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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1.09.29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 1
  3. 2021.09.19 의심의 구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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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21.08.29 기독교적 신념의 무서움
  6. 2021.08.22 [북리뷰] 하나님 나라와 언약적 관점으로 보는 성경신학
  7. 2021.08.14 밤의 틈에서
  8. 2021.08.14 아침 산책
posted by 풀숨 2021. 10. 14. 10:39

상담가 하나님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6)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은 우리의 상담가이시다. 단적으로 이사야서 9:6 말씀에서 “기묘자라 모사라”고 번역된 부분을 영어로 보면 “Wonderful Counselor” 즉, 놀라운 상담가 또는 조언자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이다. 개정개역본에서는 한자어를 써서 좀 더 멋지게 번역한 것이겠지만 요즘처럼 한자를 잘 사용하지 않는 시대에는 오히려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게 하는 것 같다. 따라서 성경 말씀의 직접적인 선언을 따라서 봐도 하나님은 우리의 상담가이시다.

 

또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활동, 즉 창조 세계, 특별히 우리 인간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활동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담가이시며 조언자이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더욱이 하나님이 우리의 상담가 또는 조언자이시다는 말이 단순히 하나님의 조언을 우리가 알아서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할 만한 수준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조언은 우리를 살리는가 아닌가 하는 절대적 의미의 수준이라는 의미로 받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비록 사람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을지라도 여전히 창조물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창조주의 상담/조언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사람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과의 상담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사람이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되었을 때에 그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인격이시며 자충족하신 분이시지만 삼위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페리코레시스의 의미에서 의존하며 자충족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인격이며 의존적이지만 자충족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우리는 자충족하시는 분의 상담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 창조물인 인간이 창조 세계의 닫힌 한계를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상담이 없으면 인간은 영원에 대해 결코 알 수가 없으며, 하나님의 상담이 없으면 인간은 자신의 위치를 명백하게 알 수가 없다. 결국 하나님의 상담이 없으면 인간은 무지의 구름으로 인해서 결코 만족할 수가 없다. 이 사실은 사람이 완전한 상태로 창조되었던 때를 돌이켜 보아도 명백하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은 상담가로서 그들에게 영적 삶의 진리를 알려 주셨고 또한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고 그 생명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셨다. 이러한 것들은 그들 스스로 혼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성경의 기록 상으로만 보았을 때에 하나님께 가장 많이 여쭈었던 인물은 우리 주님이셨다. 우리 주님은 항상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셨다. 그리고 주님 이전에는 다윗이 아니었나 싶다. 다윗은 그의 모든 행사를 위해서 무엇을 하기 전에 항상 하나님께 여쭙고 하나님의 조언을 구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상담해 주신 대로 언제나 순종했다. 다윗이 죄를 범했던 두 가지 사건들, 즉 다윗이 정욕에 휩싸여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취했던 사건과 사탄의 격동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전체의 인구조사를 했던 사건 이외에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을 청종했으며 이방의 우상을 절대로 의지하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만 따랐다. 다윗 이전이나 이후의 어떤 왕도 다윗만큼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았다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상담과 다윗의 순종으로 인해서 다윗은 항상 형통했고 자신의 대적들을 다 물리칠 수 있었다.

 

현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상담하셨던 것처럼 동일한 방식으로 상담하시지는 않는다. 다윗의 시대에 다윗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은 그에게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셨고 선지자들이나 제사장들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도 하셨지만, 오늘날에는 성경 말씀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물론 목사나 선교사 같은 사역자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또한 동료 크리스찬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말씀들은 성경에 기록된 진리들에 비추어 합당한 말씀들이어야 하기에 성경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에 우선적으로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성령 하나님께 직접 여쭐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께 상담을 요청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상담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받아야 한다. 우리가 크리스찬이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상담을 받아야 하고 또 그래야 크리스찬의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 우리 주님도 요한복음 14:26 말씀에서 확증하시길,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서 개정개역본에서 보혜사로 번역된 단어가 영역본들에서는 Helper, Comforter, Counselor, Advocate 으로 되어 있다. 즉, 도우미, 위로자, 상담자, 변호자로 번역되는 단어인데 보혜사라는 한자어로 인해서 오히려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지만, 주님은 이제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상담자가 있다고 가르쳐 주셨다. 따라서 이 마지막 시대에는 성경 묵상을 통해서든 기도를 통해서든 또는 신앙의 동료들을 통해서든 성령님이 성경 말씀을 기초로하여 우리에게 상담해 주신다.

