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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8.14 꾸준함에 대하여
  2. 2021.08.07 포도원의 품꾼 비유
  3. 2021.07.31 기독교에 대한 무관심
  4. 2021.07.31 울음 총량의 법칙 1
  5. 2021.07.24 하나님의 사랑
  6. 2021.07.22 산상수훈의 구조와 요점 2
  7. 2021.07.17 위선의 늪
  8. 2021.07.10 순종이 찬양이다
posted by 풀숨 2021. 8. 14. 10:07

꾸준함에 대하여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유명한 프랑스 단편소설이 있다. 어느 정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인데, 어느 양치기 할아버지가 황량한 산에 수십년 동안 수많은 나무 씨앗을 심어서 마침내 황량했던 산이 숲이 가득한 산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매일마다 동일한 일을 오랫동안 꾸준히 했다. 떡갈나무 씨앗인 도토리가 무사히 나무로 자랄 확률은 10 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매일매일 도토리를 심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한 사람으로 인해서 죽어있던 산이 살아났고 이렇게 자연이 살아나자 사람들이 다시 그 지방으로 모여들었고 사람들의 생활의 터전이 회복되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다. 한 사람의 꾸준한 성실함이 이렇게 큰 일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교훈이 잘 그려진 작품이다.

 

또한 ‘1만 시간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사람이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1만 시간 정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개념으로 미국 플로리다주립대의 심리학 교수가 논문에 발표한 개념이다. 이 1만 시간은 하루에 2~4 시간 연습을 하더라도 10년이라는 기간이 필요할 만큼 오랫동안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1만 시간만 채우면 무조건 전문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노력의 질이나 훈련의 방법이나 또는 천부적 재능 등 여타 다양한 요소들이 작용하겠지만 어느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오랜 시간 꾸준히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꾸준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누군가 ‘미친 듯이 꾸준히 하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누가복음 18장에 재판장과 과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이 이 비유의 이야기를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었다. 이 비유에서 과부는 재판장이 귀찮아 할 정도로 계속해서 탄원하고 또 탄원했더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던 재판장이 과부의 끈질김에 지쳐서 과부의 탄원을 들어주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이 비유를 오해하면, 마치 떼를 쓰듯이 하나님께 무대뽀로 무조건 간구하기만 하면 언젠가는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비유는 그러한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한 말씀이 결코 아니다. 떼를 쓰는 것과 꾸준히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떼를 쓰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꾸준히 하는 것은 잘하는 것이다. 과부의 탄원이 떼를 쓰는 것이 아닌 이유는 그녀의 탄원이 억지스러운 주장이 아니라 재판장도 인정하는 주장이기 때문이며 그녀는 재판장이 들어주지 않을 때에는 물러났다가 다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떼를 쓰는 것이 잘못된 이유는 그것이 상대방을 배려하거나 인정하는 것이 전혀 없고 오로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무조건 무대뽀로 억지를 부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은 종종 떼를 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서 심지어 도로 상에서도 드러누워 울면서 떼를 쓰기도 한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부모가 들어주기 전까지는 주변의 사람들이 있던 없던 부모의 사정이 어떻든 전혀 상관이 없고 오직 자기의 억지스러운 주장만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 받아내야만 한다. 자기만이 온 세상의 중심이다. 그래서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말하는 꾸준함과 성경이 가르치는 꾸준함의 차이는 무엇일까. 세상에서 가르치는 꾸준함 곧 성실에도 어느 정도 진리가 들어있다. 어쨌든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꾸준함은 그냥 꾸준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꾸준함이다. 히브리서 12:3 말씀을 보면, “너희가 지쳐서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고 하셨다. 우리가 꾸준히 하기 위해서 그냥 우리의 능력과 성실함과 노력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감당하셨던 인내를 생각하면서 그분을 본받아 그분 안에서 인내하며 꾸준히 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없이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결코 끝까지 인내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래서 우리는 세 가지를 생각해야만 한다. 첫째 우리는 꾸준히 인내하며 열매맺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둘째 우리의 꾸준함이 떼를 쓰는 것은 혹시 아닌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우리의 꾸준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먼저 첫째 문제를 생각하면, 우리가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예수님 안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적인 사고 방식에서도 올바른 말이다. 세상에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로또는 사람을 오히려 망치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가 크리스찬으로서 기도든 성경 묵상이든 무엇이든 선한 것을 이루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하루나 일주일 정도 매일 아침에 기도하는 것은 쉬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한 달, 두 달, 한 해, 두 해, 수 년 동안 또는 그 이상의 기간 동안 매일 기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노력하는 것이 심지어 작심삼일로 끝나더라도 또 다시 결심하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에 아예 시작도 안 하고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가 뭔가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 무언가를 연마하고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계속해서 간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는 우리의 간구가 올바른 간구인지 아니면 하나님께 떼를 쓰는 것인지 먼저 고민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무엇과도 타협하시는 분이 아니므로 우리가 잘못된 간구를 떼 쓴다고 해서 하나님이 결코 들어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40일 동안 금식기도를하면서 떼를 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의 간구가 올바른 간구인지 아니면 떼를 쓰는 것인지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 바로 그 간청의 내용이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한가 아닌가 살펴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의 꾸준함이 예수님 안에서 계속 되게 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능력으로 꾸준함을 유지하고자 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우리의 연약함이나 어리석음을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항상 잘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 결국에는 실패하게 된다. 세상적인 목표를 가진 일의 성공을 위한 꾸준함이 이러한데 영적인 목표를 가진 일의 성공을 위한 꾸준함이 계속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을 의지해서 우리의 꾸준함이 유지되도록 해야만 모든 일에서 제대로 할 수 있으며 또 행여 실패하더라도 곧바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예수님 안에는 모든 영적 보화와 함께 무엇보다도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있기 때문에 그 보화를 받아서 사용해야만 우리의 정욕과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이겨내고 어떤 것이든 선한 것을 계속해서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이 세 가지를 모두 검토해서 확인해야 우리는 꾸준함을 유지하며 뭔가를 이루어낼 수 있다. 이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수준 높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결국에는 포기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생각해 보자. 지금 내가 가장 성공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먼저 찾아보고,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한 것인지 아닌지 확인한 후에 합당한 것이면, 예를 들어 그것이 매일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라고 하면, 그것을 이루어내기 위해 우선 하나님께 간청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 간청을 무척 기뻐하실 것이며 성령님을 통해서 능력을 더하실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점검해야 하는 것은 매일마다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 생각과 내 의지와 내 결심과 내 의도를 가지고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묵상하고 또한 배운 그대로 삶에서 실천해서 예수님을 기쁘게 하며 예수님과 항상 동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성경 묵상을 꾸준히 오랫동안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뭐든지 대강 하다가 그냥 포기하고 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고 있다. 새해가 되면 금연하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포기하기도 하고, 뭔가 공부를 해보겠다고 결심했는데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포기하기도 하며, 컴퓨터 게임을 조금만 하겠다고 결심하고서는 삼일을 넘기지 못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결심들이 쉽게 무너지고 결국 포기하고 말았는지…. 그러나 이제 뭔가 선한 일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결심했다면 하나님께 매일마다 간청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꾸준히 하면 반드시 이루어내게 될 것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하나님께 매일마다 간청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꾸준히 하는 것,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

posted by 풀숨 2021. 8. 7. 04:23

포도원의 품꾼 비유

 

마태복음 20 장에 보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포도원의 품꾼 비유가 나온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루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선 포도원 주인과 같다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이 비유는 바로 앞 장에 있는 사건, 즉 부자 청년과의 대화의 사건으로부터 이어져서 하나의 교훈을 극명하게 가르치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우선 먼저 이 비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다. 그런데 보다 더 중요한 점은 우리의 사고의 패러다임 개혁을 요청한다는 것에 있다. 즉, 요점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깨닫기 위해서 우리의 사고 방식의 전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비유이다. 이런 결론이 내려지는 이유는 이 비유의 맨 마지막 구절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먼저 된 자는 먼저이고 나중 된 자는 나중인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역전될 수 있다는 말씀은 우리의 사고를 전적으로 개혁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 및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이것은 부자 청년의 생각에서도 알 수 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의로움을 따라서, 즉 율법의 조항들을 문자적으로 지켜온 자기들의 업적과 성과를 근거로 해서, 세리나 창녀와 같은 죄인들과 달리, 자기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또 들어가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의로운 자기들은 불의한 세리나 죄인들과 결코 함께 자리에 앉아서도 안 된다고 여길 만큼 ‘자기 의 (self-righteousness)’를 내세웠다.

