, 뛰어날 때도 참아야 하고 못날 때에도 참아야 한다. 선생이 되더라도 너무 선생이 되려고 하면 안 되고, 모르면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데 공부는 인내의 과정이다.

 

그런데 우리가 인내하기 위해서는 심지어 우리의 성격조차도 극복해야 한다. 호기심 많고 외향적인 사람은 너무 나대는 것을 참아야 하고, 수줍고 내성적인 사람은 너무 조용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는 말조차도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적당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남들이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묵묵히 자기의 일을 감당하며 남들의 평가와 비판에 흔들리지 않고 성경말씀을 삶에서 실현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세상의 평가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의 정욕을 극복해야 하는데, 그 극복의 과정이 다 인내와 절제의 과정이다.

 

무엇이든 머리로만 깨닫고 이해하며 말로만 실천하며 남을 판단하는 것은 쉽다. 그런데 깨달은 대로 가슴으로 살고 몸으로 실현하며 남을 판단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의 부족함을 견뎌내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세상은 어떡하든 우리가 남보다 우월하도록 부추기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무명으로 살기를 바라신다. 교회를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을 말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열매로 그리고 따뜻한 포용으로 침묵시켜야 한다. 이 어려운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찬의 숙명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왜 이리 시끄러운지, 왜 맨날 제자리 걸음만 하는 것 같은지 또는 왜 별로 능력이 없는 것 같은지 하는 것들을 감당해야만 한다. 그리고 소망의 하나님이 우리가 감당하도록 도와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결정을 해야 한다. 쉬운 기독교를 버리고 어려운 기독교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쉬운 기독교에 안주하면서 스스로의 만족으로 살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답은 쉬운 것처럼 느껴진다. 누구든 비록 어렵더라도 어려운 길을 가겠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진심으로 그 어려운 길을 갈 용기가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 길을 가는 것조차 쉽게 생각한다면 평생 쉬운 기독교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 길은 조금씩 변화되어 완성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물이 새로운 삶을 사는 훈련의 길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우리 주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창조물이 우리 주님 안에서 새 생명의 삶을 사는 길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옛 것에 미련을 두지 말고 새 길에서 인내하고 참고 견뎌낼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실제로 그 길을 가다 보면, 기독교가 쉬웠을 때에는 뭔가 이루어지는 것 같았지만 어려웠을 때에는 아무것도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혼자 걷는 길이 아니라 우리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신앙과 위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장 가치 있는 삶  (0) 2021.05.15
더 큰 하나  (0) 2021.05.01
시험하시는 하나님  (0) 2021.04.17
주님과 동행하기  (0) 2021.04.12
창세기 2 장  (0) 2021.04.04
posted by 풀숨 2021. 4. 17. 21:01

시험하시는 하나님

 

누구를 막론하고 시험 보는 것을 즐거워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학창 시절이나 사회 생활을 하거나 언제 어디서든 시험이 있다고 하면 마음이 가라앉고 긴장되고 두렵고 떨리기 시작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시험에서 점수를 잘 받아도 그냥 시험은 멀리하고 싶은 것이다. 시험 받는다는 것 자체가 그냥 두려운 것이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살전 2:4; 고전 10:13). 그리고 또한 사탄도 우리를 시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전 7:5; 살전 3:5). 이 두 가지 시험들은 다르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우기 위해서 시험하시지만 사탄은 우리를 무너뜨리고 망하게 하려고 시험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우리 각자 또는 우리 공동체가 어떤 위치와 상태에 있는지 우리 스스로 알게 하지만, 사탄이 주는 시험은 죄를 향한 유혹이며 이 시험은 Pass 또는 Fail 밖에는 없는 시험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든 사탄이 주는 시험이든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시험은 하나님의 주관 아래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도록 되어 있다 (고전 10:13).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하나님은 심사위원이나 심판관이 아니라 아버지이자 선생님으로서 시험을 주시는 것이므로 시험은 우리의 실력을 길러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그냥 시험을 내고 채점을 해서 점수에 따라서 상벌을 결정하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로서 자녀의 성장을 위해서 시험을 내신다는 것을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래야먄  시험에서의 실패조차도 우리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하거나 물러서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험을 허락하시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성장하려면 우리는 먼저 우리의 위치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시험이든 시험을 보지 않고는 자신의 위치와 상태를 명확하게 알기가 매우 어렵다. 시험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잘 하고 있는지 무엇이 부족한지 심지어 무엇을 잘못 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눈 감고 무조건 우길 수가 없게 된다. 시험 결과가 눈 앞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기에 눈 감고 무조건 우기면서 잘 하고 있다고 그냥 넘어갈 수가 없게 된다. 위선자가 되거나 고치거나 둘 중에 하나만 가능하게 되며, 하나님의 자녀라면 결국 고치게 되고 성장하게 된다. 이렇듯 시험 자체는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어서 피시험자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알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험을 싫어하고 두려워 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바꿔보면 시험을 무턱대고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물론 시험을 당할 동안에는 고통스럽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겠지만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약속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약 1:2; 벧전 1:6). 더욱이 주님이 우리를 도우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히 2:18; 벧후 2:9). 그러므로 시험 하면 학창시절의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보던 기억을 떠올리며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점수를 매기고 등급을 나누며 우열을 가리기 위한 것이 전혀 아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시험은 필수적이다. 태초의 사람 아담도 시험을 받았고 우리 주님도 시험을 받았으며 선생님 아래에서 자라는 모든 학생은 시험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또한 선생님이시므로 자신의 자녀이자 학생인 우리를 시험하신다. 시험 받는 것을 거부하거나 회피할 생각 보다는 오히려 시험에 대한 개념 자체를 바꿔서 시험을 달갑게 생각해야 한다. 시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방향을 알 수 있고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도 깨달을 수 있으며 모든 시험은 하나님의 주관 아래 시행되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탄이 주는 시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낸 주님을 생각해 보면 그러한 시험조차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한다.

