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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4.04 창세기 2 장
  2. 2021.04.04 봄날
  3. 2021.03.27 삶으로 드리는 예배
  4. 2021.03.20 함께 모이는 기쁨
  5. 2021.03.13 무명(無名)으로 사는 삶 2
  6. 2021.03.07 무명(無名)으로 사는 삶
  7. 2021.02.13 창조론 대 진화론
  8. 2021.02.13 덴버 1700 마일
posted by 풀숨 2021. 4. 4. 23:06

창세기 2

 

성경말씀 중에서 모순이 있다고 비난을 받는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창세기 2 장이다.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 2 장에 기록된 창조의 순서가 창세기 1 장에 기록된 내용과 다르다고 지적하며, 이것을 성경의 대표적인 오류라고 하고, 따라서 성경은 믿을 수 없다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또한 여기 불난 곳에 기름을 붇듯이 몇몇 신학자들은 창세기 2 장을 1 장과 문서학적으로 비교하면서 1 장과 2 장은 서로 기록자가 다르고, 어느 편집자가 두 개의 기록을 창세기 안에 편집해서 하나로 엮어놓았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유일한 근거는 1 장과 2 장은 서로 다르게 “보인다”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2 장을 올바르게 이해할 방법은 무엇일까.

 

창세기 1 장: 질서의 순서 (하나님 중심의 서술)

먼저 창세기 1 장은 무 (無)에서의 창조와 그리고 혼돈과 공허로부터 창조 세계가 창조물로 채워지며 질서가 확립되는 과정을 시간적 순서대로 설명한다. 서술의 초점은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어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으며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결과는 어떠한지 서술되며, 하나님은 전능의 창조주로서 묘사된다. 처음 3일 동안에는 시공간과 지구, 하늘과 땅과 바다 등 창조 세계의 토대가 창조되고 그 다음 3일 동안에는 창조 세계에서 활동할 생명체들이 순서대로 창조되어 창조 세계를 채운다. 모든 창조물에 하나님은 기뻐하셨으며 특별히 자신을 닮도록 사람을 창조하시고는 아주 기뻐하셨다. 그리고 나서 일곱째 날에는 모든 창조 사역이 완성되었으므로 창조 사역으로부터 떠나 안식하셨다. 일곱째 날에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일곱째 날이더라”는 설명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창조 사역을 마치셨고 그 후로는 그와 같은 창조 사역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녁이 되고… 일곱째 날이더라”는 한정 서술을 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은 일곱째 날 이후로는 창조 사역이 없이 안식하셨다는 것을 간단하고 알기 쉽게 기록한 것이지, ‘날’의 기간을 무너뜨리려고 한 것이 아니다.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날 (day)’의 기간에 대해서 이 ‘날’이 물리적으로 24 시간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어떤 긴 시대를 의미하는지 역사적으로 많은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인정하듯이, 성경해석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날’은 현재와 같은 24 시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날’과 함께 ‘날’을 한정하는 서술, 즉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가 ‘날’에 대해 명확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날’로 번역된 원문의 히브리어 ‘욤’은 원래 어떤 시간 단위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런데 가장 일반적인 시간 단위는 하루이며, 그리고는 일주일, 달, 년 등이 있다. 그래서 ‘욤’은 그렇게 다양하게 사용되지만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욤’의 정확한 의미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기에, 창세기 1장에서의 ‘욤’은 ‘날’로 번역되었고 그 ‘날’은 24 시간의 하루인 것이다. 다만 성경해석학적인 관점에서는 24 시간의  하루로 이해되는 ‘날’이 비유적으로는 – 만약 비유적으로 볼 수 있다면 – 긴 시대를 의미할 수도 있다. 또한 성경해석학적으로 창세기 1장은 일반적인 서술적 문장은 아니다. 어떤 신학자는 그것을 “고양된 산문 형식”이라고 부른다. 시처럼 운문과 비유적 표현으로 기록된 문장이 아니고 서술적 산문이지만, 특정 문장의 반복을 통해서 강조와 운율을 더하여 시적 분위기를 내는 특별한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 장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시간적 경과에 따라서 ‘무에서의 창조’ 및 ‘혼돈과 공허로부터 창조물이 채워지며 질서가 확립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이 이 창조 사역을 어떻게 인증했는지에 대한 기록으로서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거룩한 날로 하시며 안식하심으로써 모든 창조물이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하셨다.

 

창세기 2 장: 관계의 순서 (사람 중심의 서술)

창세기 2 장 4 절부터 또 다른 창조 이야기가 서술된다. 그런데 이 기록은 표면적으로는 창세기 1 장의 기록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것을 해결하고자 여러가지 이론이 제시되었는데, 그중에 하나는, 창세기 1 장은 온 우주의 창조를 서술하고 2 장은 에덴 동산의 창조를 서술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또는 심지어 1 장의 사람 창조와 2 장의 아담 창조가 다르다는 주장까지 하며 다양한 이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면 창세기 2 장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열쇠는 무엇일까.