 

그러한 사람들의 사고 방식은 포도원의 품꾼 비유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아침 일찍부터 포도원에서 노동을 한 사람들은 하루 종일 열심히 일했다는 업적이 있다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내가 이만큼 실적을 쌓았다’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은 포도원 주인 앞에서 자기를 내세울 근거가 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정의는 자기의 노동 시간에 비례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나중에 온 사람들과 자기들이 동일한 취급을 받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 시간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맨 먼저 와서 열심히 땀흘려 일한 자기들은 마땅히 더 받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받지 못하였으므로 오히려 빼았겼다는 생각, 곧 상대적 박탈감을 갖게 되었고 이 박탈감은 분노를 일으켰고 그 분노는 포도원 주인을 향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나를 저런 자들과 똑같이 취급했다’는 생각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차별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자기들이 더 받든지 아니면 나중에 온 모든 사람들이 덜 받든지 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러한 지극히 세상적인 사고 방식은 포도원 주인의 행동에 의해 근본적인 도전을 받는다. 주인에게 있어서 정의는 모든 품꾼들에게 삶을 살 수 있는 은혜를 베푸는 것이었다. 노동 시간을 기준으로 하여 차별적으로 품꾼들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품꾼들이 자기의 업적과 능력에 상관 없이 우선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이 주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만약에 포도원 주인에게 포도원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면 그는 아침 일찍 모든 필요한 품꾼을 다 모아서 포도원에 들여보내면 될 일이었다. 몇 번이나 장터에 가서 품꾼들을 더 부를 필요 없이 한번에 필요한 품꾼들을 불러서 하루의 작업을 다 마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주인은 개인의 성과 또는 일의 효율이 아니라 하루를 굶어야 하는 사람들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기에 그들을 가엽게 여기고 다시 장터에 나가서, 어쩌면 포도원 작업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품꾼으로 계속해서 고용했다. 이것은 사실 포도원 주인은 아무런 품꾼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결국 아침 일찍부터 일한 품꾼들 역시도 사실은 은혜를 입은 것이었다. 포도원 주인의 마음이 하루 하루 품삯을 벌어서 먹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향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었던 것이지 노동력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 둘 사이의 극명한 대조를 통해서 그리고 포도원 주인의 은혜를 권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분노에 찬 항의를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사고 방식은 세상적인 사고 방식과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는 자기 중심적이며 자기의 성과를 통해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차별하고자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은혜 중심적이며 그 은혜는 차별 없이 모두를 살리는 방식이다.

 

여기까지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의미이다. 이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서 살펴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한 은혜를 베푸는 나라 정도로만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깊이가 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불평하는 품꾼들에게 포도원 주인이 대답한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포도원 주인의 말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만 허락되었다는 것이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많으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답게 사는 사람은 적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단순히 포도원 주인의 말을 인정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포도원 주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삶과 생각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부자 청년과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다. 부자 청년의 말투는 조심스러운 듯 했지만 자세는 당당했다. 자기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했고, 그랬기에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율법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는데 부족한 게 있을까요? 그러니 예수님이 보시기엔 어떠한가요? 하고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가 온전하게 되고 싶으면 가서 네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강조점은 ‘모든 소유’에 있을 것이다. 부자 청년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한 말씀이었다. 그는 표면적이고 문자적인 율법을 지켰을 뿐, 율법의 정신 곧 하나님 나라의 법은 전혀 알지 못했다. 은혜 베푸는 삶을 살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이 마음의 부자가 되는 지름길은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자기 중심적인 시각을 갖는 것이다. 그와 반대되는 길은 자기 중심적인 시각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적인 시각을 갖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은혜로 인식하고 또 받은 은혜를 기초로해서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우리는 생각과 삶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 특별히 뭔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할수록 더욱 더 그렇다. 그리고 이러한 패러다임의 개혁은 많은 훈련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패러다임이 바뀐다는 것은 머리 속에서는 한순간에 일어날 수도 있지만 삶에서는 무수한 훈련을 통해서만 마음에 심어지고 행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심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런데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 받아주심을 우리가 제대로 올바르게 하나님의 은혜로 인식하고 그 받아주심을 토대로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변화되어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자기 중심적인 사고는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무시하게 한다. 그 주인을 대하는 품꾼들의 태도와 말에서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사람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은 오직 하나님 중심적인 사고를 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며, 사람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인식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자기의 성과를 내세우며 정작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자기가 받을 것만을 셈하는 상태에 빠지며, 성과를 통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우열을 가리고 차별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저런 사람과는 다릅니다 하고 자신을 내세우지만 이것은 은혜를 무시하고 은혜를 베푸신 분을 무시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제 정리해 보면, 사실상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이미 정당한 대가를 요구할 수 없는 위치에 놓여 있다. 철저히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부정하고 자신이 이룩한 아주 아주 아주 작은 성취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께 대가를 요구하며 항의하는 어리석음을 보인다. 더욱 불행한 것은 사람은 그 어리석음조차 스스로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깨닫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역사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우물 속 개구리를 밖으로 꺼내주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개구리는 우물이 우주라고 생각하며 일평생을 그 안에서 살게 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밖으로 꺼내어졌다면 밖의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살려면 우리는 생각과 삶의 패러다임을 철저히 개혁해서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다. 우리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하늘의 보화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지식적인 측면에서 접근을 하려고 할 뿐, 우리의 생각의 패러다임을 개혁하고 새로운 삶을 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말씀의 씨앗이 길가에 떨어지거나 가시밭에 떨어져서 열매맺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고 우리의 삶에서 열매맺게 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복받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복받은 사람이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면 위선자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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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7. 31. 16:52

기독교에 대한 무관심

 

올해 5 월에 갤럽에서 한국인의 종교 상황에 관한 리포트를 발표했다. (참고: https://www.gallup.co.kr/gallupdb/reportContent.asp?seqNo=1208 )

전체적으로 종교인의 분포를 보면, 먼저 개신교가 17 퍼센트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불교가 16 퍼센트, 천주교가 6 퍼센트였으며 종교가 없다고 응답한 사람은 60 퍼센트가 되었다. 연령대로는, 20대의 사람들은 22 퍼센트, 30 대는 30 퍼센트, 40 대는 32 퍼센트, 50 대는 43 퍼센트, 그리고 60 대 이상은 59 퍼센트가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응답했다. 이 비율은 2004 년에 54 퍼센트로 정점을 찍은 후에 계속 내리막이어서 40 퍼센트까지 왔다. 이 변화 추이에서 놀라운 점은, 2014년과 비교했을 때에 40 대의 감소폭이 19 퍼센트로 가장 컸으며 50 대의 감소폭이 그 다음으로 17 퍼센트였다. 인구 분포의 허리에 해당하며 가장 영향력이 있는 연령대에서 종교를 믿는 사람의 비중이 제일 많이 감소했다.

