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
기독교 구원론의 내용 중에서 교파나 심지어 담임 목사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 바로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은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도 그 스펙트럼이 매우 넓어서 아르미니우스파 배경의 대답으로부터 극단적인 칼빈주의파 배경의 대답 또는 구원파 배경의 대답까지 아주 다양하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언제든지 잃어버릴 수 있고 다시 받을 수도 있다’는 대답부터 ‘절대로 잃어버릴 수 없고 어떻게 살든 큰 상관이 없으며, 심지어 죄를 범하며 살아도 상관이 없다’는 대답까지 그 정도에 따라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기도 한다. 또한 인터넷에서 검색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봐도 아주 다양한 대답이 나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으며, 어떤 대답 내용 중에는 자기 대답에 반대되는 대답은 다 기독교 이단들이 주장하는 것이라며 극렬히 반대하고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기독교 이단들이 주장하는 것도 있어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 질문과 관련된 성경 말씀들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이 질문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살펴봐야 한다. 사람이 아무리 이렇다 저렇다 해도 결국엔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므로 성경으로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더 혼란스럽게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그 스펙트럼의 양 극단을 모두 지지하는 말씀들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은 철회됨이 없으며(롬11:29)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선택되어 구원받은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롬8:31~39; 요10:28)고 기록되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으로부터 파선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딤전1:19~20)이 있으며 성령에 참여하고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사람에 대한 경고(히6:4~6; 10:26~27; 벧후2:20)가 기록되어 있어서 그렇다.
그래서 정작 문제은 이와 같이 혼란스러운 성경 말씀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것으로 소급된다. 어느 한 쪽을 따르면 대답은 간단하고 쉽게 나오는데 다른 한 쪽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전체를 종합적으로 이해한 후에 결론적인 대답이 제시되어야 한다. 결국에는 이러한 두 종류의 상이한 것처럼 보이는 말씀들 중에서 무엇이 본질적인가 하는 것이다.
사람의 자연적 상태와 구원의 본질
우선 먼저, 사람의 자연적 상태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성경의 가르침은, 첫 사람인 아담의 타락 이후에 모든 사람은 자연적인 상태에서 영적으로 죽은 존재라는 것이다 (엡2:1~5; 고전15:22). 그리고 영적으로 죽은 존재는 결코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시51; 롬8:13). 이것은 어느 한 순간도 그러한 삶을 살 수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삶 전체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 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전히 완전한 것만 받으시기 때문에 털끝 만큼의 흠이라도 있으면 하나님은 거절하시기 때문이다 (갈3:10; 약2:10). 하나님은 온전히 완전하신 분이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살려면 사람도 온전히 완전해야만 한다(벧전1:15~16). 하나님은 털끝 만큼의 악일지라도 절대로 용납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연적 상태에서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 오직 저주의 심판만 받을 뿐이다. 그런데 이 저주의 상태에 있는 우리 인류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모든 죄값을 치르셨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완전한 의로움을 주셨다(롬5). 그러나 이러한 은혜조차도 우리는 누릴 수가 없다.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큰 은혜조차도 은혜로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성령님에 의해 거듭나게 하시고 이 은혜를 알게 하시고 이 은혜를 받도록 해주신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엡2:8; 벧전1:3). 그리고 은혜로 말미암아 거듭나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이기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원은 이렇게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말하면,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사람이 – 이미 거듭난 상태에서 – 죄를 범한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유지되는 상태에서 죄에 대한 징계를 받는 것일 뿐이다. 조금 극단적인 비유로 설명하자면, 부모가 대한민국 사람이어서 그들이 아들을 낳아 그가 대한민국 사람으로 태어나면 그 아들이 죄를 범하고 사형을 당한다고 해도 그는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사형을 당하는 것이지 다른 나라 사람이 되어서 사형을 당하는 것은 아닌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은 거듭난 사람을 그냥 버려두시지 않고, 아버지처럼 항상 언제나 끊임없이 사랑으로 양육하시기 때문에 행여 그가 죄를 범하더라도 회개하고 다시 회복되도록 인도하시므로, 구원받았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생각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다.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된, 믿음에 파선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와 성령님에 참여하고 신령한 은사를 맛본 사람이 타락할 수 있다는 경고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구원의 본질적인 관점에서는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얻는 조건인 것으로 보이는 믿음에 실패하게 된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을 가르쳐 주는 교훈일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믿음은 거듭난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며(엡2:8), 구원받았음을 알게 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도구이지 – 그래서 성경에는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있는 것이며 –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사람은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영이 죽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먼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을 수가 없다. 항상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반항할 뿐이다. 생각하는 것이 항상 반역 뿐인데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만약 믿음이 구원을 받기 위한 선결 조건이라면 단 한 사람도 구원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며, 이 믿음을 통해서 사람은 자기가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수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적 상태에 있고 영이 죽은 사람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확신하는 경우가 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행14:9; 히10:39)과 그렇지 않은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그러한 예들을 수없이 나열하고 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기적을 매일 매일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모세가 호렙산에 올라가 있는 40일 동안 금으로 된 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하였고, 또는 권력에 눈이 멀어 모세를 대적하다가 땅 구덩이에 파묻혀 죽임을 당했던 사람들이었다. 복음서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다니며 수많은 기적을 보고 체험했던 사람들이 결국에는 예수님을 버리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참된 믿음이 아니라 사람 스스로 만들어낸 믿음이 있을 수 있다. 마치 리플리 증후군을 앓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대부분 이런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과 차이가 거의 없다. 더욱이 그런 사람이 교회에서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들과 신앙 생활을 함께 하면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기적과 능력을 맛볼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눈에는 거의 구별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때가 되면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리고 혹시라도 자신이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만약 그런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엎드리라고 권면하는 말씀이 고린도후서13장 5절 말씀이다.
