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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1.16 국화 한 송이
  2. 2021.01.09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
  3. 2021.01.09 중독
  4. 2021.01.02 새해의 소망 2
  5. 2020.12.26 복 있는 사람
  6. 2020.12.19 청소부의 하루
  7. 2020.12.19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8. 2020.12.12 창세기 1장 1절
posted by 풀숨 2021. 1. 16. 06:13

국화 한 송이



이재이



검은 옷에 타이를 맨

바람이 애써 맴돌다가 사그라들고

불빛마저 벽에 숨는데 고개 들기도 미안하다


눈물은 짜다

그러나 짠 맛이 혀를 적시는 순간

더 이상 눈물이 아니다

말은 위로가 아니다

 

두 손 가지런히 모으고

아스팔트 걷던 발에 버선 신고

머리에 두건 쓰고

그는 차가운 사진으로 서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국화 한 송이를 들고

그가 들을 수 없는 때가 되어서야

바다의 염분이 꽃을 피워냈다고 지친 눈으로 말한다


아무도 웃지 않는다

서로 어색한데

그는 혼자 네모 웃음에서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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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1. 9. 00:48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

 

기독교 구원론의 내용 중에서 교파나 심지어 담임 목사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 바로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은 것인가?” 대한 것이다. 질문에 대한 대답도 스펙트럼이 매우 넓어서 아르미니우스파 배경의 대답으로부터 극단적인 칼빈주의파 배경의 대답 또는 구원파 배경의 대답까지 아주 다양하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언제든지 잃어버릴 있고 다시 받을 수도 있다 대답부터 절대로 잃어버릴 없고 어떻게 살든 상관이 없으며, 심지어 죄를 범하며 살아도 상관이 없다 대답까지 정도에 따라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기도 한다. 또한 인터넷에서 검색을 통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봐도 아주 다양한 대답이 나오는 것을 쉽게 있으며, 어떤 대답 내용 중에는 자기 대답에 반대되는 대답은 기독교 이단들이 주장하는 것이라며 극렬히 반대하고 있는 것을 자주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기독교 이단들이 주장하는 것도 있어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질문과 관련된 성경 말씀들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질문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살펴봐야 한다. 사람이 아무리 이렇다 저렇다 해도 결국엔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므로 성경으로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혼란스럽게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스펙트럼의 극단을 모두 지지하는 말씀들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은 철회됨이 없으며(11:29)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선택되어 구원받은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낼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8:31~39; 요10:28) 기록되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으로부터 파선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딤전1:19~20) 있으며 성령에 참여하고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사람에 대한 경고(6:4~6; 10:26~27; 벧후2:20) 기록되어 있어서 그렇다.

 

그래서 정작 문제은 이와 같이 혼란스러운 성경 말씀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것으로 소급된다. 어느 쪽을 따르면 대답은 간단하고 쉽게 나오는데 다른 쪽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결코 무시되어서는 된다. 따라서 전체를 종합적으로 이해한 후에 결론적인 대답이 제시되어야 한다.  결국에는 이러한 종류의 상이한 것처럼 보이는 말씀들 중에서 무엇이 본질적인가 하는 것이다.

 

