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구원론에 의한 성화의 삶
한국 기독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개혁주의 장로교는 종교개혁의 전통 속에서 칼빈(또는 깔뱅)의 신학을 그 토대로 하여, 칼빈 이후의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신학을 바탕으로 그 중심 교리가 세워져 있다. 특별히 구원론 및 칭의론이 잘 정립되어 있으며, 성화(Sanctification)에 대해서도 ‘칭의 없는 성화 없고, 성화 없는 칭의 없다’는 단일하면서도 이중적인 은혜에 대한 강조와 함께 성화를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칼빈은 역작인 <기독교 강요>에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이신칭의, Justified by Faith Alone)”을 설명하기에 앞서 거룩한 삶에 대해서 많은 분량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의 개혁주의 장로교 진영 내에서는 한번 칭의 받으면 구원이 완전히 완수된 것처럼 간주하여 성화의 삶을 무시하고 심지어 위선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현실이며, 여기에는 장로교회의 장로들이나 목사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현실을 좀 더 분석해 보고 성경적인 성화의 삶은 무엇이며 성도는 누구나 예외 없이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는 조언을 제시하고자 한다.
개혁주의 기독론과 구원론은 종교개혁의 5대 강령인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를 성경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는 교리이다. 특별히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의 법정적 성격, 즉 단번에 법적으로 완수된 측면을 성경적으로 잘 설명한다. 이렇게 신학적으로 잘 정립된 교리도 현실적으로는 삶의 현장에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데, 한국 및 미국의 한인 교회는 이신칭의 교리에 있어서 한가지 치명적인 덫에 빠졌으며, 이렇게 된 여러가지 원인들이 존재한다.
첫째는, 이신칭의만을 과도하게 강조하다 보니 마치 칭의가 구원 전체를 일거에 완성하는 것 같은 인식을 주게 되고, 따라서 칭의 받았으면 천국은 따논 당상이고 현실의 삶은 대강 살아도 상관없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문제이다. 개혁주의 구원론에 있어서, 칭의는 변할 수 없는 구원의 시작이기는 하지만 칭의가 구원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계에서 칭의에 대한 과도한 집중은 한국 교회에 역사적으로 문제를 일으켰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또한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과도한 쏠림의 현상과 상대적으로 거룩한 삶에 대한 간과는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여전히 부패한 습성을 지닌 인간이 심리적으로 쉬운 길을 걷도록 하고 말았다. 참된 신앙생활에 대한 가르침은 종종 공예배 참석이나 헌금 생활, 그리고 전도의 성과로 치환되었고, 결과적으로는 특별한 잘못(?)이 없으면 구원을 받는 데 아무런 염려할 것이 없다는 식으로 귀결되었으며 그러한 신앙생활이 교계에 만연하게 되었다 (물론 이 글은 공예배 참석, 헌금 생활, 또는 전도의 성과를 거부하거나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고픈 것일 뿐). 이러한 심리적 평안에 대한 추구는 값싼 복음, 번영 신학, 그리고 의무적 의식/예식적 신앙 생활에 따른 안심에 치우치도록 이끌었다.
마지막으로는 ‘성화(거룩한 삶) = 선행’이라는 공식으로 너무도 성급하고 쉽게 생각하도록 함으로써, 칭의받아 구원되었으니 안심이며 칭의받은 자로서 기본은 한 것이므로 이제 선행은 선택사항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성화의 근거인 칭의가 성도의 삶에 있어서 윤리적 도덕적 동력을 제공하지 못하게 하였고 오히려 성화가 칭의로부터 분리되고 성화 없는 칭의로 만족하게 하는 거짓 평안을 주게 만들었다.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상기한 문제들로 인하여 그동안 개혁주의 교리에 대한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으며, 더욱이 개혁주의 구원론이 성경적이지 못하다는 비판까지 듣게 되었다. 그 비판의 주요 논지는, 사도 바울은 윤리적 도덕적 성화의 삶을 서신서들에서 매우 강조하고 있는데 개혁주의 성도들의 삶이 윤리적으로 심히 문제가 많은 것으로 보아서, 개혁주의 구원론도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또는 개혁주의 구원론 자체를 잘못 되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은 주로 다른 교리를 택한 사람들로서, 아르미니우스나 웨슬리 등이 주장한 교리를 배경으로 하여 사람의 행위를 믿음과 함께 고려해서 구원론을 정립해야 한다고 비판한다. 구원론에 있어서, 믿음과 행위에 따라서 구원받음과 받지 못함이 결정되면 누구나 윤리적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도록 자연스럽게 인도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개혁주의 구원론을 비판하는 것이다 (구원론 자체를 논하는 것은 이 글의 의도가 아니므로 다음에 기회가 되면 개혁주의 구원론을 다른 기독교 종파의 구원론과 비교하기로 하고 이 글에서는 개혁주의 구원론에서의 성화의 삶을 논하고자 한다).
