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외치신 외침으로 잘 드러난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예수님께서 이렇게 시작하신 사역의 결과로서 지금 현재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장차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과도한 집중에 의해 가려져 있어서 우리의 현재의 삶과 괴리되는 현상이 발생하며 우리가 종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심각한 결함을 일으킨다. 따라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이해하고 이에 따라 종말론을 파악함으로써 지금 현재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 고민해 보자.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의 의미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후에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하였다는 것을 선포하셨다. 대표적인 말씀이 마태복음 12:28 말씀과 누가복음 11:20 말씀으로 “만일 내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귀신들을 내어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신 말씀이다. 과연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힘입어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시고 그들의 질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오순절 이후에 성령님께서 신자들에게 내주하심으로써 신자 각 사람이 성전이 되었다는 진리를 통해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고전 3:16). 이는 한글 성경에서 나라 또는 왕국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명사 ‘바실레이아’는 ‘왕국’뿐만 아니라 ‘왕권’ 또는 ‘왕의 통치’를 의미하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뜻하는 성전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의미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리델보스는 그의 저서인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탁월하게 구분하여 설명한다. 이 구분에 따라 현재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사이에서 긴장 관계에 놓여서, 현재에는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누리지만 아직 완전히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아니며 미래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하나님 나라는 완성될 것이라고 제시한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해 이렇게 요약했다.
"앞에서 우리가 강조한 것은 미래에 속한 하나의 웅대한 나라가 현재적인 실체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 나라가 가진 근본적으로 종말론적인 성격은 과정의 문제로 이해된다. 그것은 구원과 심판을 위해 세상에 임한 거대한 나라이며 하나님의 임하심이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미래가 현재에 침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절정에 달하는 사역들의 총체자인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가 이 세상의 현재 시간 안으로 그 길을 밀고 나가고 있다. 이것은 너무도 새로운 사실이며, 여러 면으로 볼 때에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라고 칭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거대한 심판의 때가 임하기 전에 시작될 것이며, 그때는 ‘세상의 종말’ 이전에 성취된다."
리델보스가 말한 ‘과정의 문제’란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세상을 끝내고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단번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거쳐서 완성되므로 항상 일정 부분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마지막 때에 종말의 완성이 이루어지게 된다. 또한 그의 설명에서 눈 여겨 봐야 할 부분은 ‘미래가 현재에 침투하는 것’이라고 말한 부분이다. 앞으로 이루어질 것이 지금 현재에 침투되어 이미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현재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미래와 동떨어진 시간이 아니라 반드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인해서 이 땅에 임하기 시작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확증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나라의 백성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능동적 순종으로 인해서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백성을 예수님께서 직접 만들어 내신 것이며 예수님께서 그 백성의 시조이시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그리스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실체가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대위임령을 통해 명령하시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그 명령의 근거를 설명하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한 모든 권세가 – 하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땅에 대해서도 – 예수님께 주어졌으니 이제 예수님의 통치를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인 것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누려야 하는 실체이며 그 실체를 우리가 얼마나 현재에 누리느냐에 따라 예수님의 복음에 얼마나 충실한 것인가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 그리고 이 실체는 로마서 8:38-39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그 어느 누구도 무엇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실체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기되는 한가지 문제가 있다. 우리는 과연 그 나라를 우리의 실제 삶에서 누리고 체험하며 살 수 있을 만큼 그 나라는 우리에게 실체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와는 동떨어진 어떤 선언적인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느낄 수 있는 체험적인 실체인가 하는 문제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 우리의 삶에서 체험적인 실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그 나라를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거짓인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뭔가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의 진리성은 예수님의 부활이 확증하였기 때문이다.