 

맨 먼저 반드시 주목해야 할 점은 창조주에 대한 호칭이 “하나님”으로부터 “여호와 하나님”으로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일반명사인 ‘하나님’ 앞에 고유명사인 ‘여호와’가 결합되어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2 장과 3 장 내내 사용된다. 이렇게 창조주의 호칭이 변경된 이유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창조주가 이젠 우리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 특정한 한 분으로서의 창조주라는 것을 의미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아저씨가 차를 타고 지나갔어”라는 말과 “마이클 아저씨가 차를 타고 지나갔어”라는 말은 의미상으로는 동일하지만 의미의 폭과 깊이는 완전히 다르다. 나와는 상관이 없지만 그냥 아는 아저씨인 경우가 있고, 이름을 알고 있으며 인격적 교제를 나눌 만큼 나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마이클이라는 아저씨가 있는 경우 만큼 다르다. 이처럼 창조주의 호칭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은 창세기 2 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주 강력한 힌트를 제공하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관계의 하나님, 즉 사회적 속성을 지닌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며 그분의 모든 창조 사역에는 사회적 속성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세기 2 장의 기록을 창세기 1 장처럼 시간적 순서의 관점에 따라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 순서에 따라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과 창조물 사이의 관계 그리고 창조물과 창조물 사이의 관계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창세기 2 장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창세기 2 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기록상 관계의 중심에 아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창조의 주체 또는 창조의 영광이 사람에게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번에는 창조에 대한 설명이 사람을 중심으로 한 관계들에 대해서 서술되었다는 의미이다.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존재들에 대한 관계들을 서술하기 때문에 그 관계들 중에서 사람에게 중요한 순서대로 나타난다. 그래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 즉 식물과 먹을거리에 대한 내용이 맨 처음에 나온다. 그리고 그 먹을거리를 내는 땅에 대해서 나오며 사람과 먹을거리 및 땅에 대한 관계가 나온다. 여기에서 사람은 땅을 경작하고 먹을거리를 재배하는 존재인데, 이는 사람이 어느 정도 독립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의 다른 모든 피조물은 창조 세계에 철저히 종속적인데 비해 사람은 경작을 통해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만들어 내는 존재로서, 창조 세계에 속하되 어느 정도 독립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이처럼 사람에 대한 서술이 맨 먼저 기록되면서 창세기 2 장에서 이야기의 중심이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사람과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 에덴의 관계, 사람과 동물의 관계,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순서대로 기록되었다.  

 

사람이 창조 세계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적인 존재가 된 것은 사람이 만들어진 과정에서 드러난다. 창조주는 사람을 만드실 때에 사람의 몸은 땅에서 취하셨으나 생명은 하나님의 숨으로부터 나오게 하셨다. 창조물이 창조주의 숨결을 품고 있으니 창조물이지만 어느 정도 창조 세계를 초월하는 존재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이 땅을 경작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그러나 육신 안에  초월 가능성을 품고 있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대로 초월을 이루어가도록 그의 성장 과정을 준비해 주셨다. 즉, 사람이 육신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움의 손길까지도 제공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 나무와 선악과 나무로 확증된 언약이었다 (선악과 나무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조하세요. https://comfortye.tistory.com/42?category=799635). 그리고 사람의 존재의 근원이 하나님이므로 사람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면 다른 모든 관계들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식물에 대한 서술 다음에는 사람이 살아야 할 장소에 대한 서술이 이어진다. 에덴에 대한 서술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숨이 불어넣어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된 존재인 아담에게 에덴은 가정이자 성전이자 왕궁이었다. 아담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대리통치자였고, 모든 창조물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제사장이었으며, 하와의 남편이었기에, 그들이 사는 곳은 왕궁이었고, 성전이었으며 하와와 함께 하는 보금자리였다. 그가 활동하고 쉬며 통치하고 하나님을 만나뵙는 공간이 바로 에덴이었다.

 

계속해서 창세기 2 장에는, 이제 사람이 누구와 함께 창조 세계를 살아갈 것인지,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생명체와는 어떠한 관계를 맺도록 창조되었는지에 대해 서술되었다. 동물들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서술이 먼저 나오고 맨 마지막에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동물들과 사람의 관계는 동료이자 친구였다. 아담이 혼자 외로이 살지 않고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살도록 하기 위해서 동물들이 창조되었다. 그는 더불어 살면서 하나님의 사회적 속성을 창조 세계에 구현하면서 하나님을 닮도록 성장해야 했다. 그는 통치자이지만 억압과 구속과 강제와 약탈이 아니라 섬김과 사랑과 헌신으로 통치하며 하나님을 대리하여 창조 세계에 하나님을 드러내야 했다.

 

그러나 동물이 아무리 동료이자 친구로서 아담과 함께 한다고 할지라도 아담의 짝은 될 수 없었다. 아담에게는 자신과 똑닮은 존재가 필요했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함께 살며 함께 누릴 수 있는, 그리고 한 몸처럼 온 맘을 다해 사랑하고 사랑을 받을 존재가 필요했다. 하와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아담으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이 한 가족을 이루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특별히 부모와 아이들로 구성된 직계 가족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사회성이 창조 세계에 구현된 직접적인 비유체였다. 이제 창조 세계의 모든 관계들이 정립되었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가 하나님에 대해 관계적 유비로서 기능하도록 창조하셨다. 관계적 유비가 가능하려면 존재적 유비도 필요했기에 모든 창조물들은 존재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조금이라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모든 창조물들의 관계가 집합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드러내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진리는 오직 창세기 2 장의 기록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 2 장은 애초부터 1 장과 함께 기록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문서들이 하나로 편집된 것이 아니라 1 장과 2 장의 기록은 한 기록자에 의해 창조 이야기를 서술하기 위해 함께 기록된 것이다.