 

또한 종교가 없다고 응답한 사람들에 대한 심층 조사에서는, 과거에는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람들 중에 52 퍼센트의 사람들이 과거에 믿었던 종교가 바로 개신교였다. 또한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호감이 가는 종교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개신교를 대답한 사람은 6 퍼센트 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이 교회를 떠난 이유 그리고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그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그것은 기독교가 사람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또한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자기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무관심한 것이다. 기독교가 그리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무종교인에게 아무런 관심거리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기에 주변을 잠깐만 돌아보아도 눈에 띄는 수많은 십자가가 그들에게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가 무관심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 것은, 먼저 사회적으로는 기독교인들이 공정과 정의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오히려 기득권 세력에 편승하여 약자를 이용해서 자기 배를 불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기독교인들이나 무종교인들이나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삶에서는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신앙하면서 멋지고 매력적인 인격을 갖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서 전전긍긍하고 거짓과 술수를 이용하는 약삭빠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무종교인들이 하는 행동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기에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차이가 있다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끼리끼리 자기네들끼리 뭉쳐서 잘 어울려 다닌다는 것 정도뿐이다.

 

사실 기독교가 사회 정의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과 같은 단체들이 그런 노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유투브에도 많은 기독교인 유투버들이 의로운 삶과 사회 정의에 대해서 열심히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고 무관심의 대상이 된 이유는 그런 단체들의 사회 정의를 향한 노력이 그렇지 않은 기독교인들의 비윤리적 부정의적 행태에 오히려 압도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의 수많은 집단 이기주의적 행태가 뉴스에 오르내리는 것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특히나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이웃들에게 코로나 감염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교회들이 앞장 서 모범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염의 위험을 몇 배나 증폭시키는 모임을 숨어서 개최하고, 그것이 들통나자 목사나 장로들이 서슴없이 거짓말을 하는 지경까지 TV 뉴스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니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나 훌륭한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적 사회 정의를 위해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기독교인들의 위선만 드러날 뿐이다.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교회에서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많은 설교가 행해졌지만 2010 년 이후에는 복에 대한 설교보다는 공의와 사랑에 대한 설교가 더 많아졌다고 보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의 삶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불의하고 기회주의적이며 돈만 좇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교회 내에서도 무리를 만들어 서로 대립하고 자기 맘에 맞는 사람들과만 어울리며 다른 무리에 속한 사람과는 담을 쌓고 살거나 배척하며 사랑의 모습을 전혀 보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사기치거나 이간질하고 왕따를 시키기도 한다. 눈 앞에서는 상냥하고 친절한데 뒤에서는 없는 말도 만들어서 험담을 하고 다니기도 한다. 마태복음 23장을 읽어보라. 여기에 기록된 위선자들의 삶이 뉴스에 나오는 한국 교회들과 무엇이 다른지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지역 교회들에서 발생하고 있는 부정적인 모습들만 본다면 교회나 세상이나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다. 이렇게 차이가 없으니 그냥 차라리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회에서 시간 들이고 돈 들이고 에너지와 노력을 들이고도 세상과 차이가 없는 게 뻔히 보이는데 누가 교회에 출석하려 하며 기독교인이 되려고 하겠는가. 이게 현실이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청년들이 교회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자기를 본받으라고 권면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도가 자기 자랑을 하고자 했거나 또는 교만해서 그런 말은 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의 삶의 예시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복음이 선포된 곳에서 당연하게 따라오는 질문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으면 현재의 삶이 어떻게 바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  ‘나를 보아라’ 하고 답한 것이다. 사도 바울의 삶의 정황에서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삶이 무엇인지 예를 보여주며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예수님을 본받아 살기를 권면했던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이렇게 청년들에게 말할 수 있는가? 나를 보아라, 나처럼 예수님을 믿는 삶을 살아라, 하고 청년들에게 권면할 수 있는가? 이러한 성도가 있는 지역 교회가 과연 한국에 몇 개나 있을까? 또는 교회의 청년들이 본받고자 하는 목사나 장로나 집사가 있는가? 그런 교회는 복받은 교회다. 이제 우리는 교회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는 예수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말 심각하게 반성하고 회개해야 한다.

 

사도행전은 성령님의 역사가 어떻게 세상에 전파되어 가는지 잘 보여준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의 삶이 극적으로 달리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도 할 수 있다. 우리의 삶도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것처럼 극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보아야 한다. 그는 자기의 의에 빠져서 위선적인 삶을 살다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뵙고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예수님을 본받아 살았다. 세상적 명예와 자기의 의를 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는 의와 사랑과 참된 평안을 위한 삶이었다. 그리고 사도 바울과 함께 다른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을 보면 예수님은 정말 다른 삶을 사셨다. 어마어마한 능력과 지혜와 지식을 가지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권력이나 부나 명예나 그 어떤 것도 탐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서 모든 치욕과 수모와 고통과 어려움을 다 감당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따를 수 없는가. 우리는 많은 것을 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세상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면 된다. 이웃에게서 이익을 빼앗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하지 않고 남의 여자를 탐하지 않고 돈이 전부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을 정직하게 섬기는 삶이면 된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 매일 10 분 기도하고 20 분 성경말씀을 읽어보자. 그리고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성령님이 감동을 주시고 은혜를 주신 대로 하루의 삶에 무조건 그냥 무조건 적용해 보자. 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살도록 해주신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증거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지하철이나 공공장소에서 소리쳐 “예수님을 믿으세요” 하고 외치지 않더라도 삶으로 증거하는 외침이 더욱 크게 사람들에게 느껴진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향기요 하나님의 나라의 대사 직분을 받은 사람이므로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각자의 삶의 정황에 따라서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고 부르실 만큼 진심으로 감당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가 오히려 세상 사람을 지옥으로 안내하는 위선자가 될 뿐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 주님 다시 사셨다! 이 말씀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말씀이 나의 삶을 그리고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자. 이 말씀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것을 인정하자. 그리고 만일 이 말씀이 마음에 울린다면 삶을 바꾸어 보자.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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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 총량의 법칙

 

 

이재이

 

 

숲이 감푸른 숨으로 신음한다

십칠 년 동안 땅 속에서 웅크려 껍질 벗고

지상에 올라와 한 달 동안

삶을 쏟아내는

매미 안고 몸살을 앓는다

그래서 운다

동시에 울어야 멀리 퍼지는 것을 아는가 보다

숲도 나무도 매미도 새도 풀도

야생화도 함께 운다

울다 울다 지쳐 마른다

아스팔트가 아지랑이 숨으로 신음한다

열 달을 배속에서 웅크리고 세상에 나와

팔십 여년 몸살 앓는 우리

매미의 울음을 가늘고 얕게

나누어 길바닥에서 운다

아무도 함께 하지 않는

드러내고 울 수 없는 울음

이불 덮고 손등으로 닦아내면

숲이 야위어

차갑게 속으로 삼키는 것처럼

야생화, 악몽에 떠는 것처럼

밤은 지나가고 다른

작은 분량의 울음이 길모퉁이에서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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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7. 24. 22:14

