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풀숨 2021. 4. 4. 23:06

창세기 2

 

성경말씀 중에서 모순이 있다고 비난을 받는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창세기 2 장이다.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 2 장에 기록된 창조의 순서가 창세기 1 장에 기록된 내용과 다르다고 지적하며, 이것을 성경의 대표적인 오류라고 하고, 따라서 성경은 믿을 수 없다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또한 여기 불난 곳에 기름을 붇듯이 몇몇 신학자들은 창세기 2 장을 1 장과 문서학적으로 비교하면서 1 장과 2 장은 서로 기록자가 다르고, 어느 편집자가 두 개의 기록을 창세기 안에 편집해서 하나로 엮어놓았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유일한 근거는 1 장과 2 장은 서로 다르게 “보인다”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2 장을 올바르게 이해할 방법은 무엇일까.

 

창세기 1 장: 질서의 순서 (하나님 중심의 서술)

먼저 창세기 1 장은 무 (無)에서의 창조와 그리고 혼돈과 공허로부터 창조 세계가 창조물로 채워지며 질서가 확립되는 과정을 시간적 순서대로 설명한다. 서술의 초점은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어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으며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결과는 어떠한지 서술되며, 하나님은 전능의 창조주로서 묘사된다. 처음 3일 동안에는 시공간과 지구, 하늘과 땅과 바다 등 창조 세계의 토대가 창조되고 그 다음 3일 동안에는 창조 세계에서 활동할 생명체들이 순서대로 창조되어 창조 세계를 채운다. 모든 창조물에 하나님은 기뻐하셨으며 특별히 자신을 닮도록 사람을 창조하시고는 아주 기뻐하셨다. 그리고 나서 일곱째 날에는 모든 창조 사역이 완성되었으므로 창조 사역으로부터 떠나 안식하셨다. 일곱째 날에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일곱째 날이더라”는 설명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창조 사역을 마치셨고 그 후로는 그와 같은 창조 사역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녁이 되고… 일곱째 날이더라”는 한정 서술을 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은 일곱째 날 이후로는 창조 사역이 없이 안식하셨다는 것을 간단하고 알기 쉽게 기록한 것이지, ‘날’의 기간을 무너뜨리려고 한 것이 아니다.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날 (day)’의 기간에 대해서 이 ‘날’이 물리적으로 24 시간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어떤 긴 시대를 의미하는지 역사적으로 많은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인정하듯이, 성경해석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날’은 현재와 같은 24 시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날’과 함께 ‘날’을 한정하는 서술, 즉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가 ‘날’에 대해 명확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날’로 번역된 원문의 히브리어 ‘욤’은 원래 어떤 시간 단위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런데 가장 일반적인 시간 단위는 하루이며, 그리고는 일주일, 달, 년 등이 있다. 그래서 ‘욤’은 그렇게 다양하게 사용되지만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욤’의 정확한 의미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기에, 창세기 1장에서의 ‘욤’은 ‘날’로 번역되었고 그 ‘날’은 24 시간의 하루인 것이다. 다만 성경해석학적인 관점에서는 24 시간의  하루로 이해되는 ‘날’이 비유적으로는 – 만약 비유적으로 볼 수 있다면 – 긴 시대를 의미할 수도 있다. 또한 성경해석학적으로 창세기 1장은 일반적인 서술적 문장은 아니다. 어떤 신학자는 그것을 “고양된 산문 형식”이라고 부른다. 시처럼 운문과 비유적 표현으로 기록된 문장이 아니고 서술적 산문이지만, 특정 문장의 반복을 통해서 강조와 운율을 더하여 시적 분위기를 내는 특별한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 장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시간적 경과에 따라서 ‘무에서의 창조’ 및 ‘혼돈과 공허로부터 창조물이 채워지며 질서가 확립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이 이 창조 사역을 어떻게 인증했는지에 대한 기록으로서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거룩한 날로 하시며 안식하심으로써 모든 창조물이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하셨다.

