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주일을 일년에 한번 특별히 부활절 주일로 지냈습니다. 그런데 사실 모든 주일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다만 일년에 한번 더욱 특별히 기념하는 의미로 부활절 주일을 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잠깐 되새겨 보고 예수님과의 만남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만이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첫 사람인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죄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 죄성으로인해서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자연적으로 죄를 짓는 것으로 결과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해치거나 해서 죄를 지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배제하고 마치 우리 스스로가 온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이루어지기 때문에 죄를 지었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죄란 창조물이 창조주를 거부하고 창조물 스스로 창조주보다 더 중심적이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죄란 인간의 자기 중심성의 결과들입니다.
이렇게 죄성으로 인해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책임은 영원한 고통의 형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지옥에서 영원히 끔찍한 고통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는 절대로 이러한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영혼은 자기중심성으로 인해서 이미 죽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도저히 알 수조차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또는 무엇이든 우리의 죄값을 우리를 대신해서 다 치르고 우리의 영혼에 새 생명을 주어서 다시 살리기 전에는 우리 스스로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의 이런 비참한 상태를 보시고 성부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자신의 친아들인 성자 하나님을 사람이 되게 하셔서 우리를 위해 모든 죄값을 대신 치르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게 하셨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성자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의로우신 분으로서 아무런 죄를 범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대신해서 죄값을 치르시려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에 죽음이 끝이 아니고 부활하셔서 죽음은 결코 의인을 이길 수 없다는 진리를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을 믿는 사람, 즉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값이 해결되고 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의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처럼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새 생명의 영원한 삶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절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이 부활절의 의미를 함께 살펴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눈을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사건들로 옮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사건들을 정리하면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뉘어집니다. 첫째는 눅 24장에서 본 엠마오로 가는 제자나 도마 또는 다른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경우입니다. 둘째는 사도 바울처럼 어떤 기적이 일어나서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복음 전파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의해서 예수님을 만나서 믿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혹은 기적적으로 음성 들음으로써, 혹은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만났든지 모두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역시 크리스천으로서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예수님을 믿고는 있는데 한번도 만난 적은 없나요?
도마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같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기 이전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사울이라고도 했던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을 감시하고 어떻게든 예수님을 무너뜨리려고 했던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이었으므로 그 역시 예수님을 알았고 만났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때의 만남과 이때의 만남은 무엇이 달라졌기에 도마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그때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믿었으나 결국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침으로써 믿지 않은 것이 될 수밖에 없는 믿음을 가졌었는데, 이제 이때는 예수님을 만나서 진정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요? 바울도 그때는 예수님을 만났으나 예수님을 적대하며 어떻게든 예수님을 무너뜨리려 했으나 이제 이때는 예수님을 만나서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세번째의 경우에 예수님을 전혀 몰랐지만 어떠한 만남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요?
오늘은 바로 이 만남이라는 것에 대해서 함께 살펴 보려고 합니다. 만남은 우리의 삶에서 필수적인 것이어서 대중가요나 소설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과 문학에서 만남을 소재로 또는 주제로 다루었습니다. 아주 유명한 대중가요가 있습니다. 노사연 가수가 부른 “만남”이라는 가요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7, 8년 후에 나온 김건모 가수의 “잘못된 만남”이라는 가요도 있습니다. 노사연 가수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서로 간절히 바랬기 때문에 운명처럼 필연적으로 우리는 만나게 되었던 것이라고 노래했는데 그 당시에 아주 크게 히트했던 노래입니다. “잘못된 만남”은 밀리언셀러입니다. 잘된 만남이든 잘못된 만남이든 만남은 우리의 삶에서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만남을 만남이라고 정의하게 하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무엇일까요? 학교에서 직장에서 지하철 역에서나 도로에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스쳐 지나갑니다. 오늘도 그랬고요. 그 모든 경우를 다 만남이라고 하지 않지요. 또는 심지어 회사나 학교나 어떤 공동체에서 미팅을 갖고 서로 앉아서 몇 시간이나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데 미팅 후에는 상대에 대해서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만난지 몇 분도 안 되어 친구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몇 년을 만나고 있지만 그저 알고 지내는 사이인 경우도 있습니다. 만남에 대한 본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음의 교류입니다. 우리의 경험이 이것을 증명한다고 봅니다. 아무리 짧은 만남일지라도 그 만남에서 두 인격체가 마음의 교류를 나누었다면 그 만남은 진정한 만남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아무리 긴 시간 동안 함께 했을지라도 마음의 교류가 없었다면 그것은 만남이 아닙니다. 그냥 알고 지낸 것뿐이죠. 즉, I know you과 I know about you은 다릅니다. 그저 상대방을 피상적으로 만나는 만남도 만남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만남은 진정한 만남이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만남은 반드시 두 인격체 간에 마음의 교류가 있어야 합니다.
