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하나
우리 속담 가운데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것이 있다. 사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더 빨리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는데, 이와 반대로 목적지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된다는 의미로, 사람이 많으면 오히려 될 일도 안 되는 상황을 가리킬 때에 사용된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 상황을 수없이 겪어봤다. 소수의 사람들로도 잘 되던 일을 더 빨리 마치려고 사람을 몇 명 더 붙였더니 오히려 일이 안 되고 결과도 더 나빴던 경우도 보았다. 우리 인간들의 한계인 것일까…
세상의 통념과는 다르게,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는 하나에 하나를 더해서 더 큰 하나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에 하나를 더해서 둘이 되고 또 그렇게 셋, 넷, 열, 백, 천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에 하나를 더해도 하나이고 또 하나를 더 더해도 하나이고 이렇게 백번을 더해도 여전히 하나인, 그러나 맨처음의 하나보다는 훨씬 더 큰 하나인, 그런 하나가 되는 길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성경은 그렇게 하나로 커지는 하나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며 또한 교회라고 부른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이러한 하나를 희미하게 느끼고 체험할 뿐이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면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체험할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지고 대단하고 위대하며 신나는 일이 아닌가! 새로운 하늘과 땅에서 완전히 이루어질 하나됨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가슴이 설렌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우리 크리스찬 각자는 여전히 피조물이라는 한계로 인해서 다른 크리스찬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다 알고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과 배려를 통해서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하며 하나가 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원형이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인류가 잃어버린 원형이었고 예수님으로 인해 회복되었으며 마침내 완성될 우리의 본래 모습이다.
이렇게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하나됨에 대한 맛보기로서, 현재의 교회를 통해 우리는 이 땅에서 더 큰 하나됨을 바라본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더 큰 하나됨에 대한 유비를 매주마다 시전하고 있었다. 바로 찬양대의 합창이다. 40 명이 합창을 하든 100 명이 합창을 하든 화음으로 어우러진 하나의 찬양이 나온다. 여기에 100 명을 더하더라도 동일한 찬양이 나온다. 소리가 더 커지고 웅장해지며 감동이 더 커졌지만 모두가 합하여 하나의 찬양을 노래한다. 우리는 주일마다 교회에서 교회가 지향하는 목표를 바라보고 있었으면서도, 그 목표를 너무도 제한해 버렸고 그 목표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 앞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전시하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참으로 눈 뜬 장님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합창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눈을 돌리면 우리의 눈은 길을 쉽게 잃어버린다. 합창으로 보여진 하나됨이 우리의 삶에서는 반목과 질투와 시기와 비판과 경멸과 무시와 억압과 경쟁으로 인해서 깨어지고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각자 혼자인 것처럼 느낄 때가 너무도 많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쉬운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참된 크리스찬이 많아야 교회는 더 큰 하나로 성장할 수 있는데, 교회가 세상에서 쉬워 보였기 때문에 크리스찬이 아닌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를 자기들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조차도 교회는 예수님의 사랑과 공의로 녹여내야 하는데, 교회가 오히려 휘둘리고 있기 때문에 쉽게 분열하고 반목하며 서로서로 비판하기만 할 뿐이다. 여기에서 목회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목회자들 중에서도 크리스찬의 진정성을 의심받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니 교회가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목회자를 중심으로 하여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가 항상 예수님 안에서 더 큰 하나됨을 이루어 낼 수 있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말씀과 모범으로 양육하고 사랑과 인내로 품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 안에서 교회 지도자들을 존경하고 따르며 성장하여 더 큰 하나됨을 누리며 즐거워 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성도들과 연합하는 즐거움이 교회를 넘어서 밖으로 퍼져 나갈 수 있도록 하고, 그 즐거움이 부러워서 교회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도록 해야 한다. 멋지고 웅장한 합창단의 공연에 사람들이 즐겁게 찾아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다. 애초부터 그렇게 되어야만 하도록 만들어졌다. 소망과 능력은 예수님께 있기 때문이고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우리는 여전히 피조물이며 목회자도 사람이기에 교회가 커지면 하나됨을 이루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현실적으로는 100 여명이 한계인 듯 싶다. 그래서 수백, 수천, 수만명이 모이는 교회는 하나됨의 즐거움을 교회 전체로는 누릴 수 없다. 소그룹 모임이나 구역별 모임에서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교회 전체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가 되기는 무척 어렵다. 부목사나 다른 교역자들이 옆에서 보조한다고 하더라도 쉽지 않다. 담임 목사가 부목사들과 하나된 교회를 찾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니 수천,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는 이미 하나됨을 포기한 상태에서 하나됨의 즐거움이 아닌 다른 즐거움을 찾는 모임이 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교회 전체가 하나되는 즐거움을 누리는 교회는 다른 교회와의 연합도 쉽게 이루지만 그렇지 못한 교회는 다른 교회와의 연합 역시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실력 있는 합창단은 다른 좋은 합창단과의 연합 공연도 쉽게 잘 하지만, 어수선한 합창단은 다른 좋은 합창단이 함께 하더라도 여전히 어수선할 뿐이다.
성경은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유비를 사용한다. 나무, 몸, 집, 건물 등과 같이 크기와 상관 없이 유기적으로 하나인 사물을 사용해서 설명한다. 몸은 크기가 아주 작아 아기처럼 작아도 여전히 하나의 몸으로서 모든 기능이 가능하며 크기가 아무리 커져도 여전히 하나의 몸이다. 그리고 크기가 커진 만큼 더 큰 힘이 나오고 더 큰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크기가 커졌다고 해서 다리가 팔에게 필요없다고 할 수 없고 팔이 눈에게 필요없다고 할 수 없다. 크기에 상관없이 유기적으로 하나이며 하나로서 기능하고 하나됨의 즐거움을 누린다. 교회는 부부처럼 두 사람이지만 하나인, 그리고 아이가 생겨서 가족이 늘어도 여전히 하나인 것으로 하나님의 가족이며, 또한 교회는 전체가 하나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합창으로 찬양하는 찬양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할 수 있다. 조금 더 인내하고 조금 더 사랑하고 조금 더 웃고 조금 더 안아주고 조금 더 형제의 짐을 나누어 지고 조금만 더 예수님을 닮고자 하면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능력과 실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있다. 더 큰 하나를 이루며 더 큰 하나됨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교회를 통해서 복음은 더 능력있게 역사할 것이다.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이루어질 미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주님도 우리를 참아주시고 계신다는 것으로부터 위로를 얻으며 우리도 서로 참고 인내하며 지금 시작해 보자.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서 역설적으로 교회의 중요성을 찾아낸 우리들은 지금은 팬데믹으로 인해서 서로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지내야만 하지만 다시 얼굴을 마주하며 모일 수 있는 때가 되면 교회 전체가 하나 되는 즐거움을 누려보자. 모두가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겪으면서 깨닫게 된 이 진리를 교회 안에서 실현해 보자. 우리에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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