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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2.06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2. 2021.02.06 번지점프
  3. 2021.01.30 나의 시편
  4. 2021.01.30 하나님의 선택
  5. 2021.01.30 고흐를 마주하여
  6. 2021.01.23 교회 개혁에 대하여 1
  7. 2021.01.23 강은 새벽에 흐른다
  8. 2021.01.16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
posted by 풀숨 2021. 2. 6. 01:38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1:5~6)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시 57:5, 11)

 

종교개혁의 5대 강령인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을 반영하여, 웨스트민스터 소교리 문답에서 첫번째 문답이 바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고 이에 대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고 답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일까. 그냥 말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하면 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간단한 지표는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고 있는지 아니면 비방을 받고 있는지 살펴 보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다고 소리 높여 외치더라도 주변의 사람들이나 이웃들이 교회를 향해서 손가락질 하고 있다면 우리의 말은 입김처럼 가벼울 뿐이다.

 

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것은, 흔히 말하는 선행이 먼저가 아니다. 성도의 선행은 당연히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지만 그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게 있다는 말씀이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마음 다해서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의지하고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반드시 짚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순종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둘째, 나는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점이다. 하나님은 성경에 계시된 대로 명확하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을 만들어 내고서는 성경의 하나님과 동일시 한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이라고 부른 사건은 지금도 계속되는 일이다.

 

사실 두번째의 경우가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첫번째 경우가 무너지는 이유로써 두번째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이 성경의 하나님과 자기 생각을 적당히 타협하여, 하나님을 자기 생각대로 정의해서 자기만의 하나님을 만들어 버리고는, 그 하나님을 섬기면서 성경의 하나님을 섬긴다고 믿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 그 사람에게는 두려운 것이 없다. 무엇을 하더라도 하나님이 무조건 자기 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부르며 다른 사람의 동참을 촉구하고 모두가 넘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을 목사나 장로가 하면 심각해진다. 지역 교회 전체가 넘어지게 되고 쉽게 고쳐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사람이 아직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실제로는 믿지 않지만 믿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이다. 다만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사람은 실수와 부족함이 시간에 지남에 따라서 하나님의 양육하심으로 점차 극복이 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양육하심이 없기 때문에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의 생각을 섞어서 하나님을 이해하며 믿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 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뿐이다.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일은 우리 사람의 자연적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는 한 불가능하다. 사람이 자연적 상태에 있을 때에는 그의 모든 생각이 하나님을 거부하며 하나님께 반항하는 생각 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사람은 먼저 반드시 성령님으로 인해서 거듭나야 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비로소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게 된다. 이제 사람은 오직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된 것이며, 성령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살 때에 하나님께 영광드리게 된다.

 

진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지에서 드러난다. 성경이 하지 말라고 하면 무조건 하지 않으려 하고, 하라고 하면 무조건 하려고 하는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토를 달고 자기 생각으로 가늠하며 상황을 고려해서 타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사실은 믿지 않는 사람이며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배를 위하는 사람일 뿐이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긴 했지만 지금의 상황을 고려하고 형편을 참작하며 체면과 인간 관계를 생각해서 적당히 하지 않는 것으로 타협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하나님과는 상관 없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하는 일일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는 것이며,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자 아버지이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낮추고 겸손하게 된다. 그래야만 내 생각이나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것,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조차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은 단순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내 생각이나 내 상황과 타협하지 않고 오직 전적으로 순종하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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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2. 6. 01:37

번지점프

 

이재이

 

 

구름다리에 잠시 몸을 누이고

파란 고양이 꿈을 꾼다

배낭 메고 슬리퍼 신고 여행 떠난다

 

건조한 날씨는

검은 바탕 캔버스에

한 송이 눈꽃, 빨간 가시 하나 하나

공중에 흩날리고

 

등에 화살 꽂힌 채 바위 밀어

산정상을 향하는 손

찢어진 발가락 앞에서

 

구름다리에서 번지점프하는 날개

산은 박혀 있고

골짜기는 장막처럼 펼쳐져 있다

걸음걸음 구름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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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1. 30. 22:01

어린 아이를 세워

노래를 부르게 하시는 이는

수선화에게 색을 입히시는 분이시도다

잠이 침상에서 굴러 떨어질 때마다

난간을 세워 붙드시는 이는

하늘의 하늘 위에 앉으신 분이시도다

땅이 검은 구름에 휩싸여

상심으로 흔들리는

중심에 도피성을 지어주신 이는

사람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시도다

겨울 아침, 맨발로 걷는 이에게

신발 가게 주인을 보내시는 이는

사람을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시도다

( 셀라 )