사람의 자연적 상태와 구원의 본질

우선 먼저, 사람의 자연적 상태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성경의 가르침은, 사람인 아담의 타락 이후에 모든 사람은 자연적인 상태에서 영적으로 죽은 존재라는 것이다 (2:1~5; 고전15:22). 그리고 영적으로 죽은 존재는 결코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51; 8:13). 이것은 어느 순간도 그러한 삶을 수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전체가 하나님께서 받으실 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전히 완전한 것만 받으시기 때문에 털끝 만큼의 흠이라도 있으면 하나님은 거절하시기 때문이다 (3:10; 2:10). 하나님은 온전히 완전하신 분이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살려면 사람도 온전히 완전해야만 한다(벧전1:15~16). 하나님은 털끝 만큼의 악일지라도 절대로 용납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연적 상태에서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 오직 저주의 심판만 받을 뿐이다. 그런데 저주의 상태에 있는 우리 인류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모든 죄값을 치르셨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도록 우리에게 완전한 의로움을 주셨다(5). 그러나 이러한 은혜조차도 우리는 누릴 수가 없다.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은혜조차도 은혜로서 인식할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성령님에 의해 거듭나게 하시고 은혜를 알게 하시고 은혜를 받도록 해주신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2:8; 벧전1:3). 그리고 은혜로 말미암아 거듭나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이기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원은 이렇게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말하면,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사람이 이미 거듭난 상태에서 죄를 범한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유지되는 상태에서 죄에 대한 징계를 받는 것일 뿐이다. 조금 극단적인 비유로 설명하자면, 부모가 대한민국 사람이어서 그들이 아들을 낳아 그가 대한민국 사람으로 태어나면 아들이 죄를 범하고 사형을 당한다고 해도 그는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사형을 당하는 것이지 다른 나라 사람이 되어서 사형을 당하는 것은 아닌 것과 비슷하. 그리고 또한 하나님은 거듭난 사람을 그냥 버려두시지 않고, 아버지처럼 항상 언제나 끊임없이 사랑으로 양육하시기 때문에 행여 그가 죄를 범하더라도 회개하고 다시 회복되도록 인도하시므로, 구원받았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생각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다.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된, 믿음에 파선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와 성령님에 참여하고 신령한 은사를 맛본 사람이 타락할 있다는 경고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구원의 본질적인 관점에서는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잃어버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얻는 조건인 것으로 보이는 믿음에 실패하게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을 가르쳐 주는 교훈일까.

 

먼저 알아야 것은, 믿음은 거듭난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며(2:8), 구원받았음을 알게 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도구이지 그래서 성경에는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받으리라 말씀이 있는 것이며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사람은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영이 죽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먼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을 수가 없다. 항상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반항할 뿐이다. 생각하는 것이 항상 반역 뿐인데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만약 믿음이 구원을 받기 위한 선결 조건이라면 사람도 구원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며, 믿음을 통해서 사람은 자기가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수납하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적 상태에 있고 영이 죽은 사람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확신하는 경우가 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14:9; 10:39) 그렇지 않은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그러한 예들을 수없이 나열하고 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기적을 매일 매일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믿는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일부는 모세가 호렙산에 올라가 있는 40 동안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하였고, 또는 권력에 눈이 멀어 모세를 대적하다가 구덩이에 파묻혀 죽임을 당했던 사람들이었다. 복음서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다니며 수많은 기적을 보고 체험했던 사람들이 결국에는 예수님을 버리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참된 믿음이 아니라 사람 스스로 만들어낸 믿음이 있을 있다. 마치 리플리 증후군을 앓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대부분 이런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과 차이가 거의 없다. 더욱이 그런 사람이 교회에서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들과 신앙 생활을 함께 하면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기적과 능력을 맛볼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눈에는 거의 구별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때가 되면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리고 혹시라도 자신이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만약 그런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엎드리라고 권면하는 말씀이 고린도후서13 5 말씀이다.

 

구원받음에 대한 테스트

여기에 가지 스스로 테스트해 만한 것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것들은 필자 개인의 경험과 성경 말씀을 묵상한 결과들이므로 개인에 따라서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도 있고 다양한 테스트 방법이 있겠지만 우선적으로 고려해 만한 것들일 것이라 생각한다.

 

첫째, 구원을 보험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구원받지 못한 상태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마치 좋은 보험 하나 들어놓고 아무런 걱정 없이 편안히 살다가 어떤 사고가 일어난 후에야 보험을 챙기는 방식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아마도 구원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구원받았으므로 이제 마음이 평안하고 안심이 된다면서, 구원받기 전이나 후나 전혀 다름이 없는 삶을 살며 이따금씩 구원받았음을 확인하기만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점검해야 한다.

