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풀숨 2024. 6. 9. 00:11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특히 개혁주의 기독교에 대해서 반감을 갖는 경우 중에 하나는, 마치 전혀 잘못을 하지 않았거나 또는 예수님을 알 수 없어서 구원받을 기회조차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사람인데도 지옥에 가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는 경우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가족 중에서 누군가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었으니 결국 그는 지옥에 갔다는 말을 듣는 경우인데 가족이라서 그가 착하게 살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단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지옥에 갔다는 말을 듣는 경우인데 가족에 대한 얘기라서 더욱 반감을 갖게 된다. 그래서 복음을 전할 때에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통해 말했던 것처럼 복음을 듣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아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지옥이라는 말이 초래하는 논리적 파생의 편린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불신자의 결단을 촉구하고자 ‘믿음’을 강조한다. 믿어야 구원 받고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하고, 또 반대로는 믿지 않으면 반드시 지옥에 가게 된다고 강조하여 불신자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하도록 한다.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마치 구원 받음이 전적으로 사람에게 달려있다는 인식을 주게 되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예상치 못한 부작용에 강하게 부닥친다. 전도자는 이제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도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하고 그냥 밀어부치다가 더 큰 반발심만 경험하고 뒤로 물러서는 경우가 많다. 이는 결국 전도자의 말이 반만 맞았기 때문이다. 믿어야 구원 받는다는 말은 맞지만 구원 받음이 전적으로 사람에게 달린 것처럼 표현한 것은 틀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대로 생각하는 크리스찬들이 있다. 그들이 근거로 드는 대표적인 말씀이 바로 로마서 2:12~15 말씀 중에서,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양심이 증거가 되어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이다. 그들은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율법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해 들어본 적 없는 이방인들은 자기 양심껏 살면 구원받을 수도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혹시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아주 과거의 사람들은 자기 양심껏 살았으면 그들도 구원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자기 행위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으니 – 유대인은 율법에 비추어 보면 그것을 알 수 있고 이방인은 양심에 비추어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며 – 오직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므로 예수님이 알려진 곳에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혹자는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는 말씀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사람은 결코 믿음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맞는 말일까? 그렇다. 알지 못하는 것을 믿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들어야 알게 되고 알아야 믿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들음이 반드시 복음전도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롬 10:18). 하나님은 복음전도자뿐만 아니라 천사들이나 무엇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릴 수 있으시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필요한 때에 필요한 곳에 적절한 방법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 대표적으로 아브라함과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지만 아브라함이나 유대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인물인 욥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이 다른 곳에서 일어나면 안 된다는 이유가 있겠는가.

 

        요점은 이것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따라서 구원의 통로이자 방편인 믿음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믿게 되는 믿음을 가질 수는 없다. 절대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미 첫 사람 아담의 타락 이후에 오직 하나님을 배척하고 배신하고 무시하기만 하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며 사람이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그러한 성향을 절대적으로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다. 평생의 삶의 기준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자기자신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려면 하나님이 은혜로이 먼저 그 사람에게 오셔서 믿음을 가질 있게 회복시켜 주시고 교제의 손길을 끊임없이 내밀어 주셔야만 가능하게 된다.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믿음이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믿음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구원을 위한 조건이 아니다. 믿음은 일차적으로는 오히려 구원을 위한 수단이며 하나님에 의해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알게 하는 도구이다. 그리고나서 이차적으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의미에서 쌍방간의 신뢰를 의미한다.

 

        이제 단순히 예수님을 모른다고 해서 또는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말은 뭔가 성경적이지 않은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받는 것이므로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해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구약 시대에 구원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의지했다. 구약 시대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보다 더 뚜렷이 알고 있었을 것이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것이며 어쩌면 성경에 기록된 이름과는 다른 이름으로 불렀을 것이다 – 다만 이방인들의 신들의 이름은 아니므로, 예를 들어, 부처가 하나님과 동일하다든지 하는 말은 철저한 거짓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다르게 불렀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은혜로 인정하게 되었으며, 그들은 자기 스스로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음을 양심을 통해 깨닫게 되고 오직 하나님만을, 그들이 하나님을 무슨 이름으로 부르든지 간에, 의지해서 구원받기를 소망했들 것이다. 이 사실은 하나님과 그들만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이 전파되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전적으로 합당한 일이다. 그 사람의 행적에 대해 아무런 기록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것을 놓고 막연한 추측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불합리하다. 설령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처럼 기록을 남겼더라고 그들의 속마음이나 신앙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이 없으니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며 사랑의 하나님이시므로 그 시대에도 그리고 비록 이스라엘 밖에서 살았을지라도 분명히 하나님은 은혜로이 사람들을 구원하셨을 것이다. 심지어 지금 현 시대에서 사람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더라도 예수님을 믿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니 그 시대에는 희미하게라도, 복음을 듣는 것보다는 훨씬 불분명하게 하나님을 알았을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가능했었다. 다만 이것은 시대적 상황이나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해당한다. 복음이 전해진 곳에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복음을 전해야 명확히 알고 확실하게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열매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릴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회가 되는대로 복음을 전하고 삶을 나누어 하나님을 함께 경배해야 한다.

 

         따라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마치 전적으로 사람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믿음을 가져야 하고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처럼 복음을 왜곡하면 복음을 전하는 자나 복음을 듣는 자나 모두 망하게 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복음을 듣는 자가 복음을 들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그는 예수님께 나아올 것이고 이번 기회가 아니면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조용히 물러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이번이 아니라고 해서 마치 그에게 다시는 기회가 없는 것처럼 지옥에 간다고 협박하며 믿으라고 강요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에 맡겨서 다른 전도자를 보내주시기를 바라며 안녕을 빌어보자. 하나님은 그의 인생도 보살피신다.

posted by 풀숨 2024. 5. 19. 20:21

        성경에는, 특히 구약 성경에는, 지금 우리가 이해하기엔 어렵기만 한 말씀들이 종종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출애굽기, 신명기와 여호수아서에 기록되어 있는 가나안 진멸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과 실행에 대한 내용이며, ‘진멸’이라 함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가축들까지 완전히 죽여 없애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지금’이라고 한 이유는 현대의 윤리적, 도덕적, 과학적, 철학적 등등의 배경을 가지고 이해하는 경우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성경 해석의 원칙은 문법적, 문맥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이다. 문법적 그리고 문맥적이라 함은 언어 그대로의 의미를 문법적이고 문맥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는 의미이고, 역사적이라 함은 기록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는 의미이며, 신학적이라 함은 성경 전체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성경 전체를 요약 정리한 것이 신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신학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는 것이다.

 

        신약 시대에 구약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자세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히브리서에 기록된 것처럼 (히 10:1), 구약 성경은 앞으로 올 것에 대한 그림자로서 이해해야 한다. 둘째는 로마서에 기록된 것처럼 (롬 15:4), 구약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구약 성경의 모든 기록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성경 해석의 원칙과 신약 성경이 가르쳐 주는 구약 성경에 대한 자세를 가지고 가나안 진멸 사건을 조명해 보자.

 

        가나안 정복에 대한 명령 그리고 실행은 출애굽기와 신명기 그리고 여호수아서에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출 3:8, 17; 6:4; 23:23; 33:2; 34:11; 신 7:1~2, 16, 23, 24; 20:17; 수 3:10; 6:21; 10:1, 28, 30) 이러한 가나안 정복 또는 진멸에 대한 기록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하는 문제는 많은 토론들로 이어졌고 지금도 계속되는 문제이므로 본 글에서는 이 기록에 대한 일반적인 접근 방식을 개괄하고 개혁주의 신학을 기반으로 이 기록을 어떻게 성경적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고민해 보도록 한다.

 

        먼저 개혁주의 신학의 진영이 아닌 다른 진영에서 이 기록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개괄해 보면 크게 세 가지 정도로 구별된다. 첫째는 이 가나안 진멸에 대한 명령이 상징적인 명령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상징적으로 가나안 민족들을 진멸했었으며 결국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으나 과장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하였고 그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둘째는 이 명령에 대해 과거 희망적 표현이라는 해석으로, 이스라엘이 포로기 이후에 구약 성경을 집필하면서 포로기에 대한 반성으로서 그때 가나안 민족들을 진멸했어야 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간 것은 가나안 민족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따라 하나님을 배신하게 되었고 결국 멸망하게 되었으므로 그때에 그들을 진멸했더라면 이러한 멸망이 없었을 것이라는 희망을 표현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셋째는 ‘진멸’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헤렘’은 실제로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일반적인 전쟁 정도로 번역 또는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하나님은 실제로는 가나안 민족들을 진멸시키라고 명령하시지 않았다는 해석이다. 결국 이러한 해석들은 이 기록을 역사적 실제 사건으로 해석하지 않으려 하며 그 근간에는 그렇게 함으로써 사랑의 하나님을 변호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이 기록을 어떻게 해석함으로써 이 기록이 실제 역사적 사건이며 또한 사랑의 하나님을 변호하는 것일까? 개혁주의 신학은 이 기록을 보다 더 큰 그림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즉, 노아의 홍수 심판 및 소돔과 고모라 사건 등과 같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연결하여 이해하려고 한다. 로마서 3:4~6 말씀을 참고하면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렇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종종 심판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전시(demonstration)되어 왔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신한 결과로서의 심판이다. 모든 사람은 첫 사람 아담이 사람의 대표로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묶여 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아담과 동일하게 하나님을 배척하고 무시하는 죄를 저지른다. 그래서 그 죄가 가득히 차면 심판이 내려진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이며 소돔과 고모라 심판이다. 가나안 진멸 사건도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이해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때문에 더욱 그렇다. 창세기 15:16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시기는 가나안 민족들의 죄가 가득 차는 때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의 죄가 가득 차는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졌다. 노아의 홍수 심판 때에도 이와 비슷했다. 창세기 6:5 말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던 것처럼 가나안 민족들의 죄가 가득 찼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사용하셔서 가나안 민족들을 심판하셨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더욱이 개혁주의 진영은 가나안 진멸 사건을 종말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다시 말해서, 가나안 진멸 사건은 종말에 이루어질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표이자 모형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노아 시대에 있었던 홍수 심판처럼 – 이 사건이 종말적 사건이라는 것은 베드로후서 3:6~7 말씀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를 보면 알 수 있다 – 가나안 민족들을 진멸한 사건 역시 종말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은 세상 나라를 심판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모형적일지라도 그 의도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은 세상 나라를 완전히 씻어버려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나안 민족들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며, 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엄중함을 나타낸다. 이것은 개념적으로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아마겟돈 전쟁이나 곡과 마곡 전쟁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20세기에 언약 신학의 부흥을 이끌어 낸 학자인 메리디스 클라인은 이러한 사건을 “종말의 침입”이라는 용어로 표현하였다. 종말에 일어날 사건이 현재로 침입하여 전시되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에 하나님의 심판을 이처럼 모형적으로 때때로 전시하신 이유는 사람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베드로후서 3:4 말씀처럼 사람은 이 세상이 영원히 동일하게 이어질 것으로 믿고 있기에 하나님은 이 세상은 심판으로 끝날 것임을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게 전시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다.