 

우리가 시험을 당하는 대부분의 원인은 우리의 욕심이다 (약 1:14).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우리의 욕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시험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탄은 우리의 욕심을 아주 잘 이용한다. 이 시험은 우리의 욕심을 극명하게 드러내어 우리의 육신의 본성의 어두움을 보게 하고, 그 욕심을 성령님의 권능으로 이겨내게 훈련시켜 주기 위한 시험이다. 우리의 자아가 변하고 인격이 변하도록 주시는 시험이다. 그러나 순전히 우리의 성장을 위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도 있다. 욥이 받은 시험이 대표적이다. 욥이 시험을 받는 기간 동안 그가 당해야 했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하기도 어렵지만 그 모든 시험 동안 욥이 점점 성장하였으며 마침내 시험이 끝나고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더 깊이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는지 생각해 보면 욥은 우리가 아주 조그만 용기라도 낼 수 있도록 위로가 되는 증인이다.

 

따라서 시험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두려움과 긴장과 걱정과 염려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한 성장에 대한 기대와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에 대한 기대이다. 그리고 시험 결과에 무너지지 말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약점을 극복해서 주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자세이다 (엡 5:10). 우리 모두는 각자 다 다르다. 같은 지역에 살더라도 삶의 정황도 다르고 개성과 성품도 다르고 선호도도 다르며 모든 게 다 다르다. 나와 똑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래서 나의 부족함과 약점은 하나님과 나만 알 수 있고 하나님만이 진정으로 나의 성장을 이끌어 주실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대해야 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나의 인격과 삶에서 열매맺을 것을 기대해야 한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어느 누구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시험에도 지지 말고 시험 결과에 실망하여 무너지지 말자. 무수한 시험이 있었고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지만 한가지 진리는 명백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시험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우리를 돕고 계셔서 우리가 시험을 이겨내고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시험을 당하는 잠시 동안은 기쁘지 않고 고통스럽겠지만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느끼게 되는 특별한 기간이라는 것과, 그리고 시험이 끝나고 우리가 얼마나 성장할 것이며 실력이 늘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큰 위로와 은혜와 기쁨을 생각하며 극복해 보자.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인내와 노력과 수고를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더욱 닮아가는 기회임을 생각하며 용기를 내자.

'신앙과 위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큰 하나  (0) 2021.05.01
쉬운 기독교, 어려운 기독교  (0) 2021.04.24
주님과 동행하기  (0) 2021.04.12
창세기 2 장  (0) 2021.04.04
삶으로 드리는 예배  (0) 2021.03.27
posted by 풀숨 2021. 4. 12. 21:13

주님과 동행하기

 

우리 크리스찬의 삶은 참으로 고달프다. 머리로는 아는데 몸은 따라주지 않으니 고달프고 애타고 초조하고 심지어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그래도 아는 것을 따라 조금씩이라도 가야만 한다. 우리의 유전자 DNA가 그렇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길이 아니면 삶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지식으로 알지 않고 온 마음과 몸으로 알기에 가야만 한다. 그나마 조금 위안이 되는 것은 이 고달픔을 그냥 고달픔만이 아니라 기쁜 고달픔으로 바꾸어줄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현실은 고달프더라도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그리스도 안에서 기쁘게 인내할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우리가 제대로 올바르게 진심으로 이 방법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이 방법도 별 효과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방법은 바로 ‘주님과 동행하기’이다.

