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풀숨 2021. 5. 8. 05:29

율법의 역할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3:31),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 7:12),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 13:8)

 

교회에서 율법에 대해 얘기를 꺼내보면 대부분 불편해 한다. 사랑, 화목, 천국, 능력 등등, 밝고 희망찬 주제도 많은데 하필 어둡고 불편하고 두렵게 만드는 주제를 얘기하는가 하는 듯한 표정으로 좋지 못하다. 율법 하면 맨처음 떠오르는 생각은 속박과 무거움일 듯 싶다. 그런데 성경은 율법에 대해서 엄청나게 많이 이야기한다. 율법 또는 율법을 의미하는 다양한 단어들, 즉 계명, 율례, 법, 법도, 규례, 말씀 등이 성경 전체에 수백 번이 넘게 나온다. 성경이 이렇게 엄청나게 많이 이야기하는 것을 우리는 교회에서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체로 그 이유는 정서적으로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또한 크리스찬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제 율법과는 별로 상관이 없게 되었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야기해야 한다.

 

성경 전체에서 율법에 대해 살펴보려면, 어거스틴이 했던 말, 신약은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에서 밝히 드러난다고 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해서 살펴야 하기에 사도 바울의 기록들을 중점적으로 보면, 율법은 두 가지 종류가 있으며 성문법으로서의 율법과 불문법으로서의 율법이다. 성문법으로서의 율법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율법, 즉 구약 성경의 처음 5 책에 기록된 법 조항들이며, 불문법으로서의 율법은 우리의 양심에 의해 선악을 구별하는 방식들이다. 이 두 종류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성문법으로서의 율법은 불문법인 양심의 소리들을 구체적이고 문자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다 율법 아래에 있다.

 

율법을 주신 이유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율법이 성문법의 형태로 주어지는 사건이 기록된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며 율법을 주실 때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 19:6),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레 11:45). 따라서 하나님은 세상과는 구별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그리고 또한 이것은 공동체의 각 개인이 하나님을 닮은 인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명시적으로 율법이 주어진 것이었다. 불문법의 형태로 주어진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율법이 주어진 것이었다. 다만 불문법으로 주어진 경우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너무도 희미해져서 도무지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수준까지 타락해 버렸기 때문에 성문법과 같을 수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한 국가의 정체성은 그들의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은 십계명으로 요약되는 율법에 명시되어 있다.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선택된 민족으로서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명을 가진 민족이라는 것이 그들의 정체성이었다. 그러나 헌법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정체성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고, 헌법을 지켜야 정체성이 유지되는 것이기에, 이스라엘에게 성문법으로 율법을 주신 것은 이제 그들이 명백히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닫고 하나님처럼 거룩한 삶을 살고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는 민족으로서의 삶을 살면서 세상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을 증거하고 그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라고 주신 것이었다.

 

율법의 기능

그렇다면 율법은 어떻게 이스라엘이 정체성을 세우도록 기능하는지 살펴보면, 첫째는 율법이 하나님의 뜻과 마음과 성품을 가르침으로써, 둘째는 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셋째는 죄를 억제함으로써,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죄의 형벌과 인생의 비참함을 알게 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특별히 십계명은 하나님이 직접 돌판에 쓰셔서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의 성품에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주어진 것이다. 율법에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과 싫어하시는 것들이 계시되어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물론 시대적 역사적 상황 안에서 주어졌으며 또한 하나님의 영원불변성에 따라서 주어졌다. 그래서 의식법처럼 시대적 역사적 상황에 따라서 폐하여질 것도 있지만 도덕법처럼 영원히 계속될 법이 들어있으며 율법의 정신은 영원불변하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수여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더 뛰어나거나 혈통이 우수하거나 등등의 그 어떠한 자랑거리가 있어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수여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으로 넘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또한 사도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 도둑질 하지 말라는 율법이 있기에 도둑질은 죄라는 것을 알게 된 것처럼 율법은 무엇이 올바른 것이며 무엇이 죄인지 가르쳐 준다. 율법이 있기에 기준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처럼 거룩하며 죄를 범하지 않아야 했으므로 율법은 죄를 억제한다. 단순히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죄를 범하지 않아야 했던 것뿐만 아니라 죄를 범하면 형벌과 저주가 내려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죄를 범하지 않아야 했고, 형벌과 저주에 대한 두려움은 죄를 억제하도록 하였다. 또한 그들이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려면 모든 율법을 온전히 다 지켜야 했는데, 모든 율법을 다 잘 지키다가 하나만 범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고 형벌과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인생의 절망과 비참함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나 율법이 그들을 절망에 가두어놓지 않고 오히려 위로가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율법이 궁극적으로 가르치는 목적이었다.