하나님의 사랑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 화목제물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후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의 1 절 가사이다. 우리는 교회에 함께 모여 이 찬송을 수없이 불렀다. 그런데 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는가? 마치 연인의 사랑을 책으로 배운 것처럼 혹시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는 책으로 배웠거나 관념적이고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가 그 사랑을 알고는 있으나 생명이 없고 역사가 없고 권능이 없으며 아무런 열매가 없는 사랑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스스로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성경 전체가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은 우리 하나님은 우상들과 다르시다는 것이다. 우상들은 모두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고 입이 있으나 말하지 못하며 손과 발이 있으나 아무런 역사를 만들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보시고 들으시고 말씀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다. 또한 하나님은 감정을 가지신 분으로 기쁨, 슬픔, 분노, 질투, 좋음, 싫음 등의 감정을 표현하신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하나님은 진정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구절까지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느끼고 알고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사랑이다. 그냥 관념적이어서 머리로만 아는 그런 사랑이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하나님의 사랑을 뉴스처럼 들으려고 한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랑이나 혹은 주변의 어느 누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마치 TV에서 뉴스를 듣는 것처럼 먼 나라에서 일어난 이야기처럼 듣는다. 그 동일한 사랑이 바로 지금 나에게도 부어지고 있으며 나는 그 사랑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자꾸만 머리 속에 붙잡아 놓으려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우상과 똑같이 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결코 그럴 수는 없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분의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느끼며 경험할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가르치기를,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지고 있다고 로마서 5장에서 말하였다. 그냥 좀 사랑이 느껴진다는 정도가 아니라 통째로 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분명히 뭔가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제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명확하고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면 절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가 없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 대신에 나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높이며 하나님을 철저히 무시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진정으로 수긍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러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거나 멸망시키시지 않고 우리의 배신과 반항까지도 품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그 사랑이 실제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역사에서 드러난 사건은 이러하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기에 우리의 배신과 반항, 즉 우리의 죄를 그냥 없었던 것으로 하실 수는 없으므로 어떻게 하든 그에 따른 형벌을 내리셔야 했다. 그런데 사람은 그 형벌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스스로 감당하신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친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의 모든 죄의 형벌을 우리 대신에 다 받게 하셨다. 그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이렇게 기록하였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의 죄가 얼마나 깊고도 큰지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2000 년 전에 역사 속에서 드러난 그 사랑,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사랑은 지금 이 시간에도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우리의 삶에서 느껴지는 사랑이므로 우리는 그 사랑을 우리의 삶에서 알 수 있다. 책으로 배우고 머리 속에만 있는 사랑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이 사랑을 먼저 알고 나야 우리의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작은 사랑들도 알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가장 크고 위대한 사랑조차 사랑으로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그 외의 다른 사랑을 어떻게 사랑으로서 경험할 수 있겠는가.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써 나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셨는데 그렇게 큰 사랑을 사랑으로서 깨닫지 못하면서 하루의 음식과 거처를 마련해 주신 사랑을 과연 사랑으로서 느낄 수 있을까.

 

그 사랑을 알고 깨닫고 나면, 이제 우리가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보았을 때에 ‘아 그때 그랬던 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특별히 내 삶에 개입하셨던 거였구나!’ 하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생각나게 된다. 사랑은 사건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냥 아무런 일도 없으면, 즉 어떤 사건을 통해 사랑을 표현하지 않으면 사랑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난 세월을 되돌아 보면서 하나님을 믿은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이러한 사랑의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다면 정말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인지 고민해 봐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를 결코 그냥 혼자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아버지로서 사랑으로 반드시 그의 삶에 개입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순간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든지 아니면 내가 지독하게도 무감각하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러니 이 사랑은 우리가 혼자서 상상하며 짜릿해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잔잔히 스며들어 가슴을 적시면서도 부모님의 사랑처럼 실제적으로 느껴지는 사랑인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화목한 가정이 중요하다.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성장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따른다.) 잘 했을 때에도 느껴지는 사랑이고 잘못 했을 때에도 느껴지는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삶에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때로는 놓칠 수도 있지만 잠시만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 보더라도 금방 깨달을 수 있는 사랑이다. 심지어 우리가 질병과 고통과 고난과 아픔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동안에도 느껴지는 사랑이다. 오히려 이러한 동안에 더 잘 느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 세계를 초월하므로 이 땅에서는 사랑이 아닌 것처럼 보여지는 것도 영원한 세계에서는 너무도 큰 사랑이기 때문이다. 마치 부모님의 징계를 받는 아이처럼 징계를 받는 동안에는 그 징계가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 징계를 받는 동안에도 부모님은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회초리로 징계를 받은 후에 하나님이 우리의 아픈 상처에 약을 발라주신 것을 우리는 깨달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사랑의 회초리를 맞아본 적이 없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히브리서는 기록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가 기록한 성경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많은 내용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의 서신서인 요한1서는 5 개의 장, 105 구절로 이루어진 비교적 짧은 서신이지만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구절이 30 구절이나 될 만큼 사랑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고 있다. 요한1서를 읽어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실제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6)고 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또한 그 사랑 안에 머무르며 그 사랑으로 살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랑을 느끼며 경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쁘게 순종한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며 마음껏 하나님을 사랑하자.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되어 하나님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광을 누리며,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넘치도록 우리가 사랑의 통로 역할을 감당하자. 사랑은 그 어떠한 두려움도 이기게 하며 고난과 어려움도 인내하게 하고 소망을 품으며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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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7. 22. 11:52

산상수훈의 구조와 요점

 

서론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산상수훈 만큼이나 유명한 말씀은 없는 것 같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산상수훈 말씀 중에 일부라도 들어보았으며 그 말씀을 일상 생활에 인용할 만큼 유명하다. 그래서 이 말씀의 핵심을 깊이 있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크리스찬에게는 더욱 중요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또한 산상수훈의 말씀은 네 개의 복음서 전체를 이해하는 데까지 연결되므로 무척 중요한 것이다. 본 글에서는 산상수훈이 기록된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말씀을 거시적으로 살펴서 그 구조와 핵심 요점을 알아보고자 한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산상수훈 말씀의 구조와 핵심을 먼저 알아야 산상수훈의 각 구절이나 소단락을 전체 구조 안에서 핵심을 벗어나지 않고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 없이 각 소단락의 말씀을 먼저 파악하려 한다면 대부분의 경우에 윤리적 또는 도덕적 교훈으로 접근하거나 아니면 기독교적 접근을 하지만 그 깊이를 깨닫지 못하고 피상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으므로 전체 구조와 핵심 요점을 먼저 파악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본론

    시대적 배경

신약 성경의 첫번째 책인 마태복음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기록된 복음서이다. 그래서 구약 성경을 인용한 구절들이 마태복음에서 많이 발견된다. 산상수훈의 말씀은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으며, 마태복음에서도 시작 부분에 기록되어 있다. 사도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하면서 의도적으로 산상수훈의 말씀을 앞에 배치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도 마태는 산상수훈의 말씀이 구약 성경을 신약 성경과 연결되도록 만들고 있으며 또한 신약 성경 전체의 길잡이 역할을 하며 산상수훈의 의미가 복음서 전체로 확산되도록 하고 있다. 이렇게 해석하게 된 근거는 본 글에서 제시될 것이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선포한 첫번째 말씀이 “회개하라 하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선포한 이 나라는 세상적 능력의 나라가 아니라 하늘적 능력의 나라, 즉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나라인 하늘에 속한 나라를 선포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그 나라를 선포하시는 데 있어서 이스라엘 나라/왕국과는 어떻게 같고 또한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먼저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개념과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통념을 배경으로 해서 선포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 당시의 시대적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산상수훈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주후 27년 즈음의 시대적 배경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첫째, 유대인들은 율법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하고 그러한 표면적, 문자적 이해를 바탕으로 율법을 613 개의 조문으로 세분화했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라고 생각했었다. 둘째, 그들이 대망하는 이스라엘 나라는 이 땅에 재건되는 다윗/솔로몬 왕국과 같은 힘과 부의 나라였다. 셋째, 그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을 구출해 줄 메시야가 와서 그들이 대망하는 이스라엘 나라를 세워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들이 이러한 상황에 있을 때에 예수님이 나타나서 엄청난 기적을 베풀며 새로운 나라에 대해서 선포하셨으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야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이 기대했던 나라는 세상적 나라였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무지했던 그들은 그저 다윗 왕국처럼 강성한 나라가 세워져서 유대인들이 세상의 정점에 서는 통치자가 되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이 세상을 통치하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구조 분석 – 전체

