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앙에 입각해서 복음을 선포하다 보면 또는 그룹으로 성경공부 하다 보면 구원과 관련해 한 가지 질문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만 구원을 받게 된다면 불신자를 향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서로 대화하다가 또 다른 질문이 나오기도 하는데, 지옥에 가는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어떻게 선포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들은 개혁주의 구원론이 반드시 대답해야 하는 질문들이지만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어서 복음 선포자들이나 성경공부 리더들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어야 한다.
사실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진영에 속하는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하나님의 선택과 복음 선포 또는 선교와 전도에 대해서 처음에 오해하기도 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셨으면 어차피 구원을 받을 텐데 굳이 선교를 해야 하나 하는 의구심 때문에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후에 한참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선교를 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이 곧 구원받음은 아니라는 신학이 정립되었고 복음 선포와 선교 및 전도의 필요성을 올바르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의 선배들도 한동안 오해하기도 했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이 문제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알고서 대처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개혁주의 신앙에 있어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사람에게 거저 주어진다 (엡1장). 즉,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성으로 인해 전적으로 무능한 상태 – 영적으로 하나님께 대해 전적으로 무능한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먼저 움직이셔서 사람을 다시 살려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먼저 알고 믿고 섬길 수 없다 (엡 2:8).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에 의해 거듭남을 통해서, 창세 전에 선택된 사람의 영과 혼과 육이 이제 다시 살아나야 하나님을 믿게 되고 또한 알게 되는 것이다. 다만 육신은 다시 살아남, 곧 부활은 유보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므로 창세 전에 삼위 안에서 어느 사람이 선택되었다고 해서 그가 그 순간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가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거듭나서 하나님을 믿고 믿음을 고백해야 한다. 그리고나서 그 믿음대로 삶을 살게 된다.
데살로니가 후서 2장 10절과 13절을 보면 구원의 불균형성이 발견된다.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고, 심판은 사람의 죄로 받게 된다는 불균형성이다. 만일 구원과 심판이 동일하게 균형있게 적용되려면,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처럼 심판은 하나님의 저주로 받게 되어야 하든가 아니면 심판이 사람의 죄로 받게 되는 것처럼 구원도 사람의 의로 받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뭔가 불균형을 이룬다. 이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개혁주의 신앙이 가르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기초로 해서 구원과 심판을 이해하는 방법뿐이다. 그런데 사람이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 아마도 모든 사람은 자기가 태어날 때부터 죄성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적절한 균형을 찾으려고 여러가지 이론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이에 대하여 명확하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앙에 따르면 선택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 곧 특별한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없으므로 그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 그러면 그런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다.
이처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택된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이 은혜로 주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에 합당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러면 선택되지 않은 사람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비록 선택되지 않은 사람에게 복음이 선포되더라도 유익이 있다. 첫째, 복음을 들었으므로 자기가 죄인임이 확증된다는 것이다. 복음을 들었음에도 자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스스로 죄인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요3:19; 고후2:14~17). 자기가 죄인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평생을 사는 것보다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사는 것이 훨씬 더 낫다. 물론 그는 거부하겠지만 말이다. 둘째, 어찌됐던 복음을 들으면 죄가 억제된다는 것이다. 복음은 삶과 삶의 방식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가르친 거룩한 삶에 대한 수많은 명령들을 생각해 보라).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는 않지만 복음이 가르치는 삶의 방식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산상수훈의 말씀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산상수훈의 말씀을 세상적 기준의 도덕과 윤리에 맞게 각색하고 또 그렇게 살려고 함으로써 세상에서 죄가 억제되도록 한다. 이것은 그들뿐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유익이 된다. 셋째, 살아서 복음을 듣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 세상에는 모든 사람이 다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않다 (살후3:2). 즉, 모두가 다 선택된 사람일 수는 없다 (아래 부분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살며 복음까지 듣게 된다는 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가 하나님의 일반은혜 아래서 편안하게 살고 있다는 의미이다. 모든 은혜의 기초는 사랑이므로, 비록 그가 거부하거나 무시하거나 거절하며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이며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성도들에게 보상이 있고 천국에도 계층이 있는 것처럼 혹시라도 지옥에 형벌의 경중이 있다면 – 많은 신학자들이 그렇게 추정한다. 그렇지 않다면 히틀러나 연쇄살인마와 나름 착하게 산 사람이 모두 동일한 형벌을 받는다는 것이 더 이상하게 된다 –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믿지 않더라도 어떤 깨달음을 얻어서 스스로 죄를 억제하여 도덕적으로 살려고 했다면 지옥에서라도 조금이라도 가벼운 형벌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악하게 사는 불택자도 있다. 