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의 구조와 요점
서론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산상수훈 만큼이나 유명한 말씀은 없는 것 같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산상수훈 말씀 중에 일부라도 들어보았으며 그 말씀을 일상 생활에 인용할 만큼 유명하다. 그래서 이 말씀의 핵심을 깊이 있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크리스찬에게는 더욱 중요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또한 산상수훈의 말씀은 네 개의 복음서 전체를 이해하는 데까지 연결되므로 무척 중요한 것이다. 본 글에서는 산상수훈이 기록된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말씀을 거시적으로 살펴서 그 구조와 핵심 요점을 알아보고자 한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산상수훈 말씀의 구조와 핵심을 먼저 알아야 산상수훈의 각 구절이나 소단락을 전체 구조 안에서 핵심을 벗어나지 않고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 없이 각 소단락의 말씀을 먼저 파악하려 한다면 대부분의 경우에 윤리적 또는 도덕적 교훈으로 접근하거나 아니면 기독교적 접근을 하지만 그 깊이를 깨닫지 못하고 피상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으므로 전체 구조와 핵심 요점을 먼저 파악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본론
시대적 배경
신약 성경의 첫번째 책인 마태복음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기록된 복음서이다. 그래서 구약 성경을 인용한 구절들이 마태복음에서 많이 발견된다. 산상수훈의 말씀은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으며, 마태복음에서도 시작 부분에 기록되어 있다. 사도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하면서 의도적으로 산상수훈의 말씀을 앞에 배치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도 마태는 산상수훈의 말씀이 구약 성경을 신약 성경과 연결되도록 만들고 있으며 또한 신약 성경 전체의 길잡이 역할을 하며 산상수훈의 의미가 복음서 전체로 확산되도록 하고 있다. 이렇게 해석하게 된 근거는 본 글에서 제시될 것이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선포한 첫번째 말씀이 “회개하라 하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선포한 이 나라는 세상적 능력의 나라가 아니라 하늘적 능력의 나라, 즉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나라인 하늘에 속한 나라를 선포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그 나라를 선포하시는 데 있어서 이스라엘 나라/왕국과는 어떻게 같고 또한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먼저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개념과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통념을 배경으로 해서 선포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 당시의 시대적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산상수훈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주후 27년 즈음의 시대적 배경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첫째, 유대인들은 율법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하고 그러한 표면적, 문자적 이해를 바탕으로 율법을 613 개의 조문으로 세분화했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라고 생각했었다. 둘째, 그들이 대망하는 이스라엘 나라는 이 땅에 재건되는 다윗/솔로몬 왕국과 같은 힘과 부의 나라였다. 셋째, 그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을 구출해 줄 메시야가 와서 그들이 대망하는 이스라엘 나라를 세워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들이 이러한 상황에 있을 때에 예수님이 나타나서 엄청난 기적을 베풀며 새로운 나라에 대해서 선포하셨으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야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이 기대했던 나라는 세상적 나라였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무지했던 그들은 그저 다윗 왕국처럼 강성한 나라가 세워져서 유대인들이 세상의 정점에 서는 통치자가 되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이 세상을 통치하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구조 분석 – 전체
이러한 배경적 상황에서 산상수훈의 말씀이 선포되었고 사도 마태는 이 말씀을 마태복음의 맨 앞에 위치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하는 말씀과 수행하는 사역에 대해 기본 방향을 먼저 설정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사역의 목적이 바로 하늘에 속한 나라를 이루기 위한 사역이라는 것이며 하늘에 속한 나라가 어떠한 나라인지 그 기초적 본질을 설명하고 가르치시며 삶으로 직접 보여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미 임하고 있는 그러나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는 않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종말론적 비전을 가지고 설명하시며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큰 단락으로 구분하면, 먼저 (1) 첫번째 단락은 5장 1절부터 16절까지의 말씀이다. 이 단락은 하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받는 9 가지의 복과 함께 그 복을 누리는 사람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가르침이다. (2) 두번째 단락은 5 장 17 절부터 6 장 4 절까지의 말씀이다. 이 단락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재해석하는 가르침이다. (3) 세번째 단락은 6 장 5 절부터 34 절까지의 말씀이다. 이 단락은 하나님과 참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서 설명하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4) 마지막 단락은 7 장 1 절부터 27 절까지의 말씀이다. 이 단락은 이렇게 설명된 하늘의 나라의 삶을 세상에서 살아내면 나타나는 결과들에 대한 말씀이다. 그리고나서 맨 마지막에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아주 짧게 기록되었다.