 

둘째, 구원받았기에 자기자신이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구원받지 못한 상태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자기혐오의 과정이 없이 무조건 자기자신이 사랑스럽고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도 바울이 자기자신은 죄인들 중에 괴수라고 고백한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또한 성도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자신을 사랑하므로, 그리스도가 없이 또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도 자기자신을 사랑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점검해야 한다.

 

셋째, 이번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며 헌금하고 왔으니까 자기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구원받지 못한 상태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노라, 하셨으며 또한 하나님께 예배하러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선포해야 했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계속 해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말라고 하였다.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며 눈물을 흘리고 헌금을 드리며 감사를 드린다 할지라도 가난한 이웃을 돌보지 않고 오히려 압제하며 속여서 빼앗는 사람은 결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 이처럼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가정, 식구, 교회만을 위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일 가능성이 많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오직 복만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구원받지 못한 상태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왜냐하면 모든 구원받은 사람은 거듭난 상태에 있을지라도 아직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수를 하고 죄를 범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을 징계하시며 교정해주시기 위해서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 잘못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신다. 이러한 징계의 과정은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나의 자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삶을 배워야 하기 때문에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고통이 한번도 없이 항상 나가고 내가 원하는 것은 이루어졌다는 삶은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주관하는 삶이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에 대한 결론

결론을 내리자면, 구원의 본질을 생각할 경우에는,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생각할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예들을 통해서 있듯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같은 사람도 믿음에 파선하고 기독교를 배신할 수도 있다(살후2:3). 참된 믿음, 구원의 시작부터 완성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자기는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사람이 자기가 구원받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너무도 쉽게 자기자신을 합리화하고 너무도 능숙하게 자기자신을 속이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을 받은 것처럼 믿고 있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스스로를 속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속일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빛과 같아서 모든 거짓을 드러낸다.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는 링크 https://comfortye.tistory.com/64 참조하고, 성화의 삶에 대해서는 링크 https://comfortye.tistory.com/24 참조하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행여라도 자기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착각 속에 사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기를 권면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이 없어서 간구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부어주신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삶이 고통스럽다. 그와 동시에 또한 삶이 즐겁다. 자신의 죄를 봐야만 하기에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그리스도로 인해서 소망을 갖고 즐거움을 누리기에 기쁘다. 그래서 언제나 겸손하며 언제나 그리스도를 자랑할 뿐이다.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완전해질 없을지라도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질 날을 바라보며 참고 인내하며 그리스도를 더욱 닮기 위해서 훈련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애쓰는 것이다(2:12).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의 자녀를 양육해 주시는 것이므로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묵묵히 감내하며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말은 고통과 겸손과 인내와 훈련과 완성을 포함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거기엔 구원받았으니 이제 무조건 고민도 걱정도 없다 개념은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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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1. 9. 00:46

중독



이재이



옥수수 밭에 물고기

가끔 드리워진 낚시바늘에 새벽을 버티며

자유롭게 나아가지만 사방은 묶였고

제자리에 누으니 감각이 없다

하늘도 밭에 조각되어 말을 잃고

울타리 밖의 시간은 벌써 다음날이다


나는 발견되는 걸까 만드는 걸까


다 자란 옥수수 밭에 물고기

너를 볼 수가 없다

모든 생각이 한 점으로 파고들어

마침내 소멸하는 이름은 단단히 굳어가는데


발견되지 않고 만들 수도 없는

나는 안에서 밖으로 점프하지 못하고

바늘을 피하며

점점 줄어드는 옥수수 밭에서

빈 웃음으로 히죽거린다


떡진 머리에서 옥수수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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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1. 2. 22:27

새해의 소망

 

