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드레베를 조심하라
사도들이 직접 사역하던 시대에도 교회 안에는 다양한 문제들이 있었고, 또 교회들 중에서 각각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교회도 있었다. 신약 성경이 기록되고 있는 과정에 있었기에 오늘날의 우리처럼 전체 성경을 가지고 있지 못했으므로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었고 따라서 더욱 그러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지식과 이해의 부족으로 인해서 발생한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들도 있었는데, 요한3서에 기록된 디오드레베가 일으킨 문제가 그중에 하나다.
사도 요한이 디오드레베에 대해 묘사한 내용을 보면, 그는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고 사도와 그 일행을 맞아들이지 아니하며 오히려 악한 말로 사도의 일행을 비방하고, 사도를 맞아들이고자 하는 교인들을 교회에서 쫓아내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약 성경 전체에서 요한3서에 딱 한 번 등장하는 인물이라서 그에 대해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그는 그 당시 집사의 직분 – 오늘날로 따지면 담임 목사보다는 장로 직분을 받았었던 것 같고, 아마도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계급이 있고 경제적으로도 부유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또는 말재주가 좋아서 사람들을 잘 설득하는 재능을 가졌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때가 대강 주후 90년 정도였고 사도 요한이 아직 밧모섬에 유배되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당시에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처럼, 사도들을 포함한 복음전도자들이 여러 지방들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하여 세우고 나서 그 교회가 영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수준이 되면 감독/장로/목사를 세워서 교회를 맡기고 다시 다른 지역으로 전도 여행을 갔다. 복음전도자는 혼자서 다닌 것이 아니라 몇 명이 팀을 이루어 다녔으며 그들은 한 지역에서 몇 개월 또는 몇 년을 살면서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 기간 동안에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며 먹을 것과 지낼 곳 등을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디오드레베가 교인들을 선동해서 사도와 그 일행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복음 전파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기록된 성경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못하고 영적인 선생님이 없는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되는 교회가 아니라 디오드레베의 사조직이 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와 똑 같은 일이 어느 교회서나 흔하게 발생할 수 있다. 카리스마 있고 공명심이 큰 목사나 장로가 이끄는 교회에는 이러한 일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또한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목사의 사조직으로 삼는 일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를 정치단체로 조직화 해서 복음이 아니라 정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목사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실제로 그런 목사를 직접 보지 않았던가! 또 예수 그리스도보다 목사가 더 높아져서 복음이 아니라 목사의 주장에 목숨 걸고 따르는 사람들도 직접 보지 않았던가!
교회의 목사, 장로, 권사, 또는 안수집사와 같이 지도자가 되면 필연적으로 한 가지 유혹이 따른다. 공명심(功名心)이다. 명예를 향한 탐욕이 생겨서 어떡하든 공을 세워 자기 이름을 널리 드러내 영향력을 키우고자 하는 욕심에 따른 행동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수십, 수백, 심지어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목사님, 장로님 하면서 떠받들어 주는 것 같고 어느 장소에서든 중심이 되는 것 같고 또 자기 없으면 일이 안 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면서 오직 자기만 뭐든 잘 할 수 있는 것 같고 자기가 하면 뭐든 잘 될 것 같고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가 훨씬 더 뛰어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이제 모두가 자기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 도취되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부패한 심령이 갖는 자연스러운 정서이다. 또는 초신자나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성도가 갖는 어리석은 마음이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이라면 점차 이러한 유혹에 저항하는 힘을 갖게 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조금씩 이겨내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유혹에 더욱 함몰되고 결국에는 디오드레베처럼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에게 장악된 교회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한낱 사조직에 불과할 뿐이다. 그 목적이 개인들의 친목에 있든지 경제적 이익이나 정치적 이익에 있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그 교회는 말만 교회일 뿐이며 교회의 탈을 쓴 사탄의 하수인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라는 탈을 쓰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방해가 되며 사람들이 교회를 오해하고 멀리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교회는 너무도 당연하게 복음을 무시하고 성경의 권면들을 무시하며 자기들의 눈에 좋은 것들을 무대뽀로 한다. 주변의 사람들이나 심지어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이 나서서 쓴소리를 해도 절대 듣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마치 성경에 따라서 하는 것처럼 눈속임을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도 확실하다.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사람들이 교회를 싫어하게 만든다. 사탄이 좋아할 일들만 골라서 하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의 끝나고 우리가 예전처럼 다시 모이기 시작하면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들이 교회에 더욱 많이 나타날 것이다. 팬데믹으로 인해서 교회가 모이지 못하고 활동이 억제되어 억눌린 공명심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게 될 것이며, 그러면 그 폐해는 교회가 고스란히 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 모두는 사도 요한의 경고처럼 우리 교회에 그러한 사람이 있는지 세심하게 살펴보고 그러한 사람이 교회를 망가뜨리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떠나도록 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교회 전체가 조심해서 그러한 사람을 경계해야 하는데, 이는 일부가 동조하기 시작하면 결국 전체가 넘어가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우리 주님이 어떠한 삶을 사셨는지 깊이 생각하고 또한 사도들이 어떻게 교회를 섬겼는지 깊이 묵상해야 한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낮추시며 사람들의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섬기려 오셨고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놓으셨다. 주님을 본받아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고후 1:24). 그리고 또한 이렇게 가르쳤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 2:3).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6).
그러므로 아주 잠깐 조금만 생각해 봐도 너무도 확실하다. 우리는 항상 스스로를 성찰하며 조심해서 스스로 높아지려 하지 말고 또한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이 교회에서 교인들을 주관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무엇을 가지고 유혹하더라도 그런 사람에게 동조하고 뜻을 함께 해서는 교회를 망치는 것일 뿐이다. 팬데믹이 끝나면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눈에 띄게 많아질 것이다. 경계해야 한다. 조심해야 한다. 우리 주님의 교회에서는 오직 주님만이 높임을 받아야 하고 우리 주님의 아버지가 영광과 감사와 찬양을 받아야 한다. 어느 누가 어떤 말로든 유혹하면 우리 교회에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경계심을 가지고 살펴보면서 교회 전체가 사조직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디오드레베가 벌인 일은 2000년 전에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다. 지금도 어느 지역에서나 어느 교회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 팬데믹의 후유증으로 인해 더욱 많이 일어날 것이다. 말세지말에 성도를 어떻게 하든지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처럼 달려드는 사탄의 졸개들이 양의 탈을 쓰고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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