모든 인생이 듣지 못하고 침묵할

돌들에게 입을 주신 이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전능자시도다

땅을 향해 팔을 펴신 우리 하나님이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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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1. 30. 06:32

하나님의 선택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 12:3)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진리를 너무도 쉽게 오해한다. 뉴스에서나 또는 주변에서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 중에 자기가 뭔가 대단한 사람이 것처럼 독불장군이나, 심지어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목사, 장로, 권사들이 특히 그런 성향을 보인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은 자기만을 위한 하나님이고,  자기는 매우 특별한 존재이자 특별한 위치로 선택받은 사람 것처럼 행동하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 나만 맞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는 식이며 내가 하는 행동은 정당하다고 한다.

 

하나님이 사랑과 은혜로 나를 선택해 주시고 자녀로 받아주셨다는 인식은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인식은 내가 하나님을 믿은 후에 가지게 되는 것이며, 선택이 스스로의 능력이나 잘남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인해서 내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더욱 믿고 의지하도록 한다. 그래서 선택의 개념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의 의미가 오해될 있기에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형제들을 권면했는데, 복음에 합당한 삶에 대해서 가르쳐주면서(12), 첫번째 교훈이 너희는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는 것이고, 두번째는 너희는 세상에 동화되지 말라는 것이며, 세번째가 너희는 스스로 뭔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교훈들을 가르쳐준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은 높여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낮춰지기 위해서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어떤 능력이나 지혜나 혈통이나 성품 때문에 선택을 받은 것이 전혀 아니다. 우리는 먼지와 같고 벌레와 같은데 하나님께서 그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다. 점은 고전1:26~29 말씀을 보면 명확하다. 우리는 육체를 따라서 때에 지혜롭지도 않고 능력이 좋지도 않으며 문벌이 좋지도 않았기에 선택을 받은 것이며, 오히려 세상의 미련한 것이기에 선택을 받았고 세상의 약한 것이기에 선택을 받았으며, 세상에서 천하고 멸시받고 가진 없는 것들이기에 선택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선택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찬양하기 위함이지 우리에게 뭔가 뛰어난 것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어리석은 죄성은 마치 우리가 선택받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우리를 속이고, 우리에게 뭔가 특별함이 있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를 높이고자 한다. 하나님의 선택을 완전히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오해는 필연적으로 악을 행하고 죄를 범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생각할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땅히 생각해야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마땅히 품어야 생각에 대해서는 빌립보서 2:5~8 말씀에 기록되어 있다: “너희 안에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말씀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우리가 마땅히 품어야 생각은,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해서 선택되었다는 마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해 주셨다는 것은 우리의 무기가 아니라 우리의 겸손이 되어야 한다. 우리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자랑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으므로 나는 뭐든지 해도 된다는 주장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그런 것은 성경에는 없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이유는 참으로 보잘 없는 나를 사용하셔서 그리스도를 드러내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나에게 뭔가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드러낼 있다고 주장할 있는 가능성 자체를 원천봉쇄 하시고, 아무런 보잘 없는 존재도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그리스도처럼 사랑이 넘치는 삶을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나를 선택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에게 어떤 뛰어남이라도 발견된다면 예를 들어, 뛰어난 언변이든, 뛰어난 손재주든, 뛰어난 재능이든, 뛰어난 재물이든, 또는 뛰어난 지능이든 어떤 것이라도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이웃과 형제들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은 참으로 보잘 없는 존재인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이 드러나도록 우리를 도구처럼 사용하신다. 나의 능력과 나의 자랑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 앞에 참으로 보잘 없다는 것만이 내게 유일한 진실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를 보시기에 내가 선택을 받을 있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것이지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이 가르쳐준 하나님의 선택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자기가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높아진 사람은, 최악의 경우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아닌 것이며, 잘해야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람일 뿐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가 얼마나 보잘 없는 존재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얼마나 것인지 알게 하기 위함이다. 이상의 생각은 악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특히나 목사, 장로, 권사, 전도사, 선교사, 안수집사를 포함하는 모든 성도들은 가장 평범하거나 평범 이하이기 때문에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명심하며 마땅히 생각할 이상을 생각하지 말고, 언제나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서 이웃과 형제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스스로를 높이지 않고 이웃과 형제들보다 낮추는 것이 사랑과 섬김의 기본이자 시작이다. 그리고 뭔가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목사가 있다면 목사와 절교하고 다른 교회로 옮기는 것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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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1. 30. 06:30