 

이렇게 우리 각자에게 상담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리이다. 언제 어디서든 무슨 상황에 부딛치든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항상 우리에게 상담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그러므로 마음이 무너질 때 그냥 무너지도록 두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마음을 쏟아 놓고 상담을 받아야 한다. 사무엘 선지자를 낳은 한나가 아이를 전혀 낳지 못하고 핍박받아 마음이 참담했을 때 성전에 올라가 마음을 쏟아놓고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녀의 기도를 받으셔서 한나에게 사무엘을 아들로 주셨다. 우리는 성전에 올라갈 필요가 없다. 우리 각자 성령님을 모신 성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놓고 무슨 일에 대해서든 상담을 요청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가 상담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

 

이제는 하나님을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요술램프 또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는 기적 정도로 생각하지 말고 나의 삶의 영원한 상담가 및 조언자로 받아들이고, 매순간 하나님과 동행하며 항상 여쭙고 조언을 구하며 또한 받은 조언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러한 삶이야 말로 가장 거룩한 삶이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가능하며 또한 이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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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것(need)과 원하는 것(desire)

 

우리는 크리스찬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면서 참으로 다양한 이유로 인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한다. 경제적인 이유나 건강 상의 이유나 가정 문제, 학교 문제, 직장 문제, 또는 이웃과의 문제, 그리고 교회 안에서 겪는 여러가지 문제들로 인해서도 기도한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을 신뢰하며 하나님께 나아가 사정을 아뢰고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이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모든 기도를 무조건 들어주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자녀와의 대화에 참여하신다는 의미에서는 모든 기도를 다 들으시지만 자녀의 요청대로 다 해결해주시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을 더 알며 더 신뢰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장하도록 하기 위한 수단이지 하나님으로부터 기적을 뽑아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기도가 올바른 기도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할 수 있는 기도인지, 그리고 어떤 기도가 잘못된 기도라서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전혀 기도 내용대로 들어주시지 않을 것인지 잘 분별해서 올바른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기대할 수 있고, 또 응답하심에 따라서 우리의 믿음이 더욱 성장하게 된다. 물론 우리의 잘못된 기도조차 하나님은 무시하시지 않는다. 그러한 기도도 들으신다. 그러나 기도의 내용대로 해결해주시지 않고 기도의 내용이 올바르게 변하도록 인도하시고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 내용으로 나아오도록 하셔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기도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신다. 그러므로 어떠한 기도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우리는 미숙하더라도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성장하며 조금 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올바른 기도와 잘못된 기도를 파악할 수 있는 성경적 방법 중에 하나는 나에게 필요한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다. 또는 내게만 도움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가를 구별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곧 나의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며, 내가 원하는 것은 대체로 내게만 도움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므로 우리의 기도가 어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시므로 무엇이든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신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건강이 좋지 않아서 건강을 위해 기도한다고 하자. 그가 건강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 자신의 정욕에 쓰려고 건강하게 되기를 구한다면 하나님은 그의 기도대로 들어주시지 않을 것이다. 그의 건강이 오히려 그를 망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약 4:3). 그러나 그가 기도할 때에 그의 건강이 하나님의 사역과 이웃을 사랑하여 활동하기 위함이라면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때가 되면 들어주실 것이다. 그의 건강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용은 똑같은 기도일지라도 그 의도와 목적에 따라서 올바른 기도가 되기도 하고 잘못된 기도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과연 나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올바른 기도인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우리의 기도 내용을 되짚어 보며 기도의 제목 하나하나 살펴서 올바른 기도가 되도록 해야 하고, 잘못된 기도 제목들은 더 이상 기도하지 않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기도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올바른 기도 제목을 찾아야 한다. 이 고민을 하다 보면, 가장 먼저 찾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가 되려면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나의 정욕에 쓰기 위함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함인지 알기 위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마다 성경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옵소서”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면에서 우리 크리스찬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수단이다.

 

다만 한가지 고려할 것은 하나님은 심지어 올바른 기도조차 때로는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들어주시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 그리스도 예수님도 하나님의 때가 차서야 이 땅에 오셨다. 그만큼 하나님의 때는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모든 상황과 환경과 우리 자신의 상태와 수준과 위치가 적절하게 준비된 때가 되어야 기도는 가시적인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가시적인 응답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며 하나님 홀로 영광받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올바른 기도를 드리고 있다면 비록 그 기도가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하지 말고 계속 기도해야 한다. 때가 되면 이루어주실 것이다.

 

내게 또는 우리 공동체에 필요한 것과 그리고 내가 또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분별하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것이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기도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 제목과 내용을 깊이 생각해 보고 내게 필요한 것조차 다시 확인해서 하나님의 뜻에 더욱 합당하게 하고, 내가 원하는 것은 혹시 그 안에 내게 필요한 것이 있는지 살펴서 내게 필요한 것을 기도하고, 그 외의 것들은 나의 정욕이나 일시적 유혹에 넘어가 원하게 된 것들이므로 반드시 버려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잠언에 기록된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잠 30:8). 지혜로운 자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는 자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여 성숙하고 나면, 즉 우리의 필요와 우리의 원함이 일치하게 되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기도하며 간구해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우리가 미숙할지라도 성령님에 의지해서 지혜롭게 우리의 필요와 원함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드리면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며 우리의 믿음은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원하는 것이 우리의 정욕이나 욕망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오게 되는 때가 온다. 우리의 필요와 원함이 일치하게 되는 때이다. 그때까지 성장해야 한다. 그 시작이 우리의 필요와 원함을 분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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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의 구름2

-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 22:14)

 

우리가 크리스찬이라 할지라도 어느날 불현듯 마음 속에 의심의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를 때가 있다.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시는 걸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가? 나는 혹시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하나님께 버림받지는 않았을까? 하나님은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알고 계시며 나를 돕고 계시는가? 등등 온갖 의심의 구름이 피어오르며 마음이 흔들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때가 있다. 더욱 심하게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협박하고 하나님을 저주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곧바로 후회하기도 하도 또는 잘못을 고백하며 울부짖기도 한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은 이후로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싶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우리는 언제나 연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의심은 우리의 존재의 불완전함으로 인해서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어느날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의심의 구렁텅이에 빠지기도 하고 또 반대로 아무런 이유 없이 불현듯 평안이 오고 모든 것이 다 잘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이 이 둘 사이를 끊임없이 왔다갔다 하면서 크리스찬의 삶이 무엇인가 하는 회의가 들며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어서 누군가는 대체로 믿음 편에 있어서 의심의 진폭이 그리 크지 않게 넘어가기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의심의 깊이가 너무도 깊어서 허무를 경험하기도 한다.