2020년은 인류에게 패배와 외로움과 슬픔을 주고 역사의 페이지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힘겹고 고통스럽게 1년을 버텼거나, 잘해야 그저 그렇게 보낸 1년이었을 것입니다. 인류에게 공통적으로는 너무도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가운데서도 어느 누구에겐 역설적으로 희망과 안식과 회복의 시간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개인적이며 또한 공동체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절감했을 것입니다. 혼자 해서 되는 일이 아니고 우리가 함께 해야 되는 일이며 우리의 실패가 나의 실패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시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의 민낯을 보게 되었고, 그것에 반해 동양적 사상의 가치를 알게 되기도 했으며, 이기적 개인주의 그리고 집단적 이기주의가 얼마나 공동체를 망치게 되는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겪어야만 했던 우리는 어떠한 하나님을 경험했나요?

 

그리고 다시 새로운 해가 찾아왔습니다. 2021년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주관하실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2020년에 이어서 계속 패배와 외로움과 슬픔의 시간을 보내야 수도 있고, 아니면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며 조금씩 회복하는 시간을 가질 있을지도 모르고, 더욱 희망적으로 연말 쯤이면 코로나 팬데믹이 종식되어 모두가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떠한 하나님을 소망하나요?

 

우리가 무엇을 소망하고 바라는지에 대한 생각보다는 우리는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이시기를 소망하는지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며, 새해에는 하나님을 많이 알며 더욱 풍성하게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조금이라도 많이 맺게 되기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시편131새번역)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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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12. 26. 07:15

있는 사람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 128:1~2)

 

어느덧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연말이 왔다. 연말연시에 서로 덕담을 나누며 새해에는 복을 많이 받으시라고 인사할 정도로 우리는 평생 복을 바라며 산다. 그리고 모든 좋은 것들을 복과 연결시킨다. 그래서 어느 누가 부자가 되면 사람은 받았다고 말하고, 어느 자녀가 명문대에 들어가도 집은 받았다고 말하며, 그리고 건강한 몸으로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몰며, 좋은 입고, 좋은 직장에 다니면서 휴가 때마다 해외 여행을 다니는 사람은 받은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거액의 로또에 당첨되면 사람은 정말로 받은 것이라고 모두들 부러워한다. 그러나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받았다고 하지 않는다.  대신에 받을 것이라고 .

 

성경 말씀을 신구약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를 모형적으로 보여주는 말씀들이어서 세상적 풍요나 물질적 복과 관련된 말씀들이 많다. 자녀가 많은 것과 장수하는 것이 복이며 부자가 되는 것도 복이다. 모든 복들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모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에 세상적인 풍요와 됨이 하나님 나라에서도 그대로 재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의 차원이 다른 좋은 복들을 기대하게 하고 소망하게 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으로 인도하기 위한 도구들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모형적으로 보여주는 복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자. 먼저, 시편 128 1~2 말씀은 우리가 수고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뭔가 크고 좋은 것을 얻는 것을 복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을 형통이라고 하지 않는다. 수고한 대로 받는 것을 복이며 형통이라고 한다. 그래서 로또에 당첨되는 것은 복이 아니며 형통한 것도 아니다. 자녀가 어떻게 하든 명문대에 들어간 것을 복이라 하지 않고, 자녀가 부모의 사랑 안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에 들어간 것을 복이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착한 일을 것이 받은 것이다. 미래에 받을 일을 것보다 먼저 지금 현재 복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몸으로 열매를 맺는 자체가 받은 것이다.