 

창세기 2장이 필요한 이유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을 배신하고 멸망의 길을 선택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기록이다. 그러므로 그 ‘배신’의 기초가 무엇인지 설명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기초는 창조 시에 놓여졌기 때문에 창조 이야기에는 물질적 창조와 관계적 창조 이야기 모두가 필요한 것이며, 따라서 창세기 1 장과 2 장은 두 이야기 같지만 하나의 기록인 것이다. 1 장과 2 장을 모두 살펴야만 창조의 전체 범위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창세기 3 장으로 넘어가면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관계가 철저히 깨지고 망가지는 기록이 나온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무너지자, 식물은 이제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사람에게 해가 되며 스스로를 보호하게 되었고, 땅은 경작되지 않을 수도 있게 되었거나 경작되더라도 소출을 내지 않게 되었고, 에덴은 폐쇄되었고, 동물은 사람을 피하게 되었으며, 사람은 서로 상대를 지배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2 장에 기록된 관계들이 그대로 대응되어 하나씩 무너지는 기록이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창조 세계를 완전한 멸망 가운데 두시지 않고 은혜로써 구원하시겠다고 선포하신다. 우리가 원시복음(Primitive Gospel)이라고 부르는 말씀인 3장 15절 말씀이다.

 

결론

창세기 2 장은 창세기 1 장과 모순되는 기록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1 장과 함께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전체 범위를 설명해주는 기록이어서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기록이다. 다만 1 장과는 다른 관점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1 장의 내용과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창조 세계의 관계들을 중심으로 서술되었기에 전혀 모순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2 장의 기록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깊이를 알 수 있게 되며 사람이 창조된 목적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그러므로 창세기 2 장을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아는 것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데에도 필요하고 창조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도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해하는 데에도 필요하다. 창세기 2 장을 통해서 종말을 바라보며 앞으로 우리에게 펼쳐질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고 현실을 인내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지혜는 창세기 2 장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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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이재이

 

 

이젠 늘어진 티셔츠

대강 보아도 넉넉했어

 

그런데 무엇이 보였던 거야?

보이는 길만 따라 달렸어

뒤돌아 보니 발자국이 모두 지워져 있어

 

두려웠지

궤적 없이 나아가려니 툭

떨어질 것만 같았지

마른 웅덩이에서도 질식할 것 같았지

 

찬찬히 봐야 해

잠은 한 밤으로 만족하는 날

아스팔트 틈 사이로 강아지풀 발견하는 날

보는 것 따라

아침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서로 손을 꼭 잡고

비척비척 느린 걸음으로 산책하는 여든의 노부부에게

물어볼 수도 있을 거야

 

대강 보아도 예뻤어

그리고 자세히 보면 언제나 신비로웠어

카메라에 저장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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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3. 27. 22:51

삶으로 드리는 예배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아마도 우리 크리스찬의 가장 큰 고민이자 평생 동안 이어질 고민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일 것이다. 마치 어린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하면서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고민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런 고민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고민을 영원토록 할 것이다. 이 고민은 우리가 개인적인 삶을 살 때나 공동체적인 삶을 살 때를 막론하고 평생 동안 이어지며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이어질 것이다.

 

사도 바울 역시 동일한 고민을 했고 로마서 12장 이후에 여러가지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그 첫번째가, “무명으로 사는 삶”이란 글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이 세상을 따르지 말고 주님을 따라서, 세상에서는 무명으로 살지만 주님 안에서는 능력 있게 사는 삶이다. 사도는 이 가르침을 통하여,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정직하고 순수하며 단순하고 열심이 있고 성실하며 겸손한 삶을, 그리고는 계속해서 용납하는 삶과 분별하는 삶을 가르쳐주고 있다. 은사, 지혜, 사랑과 화목에 대한 말씀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구체적인 적용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그 말씀들은 분별과 용납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도가 은사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는 이유는 각 사람이 각각의 은사를 받아서 외적으로 능력 있게 살라는 의미뿐만이 아니다. 성령님 안에는 다양한 은사들이 있으며, 따라서 공동체 안에 다양한 은사자들이 있을 것인데, 그럼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가 한 몸으로서 통일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이며, 이 의미를 다른 말로 설명하면 서로가 서로를 다르더라도 용납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에도 기록된 것처럼 요점은 은사들의 종류에 대한 설명이라기 보다는, 바로 이 말씀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는 말씀에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13장에 기록된 사랑, 즉 모든 것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며 인내하고 품어주는 사랑이다. 공동체에 필요한 은사가 개인이 선망하는 은사와 다를 수 있으며, 각 개인의 은사의 종류가 같더라도 그 깊이와 크기가 다를 수 있고, 사역에 따라서 필요한 은사도 다르기 때문에 공동체 안에서 모든 은사는 다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서로 다르더라도 그리고 다르기에 서로를 용납하고 주님 안에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따라서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우리는 진정 알고 있을까. 지식과 말로는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정작 우리의 삶에서 이루려고 하면 정말 어렵다는 것을 매순간마다 절감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성상 자기와 다르면 싫어하기 때문이고, 또 다르면 누가 더 나은가를 따지며, 결국 높은 자와 낮은 자 사이의 차별을 만들기 때문이다. 다르기에 서로 합하여 더 나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보다는 서로 누가 더 우위에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는 게 사람의 본성인 것 같다. 그래서 비록 우리가 크리스찬일지라도 서로를 용납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이유는 우리는 우리의 깨달음을 우리의 육체로 실현시킬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거부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는 우리의 본성이 그렇고 우리의 세상이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깨달은 대로 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본성을 쳐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섬김이다.