 

율법의 목적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보면서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주신 것이다고 하였다. 지킬 수도 없는 율법을 주시면서 이것을 지켜라 하고 말씀하실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생각도 완전히 잘못된 생각은 아니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지식과 지능과 힘과 능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완전히 지킬 능력과 실력은 없었고,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완전히 지키지 못하고 단 하나라도 범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는 것(갈 3:10; 렘 11:3; 롬 3:23)이 핵심이다. 게다가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만 해도 지키기 어려운데 율법의 정신을 헤아리면서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완전히 지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율법의 정신을 헤아리면 이제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과 동일한 죄를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율법 안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고 절망하면서도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더욱 찾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음으로 인해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고 또한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해결책이 제시될 것을 깨닫게 된다.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를 오직 바라보며 고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율법은 사람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방법을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하나님의 해결책을 고대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메시야를 고대하는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세워진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처럼 율법과 믿음은 서로 대적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으로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믿음을 대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속죄의 방편을 완성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점을 정확히 지적하였다. 사람이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깨닫고 비참함과 절망으로 인해서 자신에게는 전혀 소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않고서는 크리스찬이 될 수 없다고 설교했던 것이다. 또한 기독교의 역사에서 위대한 부흥이 나타났던 시기에는 율법에 대한 깊은 통찰과 복음적 관점에서 율법에 대한 강조가 널리 선포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복음은 율법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율법이 이제 더 이상 절망의 법이 아니라 기쁨의 법이라는 것을 드러냈기에 기쁜 소식인 것이다. 복음은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여 도무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셨다는 소식이기에, 그리고 그 불가능했던 것은 이제 영원히 폐지되었다는 소식이기에 기쁜 소식인 것이다.

 

칭의의 관점에서의 율법과 성화의 관점에서의 율법

상기한 바와 같이 정리되는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재해석되면 크게 두 개의 관점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칭의의 관점과 성화의 관점이다. 그런데 율법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들이 오직 칭의의 관점에서만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것은 특별히 한국 교회에서 더욱 크게 부각되었다. 칭의의 관점이란 죄인이 어떻게 구원받는가에 대한 관점이고 성화의 관점이란 구원받은 성도가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관점이다. 칼빈은 성화의 관점에서 율법에 대해 논의하면서 이것을 율법의 제 3 용법이라고 칭했으며 모든 크리스찬에게 반드시 적용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했다. 또한  칼빈은 크리스찬의 자유에 대해서 설명할 때에도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자유는 율법 없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기초로 하여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유는 방종이 아니므로 가이드라인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데 율법이 가이드라인의 역할을 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성화의 관점에서 율법에 대해 논의할 때에 반드시 주의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성화의 관점과 칭의의 관점을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화의 관점에서 율법의 역할은,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이미 구원을 받은 성도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항상 명백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혼동하면 율법은 이제 완전히 무익하게 되었다는 율법폐기론이나 구원을 받았어도 끝까지 율법을 잘 지켜야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구원론으로 반드시 이어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재해석된 율법은 구원을 받은 성도에게 있어서 결코 믿음과 충돌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좋은 예들 중에 하나이다. 이렇듯 오히려 율법을 통해 믿음이 행위로 말미암아 증명된다. 이것은 믿음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는 점에서도 기인한다. 믿음은 반드시 구체적 사건이나 행위로 드러나게 되는데 그 사건과 행위가 율법에 합당해야 한다. 왜냐하면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믿음을 통해서 이제 의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역사 가운데 성취된 의를 믿음을 통해서 수납했으므로 믿음으로 인해 나오는 행위는 의로우며 구체적으로 율법에 합당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만 바라보기