구원받음에 대한 테스트
여기에 몇 가지 스스로 테스트해 볼 만한 것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것들은 필자 개인의 경험과 성경 말씀을 묵상한 결과들이므로 개인에 따라서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도 있고 또 더 다양한 테스트 방법이 있겠지만 우선적으로 고려해 볼 만한 것들일 것이라 생각한다.
첫째, 구원을 보험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구원받지 못한 상태일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마치 좋은 보험 하나 들어놓고 아무런 걱정 없이 편안히 살다가 어떤 사고가 일어난 후에야 보험을 챙기는 방식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아마도 구원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구원받았으므로 이제 마음이 평안하고 안심이 된다면서, 구원받기 전이나 후나 전혀 다름이 없는 삶을 살며 이따금씩 구원받았음을 확인하기만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점검해야 한다.
둘째, 구원받았기에 자기자신이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구원받지 못한 상태일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자기혐오의 과정이 없이 무조건 자기자신이 사랑스럽고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도 바울이 자기자신은 죄인들 중에 괴수라고 고백한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또한 성도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자신을 사랑하므로, 그리스도가 없이 또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도 자기자신을 사랑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점검해야 한다.
셋째, 이번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며 헌금하고 왔으니까 자기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구원받지 못한 상태일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노라, 하셨으며 또한 하나님께 예배하러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선포해야 했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계속 해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말라고 하였다.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며 눈물을 흘리고 헌금을 드리며 감사를 드린다 할지라도 가난한 이웃을 돌보지 않고 오히려 압제하며 속여서 빼앗는 사람은 결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 이처럼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내 가정, 내 식구, 내 교회만을 위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일 가능성이 더 많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오직 복만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구원받지 못한 상태일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왜냐하면 모든 구원받은 사람은 거듭난 상태에 있을지라도 아직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수를 하고 죄를 범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사람을 징계하시며 교정해주시기 위해서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 잘못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신다. 이러한 징계의 과정은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나의 자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삶을 배워야 하기 때문에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고통이 한번도 없이 항상 잘 나가고 내가 원하는 것은 다 이루어졌다는 삶은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주관하는 삶이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에 대한 결론
결론을 내리자면, 구원의 본질을 생각할 경우에는,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생각할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예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것 같은 사람도 믿음에 파선하고 기독교를 배신할 수도 있다(살후2:3). 참된 믿음, 즉 구원의 시작부터 완성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자기는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사람이 자기가 구원받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너무도 쉽게 자기자신을 합리화하고 또 너무도 능숙하게 자기자신을 속이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을 받은 것처럼 믿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스스로를 속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빛과 같아서 모든 거짓을 드러낸다.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는 이 링크 https://comfortye.tistory.com/64 를 참조하고, 성화의 삶에 대해서는 이 링크 https://comfortye.tistory.com/24 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행여라도 자기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착각 속에 사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기를 권면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이 없어서 간구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부어주신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삶이 고통스럽다. 그와 동시에 또한 삶이 즐겁다. 자신의 죄를 봐야만 하기에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그리스도로 인해서 소망을 갖고 즐거움을 누리기에 기쁘다. 그래서 언제나 겸손하며 언제나 그리스도를 자랑할 뿐이다.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완전해질 수 없을지라도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질 그 날을 바라보며 참고 인내하며 그리스도를 더욱 닮기 위해서 훈련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애쓰는 것이다(빌2:12).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의 자녀를 양육해 주시는 것이므로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묵묵히 감내하며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는 말은 고통과 겸손과 인내와 훈련과 완성을 포함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거기엔 ‘구원받았으니 이제 무조건 고민도 걱정도 없다’는 개념은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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