 

또한 분별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옳으므로 내 편이고 틀리므로 내 편이 아니고 잘라내야 하고 심판해야 할 대상으로 구분짓는 것이 아니다. 지혜로운 분별은 진리를 바탕으로 하여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것을 깨닫고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옆에 지혜롭게 함께 서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웃과 함께 서 있기 위하여 나의 부족한 부분을 깨닫고 그 부분을 채워서 서로 화목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것 역시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분별에 대해서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향으로만 간다. 즉, 대상을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고 내 편과 내 편이 아닌 것으로 나누며 함께 할 사람과 잘라내야 할 사람으로 나누어 그냥 버리는 방향으로 간다. 다른 것을 품어서 진주를 만들어 내는 고통을 감당하는 것보다 그냥 버리는 것에 우리는 너무도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상대를 버리고 나는 남음으로써 생존에 의해 정당성이 증명된 것처럼 합리화한다. 분별을 잘못 사용하면 차별이 된다.

 

모든 종류의 차별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으며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학교에서의 왕따든 직장에서의 차별이든 심지어 인종차별이든 모든 종류의 차별은 이웃을 인정하지 않고 나와 다르기에 싫다는 것이며, 싫기에 차별하게 되는 것이며, 차별하기에 버리는 것이 된다. 특별히 코로나 펜데믹 상황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미국 내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코로나 사태가 중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인식과 함께, 이 펜데믹의 고통을 해소할 대상을 아시아인으로 삼게 되면서 인종차별이 더 심해졌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차별을 반대하며 특별히 인종차별은 더욱 더 반대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구별은 섬기고 세우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만 차별은 미워하고 버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웃을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하는 것과 같다는 우리 주님의 말씀이 너무도 가볍게 들리는 시대가 된 것은 세상이 그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르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용납하고 분별하여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서로가 서로를 세워주는 삶이 예배드리는 삶이다.

 

또한 이렇게 삶으로 드리는 예배는 적극적이어야 한다. 개인적인 삶에서든 공동체적인 삶에서든 적극적으로 용납하고 적극적으로 분별하며 적극적으로 겸손하고 적극적으로 낮아져야 한다. 도피적이고 소극적으로 자신을 제한하고 상황과 사건으로부터 도망가서 혼자 동굴에 들어가 있는 상태로는 기쁨이 가득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도망가면 어디에 있든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다. 우리가 실력이 부족하고 능력이 모자라며 작은 아이처럼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것처럼 헤매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통해 적극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여기저기 나대고 이곳저곳 헤집고 다닌다는 말과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의 육신이 우리를 부족함에 머물게 하고 우리의 상황이 우리를 무능력으로 내몰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이겼고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있게 사는 사람들이다. 비록 목표점은 멀지라도 매일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며, 바로 그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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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3. 20. 00:19

함께 모이는 기쁨

 

지난 해부터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계속되는 현재,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고 고립되어 혼자서 또는 가정 단위로만 지내는 것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립에 익숙해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예전처럼 함께 모일 수 있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이었나 하는 생각들을 갖게 되기도 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서로 모이기를 힘쓰자(히10:25)고 했던 것처럼, 특별히 우리 크리스찬은 성도들의 모임이 갖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성도의 모임이 곧 교회이다 (고전 1:2~3). 그리고 이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예수님이 자신의 피값으로 사신 것이며 모든 성도는 집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된 상태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모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여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지금 현재는 상황이 엄중한 만큼 어떻게 지혜롭게 모일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언택트 시대를 살면서도 성도의 모임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보호해 주실 것이므로 그냥 무조건 모여도 된다고 주장하는 일부 목사들의 주장은 성경을 오히려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역사에 합당해야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냥 무턱대고 무조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운다고 무조건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고 – 심지어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우고 진군했던 전쟁에서 무참히 패배했던 이스라엘에게서 아무런 교훈도 배우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코로나 팬데믹이 종료될 때까지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지혜롭게 모여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 인해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신 교회이기에 교회의 본질은 영과 진리로 성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다만 예배란 형식화된 주일예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이름으로 모여서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모든 활동들, 곧 성경공부도 예배이며 성도들이 함께 이웃을 섬기는 것도 예배이다 (롬 12:1). 그래서 예배는 개인적으로 드리거나 또는 집합적으로 성도들이 모여서 드릴 수 있으며, 성도의 삶의 중심에는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이든 반드시 예배가 있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혼자 드리는 예배와 집합적으로 드리는 예배 – 집합의 크기가 크던 작던 간에 두 사람 이상이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활동은 모든 구성원들에게 넘치는 기쁨을 준다. 집합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더욱 기쁜 이유는 그 기쁨을 모든 구성원들이 함께 나눌 수 있기 때문이고 그 나눔으로 인해서 서로의 기쁨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느 모임에 좀 비판적인 시각으로 건건이 반대만 하고 핑계만 대는 사람이 참석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함께 모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쁜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는 그런 사람의 참석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모임을 해치는 사람이는 생각만을 가졌으나 팬데믹 상황을 지나면서 드는 생각은 그런 사람의 참석조차도 귀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즐겁고 기쁜 일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물론 그런 사람이 모임을 해치게 방관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런 사람까지도 포용할 여유와 지혜를 가져서 그도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사실 나 한 사람이 모임에 참석한다는 것이 뭐가 대수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오늘 한 번은 몸도 피곤하고 다 귀찮아서 모임에 빠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 같은 나 한 사람이 모임에 참석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모든 구성원들이 기쁨을 누린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모임에 들어가서 하는 첫 인사들 – 아, 오셨어요 또는 잘 오셨네요 또는 잘 지내셨지요 또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등등의 인사조차 기쁨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임은 모였다는 것 자체로 기쁜 것이었다. 한 사람의 선한 영향력은 이처럼 그냥 별 거 아닌 것 같은 모임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령님이 그 자리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권면하는 것처럼, 우리는 기회가 되는 대로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물론 모든 모임에 다 참석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가급적 많은 모임에 참석하면 좋겠지만 결국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이루어져야 한다). 나 한 사람의 참석이 모두를 기쁘게 하며 모두가 모두에게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증거되는 귀한 시간이 된다는 것에서 모임에 참석할 동력을 얻어야 한다. 지금은 비록 언택트이 방식으로 온라인을 통해서 모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모인다는 것 자체가 성령님의 역사임을 깨닫고 서로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세히 보지 않아도 예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모임으로 향하는 발걸음조차 예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서로 마주쳐 아름다운 울림의 소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과 예쁨을 서로 나누어 서로의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어서 서로가 서로를 세워주고 사랑하는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모임이든 함께 모이기만이라도 하자. 온라인의 방식으로라도 모이기만이라도 하자. 함께 모여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우리에게 기쁨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는 다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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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無名)으로 사는 삶 2