 

시편 1편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로다. 받은 사람은 아무 때나 열매를 맺으며 잎사귀가 없는데도 열매를 맺는 나무와 같은 것이 아니다. 나무는 먼저 시냇가에 심어져야 하고 잎사귀가 풍성해야 하고 때가 되어야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이렇게 되어야 받은 것이라는 말씀이다. 나무를 심지도 않거나 물이 없는 땅에 심거나 잎사귀가 나지도 않거나 철이 아니면 나무는 절대 열매를맺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런 나무에서 열매를 바라며 열심히 밤낮으로 기도한다. 또는 그렇게 열매를 얻은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하며 하나님께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가르치기를 그런 것은 복이 아니라고 한다. 무조건 물질적으로 좋은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수고하고 흘려서 철을 따라 정당하게 수확하는 것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로또 당첨처럼 일은 하고 돈은 많이 벌려고 꾸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한다. 아니 그런 것은 애초에 복이 아니다. 더욱이 우리 크리스찬은 중에 최상의 복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받았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에 맞는 복을 이미 받은 대로 누리며 열매를 맺어 이웃과 나누면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이와 비슷한 가르침을 주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 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가르침과 함께 일은 하고 오히려 일을 만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책망하는 가르침을 데살로니카 교회에 보내기도 하였다. 자기 손으로 정직하게 일하고 수고한 대로 열매를 먹는 것은 참으로 복이다. 세상이 악으로 가득하여, 수고한 손에 아무 것도 주지 않는 상황까지 이르렀고, 그리고 놀면서도 먹고 사는 것을 복이라고 말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명확하다. 그런 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이다. 놀면서도 먹고 사는 것은 우리 크리스찬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경멸의 대상인 것이다.

 

 2021년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새해에는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를 것이다. 그러나 이제 복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흘려 수고하여 정당하게 받는 열매를 의미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고 서로에게 인사하는 변화가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새해에 모두들 그리스도 안에서 많이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모두 열심히 흘려 수고하고 항상 수고의 대가를 정당하게 받고 즐겁게 먹을 있는 날들로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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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12. 19. 22:57

청소부의 하루



이재이



유리벽이 날마다 1센티미터씩 밀려와

이제 팔 뻗을 공간만 남겼다

걸음을 옮기다가 흘낏 바라본

사람들의 시선 따라 한쪽 귀퉁이로 소환되어

쓰레기를 치우는 내가 쓰레기 되어

구겨지고 악담에 버려져

한 평 휴지통 안에서 짓무르고 있다

외로움조차 사치가 된 감정은

조선의 어느 며느리처럼 귀먹고

눈 멀고 입 막고 숨구멍까지 닫혀 붕어처럼 뻐끔거린다

한 평의 송곳에서 우리 모두의 공간으로

넘어갈 수 있는 접속은 이 세상 인류의 역사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인간의 인간다움으로 인간을 대하는 열린 하늘의 푸르름은

지구 바깥에 있는 것인가

천번의 빗질 끝에 허리를 한번 세워 우리를 본다

유리에 반사된 나

유리 너머에 선 너

유리에 새겨진 외로움 외치는 소리까지


하늘이 흐리다 쏴아 쏴--

공중의 먼지마저 쓸어가는 장대비 빗질에 몸을 맡긴다

오늘 하루는 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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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12. 19. 22:44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딤후 4:17~18)

 

이제 겨울이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이곳에도 눈이 많이 내리고 날씨가 추워져서 겨울을 실감하고 있지요. 눈이 내리고나서 비가 조금 온 후에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니까 눈이 녹다가 얼었는데 집 앞에 있는 나무에는 눈꽃이 피었다가 투명한 얼음꽃으로 아름답게 변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삭막한 것 같은 겨울에도 아름다움은 여전히 빛이 납니다.

 