 

        이 심판은 로마서 3:4~6 말씀에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시라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더라도 여전히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불의에 대한 심판은 의로움 때문이며, 의로움은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하고 사랑은 의로움이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아주 당연한 일로 선포한다. 이것을 올바로 알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진영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데 있어서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진영은 개혁주의 신학의 기초인 언약 신학을 배경으로 하여 성경 전체를 큰 그림으로 삼아 가나안 정복 및 진멸 사건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표이자 모형으로 이해하기에 ‘진멸’이라는 단어에 대해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 또한 심판의 의로움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명제를 변호한다. 의로움과 사랑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나안 민족들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그 명령의 실행은 역사적으로 실제였으며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전 지구적으로 일어날 심판에 대해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게 전시하신 것이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함뿐만 아니라 장차 반드시 일어날 사건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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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4. 4. 16. 20:17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이 무엇이 있겠냐는 말씀이 나온다(창 18:14).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으며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전능하심(omnipotence, almightiness)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 하나님은 그냥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으로 빠질 수도 있다. 그 예가 바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논쟁 중에서 흔하게 나타나곤 하는 질문인데, 하나님은 자기가 들 수 없는 바위를 만드실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만일 만드실 수 없다고 하면, 하나님은 마치 전능하신 분이 아닌 것 같고, 만드실 수 있다고 하면 만들고나서 어차피 들 수 없으니 이 또한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 아닌 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아니라고도 할 수 없고 맞다고도 할 수 없는 이상한 상황에 빠지게 한다. (이 글을 더 읽기 전에 먼저 이 질문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면 좋겠다. 그리고 나서 이 글을 계속 읽는 것이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질문은 아마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시험하기 위해서, 또는 조롱하기 위해서 일부러 만들어낸 질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든지 아니든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 크리스찬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 크리스찬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크리스찬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무엇보다도 먼저 중요하게 구별해야 할 개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전능과 만능의 차이점이다. 그냥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것은 만능의 개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만능하시지 않다.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하나님은 못하시는 게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못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악을 행하시지 못한다. 그리고 사람이 악을 행하도록 (강제)하실 수도 없다. 이처럼 하나님이 그냥 무조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는 생각은 오히려 성경적이지 않은 생각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결코 만능하시지 않다고 기록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모든 속성(또는 덕목)들은 사람의 속성들처럼 불완전하거나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서 발현여부가 달라지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속성들인 전지, 전능, 영원무궁, 거룩하심, 사랑, 공의, 선하심, 신실하심 등은 따로따로 모아놓은 또는 부분을 합쳐놓은 것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속성들은 순일성(Simplicity)이라는 기본개념을 가지고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며 영원무궁하시며 사랑이시며 공의이시며 선하시며 신실하시다는 것이 언제나 항상 동시에 완전하게 충만히 그러하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영원히 언제나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영원히 언제나 의로우시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영원히 언제나 전지, 전능하시다와 같이 모든 속성들이 그렇다. 사랑과 공의와 전능 등이 모여서 하나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에 따라 하나님이 사랑이실 때에는 잠깐 공의롭지 않으실 수 있다는 생각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모든 속성들은 인격(Person)에 담겨져 있다. 하나님은 의지와 생각과 감정과 자기정체성 등을 가지고 존재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하나님의 인격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개념이며 또한 하나님의 순일성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고 그냥 전능하심을 이해하려고 하면 만능의 개념으로 빠지게 되고 하나님을 오해하게 되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앞에 제기된 질문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이제 그 질문은 하나님에 대해 질문하면서 전능과 만능을 혼동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그 질문은 마치 사람으로 치면 사람이 스스로 죽을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질문과 비슷한 것이 된다. 사람은 그럴 수 있다.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럴 수 없다. 완전하신 인격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순일성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질문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질문으로 포장되어 하나님의 자살이 가능한지 묻는 것이므로 이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이며 하나님께 대하여 성립될 수 없는 질문이고 하나님을 마치 사람처럼 대하는 것이기에 신성모독적인 질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서 하나님의 인격 안에서 생각하고 또 하나님의 속성들의 순일성 안에서 생각하자.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생각할수록 하나님을 진정 알게 되고 또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더욱 더 깨닫게 될 것이며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될 것이다.

posted by 풀숨 2024. 4. 11. 18:55

    부활절을 지나면서 새삼 기독교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 그리고 죄가 하나도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위해 기꺼이 죽으셨고 의롭기 때문에 부활하신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으로 증명되신 하나님, 바로 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왜 위대한지 알게 된다. 단순히 부활하셨다는 사건 때문에 위대하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와, 그분의 탄생과 삶과 죽음과 부활, 이 과정을 통해서 기독교의 위대함이 어떻게 증명되었는지 아는 것은 크리스찬으로서 너무도 중요하다. 먼저 결론을 말하면 우리 기독교의 위대함은 가지 진리로부터 나온다. 하나는 우리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는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기독교는 역사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진리이다.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조하면 좋겠다 (https://comfortye.tistory.com/53). 그럼에도 다시 생각해 보면, 구약 성경에서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는 많은 힌트가 주어졌다. 가장 먼저는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천지 창조의 구절들에서 드러난다. 하나님과 성령님과 말씀이 함께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결정적으로 1장 16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신가 하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말씀이 나타난다. 신학자들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에서의 “우리”라는 단어가 삼위일체와 관련이 있다는 것에는 다 동의한다. 다만 구약시대에는 삼위일체에 대해 아주 희미해서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까지는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이제 예수님의 탄생과 세례와 가르침과 부활을 통해서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 곧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드러나셨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이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한 하나님이신데 세 분이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것을 깨닫고자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부던히 노력했고,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 기독교가 달려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참으로 어려웠다.

    우리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삼위일체는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에 대한 개념이고 우리는 이성과 지성에 한계를 지닌 피조물이기 때문에 삼위일체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래도 수많은 토론과 기도와 묵상과 그리고 결정적으로 성령님의 깨닫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가 있는데 그것을 신앙고백의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 바로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이다.  

 

    우리는 한 분이시요 전능하신 하나님,

    하늘과 땅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믿나이다.

    또한 우리는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만세 전에 성부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외아들을 믿나이다.
    이는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이시요, 빛에서 나신 빛이시요,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으로,
    지음 받지 않고 나시었으며, 성부와 한 분 본체로서,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나이다.

    우리 인간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오사,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사람이 되셨나이다.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장사되셨으며,
    성경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사 성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다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하리이다.

    또한 우리는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시며, 성부와 성자로 더불어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우리는 하나요,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나이다.
    죄를 사함 받는 하나의 세례를 믿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에서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아멘.

 

    이 고백에서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에서 “나신”, 즉 영어로는 begotten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함이지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나셨으니까 나시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태어나신 분이 아니다. 세 위격의 하나님, 곧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본질과 능력과 모든 것이 완전히 동일하신데 다만 세 위격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나셨다” 또는 “나오셨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세 위격이 어떻게 셋이지만 하나인지 설명하는 것이다.

    그 당시 수백 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지혜를 모아 이 신조에 도달하기까지 300 여년이 걸렸다. 그리고 그후에도 이 고백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수많은 신학 서적들과 논문들이 나왔다. 모든 정통 신학자들은 삼위일체 교리가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교리가 기독교의 핵심이며 우리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줄까? 삼위일체 교리가 아니면 우리 기독교는 위대함을 잃어버리게 될까?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에는 다양한 신들이 있다. 그런데 어느 종교든 최고의 신은 한 분이라고 가르친다. 그 최고의 신 아래 다양한 신들이 계층적으로 존재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등급 신들 또는 하위급 신들은 최고의 신에 비하면 그 능력과 존재감이 많이 떨어지고, 결국 최고의 신은 항상 단수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성경말씀을 토대로 하여, 신은 오직 한 분밖에 없으며 그 한 신, 곧 한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이렇게 세 분(위격)으로 존재하신다고 가르친다. 한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으로 존재하셔서 모두 다 하나님이시지만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시다.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이라고 가르치기에 논리적 모순이라고 세상사람들은 비웃기도 한다. 하지만 역으로 그래서 오직 기독교만 이 진리를 가르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진리야말로 진짜이다. 그 이유가 기독교의 전부이며, 다른 모든 종교와 구별되게 하는 위대함이다.

