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동행하기
우리 크리스찬의 삶은 참으로 고달프다. 머리로는 아는데 몸은 따라주지 않으니 고달프고 애타고 초조하고 심지어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그래도 아는 것을 따라 조금씩이라도 가야만 한다. 우리의 유전자 DNA가 그렇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길이 아니면 삶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지식으로 알지 않고 온 마음과 몸으로 알기에 가야만 한다. 그나마 조금 위안이 되는 것은 이 고달픔을 그냥 고달픔만이 아니라 기쁜 고달픔으로 바꾸어줄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현실은 고달프더라도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그리스도 안에서 기쁘게 인내할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우리가 제대로 올바르게 진심으로 이 방법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이 방법도 별 효과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방법은 바로 ‘주님과 동행하기’이다.
우리는 교회에서나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에서나 신학자들의 책에서나 인터넷의 기독교 사이트들에서나 기독교 관련 유투브 영상들에서나 많이 듣고 있는 것이 바로 ‘주님과 동행하기’이다. 주님과 동행하기에 대해서 믿음을 강조하는 분도 있고, 사랑을 강조하는 분도 있으며, 소망을 강조하기도 하고, 무엇이든 좋은 것들에 대한 실천적인 삶을 강조하는 분도 있다. 다양한 관점과 경험들을 통해서 각자 가장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라고 느껴지며 모두 도움이 되는 말씀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들의 기초는 바로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이다. 믿음이든 사랑이든 소망이든 그리고 그 어떠한 선행이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모래 위에 쌓은 성과 같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셨으므로 (고전 1:9) 우리의 삶의 기초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이다. 동행한다는 것은 교제를 나눈다는 것이며,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닮아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나눌 수 있을까. 뜬구름 잡으려는 시도는 아닐까 싶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교제를 나누신다. 그렇다고 이 말이 마치 성령님이 우리와 직접 대화를 하시고 뭔가 보이는 분처럼 활동하신다는 의미는 아니다. 고전 1:9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증거, 곧 복음이 우리 중에 견고하게 되고, 은사를 통해서 다양한 능력을 드러내면서도 모두가 하나되는 화합의 사랑으로 살며, 책망받지 않도록 죄를 이기는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도록 역사하시면서 교제를 나누신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는 반드시 우리의 변화를 만들어 내며,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드러낸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벗어나서 역사하시지 않으며 예수님이 하신 대로 역사하신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대리자로서 모든 것을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활동하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구약 성경을 시작으로 해서 복음을 설명해 주시니 그들은 가슴이 뜨거워져서 돌이켜 밤길을 걸어서라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후에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복음이 온 세상에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우리는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이제 성령님은 이렇게 예수님이 하신 대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날마다 복음을 묵상하고 무시로 기도하며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나를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변화시키시는지 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 곧 성령님 안에서 복음으로 사는 삶은 모든 일에 적극적이다. 복음은 적극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사람이 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 자체가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마지못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적극적으로 우리를 위해서 사람이 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는 모든 것이 다 사랑으로 인해 적극적인 것이다. 사랑에 소극적인 것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도 적극적으로 하고 용서도 적극적으로 하며 절제와 화합과 온유와 자비와 선을 적극적으로 행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삶은 고달프다. 먼저 다가서야 하고 모든 것을 기꺼이 감수해야 하며 다른 사람의 짐을 나누어 져야 하기에 고달프다. 그리고 머리로는 지식으로 아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실망과 함께 사이에 껴서 고달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이 주시는 위로와 기쁨이 있다. 세상이 주는 고난과 삶이 주는 고달픔을 이겨내게 하는 성령님의 평안이 있다.
반면에 율법을 따르는 삶은 소극적인 삶이다. 율법은 죄에 대한 기준을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기본 정신 자체가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거짓말 하지 말라는 율법이나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는 등의 무엇을 하지 말라고 정의되는 율법은 그 무엇을 하지만 않으면 된다. 적극적으로 정직하지 않아도 거짓말만 하지 않으면 된다. 적극적으로 남을 돕지 않아도 남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지만 않으면 된다. 이처럼 율법은 복음 안에서 이해되지 않으면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소극적인 삶에서는 쉽게 만족과 표면적 평안이 온다. 세상이 주는 고난도 없고 삶이 주는 고달픔도 거의 없다. 쉽게 만족하고 쉽게 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삶은 사랑의 화합을 이룰 수 없다. 혼자서 만족하고 혼자서 안주하는 삶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율법조차도 복음 안에서 이해되면 적극적인 것으로 바뀐다. 적극적이고 진정한 사랑이 그 기초로 깔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각자 자기의 삶을 돌아보아 자기의 삶이 적극적인 삶인지 아니면 소극적인 삶인지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이 복음의 방향에 서 있는지 아니면 율법의 방향에 서 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은 결코 소극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갖는 표면적 만족 보다는 성령님이 주시는 위로와 소망이 더 크게 느껴지는 삶이다.
그러므로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언제나 성령님 안에서 복음을 기초로 한다. 또한 성령님 안에서 무시로 기도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적극적으로 이루는 삶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도 우리는 실수하고 실패하게 된다. 우리의 소망과 뜻은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더라도 우리의 현실은 우리에게 실패를 안겨준다. 우리의 육신은 너무도 한계가 뚜렷하고 우리의 의지는 아침 저녁으로 바뀌며 우리의 실력은 늘 낙제점 주위를 오르락 내리락 할 뿐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뒤로 물러서면 안 된다. 작심삼일이 될지라도 계속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소망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기 때문이며,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루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먼저 일주일만이라도 노력해 보자.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매일 복음을 묵상하며 무시로 기도해 보자. 일주일 동안 주님께서 나와 동행하시면서 나를 어떻게 바꾸어 놓으시는지 확인해 보자.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나의 삶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내가 어떻게 적극적인 삶을 살게 되는지 확인해 보자. (성경말씀을 묵상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조하세요 https://comfortye.tistory.com/29?category=799635) 하나님이 나를 변화시키실 것을 기대하면서 그리고 하나님의 기쁨이 내 안에 스며들 것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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