이러한 배경적 상황에서 산상수훈의 말씀이 선포되었고 사도 마태는 이 말씀을 마태복음의 맨 앞에 위치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하는 말씀과 수행하는 사역에 대해 기본 방향을 먼저 설정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사역의 목적이 바로 하늘에 속한 나라를 이루기 위한 사역이라는 것이며 하늘에 속한 나라가 어떠한 나라인지 그 기초적 본질을 설명하고 가르치시며 삶으로 직접 보여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미 임하고 있는 그러나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는 않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종말론적 비전을 가지고 설명하시며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큰 단락으로 구분하면, 먼저 (1) 첫번째 단락은 5장 1절부터 16절까지의 말씀이다. 이 단락은 하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받는 9 가지의 복과 함께 그 복을 누리는 사람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가르침이다. (2) 두번째 단락은 5 장 17 절부터 6 장 4 절까지의 말씀이다. 이 단락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재해석하는 가르침이다. (3) 세번째 단락은 6 장 5 절부터 34 절까지의 말씀이다. 이 단락은 하나님과 참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서 설명하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4) 마지막 단락은 7 장 1 절부터 27 절까지의 말씀이다. 이 단락은 이렇게 설명된 하늘의 나라의 삶을 세상에서 살아내면 나타나는 결과들에 대한 말씀이다. 그리고나서 맨 마지막에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아주 짧게 기록되었다.

 

모든 단락은 세상의 나라에 속한 사람과 하늘의 나라에 속한 사람에 대한 비교를 통해서 보다 명백하게 제시되고 있다. 첫번째 단락의 9 가지 복에 대한 말씀 역시 역으로 생각하면 저주에 대한 말씀이 된다. 복과 저주는 항상 한 쌍으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를 들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의 나라가 그들의 것임이요” 말씀을 역으로 생각하면 심령이 부자인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결코 하늘의 나라에 속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나서는 표면적으로 율법을 이해하고 표면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경우와 그리스도 안에서 재해석된 율법을 지키는 경우가 비교되고, 이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온 맘 다해 섬기는 경우와 두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경우가 비교되며, 마지막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재해석된 율법을 지키는 하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의 삶과 율법이 없거나 율법을 표면적으로 지키는 세상의 나라에 속한 사람의 삶이 비교된다.

이제 각 단락을 조금 더 깊이 살펴보자.

 

    구조 분석 – 첫번째 단락 (5:1~16)

이 단락은 하늘의 나라에 대한 가르침 중에서 하늘의 나라의 백성은 누구인가에 대한 설명이다. 그들은 9 가지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복들은 한 열매의 9 가지 맛과 같은 것으로서, 어떤 복은 받고 어떤 복은 받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갈라디아서 5 장에 기록된 성령의 열매와 같이 전부 받든지 아니면 하나도 안 받든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자기는 심령은 가난한데 온유하지는 않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사도 마태가 왜 9 가지의 복을 통해서 하늘의 나라를 먼저 설명했는지를 알려면 앞에서 언급한 시대적 배경이 되는 당시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거기에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선포하신 첫 말씀은 “회개하라 하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더하여 생각해야 한다. 그럴 경우에 사람들은 그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인가 하고 모두 궁금해 하면서, 이제 드디어 이스라엘에 강성했던 다윗/솔로몬 왕국, 즉 민족주의적인 메시아 왕국이 다시 세워지겠구나 하며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고대하는 세상의 나라와는 차원이 다른 하늘의 나라에 속한 백성은 누구인지 먼저 설명함으로써 하늘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고 그 나라의 백성에 대해 언급하며 그것은 그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더욱이 여기에 소개된 복들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복들이므로 예수님이 단순히 하늘의 나라를 소개한 것뿐만 아니라 그 나라를 종말론적 관점에서 소개한 것이다.

 

사도 마태가 ‘하늘의 나라’ – 개역성경이나 개정개역성경에서는 ‘천국’으로 번역된 용어 – 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서 대개는 하늘이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므로 하나님 대신에 하늘이란 단어를 사용해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고자 ‘하나님의 나라’를 ‘하늘의 나라’로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늘의 나라’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가, 단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고자 했다는 이유보다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다윗 왕국과 비슷할 것이라는 세상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의 생각을 교정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세상적 차원의 나라가 아니라 하늘적 차원의 나라라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늘의 나라’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이것은 산상수훈의 말씀 중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으로 보아 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이 하늘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실 때 복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심으로써 그들은 자연스럽게 율법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바로는 사람이 복을 받으려면 율법을 지키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신명기 27 장에 기록된 것처럼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어기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모세의 가르침을 그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마치 율법과는 전혀 상관없이 엄청난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당연히 예수님께 여쭤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율법은 이제 소용이 없는 것인가요? 하는 질문이었다. 예수님의 대답은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늘의 나라의 백성은 율법을 다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이다. 하늘의 나라와 율법 모두 하나님의 성품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서로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

 

    구조 분석 – 두번째 단락 (5:17~6:4)

이 단락은 하늘의 나라에 속한 백성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이다. 첫번째 단락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해서 두번째 단락이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율법은 이제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따라서 두번째 단락은 율법의 참 의미, 곧 예수님 안에서 재해석된 율법, 새 언약의 관점에서 본 율법, 하늘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의 근본인 하나님의 성품이자 율법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율법에 대해서 설명해 주신다. 세상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표면적으로 이해되는 율법은 사람을 물리적으로 죽이는 것만을 살인이라고 규정하지만, 하늘의 나라의 율법의 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이해되는 율법은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살인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을 방해하고 더럽히는 모든 것이 다 악인 것이다. 이와 같이 간음, 결혼, 맹세, 그리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율법을 재해석하여 표면적이고 문자적인 이해가 아니라 공의와 사랑에 입각한 이해를 제시하시며 이제는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심지어 그들이 사랑의 표현으로서 행하는 구제조차도 구제받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구제하는 사람의 자랑을 위한 것이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한 요식행위일 뿐이므로 사랑의 행위 역시 그 본질적 의도가 더 중요하다고 하신다. 이렇듯 이 두번째 단락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율법들을 재해석하시고 하늘의 나라에 속한 백성이 지켜야 할 율법은 더 이상 표면적인 준수가 아니라 내면적인 준수가 필요한 것이며 그것이야 말로 하늘의 나라의 백성인 표지인 것임을 가르쳐 주신다.

 

첫번째 단락과 두번째 단락의 말씀을 이해함에 있어서 이 말씀이 사람이 하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독립적 조건을 설명하는 말씀으로 간주하면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게 된다. 사람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노력해서 심령이 가난해야 복을 받게 되는데 그 복이 바로 하늘의 나라를 소유하는 것이라는 식의 이해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 하늘의 나라를 소유하는 복을 받으려면 예수님을 바라보아야만 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사람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심령을 가난하게 할 수 있으므로 그 능력을 사용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의 나라를 소유하려고 노력하라는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것은 불가능하니 –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세상적 욕심을 모두 다 완전히 버리고 하늘적 소망 즉, 하나님을 향한 소망으로 채워지기를 고대하는 마음인데 사람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러한 심령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오직 예수님만을 믿고 의지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도 살리시는 분이시므로 예수님이 해결책을 주실 것을 믿고 예수님을 의지하라는 가르침이다.