 

(이 글을 읽기 전에 앞의 글을 먼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세상의 가치 기준과 평가 체계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복음서들에서 여러 번 확인할 수 있다. 사탄 마귀의 시험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에 나타나고 예수님의 형제들과의 대화에서도 나타나며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말씀 중에서, 예를 들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세상에서 무명으로 사는 사람을 의미하며,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도 내어주고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덧옷까지도 내어주라는 말씀도 그렇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주님은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기적의 능력을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시고 정작 본인을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비참하게 죽는 길을 택하셨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 나라의 삶은 세상의 가치 기준과 평가 체계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경쟁에서 이겨서 군림함으로써 가치를 증명하며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서 알려지고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가서 더 넓은 영향력을 끼치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주고 섬기며 경쟁을 피하고 경쟁에 나서지 않음으로써 무명이 될지라도 사람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전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은 능력이나 지식이나 지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 안에서 큰 능력과 지식과 지혜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과 지식과 지혜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여 그들을 섬겨서 세워주고 사랑하며 스스로는 무명이 되고 고난을 짊어지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크리스찬이 고난을 짊어지는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 몸을 학대하거나 자기자신을 무시하거나 또는 핍박을 자초하여 뭔가를 드러내고 달성하려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찬은 나누어 주는데도 멸시받고 섬기는데도 비난받음으로써 고난을 짊어진다는 것이며,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살기에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고 거부당하는 고난을 감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은 정복하고 지배하며 군림함으로써 자기를 키우고 크게 만들어 가치를 높여가지만, 크리스찬은 내어주고 나누며 섬김으로써 자기를 낮추고 무명이 됨으로써 오히려 세상을 꾸짖고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이웃을 섬기지만 오히려 비난받는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며 우리 주님과 사도들이 이미 그러한 것들을 보여주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6장에 이것을 기록하였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8b~10). 이 역설적인 삶을 진심으로 살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을 깊이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사도가 말한 것처럼 될 수 있는 이유는, 즉 우리가 고난을 짊어지는 자유를 누리는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이루었기에 그것을 이웃과 나누며 그것으로 이웃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요하기에 나누어줄 수 있고 넘치기에 퍼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어떤 사람들도 스스로 고난을 짊어지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그들과 다른 점은, 그들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 고난을 짊어지지만 우리는 이미 이루었기 때문에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다.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 뭔가 엄청난 선행을 하거나 목숨을 걸고 핍박을 받는 그런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진 것이 별로 없을지라도 더 어려운 사람의 위치에 함께 있어 주는 것도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요, 그 사람의 짐을 나누어 지는 것도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며, 내 것을 나누어 주는 것도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다. 어떠한 방식일지라도 내 형편과 상황에 맞게 그 사람을 형제로 이웃으로 함께 하는 것이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다. 목마른 자에게 물 한 잔 주는 것, 헐벗은 사람에게 옷 한 벌 주는 것, 국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세금을 정직하게 내는 것, 고아와 가난한 자들을 위해 돈과 생활필수품을 기부하는 것, 신입사원에게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것, 길을 몰라 헤매는 사람을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는 것 등등, 모두 다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통해 뭔가를 이루고자 함이 아니라, 이미 이루었기에 이러한 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 바로 고난을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어렸을 적 일화가 생각난다. 교회에서 중고등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요한복음과 요나서에 대해 성경퀴즈 대회를 열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두드러지게 뛰어났다. 그는 담당 전도사가 퀴즈 문제를 미처 다 읽기도 전에 손을 들고 정답을 맞추었다. 예배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교역자들이 다 감탄하며 놀랐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고 알게 된 것은 그 친구가 평소 친분이 있던 다른 교회의 전도사에게 성경퀴즈 예상 문제집을 미리 받아서 그것을 공부하였다는 것이었다. 세상의 기준으로 그는 영리하게 잘 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칭찬과 1등 상품은 그 친구에게 어떤 선한 영향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문제도 맞추지 못했을지라도 요한복음을 한 장이라도 직접 읽어본 아이가 차라리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한참 세월이 지나서 나중에야 들었다.