모든 단락은 세상의 나라에 속한 사람과 하늘의 나라에 속한 사람에 대한 비교를 통해서 보다 명백하게 제시되고 있다. 첫번째 단락의 9 가지 복에 대한 말씀 역시 역으로 생각하면 저주에 대한 말씀이 된다. 복과 저주는 항상 한 쌍으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를 들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의 나라가 그들의 것임이요” 말씀을 역으로 생각하면 심령이 부자인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결코 하늘의 나라에 속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나서는 표면적으로 율법을 이해하고 표면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경우와 그리스도 안에서 재해석된 율법을 지키는 경우가 비교되고, 이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온 맘 다해 섬기는 경우와 두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경우가 비교되며, 마지막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재해석된 율법을 지키는 하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의 삶과 율법이 없거나 율법을 표면적으로 지키는 세상의 나라에 속한 사람의 삶이 비교된다.
이제 각 단락을 조금 더 깊이 살펴보자.
구조 분석 – 첫번째 단락 (5:1~16)
이 단락은 하늘의 나라에 대한 가르침 중에서 하늘의 나라의 백성은 누구인가에 대한 설명이다. 그들은 9 가지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복들은 한 열매의 9 가지 맛과 같은 것으로서, 어떤 복은 받고 어떤 복은 받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갈라디아서 5 장에 기록된 성령의 열매와 같이 전부 받든지 아니면 하나도 안 받든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자기는 심령은 가난한데 온유하지는 않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사도 마태가 왜 9 가지의 복을 통해서 하늘의 나라를 먼저 설명했는지를 알려면 앞에서 언급한 시대적 배경이 되는 당시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거기에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선포하신 첫 말씀은 “회개하라 하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더하여 생각해야 한다. 그럴 경우에 사람들은 그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인가 하고 모두 궁금해 하면서, 이제 드디어 이스라엘에 강성했던 다윗/솔로몬 왕국, 즉 민족주의적인 메시아 왕국이 다시 세워지겠구나 하며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고대하는 세상의 나라와는 차원이 다른 하늘의 나라에 속한 백성은 누구인지 먼저 설명함으로써 하늘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고 그 나라의 백성에 대해 언급하며 그것은 그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더욱이 여기에 소개된 복들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복들이므로 예수님이 단순히 하늘의 나라를 소개한 것뿐만 아니라 그 나라를 종말론적 관점에서 소개한 것이다.
사도 마태가 ‘하늘의 나라’ – 개역성경이나 개정개역성경에서는 ‘천국’으로 번역된 용어 – 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서 대개는 하늘이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므로 하나님 대신에 하늘이란 단어를 사용해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고자 ‘하나님의 나라’를 ‘하늘의 나라’로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늘의 나라’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가, 단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고자 했다는 이유보다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다윗 왕국과 비슷할 것이라는 세상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의 생각을 교정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세상적 차원의 나라가 아니라 하늘적 차원의 나라라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늘의 나라’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이것은 산상수훈의 말씀 중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으로 보아 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이 하늘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실 때 복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심으로써 그들은 자연스럽게 율법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바로는 사람이 복을 받으려면 율법을 지키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신명기 27 장에 기록된 것처럼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어기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모세의 가르침을 그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마치 율법과는 전혀 상관없이 엄청난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당연히 예수님께 여쭤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율법은 이제 소용이 없는 것인가요? 하는 질문이었다. 예수님의 대답은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늘의 나라의 백성은 율법을 다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이다. 하늘의 나라와 율법 모두 하나님의 성품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서로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
구조 분석 – 두번째 단락 (5:17~6:4)
이 단락은 하늘의 나라에 속한 백성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이다. 첫번째 단락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해서 두번째 단락이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율법은 이제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따라서 두번째 단락은 율법의 참 의미, 곧 예수님 안에서 재해석된 율법, 새 언약의 관점에서 본 율법, 하늘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의 근본인 하나님의 성품이자 율법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율법에 대해서 설명해 주신다. 세상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표면적으로 이해되는 율법은 사람을 물리적으로 죽이는 것만을 살인이라고 규정하지만, 하늘의 나라의 율법의 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이해되는 율법은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살인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을 방해하고 더럽히는 모든 것이 다 악인 것이다. 이와 같이 간음, 결혼, 맹세, 그리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율법을 재해석하여 표면적이고 문자적인 이해가 아니라 공의와 사랑에 입각한 이해를 제시하시며 이제는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심지어 그들이 사랑의 표현으로서 행하는 구제조차도 구제받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구제하는 사람의 자랑을 위한 것이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한 요식행위일 뿐이므로 사랑의 행위 역시 그 본질적 의도가 더 중요하다고 하신다. 이렇듯 이 두번째 단락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율법들을 재해석하시고 하늘의 나라에 속한 백성이 지켜야 할 율법은 더 이상 표면적인 준수가 아니라 내면적인 준수가 필요한 것이며 그것이야 말로 하늘의 나라의 백성인 표지인 것임을 가르쳐 주신다.