따라서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이러한 비판을 불식시켜야 할 의무가 있고, 무엇보다도 개혁주의의 기본인 ‘칭의 없는 성화 없고 성화 없는 칭의 없다’는 개념이 성도의 현실적인 삶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칭의와 성화의 불가분리성이다. 비록 칭의는 논리적으로는 성화에 우선한다 하더라도 칭의와 성화는 시간적으로는 동시성을 갖는다. 또한 칭의는 끊임없이 성화를 위한 동력을 제공하며, 성화는 칭의를 확증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는 칭의와 성화는 심리적으로도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성화의 주체가 ‘나’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심을 명확히 하고, 하나님이 성화의 주체이시므로 거룩함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경적인 통찰이 필요하다는 점을 또한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개혁주의 구원론 안에서 성화의 삶을 성경적으로 정립하고 비판자들의 비판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먼저 성화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가 요청된다. 흔히 생각하듯이 성화의 삶은 선행하는 삶이라는 공식을 대입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삶을 일련의 과정으로서 인식하며 성화의 과정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칭의는 단번에 이루어지는 법정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성화도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간주하거나 또는 최소한 어느 수준에 단숨에 도달하는 것처럼 여겨서도 안 되며, 부단한 노력과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가는 일련의 과정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는 다음의 세가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첫째, 성화는 하나님의 ‘자녀 만들기’ 과정이라는 것이다. 둘째, 성화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성화는 공동체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이라는 것이다. 이 세가지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첫째, 성화는 하나님의 ‘자녀 만들기’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롬5:1~4; 8:11~25; 히12:1~13). 여기에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은 의롭다 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느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길이다. 성령님을 통한 양육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양육받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성화를 하나님의 ‘자녀 만들기’로 이해하면 자녀로 태어남(중생), ‘자녀임’(칭의)와 ‘자녀답게 됨’(성화)의 과정을 쉽게 알 수 있고 또한 중생 이후에 ‘자녀임’과 ‘자녀 됨’의 동시성을 이해하게 된다. 자녀가 아닌 사람이 자녀로 성장할 수는 없는 것이며 또한 자녀로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은 애초부터 자녀가 아닌 사람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녀 만들기’는 ‘자녀임’을 통하여 아버지로부터 법적으로 상속받은 모든 복을 완전히 누리기 위해 아버지처럼 되기 위한 훈련으로서의 성화를 잘 설명한다. 이는 또한 자녀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해야 하는 당위성을 잘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맏아들이시며 친아들이시다. 다른 모든 자녀들의 모범이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본체를 그대로 드러내신 분이시다. 따라서 모든 자녀들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하기를 하나님 아버지는 기뻐하시며 또한 실제로 성장시키시는 것이다. 만일 칭의가 나중으로 유보되어 있다면 이 개념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자녀로 입적되지도 않았으므로 자녀로서 양육받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거듭난 성도는 곧 하나님의 자녀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자녀 만들기’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므로 칭의는 나중으로 유보될 수 없다.