    모든 종교들은 자기네 최고의 신은 전지전능하며 영원하고 또 사랑이 넘치고 의롭고 자비하며 선한 신이라고 주장한다. 이렇지 않은 신은 최고의 신이 될 자격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덕목들 또는 속성들 가운데 사랑과 의와 선함과 자비와 신실함 등은 인격적 관계를 기초로 하는 덕목들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뿐 아니라 대상이 반드시 있어야 가능한 덕목들이다. 자기 혼자 사랑하면 나르시스트일 뿐이며, 자기 혼자 의로우면 독불장군이 될 뿐이고, 자기 혼자 선하면 선의 의미 자체가 없게 된다. 다른 관계적 덕목들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덕목들은 반드시 자기와 동등한 그리고 본질적으로 동일한 상대가 있어야만 진정으로 가능한 덕목들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이방 종교들은 이 덕목들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자기네 최고의 신은 사랑이 넘치고 의롭고 자비하며 선하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최고의 신일지라도 본질적으로 동등한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사랑을 진실로 알 수 있을까? 어떻게 진실로 의로울 수 있을까? 그 신이 자기의 생각만으로 사랑을 만들어 내고 의를 만들어 낼 뿐인데, 그 생각에 이미 사랑과 의가 들어있지 않으면 그저 독불장군일 뿐이다. 진실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알 수는 없다. 바로 여기서 기독교는 다르다. 오직 기독교가 가르치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기에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진실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사랑과 의로움과 자비와 선함과 신실함을 아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물인 우리 사람에게도 사랑과 의로움과 자비와 선함과 신실함에 대해서 우리의 존재에 심어주실 수 있으신 분이다.

    특별히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정의하면서 하나님은 빛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등의 단순 명제를 사용하여 선포한다. 이 정의들은 하나님은 사랑을 하나의 속성으로 가지고 계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사랑이시라는 의미이며, 또한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빛이시며 동시에 사랑이시며 동시에 공의로우시며 동시에 신실하시며 동시에 전지전능하시며 동시에 영원하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영원히 동일하게 이러한 분이시다. 성경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선포할 때 하나님의 의로움은 잠시 내려놓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고 선포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잠시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진리는 우리의 이성과 지성을 아득히 뛰어 넘는 것이기에 우리는 때때로 이 진리를 오해하기도 하지만 이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진실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우리 기독교가 알려주는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다. 우리 하나님은 진실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사랑이시기 때문이며 진실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의로우시며 선하시며 자비하시며 신실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며 우리의 전부를 무조건 맡길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이 진리를 통해서 선명해지고 방향이 확실해진다. 그리고 달라진다. 막연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를 바라보면서 확신을 가지고 달라질 수 있다.

 

    이제 기독교의 위대함의 근거인 역사성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크리스찬이 되고 나서 우리의 신앙은 다양한 변화를 겪는다. 놀라운 경험을 하면서 급격하게 성장하기도 하고 또는 정반대로 급격한 좌절과 우울감에 빠지기도 한다. 주변의 모든 것이 다 사랑이고 기쁨이고 노래이고 웃음과 밝음이 하루 종일 계속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아무런 까닭없이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 두려움에 떨면서 밤을 꼬박 새며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지만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몇 날 며칠을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좌절과 패배감과 우울증과 퇴보를 심하게 겪으면 한동안 침체기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평생 이러한 심한 좌절을 전혀 겪어보지 않은 분도 있을 것이다. 다만 크건 작건 누구나 신앙의 부침은 있었고 또 앞으로 우리의 삶에서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의 어둔 밤을 지나고 있는 경우에 어떻게 이것을 극복해야 할까? 아마도 먼저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고 기적같은 경험들을 기억하며, 과거에 나를 이렇게 사랑해 주신 하나님께서 내가 비록 지금은 의심의 구름에 휩싸여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과거처럼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사랑해주실 것이라고 소망의 줄을 잡고자 할 것이다. 그런데 더욱 신앙이 침체되면 나의 과거마저도 의심스럽게 되고 과거의 은혜들이 나의 착각이었거나 우연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며 하나님을 거부하는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바로 이때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식이 있다.

    대표적으로 누가복음 1장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이다. 지금 누가는 이미 과거에 이루어진 사실, 실제적인 역사적 사건, 수많은 증인들이 목격한 사실에 대해서 기록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 관점에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역사적 진실에 대한 기록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거짓이 없다. 행여 누가의 기록을 해석하는 우리에게 오류가 있을지라도 기록 자체에는 오류가 없다. 이 기록을 토대로 해석이 필요 없는 역사적 진실만을 생각해 보자.

    지금으로부터 약 2000 년 전에 예수라는 인물이 존재했다. 그는 마리아라는 유대인 처녀, 곧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에게서 태어났다. 이 잉태와 탄생은 어느 산골에서 아무도 모르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목격자와 증언자가 있는 사건이었다. 이 예수라는 분은 자라며 구약 성경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진 비범한 분이었다고 증언되었다. 그리고 최소한 세 명을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려냈고 수많은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었으며 바다 위를 걸었고 아주 적은 음식으로 수 천 명의 사람들을 먹이는 기적들을 행했다. 그리고는 우리의 죄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시 부활하셔서 수 백 명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으며 마침내 그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셨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서 증인이 최소한 수 십, 수 백 또는 수 천 명이었다. 이러한 사건들에 대해서 하나라도 거짓이 있으면 지금 기독교는 존재할 수가 없다. 이러한 사건들이 역사적 진실이라는 것을 목숨을 걸고 증언한 사람들이 전해준 것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주장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그것이 진실이라며 자기 목숨을 거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사상이나 신념 때문에 목숨을 바쳤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들은 그 당시에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목숨을 바쳤던 것이지 그것이 거짓이며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목숨을 바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은 없다. 역사적 사건은 시간이 한참 지난 나중에야 진실이냐 거짓이냐 밝혀질 수 있는 사상이나 신념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 자리에서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명되는 것이다. 수많은 직접 목격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들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언약들을 맺으신 사건들에 대한 기록이다. 성경책의 이름이 바로 옛 언약과 새 언약인 것만 봐도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이 언약들이 역사적 사건들이 아니면 아무런 효력도 구속력도 갖지 못하게 되고, 그저 사람들의 희망사항을 기록한 것에 불과할 뿐인 그렇고 그런 책이 될 뿐이다. 이 언약들이 역사적 진실이기에 효력을 갖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언약들을 성취해 오셨고 마침내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서 모든 언약들이 완수될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역사에 뿌리를 단단하게 박고 있다. 때로는 역사적 사건 자체가 하나님의 메시지였다. 우리가 그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메신저들을 통해서 친히 해석해 주시고 설명해 주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셨다. 이것이 중요할까? 이것은 바로, 성경이 어느 한 사람의 주관적인 주장이 아니라 이렇게 객관적으로 증언된 역사적 사건들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역사적 사건들이 우리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나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진실들이 없으면 나의 경험들도 공중에 떠있는 구름과 같은 것일 뿐이다. 우리 각 개인의 경험들 –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풀어주신 기적 같은 경험들은 이와 같은 역사적 진실을 바탕으로 해야만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 그때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도 동일한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나 혼자만의 착각이나 우연에 의한 경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이처럼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객관적으로 증거된 기록들을 보면서 나의 삶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해 여기까지 왔구나 하고 생각이 바뀌게 된다. 의심과 두려움과 어려움에 의해 흔들리던 믿음이 역사적 진실을 통해 확신으로 바뀌게 되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더욱 잘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 가운데 행하신 사건들에 대한 기록과 그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을 기록한 책이다.

    기독교는 역사적 사건들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역사성이 무너지면 기독교도 무너지게 된다. 그래서 수많은 불신자들이 기독교가 기록한 역사를 부정함으로써 기독교를 무너뜨리려고 시도해 왔지만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진실은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어느 누구의 머리 속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며 어느 누구의 희망사항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역사적 진실을 근거로 하기에 흔들릴 수 없으며, 그 역사가 나의 삶에도 적용될 수 있으며 실제로 적용되었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객관적 진리에 대한 주관적 적용이 일어난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역사적 진실에 근거하고 있기에 우리에게 확신을 주며 흔들리지 않는 것이며 바로 이 핵심을 알아야 우리의 신앙이 든든히 성장할 수 있다.

 

    기독교에만 있는 아주 독특하고 유일한 진리인 삼위일체 하나님과 기독교의 역사성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을 강력하게 가르쳐 주는 핵심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하나님은 자비하시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선언은 인간의 희망이거나 어떤 창작물이 아니다. 삼위일체에 의해 증명되고 역사가 증언하고 있는 진리이다. 따라서 오직 기독교가 선포하는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며 유일한 하나님이며 신앙의 대상이 되는 분이시다.

    이 진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영향력을 가져야 하고 그래서 우리의 삶 가운데 활동해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가 어려우니 멀리 놓고 그런가 보다 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삼위일체를 가르쳐 주신 이유를 무시하는 것이 된다.  이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절대적이고 완전하며 영원한 사랑이신지, 얼마나 절대적이고 완전하며 영원한 의이신지, 얼마나 절대적이고 완전하며 영원한 신실하심인지 깊이 묵상하며 이 진리가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도록 해야 한다. 그 어떠한 두려움도 또는 그 어떠한 업적도 이 진리 앞에서는 마치 태양 앞에 있는 반딧불처럼 조그맣게 보이는 것이니 우리는 흔들림 없이 힘을 내서 더욱 더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posted by 풀숨 2023. 4. 20. 20:52

    우리는 지난 주일을 일년에 한번 특별히 부활절 주일로 지냈습니다. 그런데 사실 모든 주일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다만 일년에 한번 더욱 특별히 기념하는 의미로 부활절 주일을 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잠깐 되새겨 보고 예수님과의 만남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만이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첫 사람인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죄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 죄성으로인해서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자연적으로 죄를 짓는 것으로 결과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해치거나 해서 죄를 지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배제하고 마치 우리 스스로가 온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이루어지기 때문에 죄를 지었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죄란 창조물이 창조주를 거부하고 창조물 스스로 창조주보다 더 중심적이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죄란 인간의 자기 중심성의 결과들입니다.