디모데후서는 모두 다 잘 알고 있다시피 사도 바울의 마지막 서신입니다. 이 서신을 마지막으로 바울은 로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생애 중 가장 마지막 날들에 그는 과연 어떤 신앙을 고백하고 있을까 살펴보고 우리 또한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서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더라도 능히 이겨낼 수 있도록 우리는 담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나 요즘처럼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서 하루에도 수천 명이 인생을 마감하는 시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주변 환경이나 상황들을 돌아보았을 때 우리는 별로 종교의 자유를 위한 소망이 필요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3 세계의 나라들이나 중국, 북한 같은 곳에서 선교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는 많이 다르겠지만, 웬만한 국가들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넉넉한 환경에 있기에 비록 삶이 고단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망이라고까지 할 만한 핍박이나 환난을 겪으면서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전체 인류가 코로나19로 인해서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현실적인 소망을 갖고 사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아래서 전체 인류에게 임한 이 두려움은 사람들이 이전과는 다른 생각을 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그저 한결같이 그냥 지나갈 것만 같았던 삶이 이제는 여행도 할 수 없고 친구들과도 대면하여 만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하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한가지 소망이 생겼습니다. 이 코로나가 하루라도 빨리 지구상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현실적인 소망을 매일매일 모두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좀 더 크게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평소에는 사랑을 강조하며 이렇게 많이들 말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라고요.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13장에 기록된 말씀인데, 정확한 말씀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땅의 삶에서 어떠한 이유로든, 그리고 심지어 새 하늘과 새 땅에 가더라도 역시나 소망은 항상 있을 것입니다. 항상 있을 소망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의 삶이 소망으로 인하여 확고해질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딤후 4:18 말씀을 보면,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 말씀에서 천국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천국 곧 성도가 죽은 다음에 가는 천국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만 이 구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천국은 그 천국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죽으면 가게 되는 천국은 영어로 하면 ‘heaven’입니다. 하늘입니다. 영어로는 heaven 이란 단어가 단순히 하늘 sky 라는 뜻 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한글로 번역할 때에는 하늘 또는 천국으로 번역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번역을 하다 보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The heavenly kingdom’ 또는 ‘The kingdom of heaven 하늘의 왕국역시 한자로는 천국으로 번역되기 때문에 한글 성경에 천국이란 단어가 어느 천국을 의미하는지 알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말한 천국은 하나님의 하늘 왕국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사도 바울이 모든 핍박과 고난과 환난을 견디어 내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평생동안 감당하게 한 원동력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 때문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이 땅의 삶에서 희미하게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이지만,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싶은 소망이 그를 그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소망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소망이 없으면 목적도 비젼도 목표도 인내도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천국 곧 heaven 에 다녀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환상 중에 천국을 보았고 확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천국보다 더 큰 천국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이처럼 확신에 차서 소망 가운데 모든 것을 견디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소망이 없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보고온 천국을 우리는 아직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소망을 갖지 못하는 것일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천국만을 보고 왔지만 우리는 더 큰 것을 보았습니다.

 

한가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보았을까요? 새 하늘과 새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나요? 아마도 모두에게 이 질문이 너무도 어리석게 들릴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것과 새 하늘과 새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미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기록한 계시록 1 1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읽어 보았다면 우리는 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대로 예수님의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음 안에서 보았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미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는 변경될 수도 없고 취소될 수도 없고 흔들릴 수도 없는 사실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 상에서 역사적 사건으로는 이제 곧 속히 일어날 일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는 이미 일어난 일이며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는 바로 오늘이 그날인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 전체가 우리에게 소망이 되고 계시록 1 3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 바로 무엇보다도 소망이라는 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요? 우리가 어디에 단 며칠만 여행을 가려고 해도 보통 여행지에 대해서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밤새 일정 짜고 또 다시 짜고 숙박지, 레스토랑, 먹어봐야 할 음식 리스트, 가봐야 할 장소 리스트 만들어가면서 여행가기 몇 주 전 심지어 몇 달 전부터 설레어 하고 잠을 설치기도 하지요. 그런데 정작 우리가 가야할 곳,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조국이 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고 얼마만큼 그리워하는지요?