종말론과 연결되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천년왕국론으로 표현되는 종말론은 크게 전천년설, 후천년설, 그리고 무천년설로 구분된다. 전천년설은 다시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 전천년설로 나누어지는데, 한국 교회에서 대다수는 전천년설을 지지한다. 전천년설은 예수님의 재림이 천년왕국 이전에 이루어진다는 종말론으로 천 년 동안 예수님이 왕으로서 지상에서 다스리심으로서 하나님의 통치가 지상에서 이루어지고 그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왕국으로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후천년설은 예수님의 재림이 천년왕국 이후에 이루어진다는 종말론으로 지금 성도들은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복음을 전파하여 세상이 복음으로 가득차는 천년왕국이 지나고 나서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무천년설은 예수님의 초림 이후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이 천년왕국 시대이므로 따로 구별된 천년왕국이 없으며 예수님의 재림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종말론들을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함께 숙고할 경우, 만일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실제적이고 성경적인 진리로 인정하면 전천년설은 크게 약화되는데 메리데스 클라인은 그의 저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서 이와 동일한 주장을 하였다. 그는 아마겟돈의 어원을 추적하면서 천년왕국의 의미를 파악하였는데, 결국 지금 현재 곧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 천년왕국의 기간임을 성경신학적으로 풀이하였다. 결론적으로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 보좌에 앉아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하였다면 – 비록 온 우주에 극치로 완전히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는 아직 아닐지라도 – 예수님께서 천 년 동안 모든 사람들을 이 땅에서 물리적으로 다스리시는 특정한 기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샘 스톰스 역시 그의 저서 『개혁주의 무천년설 옹호』에서 전천년설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전천년설에 의한 천년왕국의 필요성 자체에 큰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며 이미 천년왕국이 시작되었다는 관점에서 보면, 전천년설의 천년왕국과 현재의 하나님 나라의 차이점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현시적으로 직접 다스리시는지 아니면 하늘 보좌에서 성령님을 통하여 다스리시는지 하는 점일 뿐이다. 천년왕국이 기록된 요한계시록 20장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현시하셔서 다스리신다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탄이 쇠사슬에 묶여 무저갱에 가두어진다는 말씀이 예수님의 현시적 직접 통치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이 말씀은 사탄이 어떤 대상에 대하여 아무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씀이다. 따라서 그 대상이 무엇인지를 성경 말씀을 토대로 파악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사탄의 결박당함이 세상에 대하여인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인지 살펴야 한다. 이 판단을 위해 데살로니가 후서 2:6-7 “너희는 지금 그로 하여금 그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이 있는 것을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는 말씀과 사도 베드로가 이 땅의 성도들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칭했던 말씀을 중요한 기초로 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설명할 때 그 현재성은 마귀들을 쫓아냄으로써 증명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면 사탄의 결박당함은 성령님으로 인해서 사탄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쇠사슬’ 그리고 ‘무저갱’ 즉 ‘바닥이 없는 구덩이’와 같은 엄중한 표현을 사용하여 사탄의 결박을 설명하는 이유는 사탄은 창세기와 욥기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늘과 땅을 자유롭게 다니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침투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참소하여 무너뜨리며 온 우주를 자기의 통치 아래 두었던 것이 예수님의 초림 이후에 이제는 완전히 불가능하게 되어 하나님 나라에 침투할 수 없고 하나님의 백성을 절대 무너뜨릴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나타내야 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비록 사탄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으나 헛수고일 뿐이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통치하시며 역사하심으로 인해서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을 절대로 삼킬 수 없다. 그리고 사탄이 천 년 후에 잠깐 풀려나서 온 세상의 추종자들을 모아 하나님께 대항하는 마지막 전쟁을 벌인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 시에 있을 심판을 의미한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 잠깐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들어가 추종자들을 모으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넘어가지 않고 세상에 있는 어둠의 세력들만 사탄을 추종하게 된다. 사탄을 그들을 데리고 하나님께 반항하지만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서 철저하게 멸망을 당하고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과 동등한 무게를 가지고 숙고한다면 전천년설보다는 오히려 무천년설이 가장 성경적이며 타당한 주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재가 천년왕국의 시기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무천년설을 현천년설로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한 이해와 적용을 어떻게 결정하는가에 따라서 현재의 삶뿐만 아니라 종말론에 대한 관점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의하여 현재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 삶이 바로 종말의 시대를 사는 삶이며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결론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해서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리델보스의 이해를 근거로 삼아서 하나님 나라는 과연 지금 현재에 이미 임하였다는 점을 증명하였다. 따라서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진리가 확정되면 그 진리는 종말론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어 전천년설이 성경적인 근거를 상실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클라인과 스톰스는 전천년설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며 무천년설을 옹호하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만일 무천년설 혹은 현천년설에 대해 거부감이 든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너무도 연약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우리가 자신의 삶을 살펴야 한다.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따라 능력을 드러내며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누릴 때에 우리의 생각이 바뀔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한 진리는 성경의 가르침이기에 단순히 지식적인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 우리의 삶이 바로 종말을 사는 삶이어야 하며 그 삶은 하나님 나라에서 살며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과 미래에 완전히 성취될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이 진리가 우리의 삶에서 확증될수록 우리는 현재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삶이 될 것이므로 이 진리를 굳게 붙들며 이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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