 

    이렇게 죄성으로 인해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책임은 영원한 고통의 형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지옥에서 영원히 끔찍한 고통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는 절대로 이러한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영혼은 자기중심성으로 인해서 이미 죽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도저히 알 수조차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또는 무엇이든 우리의 죄값을 우리를 대신해서 다 치르고 우리의 영혼에 새 생명을 주어서 다시 살리기 전에는 우리 스스로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의 이런 비참한 상태를 보시고 성부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자신의 친아들인 성자 하나님을 사람이 되게 하셔서 우리를 위해 모든 죄값을 대신 치르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게 하셨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성자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의로우신 분으로서 아무런 죄를 범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대신해서 죄값을 치르시려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에 죽음이 끝이 아니고 부활하셔서 죽음은 결코 의인을 이길 수 없다는 진리를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을 믿는 사람, 즉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값이 해결되고 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의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처럼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새 생명의 영원한 삶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절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이 부활절의 의미를 함께 살펴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눈을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사건들로 옮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사건들을 정리하면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뉘어집니다. 첫째는 눅 24장에서 본 엠마오로 가는 제자나 도마 또는 다른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경우입니다. 둘째는 사도 바울처럼 어떤 기적이 일어나서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복음 전파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의해서 예수님을 만나서 믿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혹은 기적적으로 음성 들음으로써, 혹은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만났든지 모두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역시 크리스천으로서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예수님을 믿고는 있는데 한번도 만난 적은 없나요?

 

    도마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같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기 이전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사울이라고도 했던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을 감시하고 어떻게든 예수님을 무너뜨리려고 했던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이었으므로 그 역시 예수님을 알았고 만났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때의 만남과 이때의 만남은 무엇이 달라졌기에 도마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그때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믿었으나 결국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침으로써 믿지 않은 것이 될 수밖에 없는 믿음을 가졌었는데, 이제 이때는 예수님을 만나서 진정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요? 바울도 그때는 예수님을 만났으나 예수님을 적대하며 어떻게든 예수님을 무너뜨리려 했으나 이제 이때는 예수님을 만나서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세번째의 경우에 예수님을 전혀 몰랐지만 어떠한 만남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요?

 

    오늘은 바로 이 만남이라는 것에 대해서 함께 살펴 보려고 합니다. 만남은 우리의 삶에서 필수적인 것이어서 대중가요나 소설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과 문학에서 만남을 소재로 또는 주제로 다루었습니다. 아주 유명한 대중가요가 있습니다. 노사연 가수가 부른 “만남”이라는 가요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7, 8년 후에 나온 김건모 가수의 “잘못된 만남”이라는 가요도 있습니다. 노사연 가수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서로 간절히 바랬기 때문에 운명처럼 필연적으로 우리는 만나게 되었던 것이라고 노래했는데 그 당시에 아주 크게 히트했던 노래입니다. “잘못된 만남”은 밀리언셀러입니다. 잘된 만남이든 잘못된 만남이든 만남은 우리의 삶에서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만남을 만남이라고 정의하게 하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무엇일까요? 학교에서 직장에서 지하철 역에서나 도로에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스쳐 지나갑니다. 오늘도 그랬고요. 그 모든 경우를 다 만남이라고 하지 않지요. 또는 심지어 회사나 학교나 어떤 공동체에서 미팅을 갖고 서로 앉아서 몇 시간이나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데 미팅 후에는 상대에 대해서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만난지 몇 분도 안 되어 친구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몇 년을 만나고 있지만 그저 알고 지내는 사이인 경우도 있습니다. 만남에 대한 본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음의 교류입니다. 우리의 경험이 이것을 증명한다고 봅니다. 아무리 짧은 만남일지라도 그 만남에서 두 인격체가 마음의 교류를 나누었다면 그 만남은 진정한 만남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아무리 긴 시간 동안 함께 했을지라도 마음의 교류가 없었다면 그것은 만남이 아닙니다. 그냥 알고 지낸 것뿐이죠. 즉, I know you과 I know about you은 다릅니다. 그저 상대방을 피상적으로 만나는 만남도 만남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만남은 진정한 만남이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만남은 반드시 두 인격체 간에 마음의 교류가 있어야 합니다.

 

    도마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 그리고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그들이 아무리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였을지라도 그저 예수님에 대해서 알았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과의 마음의 교류를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며 자신들의 생각으로 예수님을 정의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예수님이 죽으시기 직전까지도 예수님이 세상을 정복하셔서 새로운 왕국을 이스라엘에 세우실 것으로 알았고 그 왕국에서 높은 위치에 올라 권력을 잡을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진정 누구이신지 무엇을 하시려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고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들은 세상적 관점과 자기의 욕망에 빠져서 예수님과 진정한 마음의 교류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예수님을 믿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생각과 욕심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에야 그들은 진정으로 예수님과 마음의 교류를 나누었습니다. 부활 사건으로 인해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무엇을 행하셨는지 그분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서야 진정으로 깨닫기 시작했고 예수님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 뜨거워진 마음은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로 하여금 밤에 여행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도마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처음 만나서 어떤 계기를 통해 사귀게 된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교 친구이든 또는 남자친구나 여자친구이든 또는 선배 혹은 후배들이든 처음엔 알지 못했지만 어떤 만남을 통해서 서로 사랑하는 베프가 되고 함께 인생을 나누는 친구가 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짧은 만남이었을지라도 그 만남에서 서로 마음의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압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만남도 이와 똑같습니다. 만약 성경이 증언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진정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 옆에 계신다면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과 이러한 만남을 갖고 친밀한 사귐을 나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서 마음의 교류를 나눌 수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시지 않을지라도 말이지요.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자 약속입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전 1:9).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Out of sight, out of mind 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분과 마음의 교류를 나눈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번 좋은 만남과 사귐이 있었다고 해서 그 관계가 그냥 그대로 유지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우리 옆에 계시더라도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서 예수님과 마주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신 4:29; 렘 29:13; 마 7:7). 만나러 나아가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그냥 아무런 노력도 없이 가만히 있는데 저절로 만남이 이루어지고 사귐이 만들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둘째는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집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집중하는 법을 두 가지 가르쳐 줍니다. 하나는 기도이고 나머지 하나는 성경 묵상입니다. 기도는 일방적으로 나의 소원을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자 정확한 형상이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곧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으며 여기에 더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힘을 실어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신 4:7).

성경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령님이 바로 예수님의 영이시라고 성경은 또한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말씀하신 모든 말씀이 기록된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묵상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대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대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벧후 1:20~21).

 

    대화 없이 마음의 교류는 불가능 합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예수님과 대화해야 하며 특히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뜻과 마음을 파악하려 하지 않고 그저 내 생각대로 하면서 마음의 교류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눈에 보이시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이것을 쉽게 잊고 내 생각대로 하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예배입니다. 개인적 예배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예배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처음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나 아직 성장하지 못한 크리스천 그리고 심지어 불신자까지도 공동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잠시 멀어진 크리스천도 예배를 통해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나 전도사의 첫째 사명은 섬김을 통해서 좋은 예배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 모두가 좋은 예배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

여기에서 요점은 마음의 교류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서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하며 예수님과 대화하고 예수님을 만나는 동안에 마음의 교류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냥 내 마음을 쏟아놓고 나머지는 예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겠지 하는 자세는 결코 마음의 교류를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 마음을 예수님께 집중하면서 예수님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내 생각을 앞세우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해야 합니다. 도덕적 교훈을 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듣는 자세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렵게 느껴지면, 우리가 어떻게 베프를 처음 사귀었는지, 연인과의 첫 데이트는 어땠는지를 떠올려 보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적극적이고 집중해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면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반드시 진실된 만남이 되게 하시고 마음의 교류를 통해서 예수님을 알며 느끼도록 합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만남의 증거들을 주셔서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 어떤 상상이나 환상이 아니라 실제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 증거들을 살펴보면, 첫째는 감성적 변화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과 진정한 만남을 가지면 우리의 가슴이 설레며 뜨거워집니다. 물론 이 변화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변화를 겪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그냥 무덤덤하게 지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인은 자신의 감성적 변화를 압니다. 둘째는 지성적 변화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무엇을 하셨는지 진정으로 알며 받아들이게 되고, 이 지식은 그냥 아는 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토대가 되고 방향을 결정하는 지식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의지적 변화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내가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먼저 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예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먼저 하고자 하는 의지가 나타납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말하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진정한 마음의 교류가 일어나고 서로 사귐이 있게 되면 상대에 대해 조금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더라도 쉽게 그리고 빨리 교정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교류가 없다면 상대에 대해 진실을 알아도 의심하며 쉽게 거짓에 속게 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바로 이 변화들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진 것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제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게 되었고 그 지식이 자신들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밤에 여행하는 두려움도 이겨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앞에서 나열한 변화의 증거들을 가졌다고 생각하며 또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너무도 쉽게 속이기도 하고 또 합리화시키기도 하기에 나타납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경우 중에 하나는 우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는 경우입니다. 예수님 믿으면 복 받고 건강하게 된다든지 높은 위치에 오르게 되고 잘 살게 된다든지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 가게 된다든지 하는, 그 어떤 이유로든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그 관계는 결코 올바른 만남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베프나 연인을 처음 만나서 사귐의 관계에 들어갔을 때, 어떤 목적을 가지고 베프를 만나거나 연인을 사귀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마치 운명처럼 이상하게 끌려서 서로 마음의 교류를 나누다 보니 사귀게 되고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목적이 생기게 됩니다. 베프나 연인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싶고 그가 원하는 것을 다 해주고 싶다는 목적이 생기고 나의 삶의 방향이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만남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명심하기 바랍니다. 예수님과의 만남과 사귐은 아주 실제적이라는 사실을요!!!

