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개혁에 대하여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계2:18~23, 29)
우리의 순진한 기대와는 다르게,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이 다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아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분류해 보자면, 첫번째는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섬기는 사람이요, 두번째는 하나님을 믿고자 하지만 스스로는 아직 회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요, 세번째는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스스로는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요, 마지막 네번째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어떤 목적을 위해서 교회에 출석만 하는 사람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부분의 교인이 첫번째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마도 첫번째 부류가 가장 적은 숫자일 것이다. 심지어 목사나 장로, 권사들조차도 첫번째 부류에 속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요즘 한국에서나 미국에서 교회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교회가 세상의 윤리 의식조차도 따라가지 못하고,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보다 못한 짓을 뻔뻔하게 벌이고 다니면서도, 오히려 적반하장식으로 구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이다. 사실 이렇게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대부분 세번째나 네번째 부류에 속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기 배를 채우는 사람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첫번째 부류인 사람들, 즉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두려워 하기 때문에 함부로 죄를 범하지 않고, 또는 죄를 범하였다 하더라도 반드시 죄를 인정하며 죄값을 달게 받고 돌이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번째 부류인 사람들도, 비록 회의에 빠져 반신반의하지만,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진정한 열심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자 죄와 악에서 떠나려고 몸부림치기 때문이다.
교회 문제의 근본적 이유
그렇다면 요즘에는 한국 교회에 왜 이렇게도 세번째와 네번째 부류의 사람이 많아진 것일까. 물론 여러가지 다양한 이유들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만의 자유로운 분위기도 제시될 수 있고, 또는 이제 겨우 100여년 밖에 되지 않은 기간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며, 또는 신학의 깊이와 감동의 부재가 제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목사들의 신앙이 교회에 감동을 주지도 못하고 모범이 되지도 못하며 오히려 불순종의 길을 용납했기 때문이고, 심지어 목사 자신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 아는 척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물론 훌륭한 목사들도 많이 있고, 모든 목사들이 다 문제라는 의미는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측면을 보면, 목사들이 가장 큰 문제인 것은 확실하다.
최근의 설문조사를 참고해 봐도 이점은 뚜렷이 드러난다. 목사들 스스로도 문제가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 (한겨레 기사 참조: http://www.hani.co.kr/arti/PRINT/979363.html 교회 개혁의 필요성은 99%가 인정했고, 목사 및 노회와 총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이 전체의 61.2%로 드러났다). 그런데 어쩌면 더 큰 문제는 잘못된 목사를 바로잡을 수 있는 수단이 거의 없다는 데 있다. 노회나 교단 총회 등이 있지만 사실상 목사 치리에 있어서 노회나 교단 총회는 거의 유명 무실하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제대로 된 치리를 행사하는 것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또는 노회나 교단 총회에서 제대로 치리를 해서 목사 직분을 박탈해도 목사가 담임하는 교회를 떠나지 않고 치리에 순종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더 이상 뭔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기껏해야 교회 간판에서 교단 이름을 삭제하는 것이 전부일 뿐이다. 더 나쁜 경우는 목사가 담임하는 교회를 다른 교단으로 옮겨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목사가 새로운 교단을 만들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목사들 스스로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또한 목사들 스스로가 개혁의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개혁이 완수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이미 교회가 시스템적으로 개혁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면 교회 개혁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중세 시대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하나님의 교회이니 하나님께서 직접 개혁하실 것이다. 엘리야 선지자가 이세벨에게 쫓겨 광야로 도망친 뒤에 크게 낙담하여 실의에 빠져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이 지금도 여전히 적용된다. 모든 이스라엘이 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바알에게 무릎 꿇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엘리야 이외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 칠천 명이 남아 있다고 하셨다. 이들이 참 이스라엘인 것처럼 지금 이 시대에도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람이 있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역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들이 시스템에 얽매여 스스로 할 수 없다면 성도들이라도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해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성도들이 개혁의 동력을 일으켜야 한다. 가장 확실한 행동은 문제 있는 목사가 담임하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것이다. 깊이 살펴보지 않고 상식 선에서 생각해 봐도 문제가 많은 목사, 즉 부당하게 교회를 세습하는 목사나 성범죄를 저지른 목사, 교인을 상대로 사기를 친 목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고 이단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목사, 교단 총회의 치리에 순종하지 않는 목사, 성도를 섬기는 일을 쇼처럼 하는 목사, 성도를 섬기는 일보다는 정치에 관심이 많은 목사 등등이 시무하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런 목사를 생각해 보라.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전체 교인을 일일이 기억하며 각 교인을 위해 중보기도 하지 않는 목사, 하나님 말씀을 매일 힘써 묵상하고 연구하며 교인들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목사, 여러가지 고통과 고난 속에 슬퍼하는 교인 가정과 함께 슬퍼하지 않는 목사, 또는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삶의 모범을 보이지 않는 목사. 이런 목사는 목사 노릇을 하며 단지 자기 배를 섬기는 사람일 뿐이다. 이러한 목사가 시무하는 지역 교회들만 없어지더라도 한국 교회는 훨씬 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며 또 능력있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 요한이 전한 말씀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이렇게 문제 있는 목사가 담임하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다른 교회로 옮기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사도 요한이 두아디라 교회에 전한 말씀,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계2:22~23)고 하셨다.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배를 우상으로 섬기며 목사 노릇하는 사람과 함께 지내면서 화합하는 사람은 자기 행위를 회개해야 한다. 이 사람은 아마도 자기가 우상을 섬긴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목사와 함께 하는 것 자체가 간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올바른 회개는 그 목사 노릇하는 사람과 절교하고 돌아서서 온전히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것이다. 그러니 현재의 교회 시스템과 상황을 고려해 볼 때에 그런 목사가 담임하는 교회를 떠나서 참된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로 옮기는 것이 올바른 회개이다.