 

율법에 대해 가르치신 두번째 단락도 마찬가지이다. 형제를 향한 미움만으로도 살인과 같은 죄를 저지르는 것이고 여자를 향해 음욕을 품기만 해도 간음의 죄를 저지르는 것이며 거짓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르는 것이 되는데 그러한 죄를 평생 단 한 번도 저지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는 누구도 하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은, 이제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이 죽은 사람도 살리신 것처럼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해결책을 주실 것이라고 믿고 의지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9 가지의 복을 받아서 하늘의 나라를 사는 사람은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의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한 사람이자 율법의 정신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구조 분석 – 세번째 단락 (6:5~34)

세번째 단락은 하늘의 나라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으로서, 하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율법을 주신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치시는 말씀이다. 하늘의 나라의 주인이자 왕으로서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은 하늘의 나라의 백성 각 사람의 아버지이시며 또한 백성 모두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시므로 나 혼자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은 무섭고 권위적인 군주가 아니라 자애로운 아버지로서 제시된다.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가까이 계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의 필요를 돌아보시며 적절하게 채워주시고 자녀들을 직접 양육하신다. 그리고 자녀들은 온 맘 다해 온 정성 다해 그리고 온 힘을 다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며 섬긴다. 이 단락의30 구절 중에서 아버지라는 단어가 11 번이나 나올 만큼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강조하여 드러내신다. 예수님은 이 관계에 대해서 다양하게 설명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자녀와 자녀가 아닌 사람을 비교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얼마나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인지, 하나님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 존재인지, 그리고 하늘의 나라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사는 존재인지 가르치신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서 제시되는 하나님과 하늘의 나라의 백성의 관계는 가족과 같은 연합의 관계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가족으로서 하늘의 나라에서 사시는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할 때마다 불러내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기도와 금식 그리고 단일한 마음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를 향해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며,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우리를 어떻게 양육하시는지 가르쳐 주신다. 우리는 이 관계에 있으면서 다른 어떤 것도 신경쓸 필요가 없다. 만일 다른 어떤 것을 신경쓴다면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형식 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은 일들도 실제로는 자신의 체면이나 명예를 위한 자랑 또는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한 것에 불과할 수 있다. 하나님과 연합된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하늘의 나라의 백성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제시하신 것은 하나님과 하늘의 나라의 백성의 연합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하늘의 나라의 백성의 연합을 함의한다. 하나님 아래서 예수님과 하늘의 나라의 백성이 한 자녀가 되고 예수님은 맏아들의 위치에 놓여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17 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와 같이,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고 예수님 안에서 우리도 하나님과 하나 되는 영광을 누린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늘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구조 분석 – 마지막 단락 (7:1~27)

마지막 단락은 하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그 나라의 백성이 세상에 어떻게 드러나는지 가르쳐 주시는 부분이다. 하늘의 나라에 속한 백성이 세상을 새 언약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해석된 율법을 바탕으로 하늘의 나라의 백성답게 살게 되면 세상의 나라에 속한 백성과 어떻게 다를지 설명해 주신 말씀이다. 이는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며 정죄하기 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을 먼저 성찰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이 자기 눈 속의 들보를 알지 못하고 남의 눈 속의 티끌을 판단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남의 눈 속의 들보를 보면서도 자기 자신의 눈 속의 티끌을 먼저 빼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그리고 자기 눈 속의  티끌을 먼저 빼내었다고 해서 남을 판단하는 것이 허락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기의 깨끗한 눈을 통해서 보면 남의 눈 속에 들보가 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을 무너뜨리고 더불어 우리를 무너뜨리는 비난과 정죄가 아니라 남을 살리고 더불어 우리를 살리는 사랑이 먼저여야 한다.

 

또한 세상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갈 때에 하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더라도 그 길을 오히려 기꺼이 가며, 세상 사람들이 허랑방탕하게 세월을 보내면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또는 넓은 길을 걸으며 악한 열매를 맺을 때에 하늘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는 맺는다. 이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해석된 율법을 내면적으로 준수하여 맺는 열매이다. 그래서 세상을 살면서 어떠한 일이 부딪쳐 오더라도 바위에 집을 지은 사람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삶이 세상에서 하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늘의 차원으로 사는 삶이다. 이렇게나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모를 수가 없으며 또한 이렇게나 다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나라의 백성들로부터 핍박을 당하더라도 흔들릴 수 없다는 말씀을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의 말씀이 교리적 가르침이나 설명에서 끝나지 않고 삶의 영역까지 이어지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하늘의 나라는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는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떤 이론이나 말이나 권고 정도가 아니라 삶의 규범으로 삼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이 몸소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지금 여기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야 우리가 바위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 된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완전한 삶을 누리지는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고 있다는 신호는 우리의 말이 아니라 삶 자체에서 계속 발신되어야 한다.

 

이렇게 네 개의 단락들로 구성된 산상수훈의 말씀이 다 선포되자 7장 마지막에는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의 의미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전반적인 반응뿐만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 될 것인지에 대한 전조를 드리우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는 차원이 다른 하늘에 속한 가르침이었다. 사도 마태는 이 말씀을 마태복음의 앞 부분에 위치함으로써 마태복음을 읽는 유대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읽으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구조 분석 – 종합 및 적용

네 개의 단락을 종합하면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예수님이 가져오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이다. 그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는 차원이 다르게 높은 나라이며 하나님이 자애로운 아버지로서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이제 그 나라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 임하게 되는데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독립적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게 된 하늘의 나라에서 율법의 정신에 맞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열매는 세상의 소금이요, 이사야 선지자가 외쳤던 바와 같이 빛이 될 것이다.

 

이렇게 이해되는 산상수훈의 말씀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 보자. 마태복음 10:34~38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 하신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에 적용해 보자. 그러면 이 말씀이 한 가족들끼리 서로 반목하고 불화하며 배척하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은 원수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데 한 가족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그를 미워하고 배척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산상수훈의 말씀을 바탕으로 해서 이해하면, 이 말씀은 세상적 나라는 하늘적 나라와 결코 함께 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빛과 어둠은 결코 함께 할 수 없으며 하나님과 맘몬도 결코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세상적 나라에 살든지 아니면 하늘적 나라에 살든지 둘 중에 하나에서만 살 수 있다. 세상적 나라에 사는 사람은 하늘의 나라를 반항하며 거부한다. 하늘적 나라에 사는 사람은 세상적 나라를 거부하고 배척해야 한다. 그의 삶은 형제와 이웃뿐만 아니라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 그 이웃이 지금은 하나님을 거부하며 하늘적 나라를 무시할지라도 나중에는 하나님께 돌아올 수도 있다. 근시안적이고 정욕과 이익에 휘둘리는 세상적 나라의 관점에서 보지 말고 하늘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요점은 예수님을 따르며 하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율법의 정신을 지키는 삶을 사는가 아닌가 하는 점일 뿐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나라에서의 삶의 열매가 어둠을 배척하며 세상의 나라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나라에 사는지 하늘의 나라에 사는지를 결정하는 요소는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아닌가 하는 점, 즉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에게 연합되어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세상의 나라와 하늘의 나라가 결코 함께 할 수 없다는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검’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살펴본 산상수훈의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전반부에 해당한다. 이 전반부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고 누구나 좋은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크리스찬이 아닌 사람은 어느 정도 왜곡된 이해를 할 수밖에는 없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산상수훈의 말씀을 높이 평가하며 인류가 따라야 할 교훈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반면에 후반부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져 있으며, 후반부는 전반부와는 다르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 의미를 알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후반부를 알아야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고 따라서 산상수훈의 말씀에 대해서도 보다 깊이 있게 본질적인 의미를 깨닫게 된다.

 

만일 산상수훈의 말씀이 예수님의 가르침의 전부라고 이해하면 그것은 전혀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본의가 심각하게 왜곡되어 결코 기독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철저히 아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산상수훈의 말씀만을 따로 떼어내어 교과서처럼 간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산상수훈의 말씀은 아주 훌륭한 윤리적 도덕적 교훈이 되고 또한 사람이 천국 – 나중에 죽어서 가게 되는 평안하고 좋은 곳에 가기 위한 조건을 가르치는 말씀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룬 업적도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도 전혀 상관이 없다. 그저 ‘나’와 ‘교훈’만 남게 된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산상수훈의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전반부이다’고 말한 이유이다. 후반부는 마태복음보다는 요한복음에 더 잘 설명되어 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어떤 의미인지가 보다 더 뚜렷하게 잘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신서들로 이어지며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과 죽음과 부활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해석하는 글을 기록하였고 또한 예수님을 대신하여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기록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떻게 세상에서 구현되며 하늘의 나라가 확장되고 있는지 기록하였다.

