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이 찬양이다
골 3:16~17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아마도 90년대 정도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부터 교회들마다 찬양 예배를 수요일 저녁이나 금요일 저녁 또는 주일 저녁에 드리기 시작했다. 설교 위주의 주일 예배 형식이 아니라 찬양 위주의 자유로운 형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유행처럼 교회들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참 지난 후에는 바디워쉽 또는 몸으로 드리는 찬양 예배라 하면서 노래와 함께 춤을 추면서 자유로운 형식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노래와 춤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존귀한 이름을 찬양하는 것은 너무도 마땅한 일이다. 히브리서 기록자 역시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찬양 예배가 유행처럼 퍼지면서 찬양은 마치 입술로 드리는 찬양만이 전부인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하였다. 시편 말씀을 먼저 살펴 보자.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시 101:1).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시 119:164). 또한 에베소서에서는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12) 하셨으며, 빌립보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 1:11) 하셨다. 이 말씀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말씀들에 있는 찬송 또는 찬양도 우리가 입술로 드리는 찬양을 의미하는 것일까.
먼저 시편 말씀들을 간단히 살펴 보면, 인자와 정의를 노래한다는 것이 오직 입술로만 노래하고 삶에서 실천하지 않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또한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주를 찬양한다는 것이 오직 입술로만 주님의 의로운 규례들에 대해서 노래하는 것이라면 진정한 찬양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의로운 규례들을 삶으로 살아내지 못하면서 입술로만 의로운 규례들을 노래한다면 그것은 위선자의 전형적인 겉치레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의로운 규례대로 살아봐야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되고 그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신 하나님을 향해서 진정한 감사와 찬양이 나올 수 있다. 에베소서의 말씀과 빌립보서의 말씀도 동일하다. 우리가 찬송이 되는 것은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의롭고 사랑이 풍성한 삶이 곧 찬송이 되는 것이다.
골로새서의 말씀도 동일하다. 이 말씀에서의 시작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이다. 그래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이것은 진리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단순한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물론 지식은 필요하다. 알아야 분별할 수 있고 알아야 방향을 잡을 수 있고 알아야 올바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지식으로서 머리에만 머무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말씀과 하나 되어 말씀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고 우리의 모든 생각과 의지와 감정과 행위의 근원이 되어서 우리의 모든 행위는 주님의 말씀의 열매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면, 주님의 모든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편 119:9, 11 말씀이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결국 주의 말씀을 나의 삶에서 구현해내는 것을 통해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그래야 살아있는 노래가 나오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찬양’이라는 단어를 입술에서 나오는 찬양과 함께 순종의 삶에서 나오는 찬양으로 이해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도 입술에서 나오는 찬양에만 익숙해져 있기에 이제는 무엇보다도 삶에서 나오는 찬양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찬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삶에서 나오는 찬양이라는 의미로 더욱 치중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어느 정도 균형잡힌 시각을 갖게 될 것이다.
수십 년 전에 찬양과 삶이 하나로 하나님께 드려진 이야기가 있다. 그 당시의 나는 10년 동안 담배를 애용했던 골초였다. 평균적으로 하루에 담배를 두 갑 정도씩 피워댔었다. 몇 번이나 끊으려고 하기도 했었지만 모두 실패하고서 그냥 포기하고 지내는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어느날 갑자기 찬양대에 서고 싶어졌다. 예배 중에 찬양대를 보면서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지휘자의 권면이 있어서 얼른 찬양대에 합류하였다. 그리고는 찬양대에서 함께 찬양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좋았었다. 그런데 어느날 나의 찬양하는 입술에서 담배 냄새가 많이 난다는 얘기를 건너 건너 들었다. 충격이었다. 그래서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담배를 끊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담배를 끊는다는 것이 생각 만큼 쉬운 것이 아니었다. 기도도 하고 결심을 반복해서 되뇌이어도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오후에 담배 생각이 나서 밖에 서성이며 복합적인 욕망으로 혼란스러웠다. 한편으로는 담배를 피고 싶지는 않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담배 생각이 간절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냥 갑자기 마음 속으로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 양 ~~ 등등 마음 속에서 생각나는 찬송가들을 부르다 보니 담배 생각이 싹 없어졌다. 그후로 몇 달 동안 계속 이렇게 담배의 유혹을 물리쳤다. 이것이었다. 내가 담배를 완전히 끊고 그 후로는 단 한 번도 담배를 입에 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 삶이 찬송이 되고 찬송이 삶이 되었던 기쁨이 담배의 유혹을 이겨내도록 했던 것이었다.
우리가 입술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은 언어를 가진 인간으로서 너무도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입술에 의한 찬양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드리는 찬양 또한 너무도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여 우리의 속을 주관하여 변혁시키고 마침내 삶의 모든 시간에서 열매를 맺음으로써 그 열매가 곧 찬양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크리스찬은 찬양대에 서 있는 찬양대원이다. 입술을 열어서 그리고 삶의 향기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찬양대원이다. 그리고 마침내 찬양드리는 기쁨을 누리는 찬양대원이다. 혼자서 찬양드릴 수도 있고 여럿이서 함께 찬양드릴 수도 있고 수백, 수천 명이 함께 찬양드릴 수도 있는 찬양대의 귀한 일원이다.
순종으로 드리는 찬양은 기쁨과 위로와 감사와 능력을 낳고 이를 통해 입술로 터져 나오는 찬양은 온 땅에 울려 퍼질 것이다. 우리 주님 안에서 말과 생각과 삶이 하나 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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