 

창세기 2 장: 관계의 순서 (사람 중심의 서술)

창세기 2 장 4 절부터 또 다른 창조 이야기가 서술된다. 그런데 이 기록은 표면적으로는 창세기 1 장의 기록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것을 해결하고자 여러가지 이론이 제시되었는데, 그중에 하나는, 창세기 1 장은 온 우주의 창조를 서술하고 2 장은 에덴 동산의 창조를 서술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또는 심지어 1 장의 사람 창조와 2 장의 아담 창조가 다르다는 주장까지 하며 다양한 이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면 창세기 2 장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열쇠는 무엇일까.

 

맨 먼저 반드시 주목해야 할 점은 창조주에 대한 호칭이 “하나님”으로부터 “여호와 하나님”으로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일반명사인 ‘하나님’ 앞에 고유명사인 ‘여호와’가 결합되어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2 장과 3 장 내내 사용된다. 이렇게 창조주의 호칭이 변경된 이유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창조주가 이젠 우리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 특정한 한 분으로서의 창조주라는 것을 의미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아저씨가 차를 타고 지나갔어”라는 말과 “마이클 아저씨가 차를 타고 지나갔어”라는 말은 의미상으로는 동일하지만 의미의 폭과 깊이는 완전히 다르다. 나와는 상관이 없지만 그냥 아는 아저씨인 경우가 있고, 이름을 알고 있으며 인격적 교제를 나눌 만큼 나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마이클이라는 아저씨가 있는 경우 만큼 다르다. 이처럼 창조주의 호칭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은 창세기 2 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주 강력한 힌트를 제공하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관계의 하나님, 즉 사회적 속성을 지닌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며 그분의 모든 창조 사역에는 사회적 속성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세기 2 장의 기록을 창세기 1 장처럼 시간적 순서의 관점에 따라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 순서에 따라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과 창조물 사이의 관계 그리고 창조물과 창조물 사이의 관계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창세기 2 장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창세기 2 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기록상 관계의 중심에 아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창조의 주체 또는 창조의 영광이 사람에게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번에는 창조에 대한 설명이 사람을 중심으로 한 관계들에 대해서 서술되었다는 의미이다.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존재들에 대한 관계들을 서술하기 때문에 그 관계들 중에서 사람에게 중요한 순서대로 나타난다. 그래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 즉 식물과 먹을거리에 대한 내용이 맨 처음에 나온다. 그리고 그 먹을거리를 내는 땅에 대해서 나오며 사람과 먹을거리 및 땅에 대한 관계가 나온다. 여기에서 사람은 땅을 경작하고 먹을거리를 재배하는 존재인데, 이는 사람이 어느 정도 독립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의 다른 모든 피조물은 창조 세계에 철저히 종속적인데 비해 사람은 경작을 통해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만들어 내는 존재로서, 창조 세계에 속하되 어느 정도 독립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이처럼 사람에 대한 서술이 맨 먼저 기록되면서 창세기 2 장에서 이야기의 중심이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사람과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 에덴의 관계, 사람과 동물의 관계,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순서대로 기록되었다.  

 

사람이 창조 세계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적인 존재가 된 것은 사람이 만들어진 과정에서 드러난다. 창조주는 사람을 만드실 때에 사람의 몸은 땅에서 취하셨으나 생명은 하나님의 숨으로부터 나오게 하셨다. 창조물이 창조주의 숨결을 품고 있으니 창조물이지만 어느 정도 창조 세계를 초월하는 존재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이 땅을 경작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그러나 육신 안에  초월 가능성을 품고 있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대로 초월을 이루어가도록 그의 성장 과정을 준비해 주셨다. 즉, 사람이 육신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움의 손길까지도 제공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 나무와 선악과 나무로 확증된 언약이었다 (선악과 나무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조하세요. https://comfortye.tistory.com/42?category=799635). 그리고 사람의 존재의 근원이 하나님이므로 사람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면 다른 모든 관계들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식물에 대한 서술 다음에는 사람이 살아야 할 장소에 대한 서술이 이어진다. 에덴에 대한 서술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숨이 불어넣어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된 존재인 아담에게 에덴은 가정이자 성전이자 왕궁이었다. 아담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대리통치자였고, 모든 창조물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제사장이었으며, 하와의 남편이었기에, 그들이 사는 곳은 왕궁이었고, 성전이었으며 하와와 함께 하는 보금자리였다. 그가 활동하고 쉬며 통치하고 하나님을 만나뵙는 공간이 바로 에덴이었다.