 

성경 속의 인물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였다. 바알의 제사장 수백 명과 대결하여 이기고 그들을 처단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던 엘리야가 바로 그 다음에는 이세벨에게 쫓겨서 사막까지 도망가서 숨어지냈던 기록이 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예수님과 직접 함께 하고 있는 동안에도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고 꾸중을 들은 적이 얼마나 많은지 성경 기록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그만큼 사람은 연약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심들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이므로 우리는 그것에 대항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저 지나가기만 바라며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인가?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의심에 대항해서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 성경이 증거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 이후에 어떻게 믿음의 용사들이 되었는지 살펴보면서 우리도 배워야 한다. 오순절에 성령님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임하시고 그후에 그들은 더 이상 믿음이 없거나 의심에 휘둘리지 않았다. 목숨을 걸 정도로 담대하고도 강한 믿음의 삶을 살았다.

 

성경은 가르치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롬 4:20). 그렇다.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의심하는 것이며, 결국에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믿음을 천국에 가는 티켓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믿음은 있다고 스스로 굳게 ‘믿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무조건 믿음은 있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의심한다.

 

그러니 차라리 믿음이 없다고 인정하자. 그리고 솔직하고 정직하게 의심하자. 이제는 믿음이 있다고 스스로 속이면서 의심하지 말고, 믿음이 없으니까 의심하는 것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의심을 정면으로 마주하자. 그러면 의심의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나의 실패에 대한 핑계로서의 의심인지, 외부에서 온 유혹에 따른 의심인지, 더 큰 믿음을 향한 시험으로서의 의심인지, 아니면 정말 믿음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의심하는 것인지 등등 의심의 근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상황을 다 종합했을 때에, 의심의 근본 이유를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아예 믿음이 없기에 생기는 의심, 사탄 마귀의 유혹으로 인한 의심, 그리고 우리 자신의 육신의 정욕으로 인한 의심이다. 이 모두는 다 믿음이 없기에 생기는 의심이지만 아예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는 경우와 하나님 향한 믿음이 충만하지 않아서 흔들리는 경우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제 의심에 대항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오순절 이후의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먼저 성령님의 내주하심이 필수적이다. 성령님의 내주하심은 믿음의 보증이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믿음이 없으면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 자체만으로 저절로 의심의 구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권면하기를 우리가 적극적으로 의심의 원인들과 싸워야 한다고 하신다.

 

첫째는, 우리는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지 스스로 항상 점검해야 한다 (고후 13:5). 이 점검을 위한 한 가지 방법은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주님께 받은 복을 세어 보는 것이다.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고 찬송했던 그 가사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가득했는지 헤아려 보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며 하나님이 그동안 우리의 삶에 얼마나 관여하시고 함께하시며 복을 주시고 인도하시어 현재의 위치까지 양육해 주셨는지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확신을 갖게 됨으로써 의심을 이겨내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하시며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만약에 믿음이 아예 없다고 느껴지면 지금 당장 하나님께 구하여야 한다. 그 방법 밖에는 없다. 흔들림이 아니라 없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먼저 믿음을 간절히 구해야 한다. 반드시 주실 것이다.

 

둘째는, 마귀의 간계에 대항하고 이겨내기 위해서 전신갑주를 입고 싸워야 한다 (엡 6:11~18). 마귀는 울부짖는 사자처럼 돌아다니며 어떻게 하든 성도를 넘어뜨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며 우리가 열매맺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 사탄 마귀의 유혹과 방해와 훼방과 거짓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결코 이겨낼 수 없다. 가벼운 것이었다면 사도 바울이 성도에게 완전무장을 권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도가 머리에서부터 발까지 완전히 무장하고 대항해야 사탄 마귀의 간교한 계획들을 이겨내고 의심의 구름에 빠져들지 않게 되므로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특별히 전신갑주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매일 성경을 묵상하며 마귀에 대적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 주님이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내셨다.