 

우리 크리스찬이 이 세상에서 무명으로 살며 고난을 짊어지는 삶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망으로부터 그리고 주변으로부터의 유혹을 끊임없이 물리치고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 주님을 바라보며 사도들을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이 걸었던 삶의 자취를 살펴보며 오늘 하루라도 무명으로 살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사는 순간마다 우리 주님이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은혜를 더욱 부어주셔서 그 삶이 역설적인 아름다움으로 빛나게, 곧 무명인 것 같으나 유명한 것이 되게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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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3. 7. 11:17

무명(無名)으로 사는 삶

 

세상은 가치로 대상을 판단하며 가치를 평가하기 위한 체계가 반드시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그리고 가치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윤리적 도덕적 가치뿐만 아니라 실용적 가치, 경제적 가치, 물질적 가치, 건강을 위한 육체적 가치, 또는 쾌락적 가치 등등 많은 종류의 가치가 있다. 또한  객관적인 가치 기준과 평가 체계에 따라서 가치가 정해질 수도 있지만 지극히 주관적으로 가치가 정해지기도 한다. 따라서 심지어 객관적 혹은 역사적 진실과 진리조차도 그 진실을 대하는 공동체에게 주는 가치가 무엇인가에 따라 진실은 취해질 수도 있고 버려질 수도 있다. 역사적 진실을 철저히 왜곡하고 부정하려는 일본 우익의 행보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서 뭔가를 인식하기 시작한 이후부터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도록 계속해서 교육을 받는다. 학교에 들어가서는 더욱 심해지고 성인이 되어 사회 생활을 할 때에는 마치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게 전부일 정도가 되며, 이로 인해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때로는 가정도 가치 평가로부터 벗어난 공간이 될 수 없다.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 되고 이제는 아버지가 아니라 그저 ‘함께 사는 사람’일 뿐이다. 이제는 아버지라는 존재도 가치 평가의 대상이 되며, 그의 가치는 돈을 얼마나 벌어오는지에 따라서 거의 결정되는 시대가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대상에 대한 가치 평가는 공동체가 수행한다. 공동체의 대표가 독단적으로 수행하기도 하지만 공동체 전부 또는 일부가 집합적으로 수행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 공동체에서는 전혀 가치 없는 것으로 평가되는 사람이 다른 공동체에서는 아주 중요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를 중요한 가치로 평가해 주는 공동체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내재되어 있어서 모든 사람은 공동체에서 인정받고자 노력한다.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경쟁에서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이다. 또는 어떤 졸업장이나 증명서 또는 수료증을 통해서든 추천서나 실적을 통해서든 어떤 방법으로든 다른 사람들보다 – 대부분 경쟁 상대보다 내가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서를 제공하면 된다. 경쟁에서 이기고 군림함으로써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고 반대로 경쟁에서 지면 결국 버려진다. 이도저도 아니면 평생 동안 불안해 하면서 ‘줄’이라도 잘 타서 살아남으려고 하는 게 전부이다. 폭넓은 인맥도 가치로 인정된다. 이러한 것들이 세상이 세상을 평가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역사상 오직 한 사람만이 이러한 가치 평가 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세상적으로는 전적으로 무명으로 살았다. 그는 무한대의 가치를 지녔으면서도 철저히 무명으로 살았으며, 이따금 보인 기적의 능력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자기를 선생님으로 모시겠다고 구름처럼 모여들었어도 다 흩어버리고 결국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 능력을 세상에 드러내고 세상으로부터 가치를 인정받아서 세상을 뒤엎고 마음대로 통치하라는 권고와 유혹을 수없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이름 없이 살았다. 만일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그는 역사 속에서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고 무명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는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였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하였으며 앉은뱅이로 수십 년 동안 살았던 사람을 걷게 하는 기적을 베풀었지만 성경 이외에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는 명백한 역사적 기록이 없다.

 

예수님의 형제들조차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에 그들이 예수님께 요구했던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드러나서 세상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7:2~9).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시고 은밀히 행하시며 무명으로 죽으심으로써 역설적으로 세상을 꾸짖고 세상에 빛을 비추신 것이었다.