‘자녀임’에 대한 선포는 비록 단회적이고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지만 ‘자녀임’은 항상 ‘자녀 됨’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자녀이기 때문에 자녀로서 양육 받는 것이며, 자녀로서 양육 받는다는 것은 자녀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둘은 항상 함께 간다. 그래서 때때로 성화의 과정에서 실수와 실패가 있다 하더라도 ‘자녀임’의 칭의를 확인하며 회복되어 다시 용기를 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화는 하나님의 ‘자녀 만들기’임을 알면 성화의 주체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다는 것을 너무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자녀의 의무는 아버지의 양육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라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자녀로서 다듬어져야 아버지를 닮은 행위, 즉 참다운 선행이 나올 수 있다. 의도적으로 선행을 해서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처럼 행하는 선행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이처럼 선행은 단지 윤리적 도덕적 선행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크고 깊은 의미로서, 아버지를 닮은 모든 행위들이 다 선행인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행함, 즉 그리스도의 성품이 드러나는 모든 행위들이 다 선행인 것이며 윤리 도덕보다 더 깊은 존재의 본질적 차원의 문제이다. 따라서 이것은 우선 먼저 사람이 ‘자기 의’를 버릴 것을 요구하며, 하나님의 자녀다워지도록 변화되어야만 가능한 것이기에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아버지의 양육은 항상 칭찬과 축복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는다. 자녀가 잘못하면, 모든 잘못에 대해서는 아닐지라도, 징계와 경책이 따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며, 심지어 잘하고 있을 때에도 자녀의 더 큰 성장을 위해서 아버지는 자녀에게 어려움을 주시기도 한다. 아버지는 자녀의 성장을 바라며 자녀의 성장통을 기꺼이 감수하시는 것이다. 물론 자녀가 잘한 때에는 칭찬으로 더욱 용기를 북돋아주시고 다음 단계를 보여주시기도 하며 하나님 나라를 품는 소망을 주신다. 그러나 자녀가 그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어서 끙끙댈 때에도 아버지는 항상 앞에서 끌어주시고 뒤에서 받쳐주시며 그 어려움 가운데서도 항상 자녀와 함께 하신다. 성화는 이처럼 자녀에게 닥치는 고난과 고통에 대해서 아버지의 시각에서 바라볼 것을 가르쳐주고 고난에 대해 올바른 통찰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렇게 자기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과연 나는 하나님의 양육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장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양육을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양육은 받았고 받고 있는데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방향으로 변화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양육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이제 엎드려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양육의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며 은혜가 충만하시므로 반드시 양육해주시며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둘째, 성화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이다 (롬6:1~23; 요15:1~10).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있는 자이다. 한 몸, 남편과 아내, 건물, 나무와 가지 등으로 비유되는 이 연합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롬 8:38~39; 요10:27~29). 그 어떤 권세를 가진 자라도 이 연합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자녀를 고아처럼 혼자 버려둘 수 없다. 이 연합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것이요 성령님에 의해 사람이 거듭날 때부터 실제적으로 역사 가운데 이루어지는 연합이다. 이 연합의 법적이며 정적인 측면을 칭의라 하고, 실천적이며 동적인 측면을 성화라 할 수 있다. 이 연합 안에서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성도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
성화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성령님을 통해서 성도의 삶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성도의 삶에서 발현된다는 것이다. 씨앗이 복숭아 나무이면 나무도 복숭아 나무이고 열매도 복숭아를 맺는다. 씨앗을 본 사람은 없지만 열매가 복숭아인 것을 보고 열매를 맺은 나무가 복숭아 나무이며 나무의 원천인 씨앗이 복숭아 씨앗이라는 것을 누구나 안다. 열매가 가지에서 열리려면 가지는 나무에 붙어있어야만 한다. 가지의 정체성은 가지 자체에 있지 않고 씨앗에 있다. 그러나 가지의 효용은 열매를 맺는다는 데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마다 다 모아서 불에 던져 태워질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는데도 열매를 맺지 않는 경우를 설명하신 것이 아니다. 나무에 붙어있지 않고 스스로 열매를 맺으려는 가지를 가리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몸에서 머리는 그리스도시다. 이는 곧 성화의 주체는 그리스도이시고 성령님을 통해 역사하시며 성도의 의무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삶에서 실천되어야 하는 거룩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또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어떻게 역사하는지 알아야 하는데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거룩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정의되며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따라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으로 거듭난 사람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고 있는가 또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의 삶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가 하고 물어봐야 한다. 여기에 그 어느 성도라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거듭난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이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발현되는 삶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발현된 삶은 그리스도처럼 모든 것을 아버지께 순종하는 삶인 것이다 (빌 2:5~8).