 

셋째는, 육신의 정욕을 극복하기 위해 성령님으로 충만해야 한다 (갈 5:16; 엡 5:18). 우리는 스스로의 정욕으로부터 오는 유혹과 의심의 구름에 빠져들 수 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하는 사람일지라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육신의 연약함과 육신의 정욕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자기자신을 중심에 세우며 하나님을 의심하는 상황에 자기도 모르게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항상 성령님으로 충만해야 한다. 성령님을 따르는 사람은 육신의 정욕을 이루지 않고 성령님의 열매를 맺는다. 부지불식간에 잠깐 실수한다 할지라도 금방 회복되어 육신의 정욕이 마음에 둥지를 틀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령님으로 충만하기를 힘써야 하며 이는 기도와 말씀 묵상 그리고 성령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삶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마지막으로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 소망을 붙잡아야 한다 (벧전 1:3~5). 그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롬 5:5). 소망으로 인해서 우리는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내며 하나님이 마침내 이루실 천상의 삶을 바라보게 되어 현실의 늪에서 의심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을 얻게 된다. 산 소망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질 그 영광의 날을 끊임없이 바라보며 우리의 눈이 앞을 향하게 한다. 이를 통해서 연단과 인내를 배우며 더욱 갈고 닦여서 정금처럼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

 

이 네 가지 전략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어쩌면 매일 아주 잠시잠깐이라도 하나님을 의심하는 순간을 접하게 되는 연약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성경은 가르치길, 우리의 현실이 그러할지라도 이러한 네 가지 전략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해 더욱 나아가는 삶을 살 수 있다고 하신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연약하지만 그 연약함이 하나님의 채우심으로 인해서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핑계로 댈 수 없다. 우리의 연약함은 핑계거리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선하심과 영광과 은혜를 찬양하며 우리가 누릴 수 있게 하는 수단이 된다. 하나님은 이처럼 크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오늘 하루의 삶에서도 평안을 누리며 의심의 구름을 날려버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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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9. 4. 10:39

의심의 구름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롬 14:22~23)

 

의심은 믿음의 적이다. 그리고 의심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만을 중점적으로 고민할 뿐이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포함하여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어떤 것을 의심하면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타당한 말이다.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의심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의심하는 경우에도 문제가 된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4장에 기록한 것이 이러한 경우를 가리킨다. 이 경우는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과 비교해서 아주 사소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고 또 실제로 사소한 문제들인 경우가 많아서 우리는 별다른 고민없이 행동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지적한 바대로 이러한 경우에도 우리는 죄를 범하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면 이러한 경우에도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어떠한 때에 이러한 경우에 부딪치는지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4장에 기록한 23절 말씀,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를 보충해서 설명하는 말씀이 20절에 있다. 모든 음식이 다 깨끗하지만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 된다는 말씀이다. NIV 성경의 구절을 번역하면, 모든 음식이 다 깨끗하지만 사람이 누군가를 넘어지게 만드는 음식을 먹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고 되어 있다. 내가 어느 음식을 먹음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어 그가 죄를 범하게 된다면 이것은 내가 죄를 범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 된다는 말씀이다. 이 경우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의심하는 것과 별로 상관이 없는 경우이지만 다른 종류의 의심이 관계되고 있다.

 

내가 하는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지 아닌지 의심이 드는 경우가 있다. 내가 이 음식을 먹는 것이 죄가 되는지 아닌지, 내가 어느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지 아닌지, 또는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 합당한지 아닌지 등등 때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이런 것뿐만이 아니다. 취업을 준비하면서 어느 회사에 지원서를 내고 한 회사에 채용이 되었는데 그 회사에 취업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 회사가 인종차별을 묵인한다는 소문을 들었다든지 또는 이익금을 빼돌린다는 소문을 들어서 그 회사가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 회사인지 의심스러운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것뿐만 아니라 나의 삶에서 아주 사소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하나님께 합당한지 아닌지 의심스러운 것들이 참으로 많이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어느 쪽으로든 나의 판단으로 결정을 하고 실행을 하는 경우에는 크게 세 가지 면에서 문제가 된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을 나 스스로의 판단으로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판단을 더 앞세워서 신뢰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나 스스로의 판단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나를 보며 시험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죄를 범하게 만드는 것은 곧 내가 죄를 범하는 것과 같다. 셋째는, 이러한 판단과 실행이 반복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습관이 생기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게 된다.

 

우리의 삶에서 모든 것이 다 명확하게 분별되지는 않는다. 때로는 이것이 맞는지 저것이 맞는지 헷갈리기도 하고 의심스럽기도 하다. 그런 경우에는 우리 스스로 판단해서 어느 것이 맞다고 결정하고 실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의지해서 우리 마음에 확신이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확신이 들고 마음에 평안이 있을 때 실행하는 것이 지혜이다. 성경은 모든 경우에 대해서 세세하게 다 무엇이 맞다 무엇이 틀리다 하고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경우를 포함하는 일반적인 원리에 대해서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쳐 주는 원리에 따라서 우리의 삶에 적용할 때에 그것이 하나님께 합당하다는 확실한 확신이 들어야 하며, 만약 조금이라도 의심스럽다면 확신이 들 때까지 기다리며 올바른 적용을 계속해서 탐구해야 한다.

 

그런데 의심이 아니라 고민이 되는 경우가 있어서 이것을 잘 분별해야 한다.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하나님의 존재, 사랑, 은혜, 능력 등에 대한 의심, 또는 하나님의 말씀, 명령, 계명, 지시 등에 합당한지 의심이 드는 경우가 아니라, 어느 것이 맞을까 더 좋을까 고민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서 심각한 고민이 되는 경우도 있다. 점심에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김치찌게를 먹을까 하는 고민처럼 단순한 것부터 시작해서, 두 회사에 취업이 되었고 둘 다 좋은 회사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어느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맞을까 하는 고민도 있고, 더욱 심각하게 미래를 걸고 하는 고민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고민은 의심과는 다르다. 이런 경우에는 그날의 입맛에 따라서 결정하거나 또는 회사의 분위기나 회사의 추구하는 방향이 자기에게 더 잘 어울리는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늘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하고 출근하면 될 일이다. 아주 심각한 고민의 경우에도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고민이라면 이것은 의심과는 다르기 때문에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이 오히려 고민을 해결하는 지혜인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의심의 경우에는 그 반대이다.