 

주님이 그렇게 철저히 무명으로 죽었으나, 바로 그 무명으로 죽었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세상을 근본적으로 뒤엎을 수 있는 힘을 받게 된 것이다. 이제는 세상의 가치 평가 체계를 따르지 않고도 그 체계를 따르는 것보다 훨씬 더 진정으로 가치 있게 되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증명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길이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은 예수님이 살았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세상의 가치 기준과 평가 체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며 어떻게 하든지 조금이라도 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경쟁에서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이기려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가치 있는 존재이지만 무명으로 살면서, 무명이기에 세상이 인정하는 가치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존재 가치를 깨닫고 진심으로 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무명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은 사람이 공부도 하지 않고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세상의 가치 기준과 평가 체계를 따라서가 아니라 주님의 가치 기준과 평가 체계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 평가 체계를 따라서는 아무런 이름도 없고 그저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큰 능력과 지식과 지혜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크리스찬은 세상의 가치 평가 체계를 거부함으로써 세상에서는 비록 무명이지만 오히려 세상을 비추고 세상의 어두움을 드러내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거부를 당할지라도 주님 안에서 진정한 가치를 이루어내는 삶을 살게 된다.

 

따라서 우리 크리스찬은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아직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 세상에 대하여 어떠한 삶을 살 것이며, 또한 교회 안에서 형제들을 대할 때에 혹시라도 세상적인 가치 평가 체계를 사용하여 형제들을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교회의 일들을 결정할 때에 세상의 가치 기준과 평가 체계를 따라서 결정하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바, 아무든지 주님을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하신 말씀은 분명히 무명의 삶에 대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삶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세상에서 무명으로 사는 삶이 얼마나 필요한 것이고 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고 각 개인이 그리고 교회가 무명의 삶을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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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2. 13. 06:02

창조론과 진화론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11:3)

 

기독교인의 비율이 점점 줄어드는 시대에 각 가정, 특히 학교에 다니는 어린 자녀를 둔 가정에서는 아마도 창조와 진화에 대해서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을 것이다. 대학생들과의 대화에서도 그런 점들이 보였으니, 그보다 더 어린 자녀들은 학교에서는 진화론을 배우고 교회나 가정에서는 창조론을 배우기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울 것이다. 2019년에 퓨리서치에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을 때에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6일 창조론을 믿는 사람의 비율이 2005년보다 현저히 줄어들었고 유신론적 진화론(또는 줄여서 유신진화론)의 비율이 많이 늘었으며, 무신론적 진화론의 비율은 조금 늘었다고 한다 (42% : 18% : 26% => 18% : 48% : 33%).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진화론을 자신의 신앙 안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로 유신진화론은 진화론적 창조론이라고도 하며, 현재의 모든 생명체는 진화를 통해서 생겨났는데 창조주가 창조 시에 자연계의 생명체들에게 진화의 능력을 부여했고 또 때론 진화의 과정에 초자연적으로 개입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는 이론이고, 무신론적 진화론은 모든 생명체들은 우연과 자연 선택의 과정을 통해서 진화하여 저절로 현재의 모든 생명체가 생겨났다는 이론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도는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며, 또는 어떻게 다른 생각을 가진 동료 성도나 무신론자와 대화해야 하는지 참으로 고민해야 한다. 진화론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무조건 무신론자인 경우가 이제는 그렇게 많지 않고,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 매우 다양한 생각의 스펙트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맨 왼쪽에는 철저한 무신론적 진화론이 있고 맨 오른쪽에는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6일 창조론이 있다. 우리 모두는 이 스펙트럼의 어느 한 지점에 위치해 있다.

 

철저하게 무신론자로서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제외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순수하게 과학적 의미로서 진화론을 주장하고 하나님의 존재 유무는 불가지론이나 이신론적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현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진화의 방식을 사용하셔서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단순한 기독교”라는 책으로 유명한 C. S. 루이스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었지만, 아담이 역사적으로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았다고 믿었고,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반 틸은 유신진화론을 지지했다.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의 창조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창조의 방식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을 가질 수 있다. 성경은 과학책도 아니고 역사책도 아니다. 다만 인간의 구원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세상에 대한 과학적인 내용과 역사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역사적인 내용이라고 해서 조선왕조실록처럼 기록된 것이 아니고, 구원의 과정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실제로 발생했었다는 기록에 역사적 내용이 포함된 것이다. 과학적인 내용도 마찬가지다. 어떤 과학 이론을 설명하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정황 가운데 과학과 관련된 내용이 – 예를 들어, 지구가 공간에 떠 있다든지,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진다든지, 또는 원의 둘레는 지름의 세 배가 조금 넘는다든지 하는 내용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근거로 해서 과학 이론이나 역사적 사실을 백 퍼센트 다 도출해 내서는 안 된다. 특별히 역사적 내용에 대해서는 창세기 12장 이전의 기록들은 굉장히 함축적이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역사적 기록이라고 간주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며, 또한 창세기 12장 이후의 기록들에 대해서도 서술적 기록뿐만 아니라 비유적 기록도 많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의 방식에 대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몇 가지 체크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아담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둘째는, 아담의 타락 사건과 죄로 인한 죽음의 시작이 실제로 발생했는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창조 시의 아담의 상태가 미개하고 저능한 상태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 외의 다양한 요점들은 상당히 큰 유동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지구의 나이가 45억년인지 아니면 6천년인지 하는 것이나, 하나님이 온 우주를 6일 동안에 창조하셨는지 아니면 아주 긴 기간 동안에 어느 정도 진화의 방식을 사용하셨는지 하는 것들이다.