첫번째 단락과 두번째 단락의 말씀을 이해함에 있어서 이 말씀이 사람이 하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독립적 조건을 설명하는 말씀으로 간주하면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게 된다. 사람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노력해서 심령이 가난해야 복을 받게 되는데 그 복이 바로 하늘의 나라를 소유하는 것이라는 식의 이해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 하늘의 나라를 소유하는 복을 받으려면 예수님을 바라보아야만 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사람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심령을 가난하게 할 수 있으므로 그 능력을 사용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의 나라를 소유하려고 노력하라는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것은 불가능하니 –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세상적 욕심을 모두 다 완전히 버리고 하늘적 소망 즉, 하나님을 향한 소망으로 채워지기를 고대하는 마음인데 사람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러한 심령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오직 예수님만을 믿고 의지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도 살리시는 분이시므로 예수님이 해결책을 주실 것을 믿고 예수님을 의지하라는 가르침이다.
율법에 대해 가르치신 두번째 단락도 마찬가지이다. 형제를 향한 미움만으로도 살인과 같은 죄를 저지르는 것이고 여자를 향해 음욕을 품기만 해도 간음의 죄를 저지르는 것이며 거짓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르는 것이 되는데 그러한 죄를 평생 단 한 번도 저지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는 누구도 하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은, 이제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이 죽은 사람도 살리신 것처럼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해결책을 주실 것이라고 믿고 의지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9 가지의 복을 받아서 하늘의 나라를 사는 사람은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의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한 사람이자 율법의 정신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구조 분석 – 세번째 단락 (6:5~34)
세번째 단락은 하늘의 나라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으로서, 하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율법을 주신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치시는 말씀이다. 하늘의 나라의 주인이자 왕으로서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은 하늘의 나라의 백성 각 사람의 아버지이시며 또한 백성 모두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시므로 나 혼자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은 무섭고 권위적인 군주가 아니라 자애로운 아버지로서 제시된다.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가까이 계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의 필요를 돌아보시며 적절하게 채워주시고 자녀들을 직접 양육하신다. 그리고 자녀들은 온 맘 다해 온 정성 다해 그리고 온 힘을 다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며 섬긴다. 이 단락의30 구절 중에서 아버지라는 단어가 11 번이나 나올 만큼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강조하여 드러내신다. 예수님은 이 관계에 대해서 다양하게 설명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자녀와 자녀가 아닌 사람을 비교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얼마나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인지, 하나님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 존재인지, 그리고 하늘의 나라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사는 존재인지 가르치신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서 제시되는 하나님과 하늘의 나라의 백성의 관계는 가족과 같은 연합의 관계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가족으로서 하늘의 나라에서 사시는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할 때마다 불러내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기도와 금식 그리고 단일한 마음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를 향해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며,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우리를 어떻게 양육하시는지 가르쳐 주신다. 우리는 이 관계에 있으면서 다른 어떤 것도 신경쓸 필요가 없다. 만일 다른 어떤 것을 신경쓴다면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형식 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은 일들도 실제로는 자신의 체면이나 명예를 위한 자랑 또는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한 것에 불과할 수 있다. 하나님과 연합된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하늘의 나라의 백성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제시하신 것은 하나님과 하늘의 나라의 백성의 연합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하늘의 나라의 백성의 연합을 함의한다. 하나님 아래서 예수님과 하늘의 나라의 백성이 한 자녀가 되고 예수님은 맏아들의 위치에 놓여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17 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와 같이,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고 예수님 안에서 우리도 하나님과 하나 되는 영광을 누린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늘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구조 분석 – 마지막 단락 (7:1~27)