 

결론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산상수훈의 말씀은 거시적으로 보아 네 개의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상의 나라와는 차원이 다른 하늘의 나라는 무엇이며 그 나라에 속한 백성의 삶은 어떠해야 하며 그 나라의 주인이자 왕이시며 백성의 아버지인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는 어떠한지, 그리고 그 백성의 삶이 세상에 드러났을 때에 세상은 어떠할 것인가를 설명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혹자들의 이해와 같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을 설명하신 말씀이 결코 아니다. 이 말씀은 종합적으로 오직 예수님만이 가져오실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게 함과 동시에 모든 복음서에 대한 길잡이 역할과 함께 복음서를 여는 역할을 한다. 또한 산상수훈의 말씀 이후에 이어서 이루어질 예수님의 사역, 즉 하늘의 나라를 이 땅으로 가져오시는 사역의 완성에 대해 소망를 품게 하는 것이다. 그 사역의 클라이막스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그 사역을 이해할 수조차 없으나 우선 산상수훈의 말씀으로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하늘의 나라의 시작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나라의 완성을 향해 인내하며 달려간다.

 

그러므로 이제 마태복음의 시작 부분에 기록된 산상수훈의 말씀을 읽고 이해한 독자는 마태복음의 나머지 부분과 다른 복음서들 및 서신서들을 어떠한 관점에서 그리고 어떠한 문맥에서 이해해야 하는지 그 방향을 명확하게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이 산상수훈을 어떻게 완성하는 것인지 고민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올바르게 깨닫게 된다. 이러한 가르침과 어마어마한 기적을 행하신 분께서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냥 죽어야만 했던 이유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보다 더 크게 보면, 구약 성경이 신약 성경으로 어떻게 이어져야 하는지 또는 구약 성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 방향을 제시해 준다. 따라서 우리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조각조각 쪼개서 미시적으로 보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이처럼 먼저 거시적으로 보고 전체적인 그림을 이해하고 나서, 각 구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신뢰하고 의지하는 동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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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7. 17. 05:52

위선의 늪

 

우리 주님이 공생애의 사역을 하시는 동안에 주님으로부터 가장 많은 책망을 받았던 사람들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다 (마 23:13, 15, 23, 25, 27, 29). 그들은 당시의 이스라엘 사회에서 종교적인 권위를 가진 지도층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가장 많은 책망을 들었으며 책망의 내용도 아주 신랄한 것뿐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그들은 위선자요 ‘회칠한 무덤’과 같다는 책망이었다. 하얀 페인트로 무덤의 겉을 칠해 놓아서 겉은 그럴싸 한데 속은 죽은 뼈들 밖에는 없다는 의미이다. 개역개정본에는 ‘외식’이라는 단어로 위선을 표현하고 있기에 그 의미를 어렵게 해서 가려놓고 있지만 영역본의 경우에는 hypocrite(위선자)라는 단어로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위선자의 대표적인 행동은 자기를 잘 포장하고 또 남을 쉽게 비난하고 정죄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행위나 삶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럽고 대체로 눈 감고 넘어가지만, 다른 사람의 아주 조그만 잘못도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고 비난하고 정죄함으로써 마치 자기는 그러한 잘못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이라고 포장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우리 주님이 아예 대놓고 책망하시기를,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눅 6:42)고 하셨다. 또한 위선자는 남들이 볼 때에는 거룩한 척하지만 아무도 없거나 누구도 볼 수 없는 상태라는 생각이 들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며 아무런 꺼리낌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위선자는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며, 조그만 이익인데도 그것을 위해서 그 어느 것도 손바닥 뒤집듯이 버리기도 하고 취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다른 사람의 잘못만을 찾아다니며 그것을 통해 자기는 거룩한 사람이라는 포장과 함께 위안을 누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교회 내에서도, 예를 들어, 설교 말씀을 듣거나 어떤 충고를 들었을 때에 그 말씀을 나 자신에게 적용하려는 생각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먼저 적용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그를 정죄한다. 흔하게는 아마도 이런 식일 것이다. 설교 시간에 어떤 말씀을 듣다가 ‘아 이 말씀은 박장로가 들어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거나 또는 주위를 둘러보며 ‘아 오늘 김집사가 안 왔네. 이 설교를 들어보고 좀 깨달으면 좋겠는데…” 같은 생각을 했다면 그것이 바로 위선의 시작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위선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 자체가 이미 위선에 빠져버렸다는 증거이다. 왜냐하면 모든 설교 말씀은 우선 그 말씀을 듣는 자신에게 먼저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게 먼저 적용하고 나서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면 위선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철저히 눈을 감고서는 밖으로만 눈을 뜨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찾아다니는 것이야말로 위선의 시작이다. 이 지점을 지나면, 이제 실제로 남의 허물을 비난하고 정죄함으로써 남을 무너뜨리고 자기 자신은 거룩하다는 평판을 얻어 만족을 누리며, 더 큰 허물을 가진 다른 사람을 찾아다닌다. 교회가 분란과 분열과 파당 싸움으로 가득하게 되는 지름길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이런 자들을 참으로 강하게 책망하셨다. 위선자요 회칠한 무덤이요 독사의 새끼라고 하셨다.

 

우리는 어떤가? 자연적 상태에 있는 사람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 다를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심지어 거듭난 사람도 여전히 육신의 죄성으로 인해서 누구나 위선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의 눈은 항상 밖을 향해 열려 있어서 다른 사람을 먼저 보기 때문에 그렇다. 다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님으로 인해서 자신을 알기에 위선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있다. 성경 말씀을 묵상하거나 설교 말씀을 듣거나 기도하는 동안에 성령님이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며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므로 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은 성령님의 이러한 인도하심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 수가 없고 따라서 위선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물론 윤리적 도덕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통해서 심각한 위선에 빠지지는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스스로 보는 것에 한계가 있으며 또는 편견에 빠져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며 그리고 또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완전히 진리이시므로 우리의 모든 잘못을 정확하게 교정해주실 수 있다. 비록 우리의 역량과 실력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따라갈 수는 없을지라도 성령님의 인도하심 자체는 완전하기에 우리가 성령 충만하여 전심으로 따르고자 한다면 위선을 이겨낼 수 있다.

 