 

일부 열성적인 기독교인들은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쳐서는 안 되고 창조론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며 교과서를 수정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그러면 다른 기독교인은 이 주장에 동조해야 하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사실 일반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진화론은 무신론자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유일한 틀이기 때문에 그들은 무조건 그 방향으로 갈 것이고 사람들을 그렇게 교육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은 그들과 함께 배우며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사고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들이 창조론을 배워서 우리와 대화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가 차라리 진화론을 배워서 그들과 대화하며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리고 교회와 가정에서 창조론을 가르치면 된다. 교회의 사역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전문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기독교인 전문가를 초청해서 배우면 된다.

 

요점은 이것이다. 기독교인이 진화론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학교에서 진화론만을 가르친다고 해서 심각하게 염려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 중에서 유신론적 진화론을 수용한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해서 6일 창조론을 버릴 필요도 없다. 진화론의 일부분을 수용하면서도 성경 말씀대로의 타락과 구원을 믿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기독교인이며 우리 모두 다 동료이며 형제이다. 나는 문자적인 6일 창조론을 믿는 기독교인인데 저 사람은 유신진화론을 믿는 기독교인이므로 저 사람과 상종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틀린 생각이다.

 

더군다나 전통적인 창조론 안에도 매우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한다. 젊은 지구론을 믿으면서도 지구 나이가 6천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최소한 수 만년 정도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며, 단일격변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다중격변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젊은 지구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고고학적 발견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날-시대 이론을 믿는 사람도 있고 간극 이론을 따르는 사람도 있어서 문자적인 6일 창조가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아담이 창조되었다고 믿기도 한다. 그러므로 창조 자체가 아니라 창조의 방식에 대한 이견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서로 반목하고 분열될 필요는 없다.

 

창조의 방식에 있어서 아담이란 존재에 대한 정의와 아담의 역사성과 아담의 타락 및 죄로 인한 죽음의 문제를 성경에 맞게 설명하면서 고고학적 발견들을 함께 설명할 있다면 어떤 창조의 방식이든, 심지어 유신진화론이든, 우리는 열린 자세로 대해야 한다. 신앙적 또는 신학적 접근이 아니라 목회적 접근이 필요한 이다. 따라서 교회에서나 기독교인 가정에서 그리고 기독교 계열의 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칠 때에도 다양한 관점에서의 창조론을 가르치며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며 자신들의 신앙 안에서 창조론을 형성해 나가도록 해야 한다. 마치 어느 한 견해만이 성경적이고 나머지 견해들은 비성경적이거나 무신론적 진화론처럼 취급함으로써 아이들이 경직된 양자택일을 강요당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도록 해야 한다.

 

최근에는, 퓨리서치의 설문조사 결과처럼, 많은 기독교인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진화론과 창조론을 조화롭게 결합하려는 시도들이 많아졌다. 아마도 이것은 과학의 발전에 따라서 사람들이 과학과 기술에 더욱 많이 접하기 때문이며 인터넷이나 유튜브에도 그러한 내용들이 많이 올라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시도이든 중요한 것은 과연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가 하는 것이지만, 성경이 설명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여유를 가지고 열린 마음으로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는 것이 기독교인이 창조론을 대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창조냐 진화냐 하는 오랜 논쟁 가운데서 우리가 배울 수 있었던 것은, 과학이 얼마나 형이상학적 의미로 확대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자연 법칙을 이해하기 위한 과학이 아니라 과학이 오히려 창조주를 제거해 버리는 방향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이 명백해졌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을 창조주 안에서 정의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또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하며, 이렇게 정의된 과학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할지라도 열린 마음으로 서로 비평하며 서로에게 배워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독교 내의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며 형제를 사랑하고, 또한 기독교인 모두가 단합해서 무신론적 진화론에는 단호하게 대처하는 지혜를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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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2. 13. 05:57

덴버 1700 마일

 

이재이

 

 

한인 마켓으로 가는 고속도로 표지판에

덴버 1700 마일이 뚜렷한데, 미국에서 20년 지나도록 마일 감각이 없어

대강 암산해 보니 서울에서 부산을 네 번이나 왕복하는 거리다

록키산맥을 끼고 있는 콜로라도 덴버,

흰 눈 이고 짙은 안개 뚫고 맹렬하게 서 있는 산맥

산 중턱 어느 통나무집에서 흘러나오고 있을 것만 같은

컨트리송 가수 존 덴버의 카랑한 노래가

발렌타인 데이 초코렛을 기다리는 연인의 눈동자처럼 꼬셔댄다

미국 친구들은 은퇴하고 대륙을 횡단하는 게 꿈이라서 나도

이 길 따라 가면 되겠구나 싶어 덴버 지나 태평양까지 3000 마일 여행길을 가늠해 본다

하루에 10 시간씩 운전하면 5 일이면 되겠지만, 중간에 콜롬버스, 인디애나폴리스, 세인트 루이스, 덴버, 라스베가스, 로스앤젤레스를 둘러보려면 최소한 2 주일은 걸리겠구나, 차에 기름 넣을 주유소와 식당도 알아 보고 호텔도 필요하겠지

태평양 너머에는 한국도 있겠지

한참 궁리에 빠져 있는데 옆 차가 빠앙 하며 지나간다

 

장 보러 가는 고속도로

하늘로 닿아 있는 언덕길이 새롭다

오늘은 배추김치랑 총각김치도 사서 저녁밥 먹고 지도를 찬찬히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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