마지막 단락은 하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그 나라의 백성이 세상에 어떻게 드러나는지 가르쳐 주시는 부분이다. 하늘의 나라에 속한 백성이 세상을 새 언약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해석된 율법을 바탕으로 하늘의 나라의 백성답게 살게 되면 세상의 나라에 속한 백성과 어떻게 다를지 설명해 주신 말씀이다. 이는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며 정죄하기 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을 먼저 성찰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이 자기 눈 속의 들보를 알지 못하고 남의 눈 속의 티끌을 판단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남의 눈 속의 들보를 보면서도 자기 자신의 눈 속의 티끌을 먼저 빼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그리고 자기 눈 속의 티끌을 먼저 빼내었다고 해서 남을 판단하는 것이 허락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기의 깨끗한 눈을 통해서 보면 남의 눈 속에 들보가 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을 무너뜨리고 더불어 우리를 무너뜨리는 비난과 정죄가 아니라 남을 살리고 더불어 우리를 살리는 사랑이 먼저여야 한다.
또한 세상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갈 때에 하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더라도 그 길을 오히려 기꺼이 가며, 세상 사람들이 허랑방탕하게 세월을 보내면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또는 넓은 길을 걸으며 악한 열매를 맺을 때에 하늘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는 맺는다. 이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해석된 율법을 내면적으로 준수하여 맺는 열매이다. 그래서 세상을 살면서 어떠한 일이 부딪쳐 오더라도 바위에 집을 지은 사람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삶이 세상에서 하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늘의 차원으로 사는 삶이다. 이렇게나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모를 수가 없으며 또한 이렇게나 다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나라의 백성들로부터 핍박을 당하더라도 흔들릴 수 없다는 말씀을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의 말씀이 교리적 가르침이나 설명에서 끝나지 않고 삶의 영역까지 이어지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하늘의 나라는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는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떤 이론이나 말이나 권고 정도가 아니라 삶의 규범으로 삼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이 몸소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지금 여기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야 우리가 바위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 된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완전한 삶을 누리지는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고 있다는 신호는 우리의 말이 아니라 삶 자체에서 계속 발신되어야 한다.
이렇게 네 개의 단락들로 구성된 산상수훈의 말씀이 다 선포되자 7장 마지막에는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의 의미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전반적인 반응뿐만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 될 것인지에 대한 전조를 드리우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는 차원이 다른 하늘에 속한 가르침이었다. 사도 마태는 이 말씀을 마태복음의 앞 부분에 위치함으로써 마태복음을 읽는 유대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읽으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구조 분석 – 종합 및 적용
네 개의 단락을 종합하면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예수님이 가져오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이다. 그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는 차원이 다르게 높은 나라이며 하나님이 자애로운 아버지로서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이제 그 나라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 임하게 되는데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독립적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게 된 하늘의 나라에서 율법의 정신에 맞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열매는 세상의 소금이요, 이사야 선지자가 외쳤던 바와 같이 빛이 될 것이다.