마지막으로 성화는 공동체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 (고전 12; 엡1), 또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공동체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다. 성도의 모임인 교회는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이므로 그 충만함을 누리는 것이 교회 공동체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이는 먼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의 사랑과 평안을 누리는 것이며, 또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혜와 사랑과 능력을 누리며 공동체 활동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 삶은 개인적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삶이며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의 삶이다. 따라서 이 삶은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삶이며 서로가 서로를 세워주는 삶이며 또한 서로가 서로를 그리스도 안에서 양육하는 삶이다. 서로 다르며 서로 다양한 관점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요 한 몸으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적 연합이 교회 울타리를 너머 밖으로 향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것이며,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성화의 과정에서도 어느 누구도 예외는 없다. 거듭난 성도가 공동체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고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성화의 삶을 사는 경우는 없다. 비록 그가 어떤 이유로 일정 기간 어느 지역 교회에도 소속되지 않은 상태로 지낸다고 하더라도 평생을 그렇게 지낼 수는 없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그를 다시 지역 교회에 소속되도록 하신다 (여기서 지역 교회라 함은 무슨 무슨 교회 하고 간판과 건물이 있는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어느 지역에서 모이는 성도의 모임을 의미한다). 또한 더 넓게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몸으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연합되어 있다. 이러한 인식이 없다면 아마도 공동체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성도는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과연 나는 그리스도와 어떻게 공동체적으로 연합되어 있는가 하고 물어보라. 물론 각 사람의 성격과 개성과 성품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도 있을 수 있으며 하나님께 받은 은사의 종류에 따라서 섬김의 차이도 있을 수 있고, 또한 각 사람의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 수준의 차이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본질적인 것은 공동체적인 연합, 그 자체의 유무이다. 목사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목사와 연합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도 아니다. 목사나 장로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요 모든 성도와 동일한 지체일 뿐이나, 섬김의 종류가 다른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말씀과 모범과 양육으로 섬기는 것이며 – 이 섬김으로 인해서 그들을 따르는 것이며 – 그리고 다른 성도들은 다른 은사로 다양하게 섬기기에 또한 이들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요 한 몸을 이루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의 사랑을 나누며 서로가 서로를 따르는 것이다. 한 몸으로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나는 것이다.