 

결론은 이것이다. 무엇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다고 확신이 들지 않으면 일단 멈추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들고가서 하나님께 여쭙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인하여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판단으로 어떻게든 결정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오늘 점심에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과 옆집에서 개업 제삿상에 올렸던 떡을 가져와서 먹으라고 준 것을 먹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은 다르다. 내가 오늘 점심에 무엇을 먹든 정당하게 벌어서 좋은 식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든지 아니면 솜씨 좋은 음식점에 가서 맛있는 메뉴를 시켜서 먹든지 다 하나님께 합당한 일이다. 사람을 빵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옆집이 준 떡을 먹는 것은 내 양심과 내 옆에서 행여라도 지켜보는 사람의 신앙 수준을 고려해서 지혜롭게 결정해야 되는 것이며, 내가 이것을 먹으면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시험에 들고 심지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을 거리낌없이 하게 되는 결과가 예상되어 고민이라면 먹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어느 경우에라도 나의 판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경우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앞에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 말씀에 따라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을 나 자신보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더 신뢰해야 한다. 그것에 아주 조그만 틈이라도 생기면 나중에는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직접 사람을 훈육하신다. 잘못을 지적하시며 무엇이 왜 잘못 된 것이지 가르쳐 주신다. 그때 그 훈육에 따라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자기의 판단을 앞세우는 것을 반복하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명백하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것조차도 하게 되어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경계하고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은 우리를 처참한 실패로 이끌어 갈 것이다.

 

고민스러운 것은 대부분 실행하는 게 맞고, 의심스러운 것은 안 하고 기다리는 게 맞다. 고민스러운 것에 대해 딱 결정해서 실행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어느 쪽으로든 결정과 실행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고 기도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기회를 맛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멈추어 서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확신이 들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기회를 맛볼 수 있다. 내 판단으로 결정해서 실행하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외면을 맛볼 뿐이다.

posted by 풀숨 2021. 8. 29. 11:43

기독교적 신념의 무서움

 

지난 8월 18일자 뉴스에 따르면 정말 어이없는 일이 아프리카 잠비아에서 발생했다. 어느 젊은 목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재현하겠다며 스스로 땅에 묻혔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https://www.etoday.co.kr/news/view/2054640). 이 뉴스를 처음 봤을 때에 필자는 눈을 의심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가짜뉴스일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만큼 충격이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흔히 말하기를 기독교는 상식과 과학보다 훨씬 더 높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상식과 과학을 초월한다는 것이 상식과 과학을 경시하거나 무시한다는 의미가 결코 될 수 없다. 기독교는 상식과 과학을 포용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위에 그보다 더 큰 것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함께 주장하는 것이다. 상식과 과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반은총과 일반계시에 따라서 인류가 발견한 윤리와 도덕적인 그리고 과학적인 진리들의 모음이다. 기독교는 이러한 상식과 과학 위에, 하나님의 특별은총과 특별계시에 따라서 주어진 믿음으로 알 수 있는 영적인 진리들을 다함께 주장하며 이 모든 것을 기반으로 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포하는 가르침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다. 빵 없이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당연히 빵도 필요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상하게도 기독교가 과학과 전적으로 대립하게 되었고, 어느 누가 과학적 진리를 주장하면 마치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는 식의 생각을 은연중에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는 영적인 진리만이 기독교의 전부이며 세상의 삶을 무시하고 또 상식과 과학을 경시하며 영적인 진리만을 좇아서 사는 것이 최고의 삶인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어느 정도는 과학계의 잘못된 주장도 이러한 현상을 유도한 측면이 있다. 과학이 자연 세계의 영역을 넘어서서 종교의 영역까지 들어가 과학으로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마치 정답을 아는 것처럼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카이저의 것은 카이저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는 금언을 가르친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아프리카에서 보내온 뉴스는 과학과 상식을 무시하는 전형적인 예를 보여준다.

 