그는 스스로 지옥의 가장 무거운 형벌을 감당할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가 선택되었는지 혹은 유기되었는지 본질적으로 완전하게 알 수는 없다. 복음을 듣고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며 (살전 1:4~5), 지금 당장 반응하지 않더라도 나중에라도 하나님께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유기된 자라고 단정할 수 없고 또한 단정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그저 복음을 전하는 입이 되어야 할 뿐이다. 그러면 선택된 자나 유기된 자나 모두 복음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다. 비록 그 유익의 차이가 너무도 크고 커서 비교할 수 없지만 어쨌든 복음을 듣지 않는 것보다는 백번 천번 더 낫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질문이 생길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그냥 모든 사람을 다 선택하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 생각에는 그것이 더 좋아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만일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으면 의와 불의, 선과 악, 죄와 무죄의 구별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의로운 자와 – 아담의 타락 이후에 사람이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의로운 자는 단 하나도 없지만 – 불의한 자가 모두 동일한 판결을 받는 법이라면 그 법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하나님의 법은 거짓이 되어 결국 하나님은 의롭지 않은 존재가 되신다.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근거로 하여 모든 사람의 구원을 주장한다 할지라도 동일한 결론이 된다. 사람이 결정권자이면 그럴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초등학교 한 반에서 모두가 잘못을 했어도 담임선생님이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적절한 근거를 들어서 모두를 용서해 줄 수 있다. 사람의 결정은 단회적이며 일시적이고 제한된 영향력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결정을 영원한 결정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근거로 모든 사람을 영원히 용서하면 결국엔 의와 불의에 대한 구별이 없어진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근거로 한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나 영원한 동일한 판결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기대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주장하면 그 사랑은 하나님의 의를 제한하게 되고, 하나님의 의에 기대어 모든 사람의 심판을 주장하면 그 의는 하나님의 사랑을 제한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과 의는 서로 분리될 수 없고 하나님의 부분적 속성이 아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사랑이시며 동시에 완전히 의로우시다. 사랑 50%와 의 50%가 하나로 합쳐져서 하나님의 속성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완전하신 하나님께 사랑과 의는 구별될 수는 있으나 분리되거나 구분되지 않는다. 이것을 하나님의 속성의 순일성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다고 말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다고 말하는 것과 같고,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다고 말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곧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는 두 개의 가장 큰 계명,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지키는 것이 의로운 것이다. 우리는 창조물이라서 하나님의 순일성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지만 성경은 이렇게 가르친다 (요일5:3; 요14:15, 21-24, 31; 15:10).
따라서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여, 세상에는 유기된 자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의가 집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선택된 자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의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를 심판하셔서 지옥의 형벌을 판결하시고 집행하신다. 지옥은 사랑과 의의 하나님께서 주관하시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일반은혜와 특별은혜는 전혀 없는 곳이기에 창조물에게 가장 혹독한 장소가 된다. 창조물이 자기의 창조주와 아무런 선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곳, 따라서 영혼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철저한 외로움과 분리를 경험해야 하는 곳, 그곳이 바로 지옥이다.
창조 세계에서의 모든 사건은 항상 반드시 제 1원인과 제2원인이 결합되어 일어난다. 결합의 종류는 종속이며, 제2원인은 제1원인에 종속되어 있다. 제1원인은 항상 하나님이시며 제2원인은 언제나 창조물이다. 이 종속은 기계적인 종속이 아니며 또한 강제적 종속도 아니다. 그러나 이 종속은 유기적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셔서 제2원인이 마치 제1원인처럼 드러나게 하신다. 또한 이 결합은 협력적 결합이 아니다. 제1원인과 제2원인이 협력하여 하나의 결과를 만드는 것이 아니어서 마치 제1원인 자체로는 뭔가 부족해서 제2원인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의미를 거부한다.
이 종속적 결합, 곧 제2원인이 제1원인에 종속되어 있기에 어느 사건의 결과가 악한 것은 제1원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제1원인은 언제나 하나님이시기에 제1원인은 언제나 항상 선하고 의롭다. 이것이 먼저이고 기초이다. 그래서 어느 사건이 악한 결과를 낸다면 그것은 반드시 제2원인이 악하기 때문이다. 다만 제1원인인 하나님께서 제2원인의 악함을 허용하시고 하나님 차원에서 감당하시겠다고 의지적으로 결정하셨기에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으며 동시에 창조물의 자유의지가 작용해서 발생된다.
이렇게 원인을 분석하는 이유는 성경이 먼저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빌 2:13; 롬9:18; 출4:21; 7:3,13; 9:12; 10:20, 27; 11:10; 14:4, 8, 17; 시 81:12). 그리고 이렇게 보면 죄의 의미가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그리고 사람이 지옥의 심판을 받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의로운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이해와 해석이 잘못될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틀릴 수 없으신 분이시다.
이상과 같이 개혁주의 신앙이 가르치는 구원론에서 파생되는 질문들에 대해 살펴 보았다. 이상의 설명이 완전한 설명이 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창조물인 사람이 제한된 이성과 지성으로 아무리 깊게 살펴본다 하더라도 뭔가 부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아니면 최소한 이 설명이 방향을 제시했기를 기대한다. 그러므로 선택된 자 앞이든 유기된 자 앞이든 우리는 그들의 상태를 알 수 없지만 복음의 능력을 믿고 복음을 선포하면 된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면 된다. 사랑과 의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