 

계속해서 창세기 2 장에는, 이제 사람이 누구와 함께 창조 세계를 살아갈 것인지,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생명체와는 어떠한 관계를 맺도록 창조되었는지에 대해 서술되었다. 동물들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서술이 먼저 나오고 맨 마지막에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동물들과 사람의 관계는 동료이자 친구였다. 아담이 혼자 외로이 살지 않고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살도록 하기 위해서 동물들이 창조되었다. 그는 더불어 살면서 하나님의 사회적 속성을 창조 세계에 구현하면서 하나님을 닮도록 성장해야 했다. 그는 통치자이지만 억압과 구속과 강제와 약탈이 아니라 섬김과 사랑과 헌신으로 통치하며 하나님을 대리하여 창조 세계에 하나님을 드러내야 했다.

 

그러나 동물이 아무리 동료이자 친구로서 아담과 함께 한다고 할지라도 아담의 짝은 될 수 없었다. 아담에게는 자신과 똑닮은 존재가 필요했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함께 살며 함께 누릴 수 있는, 그리고 한 몸처럼 온 맘을 다해 사랑하고 사랑을 받을 존재가 필요했다. 하와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아담으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이 한 가족을 이루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특별히 부모와 아이들로 구성된 직계 가족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사회성이 창조 세계에 구현된 직접적인 비유체였다. 이제 창조 세계의 모든 관계들이 정립되었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가 하나님에 대해 관계적 유비로서 기능하도록 창조하셨다. 관계적 유비가 가능하려면 존재적 유비도 필요했기에 모든 창조물들은 존재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조금이라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모든 창조물들의 관계가 집합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드러내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진리는 오직 창세기 2 장의 기록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 2 장은 애초부터 1 장과 함께 기록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문서들이 하나로 편집된 것이 아니라 1 장과 2 장의 기록은 한 기록자에 의해 창조 이야기를 서술하기 위해 함께 기록된 것이다.

 

창세기 2장이 필요한 이유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을 배신하고 멸망의 길을 선택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기록이다. 그러므로 그 ‘배신’의 기초가 무엇인지 설명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기초는 창조 시에 놓여졌기 때문에 창조 이야기에는 물질적 창조와 관계적 창조 이야기 모두가 필요한 것이며, 따라서 창세기 1 장과 2 장은 두 이야기 같지만 하나의 기록인 것이다. 1 장과 2 장을 모두 살펴야만 창조의 전체 범위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창세기 3 장으로 넘어가면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관계가 철저히 깨지고 망가지는 기록이 나온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무너지자, 식물은 이제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사람에게 해가 되며 스스로를 보호하게 되었고, 땅은 경작되지 않을 수도 있게 되었거나 경작되더라도 소출을 내지 않게 되었고, 에덴은 폐쇄되었고, 동물은 사람을 피하게 되었으며, 사람은 서로 상대를 지배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2 장에 기록된 관계들이 그대로 대응되어 하나씩 무너지는 기록이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창조 세계를 완전한 멸망 가운데 두시지 않고 은혜로써 구원하시겠다고 선포하신다. 우리가 원시복음(Primitive Gospel)이라고 부르는 말씀인 3장 15절 말씀이다.

 

결론

창세기 2 장은 창세기 1 장과 모순되는 기록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1 장과 함께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전체 범위를 설명해주는 기록이어서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기록이다. 다만 1 장과는 다른 관점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1 장의 내용과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창조 세계의 관계들을 중심으로 서술되었기에 전혀 모순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2 장의 기록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깊이를 알 수 있게 되며 사람이 창조된 목적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그러므로 창세기 2 장을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아는 것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데에도 필요하고 창조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도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해하는 데에도 필요하다. 창세기 2 장을 통해서 종말을 바라보며 앞으로 우리에게 펼쳐질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고 현실을 인내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지혜는 창세기 2 장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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