고흐를 마주하여

 

 

이재이

 

 

명태식해처럼 저음이

...화폭에 터져 나올 때마다

끈이 달린 구두 켤레를

고흐는 검정 신음으로 칠했다

4월의 언덕 아래

일출부터 일몰까지 밀밭에서 씻겼던

 

그림에 비친 나의 오른쪽 귀는

뉴욕 지하철에서

맨발의 노숙자에게 신발 벗어준 이를 따라

- - - __

절뚝거리며 비트를 넘는다

 

걸음 옮긴 벽에서,

그가 맹세로 그려 놓은

별빛 찬란한 밤을 지새고

너의 밤은 푸르렀는지 묻는다

깜박이지 않는 눈에서 물처럼 저물어 가는

해바라기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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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개혁에 대하여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눈이 불꽃 같고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내가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알지라. 내가 너희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2:18~23, 29)

 

우리의 순진한 기대와는 다르게,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이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아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분류해 보자면, 첫번째는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섬기는 사람이요, 두번째는 하나님을 믿고자 하지만 스스로는 아직 회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요, 세번째는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스스로는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요, 마지막 네번째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어떤 목적을 위해서 교회에 출석만 하는 사람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부분의 교인이 첫번째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마도 첫번째 부류가 가장 적은 숫자일 것이다. 심지어 목사나 장로, 권사들조차도 첫번째 부류에 속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요즘 한국에서나 미국에서 교회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교회가 세상의 윤리 의식조차도 따라가지 못하고,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보다 못한 짓을 뻔뻔하게 벌이고 다니면서도, 오히려 적반하장식으로 구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이다. 사실 이렇게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대부분 세번째나 네번째 부류에 속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기 배를 채우는 사람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첫번째 부류인 사람들,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두려워 하기 때문에 함부로 죄를 범하지 않고, 또는 죄를 범하였다 하더라도 반드시 죄를 인정하며 죄값을 달게 받고 돌이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번째 부류인 사람들도, 비록 회의에 빠져 반신반의하지만,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진정한 열심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자 죄와 악에서 떠나려고 몸부림치기 때문이다.

 

교회 문제의 근본적 이유

그렇다면 요즘에는 한국 교회에 이렇게도 세번째와 네번째 부류의 사람이 많아진 것일까. 물론 여러가지 다양한 이유들이 제시될 있을 것이다. 기독교만의 자유로운 분위기도 제시될 있고, 또는 이제 겨우 100여년 밖에 되지 않은 기간이 제시될 있을 것이며, 또는 신학의 깊이와 감동의 부재가 제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목사들의 신앙이 교회에 감동을 주지도 못하고 모범이 되지도 못하며 오히려 불순종의 길을 용납했기 때문이고, 심지어 목사 자신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 아는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물론 훌륭한 목사들도 많이 있고, 모든 목사들이 문제라는 의미는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측면을 보면, 목사들이 가장 문제인 것은 확실하다.

 