 

하나님께서는 보여주셨지만 우리 마음에서 그것을 소망으로 붙잡지 못했기에 보았어도 눈뜬 장님처럼 보았을 뿐이었고 귀로 들었어도 다른 귀로 내보내고 말았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조차도 우리는 스스로 거부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걷어차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소망은 우리 영혼의 닻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했습니다. 소망은 우리의 눈을 고정시켜 줍니다. 우리의 영혼이 흔들리지 않고 딱 중심을 잡고 인내하며 견디어내게 해줍니다.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과 핍박과 시험이나 현실적인 두려움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인내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절대적으로 소망이 필요합니다. 소망이 없는 크리스찬은 크리스찬이 아니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비록 요한계시록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좀처럼 읽고 묵상하는 책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해야 합니다. 이 소망이 사도 바울에게 인내와 오래 참음과 사명을 감당하게 한 동력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이 바로 소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소망의 중심에 무엇이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광으로 가득찬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마음에 품기 위해서 기도해 보시기를 권면합니다. 지금 현실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이 가장 시급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우리는 현실보다 더 큰 것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보고 그 다음에 현실을 본다면 우리는 큰 것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미 그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미 보여주신대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품고 그 나라가 임하는 소망 가운에 현실을 인내하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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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12. 12. 00:06

창세기 1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1:1)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Gen 1:1)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요한복음 3 16 말씀을 제시할 것이다. 그런데 또한 창세기 1 1 말씀을 꼽는 분들도 많이 있다. 각자 여러가지 다양한 이유를 것이지만 여기서는 조금 다른 이유로 인해서 창세기 1 1 말씀을 살펴보려고 한다.

 

요점은 이것이다. 창세기 1 1 말씀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 기사의 시작인가 아니면 결론인가? 아마도 시작이라는 분들도 많이 있을 것이고 결론이라는 분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창조 기사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말씀이므로 시작이라고 있다. 또한 하나님이 첫날에 창조하신 것은 분명히 하늘과 땅이 포함되어야 하는데, 이는 1:1 말씀의 ‘created’라는 단어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다 것을 의미하므로 분명히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졌으므로 하늘과 땅도 첫날 만드신 것이며 빛이 다음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과 그리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20:11 말씀으로 확인된다. 그래서 1:1 말씀은 창조 기사의 시작이라고 명백하게 말할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가만히 보면 결론도 있다. 천지를 대유법으로 해석하면 단순히 하늘과 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대표로 해서 모든 천지 만물을 의미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결론적으로 언급할 때에 하나님이 하늘과 천지를 만드셨다(2:4; 14:19, 22; 31:17; 왕하19:15; 115:15) 하므로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시작이라고 해도 맞고 결론이라고 해도 맞다. 그런데 더욱 정확하게는 시작과 결론 모두를 동시에 의미하고자 하는 문학적 표현은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으로, 이는 문학적으로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이 시작과 동시에 마침이 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성경은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이시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선포하지 않고도 이렇게 문학적으로 아주 멋지게 함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성경의 처음에 기록된 문장은 어쩌면 성경 전체를 감싸고 있는 문장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성경의 마지막 책의 마지막 장인 요한계시록 22:13말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명시적인 선언에 대한 은유적 선언이 창세기 1:1 말씀인 것으로 간주될 있기 때문이다.

 

수천 전에 기록된 책이 그후 1600 이후에 기록될 책까지 포함하여, 전체를 하나로 감싸는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글로 기록한 저자는 얼마나 뛰어난 분일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하는 문장이 바로 창세기 1 1절이다.

 

고전적인 미학에서 아름다움이란 진리를 표현하는 또는 드러내는 수단이라고 정의한다. 현대에서는 아름다움의 상대성을 강조하기에 절대적 의미에서의 진리라는 것을 담아낼 수가 없지만 인간은 얼마나 제멋대로인가 고전적 미학의 개념으로 보면 창세기 1 1절은 자체로 아름답다. 이토록 멋지게 진리를 드러내는 문학적 표현을 어디에서 찾을 있겠는가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어를 주신 분이시자 모든 창조의 전능자이시며 진리의 하나님이시므로 우리에게 진리를 전달할 때에도 아름답게 전달하신다. 문학 작품으로서의 성경은 이처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가지 그것을 구하리니 내가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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