 

    또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내 생각대로 내가 주도하는 만남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전형적인 예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무수히 만났고 대화했고 따라다녔지만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시든 무슨 말씀을 하시든 상관없이 자기들의 생각대로 해석했고 결정했고 실행했습니다. 그들의 결과는 너무도 처참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위선자였을 뿐이니까요. 바리새인들을 현대의 용어로 정의하면 어쩌면 스토커일 것입니다. 아주 일방적인 만남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 또한 어쩌면 예수님을 스토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돌아봐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새 생명의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아직 죄성의 흔적인 자기중심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진정한 만남은 쉽지 않으므로 항상 스스로 성찰해야 이런 함정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를 조심하면서 예수님의 만남이 진정한 만남이 되고 예수님과 진실한 사귐을 나눌 수 있도록 우리는 예수님과 마음의 교류를 이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과 아주 친밀한 만남과 사귐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바로 이 말씀을요.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시고 영원히 사신다면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과의 실제적인 만남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쳐 주는 교훈이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경험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와 동일하게 예수님을 만나고 있으며 예수님과 실제적인 사귐을 나누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역사적으로 실제로 생존했으며 어떤 일을 했는지 무슨 말들을 했는지 세종실록이나 난중일기 등을 통해서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들과의 만남을 추구하지도 않고 그분들과 사귐을 가지려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그분들과 현재적, 현실적, 실제적인 만남을 가질 수 없으니까요. 물론 우리가 비유적인 의미로 그분들을 만났다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적 표현이지 실제적인 만남을 의미하지 않지요. 우리는 이미 죽은 그분들과는 지금의 현실에서 마음의 교류를 나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2000년 전에 이 땅에 사셨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만남은 현재적, 현실적,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만남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지금 현재 인격체 사이에 마음의 교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경험은 이것을 증명해 줍니다. 우리를 스쳐가듯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 우리의 베프 또는 연인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게 됩니다. 단순한 것 같지만 바로 이 차이가 진정한 만남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과 마음의 교류를 나누어야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사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기에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의 만남에는 우리의 노력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베프와의 만남이나 연인과의 사귐에 있어서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과 동일합니다. 진정한 마음의 교류는 그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냥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지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첫째,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베프를 만나기 위해 만남의 장소에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기도와 성경 묵상을 통해서 예수님께 집중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우리는 좋은 예배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교회가 함께 예배드릴 때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집합적으로 만나 주시기 때문에 불신자나 초신자 또는 믿음이 정체되고 후퇴하는 사람들까지도 간접적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믿음이 회복될 수 있기에 예배는 아주 중요한 만남의 장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가지면 우리는 감성적, 지성적, 그리고 의지적 변화를 겪습니다. 감성적으로 충만하고 뜨거워지며, 우리의 삶을 결정할 올바른 지식을 알게 되고,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려고 하는 의지를 갖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더욱 깊은 만남을 가지면서 더욱 깊이 사귀고자 열망하게 됩니다. 이 만남 가운데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방향, 즉 진로 문제, 직장 문제, 가정 문제, 학교 문제 등등의 방향을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쪽으로 잡으며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 만남이 없으면 결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없습니다. 그저 피상적이거나 내 생각을 따르는 것을 믿음이라고 포장하는 것일 뿐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난 적이 없다면 예수님께 나아가서 만나 주시기를 청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만나 주시고 또한 진정한 만남을 나누어 주십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배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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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3. 3. 26. 20:41

잃었다가 찾아진 것에 대하여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개의 비유가 나오는데 모두 잃었다가 다시 찾은 것에 대한 비유들이다. 한 마리 양, 한 드라크마, 그리고 한 아들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이야기이며, 그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동일한 주제를 다룬다. 바로 잃었다가 다시 찾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주제이다.

    그런데 이 비유들은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흔히 겪는 일인 Lost & Found, 즉 분실물 찾기를 통해서 아주 심오한 진리를 감동적으로 전달해 준다. 우리 대부분은 비 오는 날에 밖에 나갔다가 지하철이나 버스 또는 학교나 카페 등에 우산을 잃어버리고 집에 오는 경험을 몇 차례 했을 것이고, 또는 자신이 아주 아끼는 펜을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잃어버리고는 너무도 아쉬워 한 경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잃어버린 것이 내게 너무도 소중한 것이면 우리는 어떻게든 그것을 다시 찾으려고 노력했던 경험도 있을 것이다. 지하철 역이나 버스 종착지에 가서 물어보기도 하고 또는 방 안이나 도서관을 샅샅이 뒤지며 잃어버린 펜을 찾기도 한다. 잃어버리기 전에는 몰랐지만 잃고 난 후에 이러한 찾는 행위를 통해서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알게 되기도 한다.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세 비유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의 이처럼 흔한 일을 통해서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데,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것은 하나님께도 중요한 일이며 하나님은 반드시 다시 찾으신다는 것이다. 다만 세 비유들은 조금씩 차이가 있으며, 따라서 세 비유를 하나의 세트로 해서 이해해야 하기에 누가복음의 기록자인 누가는 이 비유들이 하나의 세트임을 알고 15장에 전부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각 비유들의 차이점

    먼저 한 드라크마에 대한 비유에서 한 드라크마를 경제적 가치로만 따지면 노동자의 하루 일당 정도이니 별로 큰돈이 아니다. 로마 지역에서의 데나리온이나 그리스 지역에서의 드라크마는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 현재의 가치로 따지면 대략 15 만원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10 개의 드라크마에서 1 개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하나의 세트에서 하나의 요소이기 때문에 비록 1 개라 할지라도 큰 가치를 갖게 된 것이다. 이는 그 당시에 10개의 드라크마를 한 세트로 해서 만들어진 악세사리로써 결혼에 대한 증표로 신랑이 신부에게 주었던 것이기에 더욱 특별한 가치를 갖게 된다. 그래서 비유 속의 여인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열심히 찾았던 것이고 또 찾고 나서는 한 드라크마의 경제적 가치보다 아마도 훨씬 더 돈이 드는 잔치를 열었던 것이다. 결국 이 비유에서 다른 두 개의 비유와 다른 점은, 어떤 것이 그 자체로는 별로 큰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인이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큰 가치를 갖게 된 것을 잃어버린 경우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100 마리의 양 중에서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린 비유 역시 잃었다가 다시 찾는 것에 대해서는 한 드라크마와 동일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 비유가 다른 두 비유와 다른 점은 이 비유는 많은 것들 중에서 하나라 할지라도 결코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준다는 점이다. 사실 100 마리 중에서 한 마리가 없어졌다는 것 그 자체를 놓고 보면, 겨우 1%에 해당한다. 전체에 큰 영향을 주는 분량이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는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을 들판에 그냥 두고 찾으러 나섰다. 그리고 찾고 나서는 다시 찾았다는 기쁨을 나누기 위해 이웃들과 잔치를 열었다. 결국 이 비유는 그 많은 전체 중에서 단 하나라 할지라도 소중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탕자의 비유에서는 드라크마나 양과는 달리 잃은 것 자체, 곧 탕자에 많은 비중이 실려 있다. 그래서 탕자의 이야기가 주요 내용이다. 이전의 두 비유들에서는 주인이나 목자의 행동에 대한 내용만 나오지만, 탕자의 비유에서는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마지막 부분에 조금 나올 뿐이며 거의 대부분 탕자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 비유는 다른 두 비유와는 달리 잃게 된 과정과 잃은 바 된 사람의 심경 변화를 보여주면서 잃었다가 다시 찾아진 사람의 마음을 그의 아버지의 마음과 함께 드러낸다. 초점이 잃은 것에게 있다.

 

세 비유들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이처럼 조금씩 다른 세 개의 비유를 하나의 세트로 해서 살펴보면, 잃었다가 다시 찾은 것에 대한 비유를 전체적이며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핵심의 첫째는 분실물 자체의 가치보다 잃어버린 자의 마음, 둘째는 다시 찾아진 것 또는 다시 찾아진 사람의 마음,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잃어버린 자와 찾아진 자가 다시 결합했을 때 둘의 마음이 어떠할지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첫째 내용에 주로 관심을 기울여 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에 주인의 열심과 은혜를 조명하며 다시 찾아진 자로서 우리는 주인-목자-아버지에게 감사드려야 한다는 식으로 마친다. 이러한 방향에서 이 비유들을 보면 ‘주인-목자-아버지가 열심히 찾아주셔서 너무도 감사하고 좋은 일이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하며 더 이상 깊게 들어가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모두 살펴야 잃었다가 다시 찾은 것에 대한 비유들 모두를 전 영역에서 이해하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살펴보기에 전에 먼저 반드시 보아야 할 성경구절이 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말씀인데 눅 15:24, 32두 번 나온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 말씀을 보면, 잃은 것은 죽은 것과 같고, 다시 찾은 것 또는 얻은 것은 다시 살아난 것과 같다. 즉, 잃었다는 표현을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두고 이 비유들을 보아야 한다.

    결국 이 말씀을 통해서 보면, 이 비유들에서 뭔가를 잃었다는 것은 그냥 잃었으니 어디엔가 잘 있겠지, 또는 누가 발견하면 잘 쓰면 되지 하는 마음이 아니라 이제 그 특별히 소중했던 것은 완전히 나랑은 상관이 없고 내게서 영원히 떠난 것이어서 다시는 볼 수도 없겠구나 하는 마음이었다는 것이다. 풍족한 상황에서 뭔가 하나 없어졌다고 해서 크게 타격을 입는 것도 아닌 그런 상황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풍족하더라도 그것 하나가 없으면 너무도 신경 쓰이고 마음이 아픈 상황을 묘사한 것이며, 그래서 주인은 소중하지만 잃어버린 것을 아주 열심히 찾았다. 그냥 열심히 찾았던 것이 아니라 아주 아주 열심히 찾았다. 이 열심에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포함된다. 주인은 자기 목숨을 다해서 열심히 찾았고 그래서 다시 그것을 찾았을 때에는 동네 사람들을 불러서 잔치를 벌이며 함께 기뻐하자고 동네방네 초청했다.