최근의 설문조사를 참고해 봐도 이점은 뚜렷이 드러난다. 목사들 스스로도 문제가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 (한겨레 기사 참조: http://www.hani.co.kr/arti/PRINT/979363.html 교회 개혁의 필요성은 99% 인정했고, 목사 노회와 총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이 전체의 61.2% 드러났다). 그런데 어쩌면 문제는 잘못된 목사를 바로잡을 있는 수단이 거의 없다는 있다. 노회나 교단 총회 등이 있지만 사실상 목사 치리에 있어서 노회나 교단 총회는 거의 유명 무실하다. 지난 수십 동안 제대로 치리를 행사하는 것을 기억이 거의 없다. 또는 노회나 교단 총회에서 제대로 치리를 해서 목사 직분을 박탈해도 목사가 담임하는 교회를 떠나지 않고 치리에 순종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이상 뭔가 있는 없다. 기껏해야 교회 간판에서 교단 이름을 삭제하는 것이 전부일 뿐이다. 나쁜 경우는 목사가 담임하는 교회를 다른 교단으로 옮겨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목사가 새로운 교단을 만들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목사들 스스로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또한 목사들 스스로가 개혁의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개혁이 완수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이미 교회가 시스템적으로 개혁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면 교회 개혁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중세 시대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하나님의 교회이니 하나님께서 직접 개혁하실 것이다. 엘리야 선지자가 이세벨에게 쫓겨 광야로 도망친 뒤에 크게 낙담하여 실의에 빠져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이 지금도 여전히 적용된다.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바알에게 무릎 꿇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엘리야 이외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 칠천 명이 남아 있다고 하셨다. 이들이 이스라엘인 것처럼 지금 시대에도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람이 있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역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들이 시스템에 얽매여 스스로 없다면 성도들이라도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해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성도들이 개혁의 동력을 일으켜야 한다. 가장 확실한 행동은 문제 있는 목사가 담임하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것이다. 깊이 살펴보지 않고 상식 선에서 생각해 봐도 문제가 많은 목사, 부당하게 교회를 세습하는 목사나 성범죄를 저지른 목사, 교인을 상대로 사기를 목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고 이단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목사, 교단 총회의 치리에 순종하지 않는 목사, 성도를 섬기는 일을 쇼처럼 하는 목사, 성도를 섬기는 일보다는 정치에 관심이 많은 목사 등등이 시무하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런 목사를 생각해 보라. 최소한 달에 번이라도 전체 교인을 일일이 기억하며 교인을 위해 중보기도 하지 않는 목사, 하나님 말씀을 매일 힘써 묵상하고 연구하며 교인들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목사, 여러가지 고통과 고난 속에 슬퍼하는 교인 가정과 함께 슬퍼하지 않는 목사, 또는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삶의 모범을 보이지 않는 목사. 이런 목사는 목사 노릇을 하며 단지 자기 배를 섬기는 사람일 뿐이다. 이러한 목사가 시무하는 지역 교회들만 없어지더라도 한국 교회는 훨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며 능력있게 복음을 전파할 있을 것이다.

 

사도 요한이 전한 말씀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이렇게 문제 있는 목사가 담임하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다른 교회로 옮기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사도 요한이 두아디라 교회에 전한 말씀,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알지라”(2:22~23) 하셨다.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배를 우상으로 섬기며 목사 노릇하는 사람과 함께 지내면서 화합하는 사람은 자기 행위를 회개해야 한다. 사람은 아마도 자기가 우상을 섬긴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목사와 함께 하는 자체가 간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올바른 회개는 목사 노릇하는 사람과 절교하고 돌아서서 온전히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것이다. 그러니  현재의 교회 시스템과 상황을 고려해 때에 그런 목사가 담임하는 교회를 떠나서 참된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로 옮기는 것이 올바른 회개이다.

 

일주일에 예배를 번이나 드리는가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한 아니다 (물론 예배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번이라도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는 것이 핵심이며, 가장 중요한 예배는 주일 대예배가 아니다.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며,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슬퍼하는 영혼과 함께 드리는 예배가 가장 중요하며, 목사가 그러한 사람의 처지에 내려가서 함께 슬퍼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일수록 예배당에서 좋은 자리에 앉아야 하며, 몸이 아파서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사람일수록 예배당 앞자리에 앉아서 목사와 교인이 함께 위하여 기도할 있어야 한다.

 

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가장 두렵게 느꼈던 성경 말씀이 있다. 12:47~48 말씀으로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것이니라 말씀이다. 목사가 사람들은 분명히 우리 주님께 많이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경험과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이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우리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주님은 분명히 그들에게 많이 달라고 하실 것이다. 시대의 목사들은 그때에 무엇을 주님께 드릴 것인가. 목사는 자기 뜻대로 목양하는 사람이 아니다. 양치는 목장을 비유로 들면, 우리 주님은 목자요 성도는 양들이로되 목사는 목자의 뜻을 수행하는 목양견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찬양대를 비유로 들면, 우리 주님은 지휘자요 성도는 찬양대원이고 목사는 지휘자를 따라서 성도가 찬양할 있도록 음을 잡아주는 반주자인 것이다.