아프리카의 젊은 목사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런 일을 계획했고 실행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거듭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확고한 확신을 가지고 자기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결국 실행했다가 비참하게 사망하고 말았다. 우리들도 때로는 이와 비슷한 일들을 저지른다. 이처럼 어리석은 일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지만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른다. 지금 대표적인 예가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배드린다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방역을 무시하고 코로나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일을 서슴지 않고 한다. 물론 그런 모임을 갖는 교회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른 많은 모임들도 방역을 무시하고 바이러스를 퍼트리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모임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교회의 기본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인데,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웃에게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원인이 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이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인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면서 이웃에게 해를 끼치고 있으며 이웃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멀리 하도록 만들고 있으니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잘못된 것이며 교회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만일 교회의 모임이 꼭 필요하면 방역을 지키며 최소한의 인원으로 지혜롭게 해서 이웃에게 염려와 피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각 교회마다 사정이 있고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교회 밖으로 피해를 주는 일은 없어야 하고, 최소한 이러한 고민을 심각하고 깊이있게 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한다. 우리의 이웃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본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며, 또한 사도 바울은 믿음이 약한 성도가 고기로 인해서 시험에 들까 걱정되는 경우에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가르친 이유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처럼 기독교적 신념이 무서운 이유는 사람이 자기자신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능력을 입었다고 또는 특별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확신하며 죽음마저도 경시하고 무조건적으로 밀어부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더욱 무서운 이유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가장 숭고한 것으로 포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어리석음에 눈이 가려진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기 때문에 자기가 무엇을 잘못하는지도 모르면서도 자기가 제일 잘 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거기에 더하여, 신념으로 무장한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그런 확신을 갖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숭고하고 기독교적 가치에 충실한 목적을 내세운다. 그래서 더욱 더 깊은 어둠에 빠지지만 결코 깨닫지 못한다.

 

성경에도 이러한 종교적 신념에 빠진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다. 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안식일에는 사람이 질병이나 사고로 죽어가는데도 치료하지 않는다. 그런데 소나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건져낸다. 그들은 구약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많이 그리고 자주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자기들이 만든 전통과 신념으로 인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무시해 버렸다. 더욱이 그들은 그들 자신들만 이러한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고 자신들을 종교적으로 아주 잘 포장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과 같은 신념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다함께 멸망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기독교적 신앙과 기독교적 신념은 얼핏 보면 비슷한 것 같지만 아주 다르다. 기독교적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믿음이지만, 기독교적 신념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이 자기의 사상과 주장을 믿고 따르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믿음이다. 이 두 믿음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비슷하지만 본질적인 기준이 다르다. 기독교적 신앙은 철저하게 성경이 기준이지만, 기독교적 신념은 기독교적 용어로 포장된 자기 주장이 기준이다. 그래서 기독교적 신념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장되지만 성경 말씀과 대조해 보면 금방 헛점이 드러난다.

 

그래서 기독교적 신앙과 기독교적 신념을 구별하는 기준은 오로지 성경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어 있기 때문에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무엇이 사람의 뜻인지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이 제시되어 있다. 디모데후서를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딤후 3:16~17). 하나님의 자녀들이 교육받고 하나님의 일꾼들이 능력있게 일해서 선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성경뿐이다. 더욱이 “모든 선한 일”을 하려면 반드시 성경만을 의지해야 한다. 이 디모데후서 말씀은 배타적인 말씀이다. 즉, 성경 말씀도 필요하고 또 적절하게 다른 조언들도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잘 알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면 결코 기독교적 신념으로 빠질 수가 없다. 기독교적 신념이 생기는 원인이 성경에 대한 무지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기도 하다. 사람이 성경을 하나님이 의미하신대로 올바르게 이해해야 하는데, 사람이 여러가지 이유와 욕심으로 말미암아 성경을 자기 뜻대로 이해하는 경우도 아주 비일비재하다. 그렇게 자기 생각대로 성경을 해석해 놓고는 마치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신념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가 더욱 치명적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믿고서 신념에 빠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을 절대로 듣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교훈을 주었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벧후 3:16).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서 선생님을 두 분 준비하셨다. 한 분은 성령님이시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요일 2:17) 말씀에 따르면 성령님께서 성도 각 사람 안에 거하셔서 직접 가르치신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목사와 교사’ 직분을 받은 하나님의 일꾼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르치신다 (엡 4:11). 이렇게 준비된 두 선생님을 통해서 양육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게 된다. 물론 이렇게 좋은 선생님들이 계시지만 배우는 학생의 의지와 노력과 자세에 따라서 배움의 결과는 많이 다르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또한 성령님은 결코 틀릴 수가 없지만 목사와 교사 직분자는 대부분의 경우에 도움이 되지만 때때로 틀릴 수도 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직접 가르치시며 교정하시고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독교적 신앙이 아니라 기독교적 신념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목사와 교사’ 직분자들이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달하는 것이며, 둘째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교회가 성경 해석의 방법들을 가르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성도들이 교회에서 모여 각자 해석한 성경 말씀을 나누고 또한 그 해석한 대로 적용한 결과들을 토론하여 서로가 서로를 가르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은 직접 참여하셔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 함께 하신다. 그래서 성도 각 개인뿐만 아니라 성도의 모임으로서 교회가 올바르게 성장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에서 성경 해석학 또는 성경 해석의 방법과 요령들을 가르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만일 없다면 담임 목사에게 당당하게 요청해야 한다. 목사나 장로들이 성경 말씀을 해석해서 삶에 적용하는 방식까지 알려주며 떠먹이는 것은 아주 어린 성도에게는 필요할 수 있으나 초신자를 벗어난 상태가 되면 곧바로 이러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교회로서,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몸으로서 기능하며 성장할 수 있고, 어느 한 성도라도 영혼이 병들지 않고 잘못된 길에 빠지지 않게 된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성경 공부가 다 목사들이 성경을 해석해서 그 해석한 결과를 가르치는 것이지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과 요령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학교에서 국어 시간에 소설, 시, 수필, 역사서 등등 다양한 문학 작품을 해석하는 방법을 배운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도 해석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부끄러운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장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성도가 예수님 안에서 제대로 살고 교회도 예수님 안에서 제대로 살게 된다. 목사와 장로는 성경 해석의 방법과 요령을 성도들에게 가르치라고 세움을 받은 직분자들이다.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처럼 목사는 성도가 성경 말씀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을 당하지 않도록 성도에게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실행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의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그래야 우리 모두는 서로가 서로를 세워서 아무도 기독교적 신념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올바르게 신앙할 수 있도록 서로 돕고 섬길 수 있다. 그렇게 되도록 교회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교회들은 성경 해석학을 가르치자. 성도들은 성경 해석학을 기초로 해서 성경을 해석하며 그 해석된 대로 자신의 삶에 적용하고 교회에서 모여 함께 나누어 보자. 그것만이 우리의 신앙이 기독교적 신념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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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하나님 나라와 언약적 관점으로 보는 성경신학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에서 언약신학에 대한 관심이 많이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언약신학과 관련된 책들이 비교적 많이 출판되었고 언약신학에 대한 글들도 인터넷에 많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는 참으로 반가운 현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관성 있게 이해하려면 언약에 대한 기본 개념을 알고 있어야 하는데 언약신학은 이것을 잘 정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언약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2019년도에 출판된 <하나님 나라와 언약적 관점으로 보는 성경신학>을 리뷰하는 것은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성도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된다.