크리스찬은 예수님만을 믿고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는 말은 이와 같이 결코 추상적인 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무엇을 믿고 예수님의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지 명확히 해야 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또한 예수님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음을 믿으며 예수님이 사셨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예수님만 바라본다면서 내 맘대로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죄를 대속하심도 율법에 의한 것이고 예수님이 사셨던 삶도 율법에 근거했던 삶이었으므로 우리가 예수님만 바라보며 산다는 것 역시 율법과 무관한 것이 될 수 없다. 다만 유대의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자구(字句)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르쳐주신대로 영으로 이해해야 한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자구로만 이해함에 따라서 율법은 오히려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말았고 믿음을 대적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크리스찬이라면 일주일에 최소한 한번 정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 시간이 없으면 쉽게 길을 잃고 자신의 위치를 낙관적으로 보거나 과대평가하거나 또는 반대로 의기소침하며 불안해 할 가능성이 크다.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께 나아가고,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율법을 통해서 나의 위치를 깨닫고,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 안에서 방향을 잡고,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알게 된다. (율법에 대한 깊은 묵상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종착점으로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복음이라는 그릇 안에 담긴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 안에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본받는 삶이란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셨던 방식으로 우리도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해야 한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신 방식대로 우리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재해석된 율법을 그리스도의 법이라 하는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9~30)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볼 때에, 예수님 안에서는 율법이 더 이상 속박과 두려움이 아니라 반가움과 기쁨이다. 길이 없거나 길을 잘 알지 못하는 곳에서 헤매다가 도로표지판을 만나는 반가움이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행여 죄를 범하더라도 – 율법을 어기는 것이 곧 죄를 범하는 것이다 – 우리에겐 예수님이 계시므로 더 이상 절망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죄를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용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즉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는 것인데 예수님은 항상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용서 받게 되며, 따라서 우리가 잘 하고 있을 때에나 잘못 하고 있을 때에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멍에는 쉽고 짐은 가벼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는 것은 이제 돌이켜 다시 예수님 안에서 율법, 곧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인 것이다.

 

결론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와 율법의 기능 그리고 목적을 살펴보았다. 사람이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켜서 스스로의 능력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인생은 하나님의 영광에 비하면 참으로 비참할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람을 속박하는 것 같고 사람을 죄에 가두기만 하는 것 같은 율법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길, 즉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는 길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렇게 의롭게 되어 저주와 비참함과 절망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이제 율법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위한 가이드라인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가이드라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따르게 된다. 그 사람 안에서 거주하시는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재해석된 율법에 순종하도록 만드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크리스찬은 율법에 대해서 기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크리스찬이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키고 있기 때문에 기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크리스찬을 더 이상 정죄하며 속박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며 크리스찬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에 마음이 불편한 것은 죄에 대한 정죄와 형벌로 인해서 두렵기 때문에 불편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DNA가 죄를 싫어하게 되었으므로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꾸짖어 주시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크리스찬은 율법을 예수님 안에서 묵상하며 자신을 살펴야 한다.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길이 기록되어 있으니 자주 살펴보고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것이 너무도 마땅하고, 크리스찬은 그 길 이외에 다른 어떤 길도 갈 수 없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불편한 마음보다는, 그리고 내가 어제 무엇을 잘 했고 무엇을 잘못 했나 하고 정죄하며 따지기 보다는,  율법에는 하나님의 성품과 뜻이 계시되어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길이 제시되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서로 권면하며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을 누리자. 기독교의 부흥은 율법에 대한 깊은 성찰이 강조될 때에 일어났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