 

교회 개혁의 시작점

혼탁하고 어려운 시기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면서 성령님의 가르치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 주님이 성령님을 보혜사로 보내신 이유이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직분으로서 목사와 교사 세우셨지만 무엇보다도 성령님이 우리를 가르쳐 주시므로 우리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성경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성령님이 가르쳐 주신다는 것은, 우리가 무슨 직통계시를 듣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성경 말씀대로 살게 하시는 것이다. 목사도 성령님의 가르침을 배워야 하며, 성령님의 가르침을 깊이 배워서 교인들에게 일종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목사가 자기 직분에 충실하지 않으면 다른 충실한 목사와 함께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도 올바른 방법이다. (그렇다고 글이 성도들에게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자기 맘에 들어서 교회를 옮기도록 부추기는 식으로 해석되어서는 된다. 그런 의도가 전혀 없음을 명확히 밝혀 두고자 한다.) 목사의 잘못된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목사와의 친분이나 어떤 망설임 때문에 교회를 옮기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 개혁을 목사들에게만 맡겨두지 말고 이제 성도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행동해야 때인 것이다. 두아디라 교회에 보낸 메시지처럼 우리는 즉시 행동해야 한다. 어느 교회로 옮겨야 할지 고민하지 말고,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시리라 믿고 행동하면 된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야 하고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익숙해질 때까지 조금은 불편할 수도 있지만 모든 교회는 주님 안에서 형제자매이므로 그런 불편을 기꺼이 감수할 있고, 더욱이 그런 이동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함께 성장하는 새로운 기회가 것이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눈으로 직접 보게 것이다.

 

지금 현재 한국 교회는 문제에 빠져 있다는 것을 누구나 공감한다. 그리고 그렇게 데에는 목사들의 잘못이 가장 크다는 것도 대부분 공감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목사들이 스스로 회개하고 한국 교회를 개혁할 있는 시기와 실력을 이미 상실해 버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성도들이 일어서서 개혁해야 한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행동은 그런 문제 있는 목사가 담임하는 교회를 출석하지 않는 것이다. 성도는 그런 목사와 함께 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목사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런 교회를 떠나서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에 출석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 개혁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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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 새벽에 흐른다

 

 

이재이

 

 

산그림자 깊고 아늑하다

신비를 풀어낸 문장을

어깨에 새기고

아무도 보지 않아야 깨어나는

피규어 인형처럼

강은 새벽에 흐른다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순례를 마치고

신전에 오르는 연어의 날개

길을 여니

죽여 터지는

아기의 울음처럼

물안개 짙게 피어 오른다

정동진 끝에서

샛별이 깊음 속에

하루의 빛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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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1. 16. 06:16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

 

우리 크리스찬이 지금 현재 육신을 입고 땅에 살면서도 지금 누리는 하나님 나라와 그리고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우리의 본향이며 장차 우리는 완성을 보며 그곳에 살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냥 막연히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단순하게 고통이나 슬픔이 없이 기쁨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사실 별다른 의미를 두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닐까 싶다.

 

우리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선포하셨던 말씀이 바로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이다 (1:15).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고 마침내 일을 이루셨다. 그리고 주님은 현재 나라의 왕으로서 다스리고 계신다 (5:29~32).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다. 그저 땅에서 조금이라도 먹고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누가 좋은 차를 몰고 누가 좋은 집에 사는 것과 누구 자식이 명문대에 들어가고 좋은 회사에 취직했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는 사람들은 천국에 다녀왔다는 사람의 간증을 들으면서 막연한 꿈을 꾼다. 여기에 사는 동안 착한 많이 해서 나중에 천국 가면 보석으로 만든 집에서 살아야겠다는 꿈을 꾸는 대부분이다.

 

우리는 최소한, 성경 말씀과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얼마나 아름답고 영화롭고 멋스러울지 진지하게 연구하며 나라를 바라보며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장차 완성될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먼저 구약 성경이 계시한 하나님 나라의 이미지는 에덴 동산의 이미지이다. 이사야서 11장에 기록된 것처럼 사람과 모든 동물들이 평화롭고 사랑스럽게 함께 어울려 사는 장소로서의 이미지이다. 그곳엔 억압과 착취와 압제와 먹이 사슬이 아니라 서로 어울려 함께 즐겁게 뛰어 노는 평안과 기쁨만이 있다. 그리고 에스겔서 47장에는 생명과 치료와 풍요의 장소로 묘사된다. 신약 성경에서 계시록 21 말씀에 의하면 그곳엔 눈물과 슬픔과 아픔과 사망이 이상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우리와 함께 하신다. 로마서 14장이 가르쳐주는 하나님 나라는 이젠 먹는 것과 입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 안에 있는 의와 평안과 기쁨이다.