 

이 책의 저자인 전정구 교수는 현재 미국 메릴랜드주에 있는 Faith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성경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동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메리데쓰 클라인 교수에게 사사했으며, 박사학위 역시 클라인과 머레이의 언약신학을 비교하는 논문으로 취득하였을 만큼 언약신학에 대한 ‘전문가’이다. 또한 그는 미국 PCA(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 교단에 소속되어 있으며 지역 교회에서 협동 목사로 섬기고 있다.

 

이 책은 전정구 교수가 책머리에 밝히고 있는 것처럼 신학교와 선교 현장에서 신학생들과 선교사들 및 목회자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가운데 그들에게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성경신학에 대한 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저술한 것이다. 그가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개혁신학은 언약신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언약사상은 비록 초대교회 시기부터 어거스틴을 비롯한 여러 교부들과 신학자들에게서도 발견되지만, 언약신학은 종교개혁자들과 그의 후예들에 의해서 정립되고 발전되어 왔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청교도 신학자들 이후에 한동안 주춤했던 언약신학은 20세기에 고대 근동 지역에서 국가간 조약 문서들이 새롭게 발견되면서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고 클라인 교수는 이를 깊이 연구하면서 언약신학의 깊이와 지평을 크게 넓히는 데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전정구 교수가 동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수학한 것은 자신의 성경신학의 근간을 클라인 교수의 언약신학에 뿌리내리고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의 구성은 단순하다. 처음에 서론으로는 언약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이 제공된다. 언약신학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 아니라 언약신학 자체에 대한 개론적인 설명이 제시되며 세대주의 신학에 따른 성경 해석 및 구속사적 성경 해석 등이 간략하게 비교, 소개된다. 그리고 나서 언약신학의 대표적인 언약 구분에 따라 각 언약을 차례로 설명하며 각 언약이 하나님 나라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논증한다. 그래서 창조 언약,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그리고 새 언약을 성경 본문과 함께 설명한다. 또한 언약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언약들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제시되며, 더불어 언약의 흐름을 따라서 새 언약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새 언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 언약이 어떻게 정점에 이르는지 기술되어 있다. 이것을 통해서 성경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뼈대를 세우게 될 것이다.

 

다른 언약신학 책들과 비교하여 이 책의 장점은, 첫째 무엇보다도, 언약과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생각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언약과 구원 및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의 가장 큰 주제들이다. 이 책은 각 언약을 하나씩 살펴보면서도 이 모두를 다함께 생각하도록 하는 통찰을 제공한다. 이것은 아주 큰 장점으로서, 다른 언약신학 관련 책들이 대부분 언약 그 자체만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부분을 빠트리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서 언약과 하나님 나라와의 상관 관계를 생각해 볼 중요한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둘째, 언약신학이 성경본문으로부터 어떻게 도출되었는지 보여주는 아주 풍부한 성경본문이 책에 함께 들어있어서 언약을 이해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책과 성경을 왔다갔다 하면서 읽다보면 집중력이 흩어지기 쉬운데 이 책은 성경본문을 적절하고도 풍부하게 제공함으로써 집중력을 잃지 않으면서 책을 계속 읽을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이렇게 성경본문으로부터 도출된 언약이 다시 성경의 다른 부분들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이해하게 한다.

 

셋째, 특별히 노아 언약에 대해서는 홍수 후에 하나님이 노아와 맺은 언약이 어떻게 일반은총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은 다른 언약신학 책들이 대부분 놓치고 있는 부분이어서 중요하다고 하겠다. 언약은 계시적인 측면에서 특별계시에 속하고 하나님의 특별은총의 한 부분으로서 주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에는 일반은총의 성격이 아주 강한 면도 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홍수 후의 노아 언약이다. 전정구 교수는 이 측면을 심도 있게 연구하였다.