 

우리는 교회에서나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에서나 신학자들의 책에서나 인터넷의 기독교 사이트들에서나 기독교 관련 유투브 영상들에서나 많이 듣고 있는 것이 바로 ‘주님과 동행하기’이다. 주님과 동행하기에 대해서 믿음을 강조하는 분도 있고, 사랑을 강조하는 분도 있으며, 소망을 강조하기도 하고, 무엇이든 좋은 것들에 대한 실천적인 삶을 강조하는 분도 있다. 다양한 관점과 경험들을 통해서 각자 가장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라고 느껴지며 모두 도움이 되는 말씀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들의 기초는 바로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이다. 믿음이든 사랑이든 소망이든 그리고 그 어떠한 선행이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모래 위에 쌓은 성과 같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셨으므로 (고전 1:9) 우리의 삶의 기초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이다. 동행한다는 것은 교제를 나눈다는 것이며,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닮아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나눌 수 있을까. 뜬구름 잡으려는 시도는 아닐까 싶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교제를 나누신다. 그렇다고 이 말이 마치 성령님이 우리와 직접 대화를 하시고 뭔가 보이는 분처럼 활동하신다는 의미는 아니다. 고전 1:9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증거, 곧 복음이 우리 중에 견고하게 되고, 은사를 통해서 다양한 능력을 드러내면서도 모두가 하나되는 화합의 사랑으로 살며, 책망받지 않도록 죄를 이기는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도록 역사하시면서 교제를 나누신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는 반드시 우리의 변화를 만들어 내며,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드러낸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벗어나서 역사하시지 않으며 예수님이 하신 대로 역사하신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대리자로서 모든 것을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활동하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구약 성경을 시작으로 해서 복음을 설명해 주시니 그들은 가슴이 뜨거워져서 돌이켜 밤길을 걸어서라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후에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복음이 온 세상에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우리는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이제 성령님은 이렇게 예수님이 하신 대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날마다 복음을 묵상하고 무시로 기도하며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나를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변화시키시는지 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 곧 성령님 안에서 복음으로 사는 삶은 모든 일에 적극적이다. 복음은 적극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사람이 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 자체가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마지못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적극적으로 우리를 위해서 사람이 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는 모든 것이 다 사랑으로 인해 적극적인 것이다. 사랑에 소극적인 것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도 적극적으로 하고 용서도 적극적으로 하며 절제와 화합과 온유와 자비와 선을 적극적으로 행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삶은 고달프다. 먼저 다가서야 하고 모든 것을 기꺼이 감수해야 하며 다른 사람의 짐을 나누어 져야 하기에 고달프다. 그리고 머리로는 지식으로 아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실망과 함께 사이에 껴서 고달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이 주시는 위로와 기쁨이 있다. 세상이 주는 고난과 삶이 주는 고달픔을 이겨내게 하는 성령님의 평안이 있다.

 

반면에 율법을 따르는 삶은 소극적인 삶이다. 율법은 죄에 대한 기준을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기본 정신 자체가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거짓말 하지 말라는 율법이나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는 등의 무엇을 하지 말라고 정의되는 율법은 그 무엇을 하지만 않으면 된다. 적극적으로 정직하지 않아도 거짓말만 하지 않으면 된다. 적극적으로 남을 돕지 않아도 남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지만 않으면 된다. 이처럼 율법은 복음 안에서 이해되지 않으면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소극적인 삶에서는 쉽게 만족과 표면적 평안이 온다. 세상이 주는 고난도 없고 삶이 주는 고달픔도 거의 없다. 쉽게 만족하고 쉽게 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삶은 사랑의 화합을 이룰 수 없다. 혼자서 만족하고 혼자서 안주하는 삶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율법조차도 복음 안에서 이해되면 적극적인 것으로 바뀐다. 적극적이고 진정한 사랑이 그 기초로 깔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각자 자기의 삶을 돌아보아 자기의 삶이 적극적인 삶인지 아니면 소극적인 삶인지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이 복음의 방향에 서 있는지 아니면 율법의 방향에 서 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은 결코 소극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갖는 표면적 만족 보다는 성령님이 주시는 위로와 소망이 더 크게 느껴지는 삶이다.

 

그러므로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언제나 성령님 안에서 복음을 기초로 한다. 또한 성령님 안에서 무시로 기도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적극적으로 이루는 삶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도 우리는 실수하고 실패하게 된다. 우리의 소망과 뜻은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더라도 우리의 현실은 우리에게 실패를 안겨준다. 우리의 육신은 너무도 한계가 뚜렷하고 우리의 의지는 아침 저녁으로 바뀌며 우리의 실력은 늘 낙제점 주위를 오르락 내리락 할 뿐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뒤로 물러서면 안 된다. 작심삼일이 될지라도 계속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소망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기 때문이며,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루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먼저 일주일만이라도 노력해 보자.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매일 복음을 묵상하며 무시로 기도해 보자. 일주일 동안 주님께서 나와 동행하시면서 나를 어떻게 바꾸어 놓으시는지 확인해 보자.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나의 삶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내가 어떻게 적극적인 삶을 살게 되는지 확인해 보자. (성경말씀을 묵상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조하세요 https://comfortye.tistory.com/29?category=799635) 하나님이 나를 변화시키실 것을 기대하면서 그리고 하나님의 기쁨이 내 안에 스며들 것을 기대하면서!

'신앙과 위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쉬운 기독교, 어려운 기독교  (0) 2021.04.24
시험하시는 하나님  (0) 2021.04.17
창세기 2 장  (0) 2021.04.04
삶으로 드리는 예배  (0) 2021.03.27
함께 모이는 기쁨  (0) 2021.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