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풀숨 2021. 4. 24. 21:00

쉬운 기독교, 어려운 기독교

 

크리스찬으로 살면서 때로는 기독교가 쉽게 느껴지고 또 어떤 때에는 매우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크리스찬으로서의 삶, 즉 우리 각자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실현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천편일률적이지 않고, 우리 각자의 삶과 엮여서 다양한 변주와 다양한 비율의 타협이 가능하며 심지어 말로만 믿음을 외치다가 끝나는 경우도 있다. 그 다양함에 따라서 기독교가 쉽기도 하고 아주 어렵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우리는 기독교를 쉽게 느끼는 걸까? 아마도 그 때는사도 바울이 경고한 대로 (딤전 1:6~7), 도덕적 윤리적 선생이 되려고 했던 때로서, 기독교를 머리와 입으로만 아는 경우이다. 그 선생은 이웃과 형제들을 성경말씀을 들어서 정죄함으로써 마치 자신은 그들보다 우월하며 그들과는 다르게 잘 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다. 성경은 이러한 경우에 위선자라고 정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가려져서 그것을 미처 보지도 못하고 그저 자신은 잘 하고 있다고만 ‘믿었던’ 시기다. 표면적인 현상에 대해서는 적극적이면서도 본질과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는 소극적이면서 성경말씀을 들어서 형제들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경멸하며, 자신의 우월성을 형제를 향한 정죄에서 찾고, 또한 우월하기에 자신은 문제가 없다고 느끼는 경우다.

 

자기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비판함으로써, 자기의 ‘아무것도 안 함’이나 ‘그저그런 상태’가 다른 사람의 ‘잘못 됨’ 보다는 더 좋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착시 현상이다. 중간에 있으면 오른쪽에 있는 사람에 비해서 왼쪽에 있는 것뿐인데, 이것이 실제로 왼쪽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착시 현상이다. 그리고 이 착시 현상으로 위로를 얻고 우월감을 가진다. 그런데 성경은 중간에 있는 것이나 오른쪽에 있는 것이나 다 잘못 된 것이라고 한다. 복음은 적극적이며 사랑도 적극적이고 공의 역시 적극적이기 때문에 실제로 적극적으로 행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 역시 잘못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죄성과 연약함으로 인해서 너무도 쉽게 빠지는 착각은, 심판자의 위치에 서면 자동적으로 깨끗해지는 것처럼 느끼는 착각이다. 우리 자신도 심판의 기준에 맞게 살아야,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에 사용했던 기준을 우리의 삶에서 실현해야만 우리가 깨끗한 것인데, 우리는 그저 다른 사람을 그렇게 판단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그와 다르게 깨끗한 것처럼 느끼는 착각에 빠진다. 그리고 그 착각을 실제라고 굳게 믿어버리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착각에 빠지면 좀처럼 헤어나올 수 없다. 그 착각이 주는 우월감과 만족과 평안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우월감과 만족과 평안을 계속해서 느끼기 위해 다른 사람의 잘못을 찾아내어 정죄하고 비판하고 비난하기 시작한다.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소위 말하는, 감투를 쓴 사람에게서 많이 드러난다. 감투 없이 평범하게 지낼 때에는 자신을 돌아보며 조심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감투를 쓰고 난 후부터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면서 심판자의 역할을 하고 선생이 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교회에 있다 보니, 감 놔라 대추 놔라 하고 말하는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서 제시한다. 그러면 뿌듯하다. 다 이룬 것 같다. 다 잘 되는 것 같고 하나님께 영광드린 것 같다.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참 쉽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감투가 없어도 이런 게 가능하다.

 

이것은 굉장히 큰 유혹이다. 초대교회 시기부터 있어왔던 유혹이며 지금도 이런 기독교를 원하는 유혹이 너무도 크고 많은데, 우리는 우리의 본성적 연약함 때문에 이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 그래서 교회에는 이런 유혹에 넘어간 사람과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새 신자와 이 유혹을 이겨낸 사람과 종교성만을 가진 무신자까지 다양하게 섞여 있고, 결국 교회는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이 시끄러움을 이겨내야 하는 것이 지상 교회의 숙명이며, 이겨내는 방법은 이 유혹을 이겨낸 사람이 많아지는 것 밖에는 없다. 윤리적 도덕적 심판자의 위치를 버려야만 한다.

 

이와 반대로 어떤 때에 기독교가 어렵다고 느껴지는 걸까? 바로 인내하고 절제해야 하는 때이다. 우리는 육신의 연약함과 본성의 정욕으로 인해서 인내하고 절제하는 것을 어렵다고 느낀다. 성경 말씀을 지식과 말이 아니라 삶에서의 행함으로 실현해 보려고 하면 성경 말씀이 어렵게 다가온다.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과 손 끝으로 실현해 보려고 하면 잘 안 된다. 그래서 삶의 지혜에 대한 사도 바울의 많은 가르침들이 ‘인내’와 ‘참음’과 ‘견뎌냄’으로 연결된다.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정의하는 사랑의 첫번째 속성이 ‘오래 참음’이다. 우리 크리스찬은 잘 해도 참아야 하고 잘못해도 참아야 하며, 뛰어날 때도 참아야 하고 못날 때에도 참아야 한다. 선생이 되더라도 너무 선생이 되려고 하면 안 되고, 모르면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데 공부는 인내의 과정이다.

 

그런데 우리가 인내하기 위해서는 심지어 우리의 성격조차도 극복해야 한다. 호기심 많고 외향적인 사람은 너무 나대는 것을 참아야 하고, 수줍고 내성적인 사람은 너무 조용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는 말조차도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적당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남들이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묵묵히 자기의 일을 감당하며 남들의 평가와 비판에 흔들리지 않고 성경말씀을 삶에서 실현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세상의 평가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의 정욕을 극복해야 하는데, 그 극복의 과정이 다 인내와 절제의 과정이다.

 

무엇이든 머리로만 깨닫고 이해하며 말로만 실천하며 남을 판단하는 것은 쉽다. 그런데 깨달은 대로 가슴으로 살고 몸으로 실현하며 남을 판단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의 부족함을 견뎌내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세상은 어떡하든 우리가 남보다 우월하도록 부추기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무명으로 살기를 바라신다. 교회를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을 말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열매로 그리고 따뜻한 포용으로 침묵시켜야 한다. 이 어려운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찬의 숙명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왜 이리 시끄러운지, 왜 맨날 제자리 걸음만 하는 것 같은지 또는 왜 별로 능력이 없는 것 같은지 하는 것들을 감당해야만 한다. 그리고 소망의 하나님이 우리가 감당하도록 도와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결정을 해야 한다. 쉬운 기독교를 버리고 어려운 기독교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쉬운 기독교에 안주하면서 스스로의 만족으로 살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답은 쉬운 것처럼 느껴진다. 누구든 비록 어렵더라도 어려운 길을 가겠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진심으로 그 어려운 길을 갈 용기가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 길을 가는 것조차 쉽게 생각한다면 평생 쉬운 기독교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 길은 조금씩 변화되어 완성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물이 새로운 삶을 사는 훈련의 길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우리 주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창조물이 우리 주님 안에서 새 생명의 삶을 사는 길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옛 것에 미련을 두지 말고 새 길에서 인내하고 참고 견뎌낼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실제로 그 길을 가다 보면, 기독교가 쉬웠을 때에는 뭔가 이루어지는 것 같았지만 어려웠을 때에는 아무것도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혼자 걷는 길이 아니라 우리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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