일주일에 예배를 몇 번이나 드리는가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한 게 아니다 (물론 예배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단 한 번이라도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는 것이 핵심이며, 가장 중요한 예배는 주일 대예배가 아니다.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며,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슬퍼하는 영혼과 함께 드리는 예배가 가장 중요하며, 목사가 그러한 사람의 처지에 내려가서 함께 슬퍼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일수록 예배당에서 좋은 자리에 앉아야 하며, 몸이 아파서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사람일수록 예배당 앞자리에 앉아서 목사와 전 교인이 함께 위하여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가장 두렵게 느꼈던 성경 말씀이 있다. 눅12:47~48 말씀으로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는 말씀이다. 목사가 된 사람들은 분명히 우리 주님께 많이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경험과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우리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주님은 분명히 그들에게 더 많이 달라고 하실 것이다. 이 시대의 목사들은 그때에 무엇을 주님께 드릴 것인가. 목사는 자기 뜻대로 목양하는 사람이 아니다. 양치는 목장을 비유로 들면, 우리 주님은 목자요 성도는 양들이로되 목사는 목자의 뜻을 수행하는 목양견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찬양대를 비유로 들면, 우리 주님은 지휘자요 성도는 찬양대원이고 목사는 지휘자를 따라서 성도가 찬양할 수 있도록 음을 잡아주는 반주자인 것이다.
교회 개혁의 시작점
혼탁하고 어려운 시기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면서 성령님의 가르치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 주님이 성령님을 보혜사로 보내신 이유이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한 직분으로서 “목사와 교사”를 세우셨지만 무엇보다도 성령님이 우리를 가르쳐 주시므로 우리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성경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성령님이 가르쳐 주신다는 것은, 우리가 무슨 직통계시를 듣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성경 말씀대로 살게 하시는 것이다. 목사도 성령님의 가르침을 배워야 하며, 성령님의 가르침을 좀 더 깊이 배워서 교인들에게 일종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목사가 자기 직분에 충실하지 않으면 다른 충실한 목사와 함께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도 올바른 방법이다. (그렇다고 이 글이 성도들에게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자기 맘에 안 들어서 교회를 옮기도록 부추기는 식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도가 전혀 없음을 명확히 밝혀 두고자 한다.) 목사의 잘못된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목사와의 친분이나 어떤 망설임 때문에 교회를 옮기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 개혁을 목사들에게만 맡겨두지 말고 이제 성도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행동해야 할 때인 것이다. 두아디라 교회에 보낸 메시지처럼 우리는 즉시 행동해야 한다. 어느 교회로 옮겨야 할지 고민하지 말고,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시리라 믿고 행동하면 된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야 하고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익숙해질 때까지 조금은 불편할 수도 있지만 모든 교회는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이므로 그런 불편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고, 더욱이 그런 이동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함께 성장하는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될 것이다.
지금 현재 한국 교회는 큰 문제에 빠져 있다는 것을 누구나 공감한다. 그리고 그렇게 된 데에는 목사들의 잘못이 가장 크다는 것도 대부분 공감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목사들이 스스로 회개하고 한국 교회를 개혁할 수 있는 시기와 실력을 이미 상실해 버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성도들이 일어서서 개혁해야 한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행동은 그런 문제 있는 목사가 담임하는 교회를 출석하지 않는 것이다. 성도는 그런 목사와 함께 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목사를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런 교회를 떠나서 참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에 출석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 개혁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