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겸손과 꾸며낸 겸손
우리 주님의 행적과 말씀들을 기록한 복음서들을 보면 우리 주님은 참 겸손하신 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천동지할 기적을 아무렇지도 않게 베푸시면서도 한번도 ‘나’를 내세우지 않으셨고 어쩔 수 없이 무언가를 자랑해야 하는 경우에는 하나님 아버지만을 자랑하셨다. 우리 주님의 겸손하심은 요한복음 17 장과 빌립보서 2 장에 잘 드러나 있다. 우리 주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고 빌 2:6~8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겸손하신 주님은 스스로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겸손을 배워야 한다.
겸손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비유가 있다. 누가복음 14:7~11 말씀에 기록된 비유를 보면,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다.
이 비유에는 세 명의 사람이 나온다. 혼인 잔치를 열고 사람들을 초대한 주인과 초대를 받은 두 사람이다. 초대를 받은 한 사람은 잔치의 주인과 상관 없이 자기 자신의 명예를 가지고 스스로 판단하여 높은 자리를 택하여 앉았다. 이 사람은 아마도 사회적으로 높은 명예를 가지고 있든지, 많은 부를 소유한 사람이든지, 아니면 높은 권력의 지도층 인사였을 것이다. 이 사람 스스로의 생각으로는 ‘내가 이 정도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누가 봐도 당연한 것’이어서 당연하게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데 초대를 받은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명예를 다 내려놓고 가장 낮은 자리에 가서 앉았다. 자기의 위치 정함을 친구인 주인에게 맡기는 처사였다. 잔치의 주인이 친구이기에, 자기가 어떤 사람이든 그 잔치에서는 잔치의 주인이 정해 주는 자리가 자기에게 맞는 자리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주인에게 맡겼던 것이다. 주인과 이 사람은 사랑과 우정의 관계 안에서 서로를 위해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은 이 사람을 벗이라고 부르며 주인이 정한 자리로 올라오라고 권면한다. 겸손이란 무조건적으로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의 관계 안에 있다는 전제가 성립되어 있고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서 나를 낮추는 것이 겸손인 것이다. 이 비유를 실제의 삶에 적용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겸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골로새서 2장에는 겸손에 대해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기록되어 있다.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를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골 2:18~23). 이 말씀에서의 ‘겸손’은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 기록된 ‘겸손’과는 다르다. 이 겸손은 ‘꾸며낸’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겸손이다. 그렇다면 순수한 겸손과 꾸며낸 겸손은 무엇이 다른지 알아야 하고, 우리는 결코 꾸며낸 겸손을 경계해야 한다.
먼저 겸손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사전적 의미로는 겸손이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를 의미하는데, 성경이 가르치는 겸손이 윤리적 또는 도덕적 겸손을 의미해서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겸손해야 한다’는 식의 가르침이거나 또는 ‘사람은 겸손해야 복을 받는다’는 식으로 뭔가 반대급부를 위해 취해야 할 필요사항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의 비유를 보면 알 수 있다. 누가복음의 비유에서 겸손은 주인과의 사랑 또는 우정의 관계에서 나온 자기 비하였다. 겸손한 손님은 주인을 생각해서 가장 끝자리에 앉았다. 주인의 처분에 맡긴다는 의미였다. 반면에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의 명예를 내세우며 자기 스스로 자리를 정해서 앉았다. 이 손님은 누구와도 상관 없이 자기는 이 정도의 자리를 앉는 것이 마땅하다는 듯이 앞자리를 택했다. 따라서 성경이 가르치는 겸손이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사랑하는 상대에게 자기에 대한 처분을 맡길 만큼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
그렇다면 골로새서 2 장의 ‘꾸며낸 겸손’이란 무엇일까.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겸손과 함께 천사 숭배 또는 자의적 숭배가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우상 숭배의 근본은 사람의 자기 중심성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 중심적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말하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냄새 맡지도 못하는 우상을 만들어 놓고, ‘이것이 우리의 신이다’ 하는 자기 중심적 결단이 우상을 숭배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중심적이면 결코 겸손할 수 없다. 다른 존재가 그 사람의 마음에 결코 들어올 수 없는데 어떻게 사랑의 관계에서 나오는 자기 비하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잘해야 꾸며낸 겸손만이 가능한 것이다. 뭔가 겸손한 것 같은데 참된 겸손이 아니라 일시적이거나 또는 자기 만족이나 또는 뭔가 이익을 위해서 겸손한 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겸손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겸손할 수 없는 것이다. 잠언 15장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5:33).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겸손이 함께 언급되고 있다는 것에 주의해서 생각해 보면, 겸손은 무조건적 자기 비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의 원래의 존재적 특성 자체가 사회적이기 때문이라서 사람은 자기 스스로 정의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정의된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에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을 본따서 만드셨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이 스스로 이 관계적 정의를 거부하고 자기 중심적인 정의를 취하였을 때에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결코 겸손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사람은 이제 참된 겸손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따라서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사랑 안에서 이웃을 위해 스스로 자기 비하의 태도인 겸손이 가능해진 것이다. 다만 이제 문제는 이 가능성을 단지 가능성으로서 자기 존재 안에 가지고 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삶에서 그 가능성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의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의지는 사랑 안에서 쉽게 해결되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겸손한 마음은 기본적인 덕목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현대를 자기 PR의 시대라고 한다. 자기를 자랑하는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자기를 적극적으로 알려서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게 만들어야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이다. 그런데 자기 PR은 교만과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게 만든다. 자기 PR이 아주 조금만 지나쳐도 바로 교만이 되기 때문이고 그렇다고 소극적으로 하자니 자기 PR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를 ‘지혜롭게’ 내세우기 위한 자기계발서들을 서점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사실 말이 자기 PR이지 실제로는 적당한 수준의 자기 자랑일 뿐이다. 자기의 잘난 것을 내세워서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기 바라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특성을 생각해 볼 때에 이러한 자기 PR도 어떻게 보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알아야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에 무작정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이 필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자기 PR조차도 우리가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겸손이 무엇인지 살펴본 바를 토대로 하여, 자기 PR이 자기 자랑이나 심지어 교만이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지 살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결단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또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는 결단코 겸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겸손하지 않은 자기 PR은 아무리 부드럽게 포장했다고 해도 결국 교만일 뿐이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 사람들에게 경고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육신에 남아 있는 옛습성 때문에 너무도 쉽게 ‘꾸며낸 겸손’의 덫에 빠질 수 있다. 그런데 꾸며낸 겸손일지라도 참된 겸손과 겉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쉽사리 분별하기 어렵고 따라서 스스로는 마치 잘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그만큼 위험한 것이다. 자기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고칠 기회는 없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래서 우리는 참된 겸손과 꾸며낸 겸손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분별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아닌가에 있다. 그러므로 겸손은 거듭난 사람,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성령 충만함으로써 반드시 드러나는 미덕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우리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여기에서 멍에는 사랑의 멍에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사랑 안에서 겸손을 배우자. 사랑 안에서의 겸손은 우리 주님이 죽음을 통해 걸으셔야 했던 길을 우리도 걷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