도마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 그리고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그들이 아무리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였을지라도 그저 예수님에 대해서 알았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과의 마음의 교류를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며 자신들의 생각으로 예수님을 정의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예수님이 죽으시기 직전까지도 예수님이 세상을 정복하셔서 새로운 왕국을 이스라엘에 세우실 것으로 알았고 그 왕국에서 높은 위치에 올라 권력을 잡을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진정 누구이신지 무엇을 하시려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고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들은 세상적 관점과 자기의 욕망에 빠져서 예수님과 진정한 마음의 교류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예수님을 믿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생각과 욕심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에야 그들은 진정으로 예수님과 마음의 교류를 나누었습니다. 부활 사건으로 인해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무엇을 행하셨는지 그분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서야 진정으로 깨닫기 시작했고 예수님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 뜨거워진 마음은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로 하여금 밤에 여행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도마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처음 만나서 어떤 계기를 통해 사귀게 된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교 친구이든 또는 남자친구나 여자친구이든 또는 선배 혹은 후배들이든 처음엔 알지 못했지만 어떤 만남을 통해서 서로 사랑하는 베프가 되고 함께 인생을 나누는 친구가 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짧은 만남이었을지라도 그 만남에서 서로 마음의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압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만남도 이와 똑같습니다. 만약 성경이 증언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진정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 옆에 계신다면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과 이러한 만남을 갖고 친밀한 사귐을 나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서 마음의 교류를 나눌 수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시지 않을지라도 말이지요.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자 약속입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전 1:9).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Out of sight, out of mind 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분과 마음의 교류를 나눈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번 좋은 만남과 사귐이 있었다고 해서 그 관계가 그냥 그대로 유지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우리 옆에 계시더라도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서 예수님과 마주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신 4:29; 렘 29:13; 마 7:7). 만나러 나아가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그냥 아무런 노력도 없이 가만히 있는데 저절로 만남이 이루어지고 사귐이 만들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둘째는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집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집중하는 법을 두 가지 가르쳐 줍니다. 하나는 기도이고 나머지 하나는 성경 묵상입니다. 기도는 일방적으로 나의 소원을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자 정확한 형상이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곧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으며 여기에 더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힘을 실어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신 4:7).
성경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령님이 바로 예수님의 영이시라고 성경은 또한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말씀하신 모든 말씀이 기록된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묵상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대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대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벧후 1:20~21).
대화 없이 마음의 교류는 불가능 합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예수님과 대화해야 하며 특히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뜻과 마음을 파악하려 하지 않고 그저 내 생각대로 하면서 마음의 교류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눈에 보이시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이것을 쉽게 잊고 내 생각대로 하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예배입니다. 개인적 예배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예배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처음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나 아직 성장하지 못한 크리스천 그리고 심지어 불신자까지도 공동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잠시 멀어진 크리스천도 예배를 통해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나 전도사의 첫째 사명은 섬김을 통해서 좋은 예배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 모두가 좋은 예배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
여기에서 요점은 마음의 교류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서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하며 예수님과 대화하고 예수님을 만나는 동안에 마음의 교류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냥 내 마음을 쏟아놓고 나머지는 예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겠지 하는 자세는 결코 마음의 교류를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 마음을 예수님께 집중하면서 예수님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내 생각을 앞세우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해야 합니다. 도덕적 교훈을 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듣는 자세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렵게 느껴지면, 우리가 어떻게 베프를 처음 사귀었는지, 연인과의 첫 데이트는 어땠는지를 떠올려 보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적극적이고 집중해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면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반드시 진실된 만남이 되게 하시고 마음의 교류를 통해서 예수님을 알며 느끼도록 합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만남의 증거들을 주셔서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 어떤 상상이나 환상이 아니라 실제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 증거들을 살펴보면, 첫째는 감성적 변화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과 진정한 만남을 가지면 우리의 가슴이 설레며 뜨거워집니다. 물론 이 변화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변화를 겪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그냥 무덤덤하게 지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인은 자신의 감성적 변화를 압니다. 둘째는 지성적 변화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무엇을 하셨는지 진정으로 알며 받아들이게 되고, 이 지식은 그냥 아는 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토대가 되고 방향을 결정하는 지식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의지적 변화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내가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먼저 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예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먼저 하고자 하는 의지가 나타납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말하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진정한 마음의 교류가 일어나고 서로 사귐이 있게 되면 상대에 대해 조금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더라도 쉽게 그리고 빨리 교정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교류가 없다면 상대에 대해 진실을 알아도 의심하며 쉽게 거짓에 속게 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바로 이 변화들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진 것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제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게 되었고 그 지식이 자신들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밤에 여행하는 두려움도 이겨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앞에서 나열한 변화의 증거들을 가졌다고 생각하며 또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너무도 쉽게 속이기도 하고 또 합리화시키기도 하기에 나타납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경우 중에 하나는 우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는 경우입니다. 예수님 믿으면 복 받고 건강하게 된다든지 높은 위치에 오르게 되고 잘 살게 된다든지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 가게 된다든지 하는, 그 어떤 이유로든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그 관계는 결코 올바른 만남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베프나 연인을 처음 만나서 사귐의 관계에 들어갔을 때, 어떤 목적을 가지고 베프를 만나거나 연인을 사귀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마치 운명처럼 이상하게 끌려서 서로 마음의 교류를 나누다 보니 사귀게 되고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목적이 생기게 됩니다. 베프나 연인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싶고 그가 원하는 것을 다 해주고 싶다는 목적이 생기고 나의 삶의 방향이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만남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명심하기 바랍니다. 예수님과의 만남과 사귐은 아주 실제적이라는 사실을요!!!