    이 기쁜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은 이렇게 기쁜 마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제부터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보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찾아진 것의 마음이며 찾아진 후에 주인-목자-아버지의 마음과 찾아진 것의 마음이 더욱 친밀해졌고 돈독해졌다는 진리이다. 그냥 단순히 ‘다시 찾아주셔서 감사하고 좋구나’ 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인-목자-아버지와 드라크마-양-아들이 어떻게 새로운 삶으로 나아갔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너무도 당연히 알 수 있지만 별로 고민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 있는데, 다시 찾아진 것들이 어디로 찾아지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게 원래의 주인에게 찾아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열심히 찾다가 마침내 찾아낸 주인-목자-아버지에게 찾아진 것들은 어떤 의미가 되는 것인가. 먼저 주인-목자-아버지는 그것을 잃기 전보다 훨씬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소중하게 대하고 소중하게 관리할 것이란 사실이다. 다시 찾아진 것은 주인-목자-아버지의 품 속에서 훨씬 더 엄청난 관심과 배려와 사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우리의 일상에서 그렇게 경험함으로써 이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면 찾아진 것의 마음도 주인-목자-아버지에게 훨씬 더 기울어지게 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저 많은 것들 중에 하나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특별한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체험하며 주인-목자-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고 그 사랑에 합당하게 변화를 만들게 된다. 자기가 뭔가 잘 나서 주인이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소중하게 생각해 주기 때문에 소중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탕자의 비유에서 이것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주인에게 다시 찾아졌다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과 같은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으니, 곧 새 생명이 시작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새 생명이 활동하는 터전은 어디인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맨 처음 외쳤던 말씀이 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씀이었다. 천국, 곧 The Kingdom of Heaven(하늘의 나라), 또는 The Kingdom of God(하나님의 나라)이 예수님이 선포하시려는 주제였고 핵심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서 사도들은 천국 복음 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고 했다. 그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아주 많은 다양한 비유를 말씀하셨고 또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사셨다가 하나님께서 원하신 죽음으로 죽으셨다. 그랬기 때문에 부활하셨고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셨으며 자기를 통해서 죄인들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셨다. 잃었다가 다시 찾은 것들에 대한 비유들도 이러한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주인-목자-아버지에게 다시 찾아졌다는 것은 주인의 품에 다시 속해졌다는 것이며 이것은 곧 하나님 나라로 들어갔다는 말씀과 동일하다. 우리 주님이 Lost & Found 비유를 주신 이유는 다시 찾았을 때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 들어간 우리의 기쁨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성경 본문에서는 주인이 잃었던 것을 찾고 나서 잔치를 열어서 이웃들과 기뻐하는 것으로 설명되었다. 그 잔치에서 주인공은 당연히 주인이다. 그런데 주인은 첫번째 주인공이지만 잃었다가 다시 찾아진 것 또한 주인공이다. 이 둘이 이웃들과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하길, 잃었다가 다시 찾은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과 같은 것이라고 했는데, 이제 그 새 생명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새 생명이다. 주인이 훨씬 더 소중하게 생각하게 된 새 생명이고 찾아진 것 스스로 생각했을 때에도 훨씬 더 소중해진 새 생명인 것이다. 그리고 주인과 함께 새 생명을 살게 된 사람은 이제 둘이서 함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찾아졌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뜻이며 앞으로 영원히 주인과 함께 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주인-목자-아버지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 속에서!

    그래서 교회는 이렇게 정의될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님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공동체이다. 다만 구원받았으나 아직 육체를 입고 있다는 현실적 상황 때문에 많은 제약과 연약함이 있고, 또 현실적으로 지역교회에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도 함께 있다는 한계가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렇게 정의될 수 있다. 그 한계와 제약과 연약함이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서 완전히 제거되고 교회의 본질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때가 올 것이라고 하나님은 가르쳐 주셨으니,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 각자의 위치에서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다시 찾아진 것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고민을 하도록 찾아진 것이다.

 

결론

    세 비유들을 이렇게 종합적으로 한 세트로 살펴보면, 우리는 이 세 개의 비유들을 통해서 단순히 다시 찾아진 기쁨 또는 감사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된다. 주인-목자-아버지의 열심과 사랑을 통해서 다시 찾아졌다는 것은 처음엔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가져오겠지만 그것이 끝이 될 수 없다. 이제 다시 찾아졌다는 것은 새 생명을 얻었다는 것과 같으며 새로 얻은 이 생명은 반드시 주인-목자-아버지의 열심과 사랑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한다. 이 새로운 생명의 삶은 더 이상 혼자의 삶이 아니라 주인-목자-아버지의 품 속에서, 즉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자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이며 더욱 소중한 삶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찾아진 자들로서 이 새로운 생명의 삶, 하나님 나라의 삶을 누려야 한다. 어떠한 삶이 하나님 나라의 삶인지 고민하며 하나님께서 그 삶을 이끌어 주시고 동행하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것에 대한 비유들에서 우리는 주인-목자-아버지의 마음뿐만 아니라 다시 찾아진 양-드라크마-아들의 마음도 살펴야 하며, 다시 찾아진 후에 주인-목자-아버지와 양-드라크마-아들이 함께 하는 삶이 얼마나 소중하며 즐거우며 새로운 삶이 될 것이지 고민해야 한다. 이 세 가지 모두를 전체로 이해하는 것이 잃었다가 다시 찾은 것에 대한 비유들이 가르쳐 주고 싶은 진리이다.

    우리가 잃은 바 되었다가 다시 찾아진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새 생명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는 삶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주님이 우리의 머리이시자 맏 형님으로서 그리고 구원자로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시며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실제적인 영향을 주고 계신다. 이것을 깨닫고 느끼고 경험하지 못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잃어버린 상태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찾아졌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새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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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3. 2. 8. 22:30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재연

 

1. 서론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흔하고 쉬운 주제는 사랑일 것이다. 수많은 문학 작품들과 노래들과 우리의 경험이 그렇다고 말하며, 또한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혹은 무엇을 사랑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더욱 그렇다. 가족이든지 또는 여자친구나 남자친구를 사랑하고 심지어 어느 아이돌 그룹의 멤버나 꽃미남 배우를 최애라고 하며 다양한 조공을 바치고 콘서트나 팬미팅에 가서 ‘사랑해요’ 하고 고백하기도 한다. 사랑은 이런 것인가? 한국의 아이돌 그룹인 BTS는 Fake Love라는 노래를 통해서 사랑에 대해 물음표를 던졌었다. 그들이 가짜 사랑이라고 정의한 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에게 나를 맞추는 삶이었다. “널 위해 슬퍼도 기쁜 척하고, 아파도 강한 척하며, 예쁜 거짓을 빚어내, 날 지워 너의 인형이 되려 하는” 사랑을 가짜 사랑이라고 했다. 그들은 가짜 사랑에 대해 노래함으로써 사람들이 진짜 사랑에 대해 고민하도록 했다.

    기독교에서도 사랑은 가장 큰 주제 중에 하나이다. 특히 요한일서 4장에는 전체 21구절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31번이나 나온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무엇인가? 요한일서 4장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그래서 첫째는 사랑이란 무엇인가와, 둘째는 진짜 사랑을 배우는 방법과, 마지막으로는 진짜 사랑이 우리의 현실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알아보자. 이러한 고찰을 통해서 기독교의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 무엇이 다르며 또 우리는 어떻게 기독교의 사랑을 배울 수 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2. 본론

    내가 생각해서 원하는 대로 상대에게 하는 것이 사랑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는 것이 사랑일까? 뭔가 그것도 아닐 것 같다. 또는 무조건 용서해 주는 것이 사랑일까? 이러한 것들은 사랑이 드러나는 모습의 예일 뿐이다. 보다 더 근본적인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사랑이란 인간이 혼자 있는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이루는 연합”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런가 하면, 인도의 명상가이자 런던의 “선데이 타임스”가 뽑은 20세기를 빛낸 1000 명의 위인 중 한 명인 오쇼 라즈니쉬는 사랑이란 아무런 조건 없이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런데 그가 정의하는 ‘자기’는 “자신이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깊은 침착함과 고요가 내면에 자리 잡는다”가 되는 자기이다. 뭔가 귀에 솔깃하긴 하다. 이 사랑이 맞는 것일까? 결코 아니다. 왜 아닌가 하면, 우리 크리스천은 ‘자기 자신’을 이 사람이 말하는 존재로 정의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내어주는 것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외에도 사랑에 대한 다양한 정의들이 있다. 하지만 비관적이든 긍정적이든 세상이 가르치는 사랑에는 하나님이 없다. 세상은 하나님을 거부하기 때문에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 없는 사랑, 즉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 사랑이 참 사랑이 될 수 있을까? 창조주를 거부하고 부정하며 창조주는 없다고 믿는 세상은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하겠지만, 창조주가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믿는 크리스천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2.1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가르쳐 주는 사랑은 대표적으로 사랑의 사도인 요한 사도를 통해서 기록되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3년을 넘게 생활하면서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고 눈으로 확인한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가 요한일서 4장에 기록한 사랑은 자기를 내어주어 상대의 자리에 서는 것이란 진리이다. 이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 가운데 전시되었기에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에 대한 이 정의는 인도의 명상가가 했던 말과 비슷하다. 그러나 다른점은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상대의 자리에 서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이며,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자기’라는 존재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는 것인데 우리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부터 파생된 존재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사랑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데 삼위일체가 바로 그런 의미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세상의 다른 모든 신들과 다르며, 그 결정적인 차이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유일하지만 삼위일체의 하나님이고 세상의 최고 신은 다 일원론적(monistic)인 신이라는 점에서 드러난다. 이 차이는 따라서 결정적인 결과를 낳게 되는데, 사랑은 반드시 동등한 대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아니면 사랑을 참되게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삼위일체를 조금 풀어서 설명하면 “Three persons in one essence”라고 한다. 그리고 또 달리 설명하는 표현이 Perichoresis (페리코레시스)이다. 이 단어는 강강수월래와 같이 서로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도는 춤, 즉 윤무(輪舞)를 의미한다. 자아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 모를 만큼 계속 돌고 도는 춤인데 이 춤을 통해서 삼위일체, 즉 ‘세 분이시지만 한 하나님’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마치 그 모습은 끊임없이 서로가 자기를 내어주고 서로의 자리에 서는 것과 같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명제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사랑을 존재 자체에 가지고 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기 때문에 유일한 참 사랑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성자 하나님께서 자기를 내어주어 예수님으로 사람이 되어서 오셨고, 피조물인 우리의 자리에 서셨으며,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의 모든 것을 감내하심으로써, 이 사랑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고 증명되었다.