 

넷째, 모세 언약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모세 언약의 본질에 대한 논쟁은 개혁주의 신학 진영 내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이었며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논쟁이다. 한국에서 <언약신학>으로 유명한 마이클 호튼은 전정구 교수와 함께 둘 다 클라인의 제자인데, 마이클 호튼은 클라인의 언약신학을 아주 충실하게 따르고 있지만, 전정구 교수는 모세 언약의 본질에 대하여는 클라인과는 다른 관점을 갖는다. 클라인과 호튼은 모세 언약을 행위 언약의 갱신으로 이해하지만, 전정구 교수는 튜레틴을 비롯한 주요 청교도 신학자들과 함께 모세 언약이 외적으로는 행위 언약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은혜 언약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호튼의 <언약신학> 책을 읽은 독자라면 전정구 교수의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혼란스러울 수 있다. 다만 둘 중에 하나가 틀렸다는 것보다는 서로의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클라인은 대속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강조하기 때문에 모세 언약을 행위 언약의 갱신으로 본 것이고, 반면에 전정구 교수는 죄인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기 때문에 모세 언약의 본질이 은혜 언약이라고 본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각 언약들에 대해 성경본문과 함께 설명하면서 필요한 경우마다 세대주의 신학의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비평한다는 점이다. 개혁주의 신학의 양대 산맥인 언약신학과 세대주의 신학은 서로 아주 상이한 성경해석의 체계를 제공한다. 서로가 서로를 비평하면서 발전하기도 하지만 세대주의 신학은 각 세대들 간의 철저한 불연속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때로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역사적인 흐름을 무시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세대주의 신학도 세대들 간의 연속성을 인정하는 분파도 나타나서 언약신학의 장점을 수용하기도 하였다). 세대주의 신학에 대한 비평은 한국에 퍼져있는 세대주의 신학의 문제들을 교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특별히 세대주의 종말론의 경우에 더더욱 그렇다.

 

이 책에도 몇몇 아쉬운 점들이 있다. 가장 큰 아쉬움은 이 책에 구속 언약에 대한 부분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정구 교수가 구속 언약을 언약으로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이 책의 성격을 언약을 기반으로 하여 성경신학의 기초를 제공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성경 본문 상에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은 구속 언약을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각 언약이 하나님의 나라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경우도 있어서 이 부분이 좀 더 명확하게 설명되었더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혹시 개정증보판이 앞으로 나온다면 이러한 점들이 보완이 되어서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또 다른 아쉬움은 새 언약 이후에 펼쳐질 종말에 대해 한 장(chapter)를 할애하여 좀 더 집중적으로 설명했었다면 하는 점이다. 다만 이 부분은 지금 현재 전정구 교수가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본 종말론에 대한 책을 저술하여 미국에서 출판을 앞두고 있다고 하니 조만간 해소될 것으로 보이며 전정구 교수가 언약들을 기반으로 하여 종말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기대가 된다.

 

전반적으로 이 책은 책의 제목처럼 언약을 기반으로 하여 성경신학의 기초를 세워주는 작업에 충실하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지는 언약의 흐름으로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 개념들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뼈대를 세우는 일이므로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번 읽어보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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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8. 14. 23:35

밤의 틈에서   

 

 

이재이

 

 

혼자 산다는 것은

잠은 오는데 잠들고 싶지 않은 밤과 같아

꺼낼 수 있는 기억들을 다 꺼내 안아주는 것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들

카메라 보며 스스로에게 말하는 동영상들

SNS 통에 버려진 의미와 진실

 

기억의 틈을 잇는 진공의 암흑에너지

버티게 하는

방 안을 낯설게 서성이다가

문지방에 낀 쌀 알을 하나씩 줍는다

술로 시간을 잃고 싶지 않아

밤 바닷가 사진의 배경, 푸른 물 길어 

주워 모은 쌀로 밥을 짓는데

밖에는 사람들 틈에서 비늘 돋아나

밥 짓는 연기는 방 안에서 껍질 딱딱한 알을 낳고

혼자 구르니

 

힘껏 오른팔 뻗어 핸드폰 쥐고

왼손 손가락 두 개를 편 채 얼굴 사진으로

알을 삼킨다

밥 한 술, 한 술에 알이 깨지는 

불그스름한 무정란 깨지는 밤의 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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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8. 14. 10:09

아침 산책

 

 

이재이

 

 

또로롱 호오잇 촉촉촉촉

비스듬히 비쳐드는 햇빛, 머리칼 쓸어올리는 바람

숲 정문에서 네가 인사한다

저만치 강아지풀 속으로 사라진 토끼

몸에는 나무들이 밤새 모은 한 방울 향수

그 사잇길을 너와 걷는다

너는 쉬지 않고 노래한다

어떤 질문에도 대답 대신 가볍게 찡그리며

귀 기울여 들으려 하면 멈추고

듣지 않는 듯 걸으면 들리는 숲의 합창

아마 그때 쯤이었다

풀잎 이슬과 나뭇잎에 산란된 햇빛으로

아득해지는 순간, 들리는 목소리

  - 찾지 말아요 느껴요 언제나 여기 있어요

굿모닝 인사를 건네는 동네 사람 뒤로

숲의 끝이 나타난다

앨리스 안녕! 내일 아침에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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