이렇게 이해되는 산상수훈의 말씀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 보자. 마태복음 10:34~38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 하신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에 적용해 보자. 그러면 이 말씀이 한 가족들끼리 서로 반목하고 불화하며 배척하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은 원수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데 한 가족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그를 미워하고 배척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산상수훈의 말씀을 바탕으로 해서 이해하면, 이 말씀은 세상적 나라는 하늘적 나라와 결코 함께 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빛과 어둠은 결코 함께 할 수 없으며 하나님과 맘몬도 결코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세상적 나라에 살든지 아니면 하늘적 나라에 살든지 둘 중에 하나에서만 살 수 있다. 세상적 나라에 사는 사람은 하늘의 나라를 반항하며 거부한다. 하늘적 나라에 사는 사람은 세상적 나라를 거부하고 배척해야 한다. 그의 삶은 형제와 이웃뿐만 아니라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 그 이웃이 지금은 하나님을 거부하며 하늘적 나라를 무시할지라도 나중에는 하나님께 돌아올 수도 있다. 근시안적이고 정욕과 이익에 휘둘리는 세상적 나라의 관점에서 보지 말고 하늘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요점은 예수님을 따르며 하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율법의 정신을 지키는 삶을 사는가 아닌가 하는 점일 뿐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나라에서의 삶의 열매가 어둠을 배척하며 세상의 나라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나라에 사는지 하늘의 나라에 사는지를 결정하는 요소는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아닌가 하는 점, 즉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에게 연합되어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세상의 나라와 하늘의 나라가 결코 함께 할 수 없다는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검’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살펴본 산상수훈의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전반부에 해당한다. 이 전반부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고 누구나 좋은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크리스찬이 아닌 사람은 어느 정도 왜곡된 이해를 할 수밖에는 없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산상수훈의 말씀을 높이 평가하며 인류가 따라야 할 교훈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반면에 후반부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져 있으며, 후반부는 전반부와는 다르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 의미를 알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후반부를 알아야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고 따라서 산상수훈의 말씀에 대해서도 보다 깊이 있게 본질적인 의미를 깨닫게 된다.
만일 산상수훈의 말씀이 예수님의 가르침의 전부라고 이해하면 그것은 전혀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본의가 심각하게 왜곡되어 결코 기독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철저히 아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산상수훈의 말씀만을 따로 떼어내어 교과서처럼 간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산상수훈의 말씀은 아주 훌륭한 윤리적 도덕적 교훈이 되고 또한 사람이 천국 – 나중에 죽어서 가게 되는 평안하고 좋은 곳에 가기 위한 조건을 가르치는 말씀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룬 업적도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도 전혀 상관이 없다. 그저 ‘나’와 ‘교훈’만 남게 된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산상수훈의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전반부이다’고 말한 이유이다. 후반부는 마태복음보다는 요한복음에 더 잘 설명되어 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어떤 의미인지가 보다 더 뚜렷하게 잘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신서들로 이어지며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과 죽음과 부활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해석하는 글을 기록하였고 또한 예수님을 대신하여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기록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떻게 세상에서 구현되며 하늘의 나라가 확장되고 있는지 기록하였다.
결론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산상수훈의 말씀은 거시적으로 보아 네 개의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상의 나라와는 차원이 다른 하늘의 나라는 무엇이며 그 나라에 속한 백성의 삶은 어떠해야 하며 그 나라의 주인이자 왕이시며 백성의 아버지인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는 어떠한지, 그리고 그 백성의 삶이 세상에 드러났을 때에 세상은 어떠할 것인가를 설명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혹자들의 이해와 같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을 설명하신 말씀이 결코 아니다. 이 말씀은 종합적으로 오직 예수님만이 가져오실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게 함과 동시에 모든 복음서에 대한 길잡이 역할과 함께 복음서를 여는 역할을 한다. 또한 산상수훈의 말씀 이후에 이어서 이루어질 예수님의 사역, 즉 하늘의 나라를 이 땅으로 가져오시는 사역의 완성에 대해 소망를 품게 하는 것이다. 그 사역의 클라이막스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그 사역을 이해할 수조차 없으나 우선 산상수훈의 말씀으로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하늘의 나라의 시작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나라의 완성을 향해 인내하며 달려간다.
그러므로 이제 마태복음의 시작 부분에 기록된 산상수훈의 말씀을 읽고 이해한 독자는 마태복음의 나머지 부분과 다른 복음서들 및 서신서들을 어떠한 관점에서 그리고 어떠한 문맥에서 이해해야 하는지 그 방향을 명확하게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이 산상수훈을 어떻게 완성하는 것인지 고민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올바르게 깨닫게 된다. 이러한 가르침과 어마어마한 기적을 행하신 분께서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냥 죽어야만 했던 이유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보다 더 크게 보면, 구약 성경이 신약 성경으로 어떻게 이어져야 하는지 또는 구약 성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 방향을 제시해 준다. 따라서 우리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조각조각 쪼개서 미시적으로 보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이처럼 먼저 거시적으로 보고 전체적인 그림을 이해하고 나서, 각 구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신뢰하고 의지하는 동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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