 

그러면 이렇게 묘사된 하나님 나라가 우리와는 어떠한 관계에 있게 되는가. 단지 우리는 거기서 살게 되는 것뿐일까 아니면 우리에게 약속된 것은 훨씬 풍성한 것일까. 성경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훨씬 풍성하다. 비록 성경에 자세히 계시되지는 않았지만 숨겨진 힌트들을 모아서 생각해 봐도,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감히 비교도 없을 만큼 우리는 엄청난 복을 받게 된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됨의 극치를 맛보게 된다 (17:21).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 되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며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됨으로써 하나님과 연합됨의 극치를 맛보게 된다. 창조물이 창조주와 연합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연합은 세상에서는 상상조차 없는 수준의 연합이 것이다.


둘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다 (21:7; 22:5).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아서 되며 내가 통치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소유의 대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것이기에 사랑해야 하는 가지고 사는 삶이 되는 것이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마음껏 정성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우리 자신을 드릴 있게 된다 (12:1). 그리스도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순전하고 완전하게 드릴 있게 되어 우리의 기쁨이 넘치게 된다. 우리는 영광의 몸을 입고 이상 죄와 악에 조금도 얽매이지 않으며 (요일3:6), 완전히 자유롭고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있게 된다.  


넷째, 우리에게 창조와 능력의 영이신 성령님이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창조의 능력을 통해서 창조 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게 된다 (1:2). 성령님은 날마다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더욱 친밀하게 연합시키시며 하나님의 깊은 속까지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고전2:10),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도록 도우신다 (4:13).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을 얼굴을 마주보며 아는 것처럼 알게 되고 (고전13:12; 3:10), 하나님 품에 완전히 안겨서 살게 된다.


다섯째,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서로 사랑하게 된다 (13:34). 세상에서 살면서 수많은 제약과 한계와 오해로 인해서 마음껏 사랑하지 못했던 것이 이제는 아무런 제약과 한계와 오해가 없이 서로 마음껏 사랑하며 섬기며 즐거워 하는 관계가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가족이므로 언어와 문화와 인종과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부보다 친밀해지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조금이라도 닮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섬기고 끌어주며 함께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가는 삶을 나누게 된다. 다양한 문화 속에서도 모두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와 찬송을 드리며 한 마음으로 기뻐하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하늘과 땅은 세상과는 비교도 없이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 (21:4~5). 하나님의 진리가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구현되기 때문에 하늘과 땅은 모든 곳이 아름다우며, 어느 곳에서도 눈물과 슬픔과 추함이 없고 극치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어느 곳에서나 있고 느낄 있으며 모든 성도가 간절히 소망했던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구현된 세상이 된다.

 

하나님은 영원무궁하시기에 창조물인 우리가 아무리 접근해도 하나님은 영원히 초월적인 분이시며 우리에게 언제나 새로운 기쁨을 주신다. 기쁨에 대비되는 슬픔이 있어야 기쁨을 알게 되는 세상의 삶과는 달리,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는 언제나 새로운 기쁨이 존재한다. 하나님은 그만큼 크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성품이 극치로 구현된 세상이 된다.

 

이제 다시 생각해 보자. 이러한 하나님 나라에서 보석으로 지은 집이 필요하겠는가. 성경에 보석으로 묘사된 많은 것들이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움의 극치를 표현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늘과 땅의 아름다움을 우리가 이해할 있도록 설명할 있는 단어가 보석뿐이기에 각종 보석으로 치장된 묘사가 들어있는 것이다.

 

땅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을 닮은 인생을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행위로 하나님께 영광을 많이 드린 사람은 천상에 있는 예루살렘에서나 또는 장차 임할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만큼 하나님과 친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재의 삶에서 선행을 많이 함으로써 천상의 예루살렘에서나 또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보석으로 만든 집을 보상으로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나 너비나 높이가 크고 창조의 영이신 성령님과 함께 창조의 능력이 발휘되는 영역과 크기가 크며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는 차원이 높고 오묘하게 되는 것이다.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말씀을 곰곰히 묵상해 보면 성령님께서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기대하며 우리가 정성 다해서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그날을 기다리자. 세상의 삶에서 눈을 들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자. 비록 우리가 발은 땅에 딛고 살고 있지만, 발은 땅을 디디면서 눈은 들어서 하늘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장차 완성하실 하늘과 땅을 깨닫고 기대하자. 더욱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서 마치 모든 것이 절망적인 것처럼 보이는 현실에 주저앉지 말고, 마침내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기대어 보자.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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