    이제 우리 사람 차원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보자. 우리 차원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가장 기초적인 것은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존재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은 원래적인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닮도록 파생된 존재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담겨 있고 우리는 존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의존하며 닮아가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 있는 경우에만 우리 존재의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게 되며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자 하는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되었고, 이 자기중심성 때문에 우리에게 담긴 하나님의 사랑은 오염되고 훼손되어 많이 비뚤어진 사랑이 되었다. 단적인 예가 인간의 사랑 중에 가장 숭고하다는 어머니의 사랑마저도 오직 자기 자녀에게만 향하는 사랑이 되었으며 자기 자녀들 안에서도 더 사랑하는 자녀가 있고 소외되는 자녀가 있으며 사랑으로 인해 오히려 상처를 준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안에 들어가야 페리코레시스를 알게 되고 느끼며 참된 사랑을 받고 사랑하게 되는 상황에 놓였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기를 내어주어 상대의 자리에 서는 것이다. 그래야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하고 또 비뚤어진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참 사랑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랑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드러난 사랑으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는 말씀과 같다. 하나님의 사랑이 말에서, 행동에서, 삶에서, 생명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이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이 가르쳐 준다.

 

2.2 사랑을 배우는 방법

    어떻게 해야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며 배우고 또 사랑할 수 있을까? 먼저 세상은 어떻게 말하는지 BTS를 통해 살펴본다. BTS가 몇 년 전에 앨범을 내면서 그 주제를 Love Yourself로 했고, 그 앨범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수많은 BTS 팬들이 자기자신을 사랑하게 되었고 새로운 삶을 산다고 고백하는 장면을 유튜브 영상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리더 RM은 유엔 연설에서 “저는 김남준입니다. 단점도 많고 두려움도 많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였는지, 내가 누구이고 싶은지를 모두 포함해 나를 사랑하세요”라고 했다. 그의 연설은 전 세계의 수많은 청년들의 호응을 얻었고 심지어 미국의 많은 학교들에서는 학생들이 그의 연설문을 수업 시간에 다시 읽어보고 토론하기도 했다고 한다. RM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는 것을 통해서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니 먼저 자신을 사랑하라는 조언은 결코 잘못된 말이 아니다. 그의 말은 Fake Love는 나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에게 맞추는 것이므로 True Love는 내가 내 자신의 음성을 듣고 내가 좋아하는 것 또는 원하는 것을 충실하게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이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방법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듯싶다. 물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고 ‘나’라는 존재에 초점을 맞추며 또 나를 드러내서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당당하게 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참 사랑인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해서 받는 방법이라고 가르쳐 준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거듭난 우리는 계속 사랑을 받아서 성장하여 그 사랑이 나 자신을 사랑하게 하고 또 더욱 넘쳐서 다른 사람에게로 향하게 한다고 가르쳐 준다. 그래서 만일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참 사랑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고 가능한 사랑이기에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심지어 그 사랑이 지금도 계속 우리에게 부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랑이 잘 안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의 거듭남 때부터 이미 나에게 부어졌고 그 후에도 계속 부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사랑을 잘 배우지 못하고 어렵게 느껴진다. 왜일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고 명확하다.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를 제대로 올바르게 나누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교제에 서투른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주도권을 내가 갖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내가 교제를 이끌어 가기를 원해서 사귐의 대상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내가 주도권을 갖고 교제하고자 한다. 우리가 거듭났음에도 여전히 육신적 생각인 자기중심적 생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교제의 주도권을 갖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 중심적인 생각으로 바꿔서 하나님께 주도권을 드리고 나는 배우고 순종하며, 마치 어린 자녀가 아버지를 따르듯이 따라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이 사랑을 배울 수 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쌍방향의 사귐이 아니라 일방적인 사귐을 가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직접 보이지는 않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 없이 나 자신을 중심으로 일방적인 관계를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과 음성과 마음과 반응을 신경쓰지 않고 오직 나로부터 하나님께로 가는 일방적인 것만을 교제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도 않고 묵상하지도 않으면서도 기도하고 이루어지면 좋아하는 것으로 끝내버리거나 또는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평하며 끝내버린다. 이러한 관계는 결코 사귀는 사이가 아니다. 사귀는 사이에서는 마음의 교류가 있어야 한다. 서로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한다. 나의 마음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마음도 나에게 중요하고, 나의 말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말도 나에게 중요하며, 나의 반응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반응도 나에게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마음을 알려고 노력하며 하나님의 반응에 집중해서 하나님이 나랑 어떻게 사귀고 계시는지 알아야 진정한 교제를 이룰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성경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해야 하는 이유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 없이 하나님의 마음과 의도를 알 수 없으며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며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알아야 나의 상황과 환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제대로 된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내가 주도적이거나 나의 일방적인 교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마음과 반응에 집중해서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교제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진실하고 참된 교제가 가능하고 하나님을 배우며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눌 때에 우리는 정직하고 솔직해야 한다. 나 자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를 향해서도 솔직해야 한다. 만일 죄를 범하였으면 솔직하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죄에서 벗어나길 먼저 노력해야 하고, 또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뭔가를 했으면 하나님 아버지께 자랑하기도 해야 한다. 교만 섞인 자랑이 아니라 아주 어린 자녀가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과 같은 자랑은 오히려 우리를 솔직하게 만든다.

    사랑은 지식이 아니라 삶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이 방법을 머리로는 깨닫게 되어도 실제로는 잘 되지 않는다. 부단한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의 자기중심성은 쉽게 깨어지지 않기 때문에 머리로 아는 것이 삶에서 행동으로 드러나려면 먼저 하나님의 사랑에 푹 젖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자기중심성을 완전히 깨트려야 한다. 그리고나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부단히 노력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러니 처음에 잘 안 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음미하며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실천해 보고 또 하루에 십 분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들을 끊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온전히 배우지 못하며 우리의 삶에서 드러내지 못한다.

 

2.3 사랑의 역할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두려움에 대한 것인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현실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두려움이다. 악과 고통이 있는 세상에서 3차원 시공간에 갇힌 제한된 존재로 사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두려움을 마주하게 된다. 상황과 환경과 기타 여러 조건들이 만나면 두려움이 우리에게 덮친다. 두려움이 두려움인 이유는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미래를 알 수 없기에 우리는 우리의 상상으로 악과 고통으로 가득 찬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극대화시키면서 두려움을 갖는다. 이 두려움은 심지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덮쳤다. 열왕기에 기록된 엘리야 선지자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갈멜산에서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서 물에 푹 적셔진 제단이 불타는 기적을 체험하며 바알의 선지자 수백 명을 다 이기고 모두 죽였다. 그러나 불과 하루쯤 지나서 북 이스라엘 왕국의 왕후인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리라는 말을 듣고 갑자기 두려움에 휩싸여 광야로 도망하여 숨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천사를 통해 먹을 것을 보내 주시면서 회복시켜 주시고 다시 돌아오게 하셔야 했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선교 여행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7:5 기록처럼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라고 고백했다. 그가 처음 마케도니아로 들어간 것이 밤에 하나님이 주신 환상을 보았기 때문이었는데, 그 마케도니아에서 그는 두려움을 느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두려움은 임하기도 한다.

    특별히 사도 요한이 말하는 바와 같이, 마치 심판이 임한 것처럼 극심한 고통과 환난이 덮치면 두려움을 갖게 된다. 미래는 더욱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상상이 극대화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고백하였다. 우리가 일시적으로 두려움에 휩싸일 수는 있지만 결국 하나님의 사랑은 이 두려움을 없애주며 담대하게 해 준다고 고백하며 성도들을 권면하고 위로하였다. 로마 제국으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았던 시대를 살았던 사도 요한이 인생의 말년에 이렇게 고백한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그 어떠한 외부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이 잠시 우리에게 임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를 넘어뜨릴 수는 없으니,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 주시고 돌보아 주셔서 우리를 두려움에서 건져내신다.

    현대에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는 우리의 삶도 어쩌면 엘리야나 바울이나 요한 사도와 비슷한 면을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비록 극심한 박해는 없을지라도 하루는 담대하며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가 그 다음날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금방이라도 세상을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한다고 느낄 만큼 외롭고 두려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두려움 때문에 당황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도 단 한 번의 기도만으로도 우리는 평안을 회복하게 된다.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평안이 우리를 감싸주어 하나님 안에서 든든하게 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며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아시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사랑을 깨닫고 두려움을 극복하게 된다. 온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곧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자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사야서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는 말씀이다. 또한 로마서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뭔가 두려움이 임하거든 그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기도하면서 직시하면 극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반드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 줄 것이다.