또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내 생각대로 내가 주도하는 만남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전형적인 예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무수히 만났고 대화했고 따라다녔지만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시든 무슨 말씀을 하시든 상관없이 자기들의 생각대로 해석했고 결정했고 실행했습니다. 그들의 결과는 너무도 처참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위선자였을 뿐이니까요. 바리새인들을 현대의 용어로 정의하면 어쩌면 스토커일 것입니다. 아주 일방적인 만남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 또한 어쩌면 예수님을 스토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돌아봐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새 생명의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아직 죄성의 흔적인 자기중심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진정한 만남은 쉽지 않으므로 항상 스스로 성찰해야 이런 함정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를 조심하면서 예수님의 만남이 진정한 만남이 되고 예수님과 진실한 사귐을 나눌 수 있도록 우리는 예수님과 마음의 교류를 이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과 아주 친밀한 만남과 사귐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바로 이 말씀을요.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시고 영원히 사신다면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과의 실제적인 만남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쳐 주는 교훈이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경험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와 동일하게 예수님을 만나고 있으며 예수님과 실제적인 사귐을 나누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역사적으로 실제로 생존했으며 어떤 일을 했는지 무슨 말들을 했는지 세종실록이나 난중일기 등을 통해서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들과의 만남을 추구하지도 않고 그분들과 사귐을 가지려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그분들과 현재적, 현실적, 실제적인 만남을 가질 수 없으니까요. 물론 우리가 비유적인 의미로 그분들을 만났다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적 표현이지 실제적인 만남을 의미하지 않지요. 우리는 이미 죽은 그분들과는 지금의 현실에서 마음의 교류를 나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2000년 전에 이 땅에 사셨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만남은 현재적, 현실적,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만남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지금 현재 인격체 사이에 마음의 교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경험은 이것을 증명해 줍니다. 우리를 스쳐가듯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 우리의 베프 또는 연인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게 됩니다. 단순한 것 같지만 바로 이 차이가 진정한 만남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과 마음의 교류를 나누어야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사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기에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의 만남에는 우리의 노력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베프와의 만남이나 연인과의 사귐에 있어서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과 동일합니다. 진정한 마음의 교류는 그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냥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지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첫째,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베프를 만나기 위해 만남의 장소에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기도와 성경 묵상을 통해서 예수님께 집중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우리는 좋은 예배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교회가 함께 예배드릴 때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집합적으로 만나 주시기 때문에 불신자나 초신자 또는 믿음이 정체되고 후퇴하는 사람들까지도 간접적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믿음이 회복될 수 있기에 예배는 아주 중요한 만남의 장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가지면 우리는 감성적, 지성적, 그리고 의지적 변화를 겪습니다. 감성적으로 충만하고 뜨거워지며, 우리의 삶을 결정할 올바른 지식을 알게 되고,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려고 하는 의지를 갖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더욱 깊은 만남을 가지면서 더욱 깊이 사귀고자 열망하게 됩니다. 이 만남 가운데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방향, 즉 진로 문제, 직장 문제, 가정 문제, 학교 문제 등등의 방향을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쪽으로 잡으며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 만남이 없으면 결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없습니다. 그저 피상적이거나 내 생각을 따르는 것을 믿음이라고 포장하는 것일 뿐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난 적이 없다면 예수님께 나아가서 만나 주시기를 청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만나 주시고 또한 진정한 만남을 나누어 주십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배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