상기한 바와 같이 개혁주의 구원론 안에서 성경적인 칭의와 성화는 서로 절대 분리될 수 없다. 논리적으로는 칭의가 성화보다 앞서지만 시간적으로는 항상 동시적이어야 한다. 칭의받는 순간 이미 성화는 시작된 것이며, 성화는 언제나 칭의를 바탕으로 한다. 칭의와 성화에 대해서 이렇게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개혁주의 진영에서 지금까지 칭의와 성화에 대해서 취해온 일반적인 접근은, 중생과 칭의는 정체성의 개념으로 인식하게 하고 성화는 (칭의와는 분리된 듯한) 행위의 개념으로 인식하게 하여, 서로의 관계에 따른 올바른 개념을 가지기 어렵게 하였다. 그래서 성도가 자기는 하나님의 자녀로 이미 구원받았으니 선행은 기회가 되는대로 하면 된다는 안일하고 심지어 위선적인 생각에 이르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선행의 많고 적음에 따라 누가 잘 하고 못하는지 판단하게 하는 관점을 갖도록 하고, 다른 사람과 나를 그리고 성도들끼리 서로 비교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을 방해하고 해치며, 오히려 복음 전파의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앞에서 소개한 개념들은, 중생과 칭의는 정체성의 개념으로 인식하게 하되 성화를 행위의 개념이 아니라 정체성의 발현에 대한 개념으로 이해하도록 하여, 칭의와 성화가 결코 분리될 수 없도록 하였다. 성화를 하나님의 ‘자녀 만들기’로 이해하면, ‘자녀임’과 ‘자녀답게 됨’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자명하고, 또 성화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이해하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성도의 삶에서 발현될 수밖에 없기에 칭의와 성화는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 성도의 거룩한 삶을 위해서 이보다 더 윤리적 도덕적인 동력이 어디에 있겠는가. 성경적인 성화는 비단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범주를 넘어서 존재의 본질적인 면까지 이르게 한다. 또한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나를 오늘의 나와 비교하게 하고 오늘의 나를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하게 함으로써 앞으로 달려갈 힘을 준다. 그리고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개념을 갖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기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제 생각을 바꾸어야 하며 하나님의 양육하심에 순종해야 한다. 누구도 예외는 없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장하도록 양육을 받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의 삶에서 발현되도록 훈련받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항상 양육하시는 아버지이자 훈련교관인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언제나 무릎 꿇고 귀 기울여 배워야 하는 것이다.
때로는 고난과 고통이 이 과정을 더욱 힘들게 하지만 고난이 없이는 성장할 수 없으며, 시험이 없이는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러한 고난과 시험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담담히 이겨내며 조금씩이라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양육하심에 순종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닮아서 사는 삶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세상에 보내어진 삶을 사는 것이다.
이렇듯 개혁주의가 가르치는 성화의 삶은 참으로 멋지고 신나는 삶이다. 아침마다 잠에서 깨어 오늘 하루를 기대하는 삶, 그리스도가 오늘도 나와 함께 동행하며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게 하는 삶이다. 그 열매가 크든 작든 상관없이 아름답고 멋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기쁘게 살자. 주님이 이루시리라.
(사족)
개혁주의 진영에서 발생하는 한가지 아쉬운 점은 개혁주의 기독론과 구원론의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모든 문제들을 너무도 쉽게 구원의 문제로 치환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의 문제로 치환되면 바로 이어서 구원 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구별이 이루어지고, 이것은 결국 내 편과 네 편으로의 편가르기로 이어지며, 내 편이 아니면 다 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되는 편협한 생각으로 정착하게 된다. 우리 주님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섬기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다 적으로 간주하는 마음에 사랑이 들어설 자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것은 결국 개혁주의를 따르는 성도가 자기 의를 버리지 못하고 개혁주의 교리를 스스로의 생각 안에서 녹여냈기 때문이다. 자기 의를 철저히 버리고 성령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개혁주의 교리를 수용해야 하는데, 개혁주의 교리를 따라서 구원을 이해하고 구원을 받은 자가 구원받은 후에 오히려 자기 의에 취해서 구원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개혁주의가 아닌 방향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흔한 예는, 자연재해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은 지역의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라고 너무도 쉽게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을 언급하는 정도가 아니라 확정적으로 단언하는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렇게 단언하는 사람은 그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단 한 사람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확언할 수 있는가. 다른 종교의 지역이므로 무조건 심판이라고 하는가. 하나님은 다른 종교 지역에서는 역사하시지 않는가. 똑같은 자연재해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미국에서 일어나면 심판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냥 함께 슬퍼하고 함께 울면 된다. 슬퍼하는 사람 옆에서 함께 슬퍼하고 또 기뻐하는 사람 옆에서 함께 춤추면 된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고 사람을 위로하는 기본이다. 그런 사람 옆에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고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들과 함께 슬퍼하며 그리스도의 위로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연재해 속에서도 역사하시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야 한다. 위로 없이 어떻게 사랑을 보일 수 있겠는가. 아무리 악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사망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하셨다(겔18:23; 33:11)는 것을 기억하며 네 편과 내 편으로 나누지 말고,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여전히 모든 사람들 위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나 역시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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