디모데후서 4장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뒷부분을 NIV에서 번역하자면 “그러한 가르침들은 위선적 거짓말쟁이들을 통해서 오며 그들의 양심은 뜨거운 인두로 지져 말라비틀어져 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 그들은 이제 그 어떤 방법으로도 자기의 양심을 되살릴 수 없게 되었고 사탄 마귀의 하수인이 되어 사람들을 넘어뜨리고 미혹하며 거짓을 퍼뜨리지만 스스로는 결코 잘못됨을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위선의 무서운 점은 그것이 겉으로는 진리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겉으로도 거짓으로 보인다면 누구나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알지만, 그것이 비록 속으로는 술수와 사기와 거짓일지라도 겉으로는 진리처럼 보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속아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에 대해서 평가하신 말씀이 바로 그들의 말은 따를지라도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 말은 진리를 선포하는 것 같지만 실제 행위는 거짓과 폭력과 억압과 착취와 사기였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정도의 위선자를 찾기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뉴스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요즘의 말로는 ‘선택적 정의’라고도 할 수 있고 또는 ‘내로남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남에게는 항상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먼지 하나라도 털어대면서 정작 자기 자신이나 자기 친구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잣대로 그냥 넘어가는 사람들이 뉴스에 나온다. 지역 교회 안에서도 그렇다. 특히 지역 교회에는 위선자들이 많이 있을 수 있는 구조를 가졌다. 지역 교회에 출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선자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상당수가 위선자일 가능성은 있다. 이것은 진리가 교회 안에서 선포되고 있어서 귀로는 진리를 들을 수 있으나 삶으로는 진리를 무시할 기회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습관이 될 정도로 방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 교회들은 성령님과 함께 리더들이 그러한 사람들의 삶도 진리로 이끌어야 하는데 리더들조차도 위선에 빠져 있을 가능성이 있고 또 리더들의 수가 제한적이어서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까지 돌볼 수 있는 여력이 없기에 그러한 사람들은 사각지대에 놓이고 자기들만의 기준을 스스로 정해서 교정받을 기회를 갖지 못하는 구조로 쉽게 빠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 교회에 모이는 회중의 크기가 리더들의 수에 맞게 적절해야 하는데 요즘은 무조건 큰 교회를 추구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다. 목사나 장로들은 교회가 크면 마치 자기가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우쭐대고 그러한 교회의 교인들은 마치 자기는 대단한 집단에 소속된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목에 힘을 준다. 위선에 빠진 전형적인 형태인데도 교회 전체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또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말하지만 그 말이 정작 상식적이지도 않은 주장이라는 것을 자신들만 알지 못한다. 그러니 교회 밖의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말하기를, ‘저런 하나님을 누가 믿겠느냐’ 하면서 오히려 교회를 조롱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는데도 그 안에 갇혀 있어서 오히려 적반하장식으로 더욱 어리석은 주장을 하게 되고 교회를 해치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거나 설교 말씀을 듣거나 기도를 하거나 찬송을 부르거나 어느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거든 항상 그 말씀을 나 자신에게 먼저 적용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눈이 나 자신이 아니라 남을 먼저 향할 때에는 반드시 위선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어떻게 하든지 나 자신을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고 무조건 적용해야 한다. 위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사람이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었을 때에 ‘아 좋은 말씀이네. 은혜 받았네’ 하고 그냥 습관적으로 넘어가면 그것은 이미 위선의 징후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 말씀은 박장로가 들어야 하는데…’ 하고 생각한다면 위선이 시작된 것이며, 만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을 정죄하고 비난한다면 위선에 빠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정말 은혜 받았다면 그 말씀이 먼저 나 자신에게 적용되어 내 삶을 변화시키고 열매 맺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래야 위선의 늪에 빠지지 않고,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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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7. 10. 21:05

순종이 찬양이다

 

골 3:16~17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아마도 90년대 정도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부터 교회들마다 찬양 예배를 수요일 저녁이나 금요일 저녁 또는 주일 저녁에 드리기 시작했다. 설교 위주의 주일 예배 형식이 아니라 찬양 위주의 자유로운 형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유행처럼 교회들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참 지난 후에는 바디워쉽 또는 몸으로 드리는 찬양 예배라 하면서 노래와 함께 춤을 추면서 자유로운 형식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노래와 춤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존귀한 이름을 찬양하는 것은 너무도 마땅한 일이다. 히브리서 기록자 역시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찬양 예배가 유행처럼 퍼지면서 찬양은 마치 입술로 드리는 찬양만이 전부인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하였다. 시편 말씀을 먼저 살펴 보자.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시 101:1).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시 119:164). 또한 에베소서에서는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12) 하셨으며, 빌립보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 1:11) 하셨다. 이 말씀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말씀들에 있는 찬송 또는 찬양도 우리가 입술로 드리는 찬양을 의미하는 것일까.

 

먼저 시편 말씀들을 간단히 살펴 보면, 인자와 정의를 노래한다는 것이 오직 입술로만 노래하고 삶에서 실천하지 않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또한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주를 찬양한다는 것이 오직 입술로만 주님의 의로운 규례들에 대해서 노래하는 것이라면 진정한 찬양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의로운 규례들을 삶으로 살아내지 못하면서 입술로만 의로운 규례들을 노래한다면 그것은 위선자의 전형적인 겉치레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의로운 규례대로 살아봐야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되고 그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신 하나님을 향해서 진정한 감사와 찬양이 나올 수 있다. 에베소서의 말씀과 빌립보서의 말씀도 동일하다. 우리가 찬송이 되는 것은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의롭고 사랑이 풍성한 삶이 곧 찬송이 되는 것이다.

 

골로새서의 말씀도 동일하다. 이 말씀에서의 시작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이다. 그래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이것은 진리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단순한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물론 지식은 필요하다. 알아야 분별할 수 있고 알아야 방향을 잡을 수 있고 알아야 올바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지식으로서 머리에만 머무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말씀과 하나 되어 말씀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고 우리의 모든 생각과 의지와 감정과 행위의 근원이 되어서 우리의 모든 행위는 주님의 말씀의 열매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면, 주님의 모든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편 119:9, 11 말씀이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결국 주의 말씀을 나의 삶에서 구현해내는 것을 통해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그래야 살아있는 노래가 나오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찬양’이라는 단어를 입술에서 나오는 찬양과 함께 순종의 삶에서 나오는 찬양으로 이해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도 입술에서 나오는 찬양에만 익숙해져 있기에 이제는 무엇보다도 삶에서 나오는 찬양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찬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삶에서 나오는 찬양이라는 의미로 더욱 치중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어느 정도 균형잡힌 시각을 갖게 될 것이다.

 

수십 년 전에 찬양과 삶이 하나로 하나님께 드려진 이야기가 있다. 그 당시의 나는 10년 동안 담배를 애용했던 골초였다. 평균적으로 하루에 담배를 두 갑 정도씩 피워댔었다. 몇 번이나 끊으려고 하기도 했었지만 모두 실패하고서 그냥 포기하고 지내는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어느날 갑자기 찬양대에 서고 싶어졌다. 예배 중에 찬양대를 보면서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지휘자의 권면이 있어서 얼른 찬양대에 합류하였다. 그리고는 찬양대에서 함께 찬양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좋았었다. 그런데 어느날 나의 찬양하는 입술에서 담배 냄새가 많이 난다는 얘기를 건너 건너 들었다. 충격이었다. 그래서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담배를 끊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담배를 끊는다는 것이 생각 만큼 쉬운 것이 아니었다. 기도도 하고 결심을 반복해서 되뇌이어도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오후에 담배 생각이 나서 밖에 서성이며 복합적인 욕망으로 혼란스러웠다. 한편으로는 담배를 피고 싶지는 않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담배 생각이 간절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냥 갑자기 마음 속으로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 양 ~~ 등등 마음 속에서 생각나는 찬송가들을 부르다 보니 담배 생각이 싹 없어졌다. 그후로 몇 달 동안 계속 이렇게 담배의 유혹을 물리쳤다. 이것이었다. 내가 담배를 완전히 끊고 그 후로는 단 한 번도 담배를 입에 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 삶이 찬송이 되고 찬송이 삶이 되었던 기쁨이 담배의 유혹을 이겨내도록 했던 것이었다.

 

우리가 입술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은 언어를 가진 인간으로서 너무도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입술에 의한 찬양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드리는 찬양 또한 너무도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여 우리의 속을 주관하여 변혁시키고 마침내 삶의 모든 시간에서 열매를 맺음으로써 그 열매가 곧 찬양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크리스찬은 찬양대에 서 있는 찬양대원이다. 입술을 열어서 그리고 삶의 향기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찬양대원이다. 그리고 마침내 찬양드리는 기쁨을 누리는 찬양대원이다. 혼자서 찬양드릴 수도 있고 여럿이서 함께 찬양드릴 수도 있고 수백, 수천 명이 함께 찬양드릴 수도 있는 찬양대의 귀한 일원이다.

 

순종으로 드리는 찬양은 기쁨과 위로와 감사와 능력을 낳고 이를 통해 입술로 터져 나오는 찬양은 온 땅에 울려 퍼질 것이다. 우리 주님 안에서 말과 생각과 삶이 하나 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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