 

3. 결론

    사도 요한은 서신서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는데,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는 요한 사도는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 가장 방대한 기록을 남긴 사도이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였고,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 주었으며,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현실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알게 하였다.

    삼위일체이기에 존재 자체가 사랑이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 보여주신 사랑이란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신을 내어주어 상대의 자리에 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이 되어 오셔서 사람으로 살면서 우리의 모든 의를 이루시고 마지막에는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감당하셨다.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 사랑을 먼저 알고 이 사랑을 받아야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체험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사랑을 통해서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또 교회와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닮아가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런데 교제가 결코 쉽지 않다. 그 이유는 내가 교제의 주도권을 가지려고 하든지 또는 쌍방향의 교제가 아니라 일방향으로 내가 원하는 것만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제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 마음을 살피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도 반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반응은 솔직하고 정직해야 한다. 나의 상황과 처지와 필요를 말씀드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살펴보면서 하나님과 쌍방향의 교제를 나누어야 하고, 만일 죄를 범하였으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닮아가며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배울 수 있다. 다른 방법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이 큰 사랑을 배우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지라도 참으로 연약한 우리는 때때로 두려움에 휩싸일 때가 있다. 그러나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더 가까이 그리고 더 깊이 알며 사랑하며 함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가르쳐 준 것처럼 우리는 사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참 사랑을 배우며 우리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현실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사랑은 그 현실마저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볼 수 있게 하며 나 자신을 사랑하고 또 교회를 사랑하며 결국엔 교회를 너머 이웃을 사랑하게 할 것이다. 그 삶이 얼마나 즐겁고 멋지고 아름다울지 예수님을 통해서 기대하며 우리의 본모습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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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2. 7. 26. 10:38

우리는 세상에 만연한 악과 고통을 바라보면서 우리 스스로의 무력감에 빠져 공중에 대고 불평한다. 세상이 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가, 하고 말이다. 그러면서 악과 고통을 근거로 해서 무신론자가 되기도 하고 또는 그 반대로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았다고 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능력으로 악과 고통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존주의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모두 그냥 내던져진 존재일 뿐이기에 그냥 그런 세상에 던져진 것뿐이다. 적어도 악과 고통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느껴진다.

 

악에 대한 기존의 이해

    무엇보다 크리스찬으로서 우리는 악과 고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나님께서는 왜 세상에 악을 허용하셨을까?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고통받는 것을 즐기시는 것일까? 여러가지 다양한 물음이 떠오른다.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안 계시기 때문에 이런 것은 아닐까? 크리스찬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 이레니우스, 라이프니쯔와 같은  오래전 크리스찬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많은 신학자들이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나름의 설명을 제시하였으며 심지어 존 힉과 같은 종교철학자들도 관심을 가지고 나름의 설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뭔가 깔끔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여러가지 다양한 설명이 제시된다는 사실만 봐도 이 문제는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이 문제는 뒤로 나중으로 놓여진다. 지금은 잘 모르지만 나중에 마지막 때가 되어 모든 것이 분명하게 될 때에는 알게 되겠지, 하고 후퇴해 버린다. 아마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것에 대해 우리가 생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은 지극히 작기 때문에 더 많은 초월적 지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때가 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 문제를 이해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과 악의 관계에 대한 문제, 특별히 “의롭고 선하시며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악을 허용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학문 분야를 신정론이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신정론을 다루었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문제를 입구에서 바라보았다. 즉, 선하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는 세상에 어떻게 악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하여 그 시작점을 항상 고민해 왔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어서 출구에서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 그것을 고민해 보면 이 문제에 대해 뭔가 다른 통찰과 이해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논의된 신정론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처럼 악 자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악 자체는 비존재이며 선의 결핍으로 이해하였으며 실제적인 악보다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악을 주로 다루었다. 다른 하나는 이레니우스나 라이프니쯔처럼 악을 인간의 영적 성장을 위한 과정에 필요한 수단으로 이해하는 시도이다. 모든 신정론은 하나님을 악의 창시자로 주장하지 않는다. 악은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왜 악을 허용하셨는가 하는 점이다. 심지어 과정철학에 기반한 과정신학이나 열린 신론의 경우에는 하나님조차 악을 어떻게 하실 수 없으며 하나님도 악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을 악의 창시자로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른 한편에서는 신정론 자체를 거부한다. 악의 존재는 하나님을 부정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능하시며 사랑이 넘치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 세계에 악을 허용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악이 불가능하든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든지 둘 중에 하나만 참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악은 실재하므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런데 과연 악의 존재는 하나님의 비존재를 증명하는 것인가? 악이 실재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존재하지 않아야만 하는 것인가?

    결론을 먼저 말하면, 이 문제는 인간들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인간과 자연 밖의 것을 탐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에 묶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무리 이성을 사용하여  초자연적인 것을 탐구한다고 하여도 그것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자연을 연구해서 초자연에 대해서 참인 진리를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뭔가 알아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확인할 기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것이고 각 의견이 나름 일리는 있지만 결정적으로 확실하다고 인정받을 방법은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창조주에 대한 증거라며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하지만, 다른 사람은 자연의 고통을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창조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동일한 자연에서 완전히 상반된 주장들이 나온다. 자연으로부터 초자연적인 진리를 연역할 수도 없고 귀납적으로 추론할 수도 없다. 모두 다 각자 가지고 있는 전제에 따라 해석한 자기 나름의 주장일 뿐이다. 악에 대한 문제도 동일한 것이다.

 

악에 대해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기

    이제 악과 고통의 문제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싶다. 입구에서만 바라보지 말고 출구에서 바라보면 뭔가 다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지금까지 대부분 악과 고통의 문제를 입구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아주 다양한 주장들이 제시되었지만, 출구에서 바라보면 훨씬 단순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악이 현재의 세상에 실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이 악과 고통의 문제에서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것과 그렇지 않다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우리에게 합리적인 것일까? 입구가 아니라 출구에서 보면 – 만일 출구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 당연히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것이 무조건 더 좋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끝장내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악의 문제에서 출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악은 영원할 것이며 자연과 인간은 영원히 고통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아마도 무신론자들은 이것을 감수하겠다고 할 것이다.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이며 인간은 그런 세상에 내던져진 것일 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만일 출구가 있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할까? 그냥 악과 고통이 너무도 끔찍해서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함이 전부일까 아니면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악과 고통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부자이고 건강하며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지라도 악과 고통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악과 고통의 문제를 출구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오직 두 개밖에는 없다. 악이 그 자체로 영원하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악을 끝장내고 악과 고통이 없는 세상이 미래에 나타든지, 이 둘 중에 하나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악과 고통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 심지어 무신론자들도 세상의 악과 고통을 바라보며 한탄하며 악과 고통이 없는 세상이 왔으면 정말 좋겠다고 말한다. 비록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말은 한다. 그러한 말이 그냥 하는 말인지 아니면 그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희망인지 그들 자신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증거라고 한다. 우리가 악과 고통의 문제를 출구에서 바라보면 우리 모두는 한 가지를 바라게 된다. 악과 고통이 반드시 끝나는 때가 올 것이라고 바란다. 악과 고통을 끝장낼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초월적인 존재, 곧 하나님뿐이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바라고 있다. 그리고 이 바람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며 언젠가 악과 고통을 끝장내실 것이라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악과 고통이 아무리 넘친다고 하더라도 희망을 갖고 인내하자. 하나님께서 언젠가 반드시 악과 고통을 없애실 것이다.

   이렇게 출구에서 바라보면 입구에 대한 생각도 조금 바뀐다. 만일 악과 고통이 영원하다면, 그것은, 만일 시작이 있다면, 처음부터 악과 고통이 존재했던지 아니면 세상이 곧 악과 고통이든지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악에는 어떤 목적도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그냥 악인 것이며 인간과 자연이 존재하지 않으면 악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에게 고통이기에 악이라고 명명된 것뿐이며 선과 악에 대한 궁극적 기준이 없다. 여기에서 불합리가 발생한다. 악은 영원한데 시공간에 묶인 인간과 자연에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서, 하나님께서 악과 고통을 언젠가 끝내실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악과 고통을 통제하실 수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허용하신 이유와 목적이 반드시 존재한다. 비록 지금 우리는 그것을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중에는 분명히 알게 될 것이며 우리 모두 충분히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악과 고통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힘을 갖게 되고 악과 고통에 짓눌려 살지 않게 되기에 서로를 위로하며 서로를 포용할 수 있게 된다.

 

결론

    이제 결론을 내려보면, 악과 고통에 대해 입구에서 바라보면 마치 미궁에 빠진 듯한 생각을 갖게 된다. 아주 다양한 주장들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도 명쾌하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초월적이며 초자연적인 것을 인간이 자기자신과 자연을 탐구하며 그것에 대해 결론을 내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을 출구에서 바라보면 매우 단순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모두가 악과 고통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만큼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바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이므로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언젠가 악과 고통을 반드시 끝내실 것이다. 그러므로 악과 고통에 대해 입구에서만 바라보며 의심에 찬 질문들만 던져놓지 말고 이제는 출구에서 바라보며 확신과 위로와 평안을 누려야 한다. 악과 고통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악과 고통에 대해서 입구에서만 바라보지 말고 출구를 향하여 생각해 보자. 그 어떤 무신론자라도 악과 고통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바람이 이루어지기 위한 유일한 희망은 오직 초월적인 존재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희망 없이 살든지 아니면 희망을 가지고 초월자를 바라보든지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 무엇을 진정 바라는지 마음 속 깊이 생각해 보기를 우리 모두에게 권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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