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 신념의 무서움
지난 8월 18일자 뉴스에 따르면 정말 어이없는 일이 아프리카 잠비아에서 발생했다. 어느 젊은 목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재현하겠다며 스스로 땅에 묻혔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https://www.etoday.co.kr/news/view/2054640). 이 뉴스를 처음 봤을 때에 필자는 눈을 의심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가짜뉴스일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만큼 충격이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흔히 말하기를 기독교는 상식과 과학보다 훨씬 더 높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상식과 과학을 초월한다는 것이 상식과 과학을 경시하거나 무시한다는 의미가 결코 될 수 없다. 기독교는 상식과 과학을 포용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위에 그보다 더 큰 것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함께 주장하는 것이다. 상식과 과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반은총과 일반계시에 따라서 인류가 발견한 윤리와 도덕적인 그리고 과학적인 진리들의 모음이다. 기독교는 이러한 상식과 과학 위에, 하나님의 특별은총과 특별계시에 따라서 주어진 믿음으로 알 수 있는 영적인 진리들을 다함께 주장하며 이 모든 것을 기반으로 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포하는 가르침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다. 빵 없이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당연히 빵도 필요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상하게도 기독교가 과학과 전적으로 대립하게 되었고, 어느 누가 과학적 진리를 주장하면 마치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는 식의 생각을 은연중에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는 영적인 진리만이 기독교의 전부이며 세상의 삶을 무시하고 또 상식과 과학을 경시하며 영적인 진리만을 좇아서 사는 것이 최고의 삶인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어느 정도는 과학계의 잘못된 주장도 이러한 현상을 유도한 측면이 있다. 과학이 자연 세계의 영역을 넘어서서 종교의 영역까지 들어가 과학으로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마치 정답을 아는 것처럼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카이저의 것은 카이저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는 금언을 가르친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아프리카에서 보내온 뉴스는 과학과 상식을 무시하는 전형적인 예를 보여준다.
아프리카의 젊은 목사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런 일을 계획했고 실행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거듭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확고한 확신을 가지고 자기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결국 실행했다가 비참하게 사망하고 말았다. 우리들도 때로는 이와 비슷한 일들을 저지른다. 이처럼 어리석은 일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지만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른다. 지금 대표적인 예가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배드린다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방역을 무시하고 코로나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일을 서슴지 않고 한다. 물론 그런 모임을 갖는 교회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른 많은 모임들도 방역을 무시하고 바이러스를 퍼트리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모임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교회의 기본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인데,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웃에게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원인이 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이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인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면서 이웃에게 해를 끼치고 있으며 이웃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멀리 하도록 만들고 있으니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잘못된 것이며 교회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만일 교회의 모임이 꼭 필요하면 방역을 지키며 최소한의 인원으로 지혜롭게 해서 이웃에게 염려와 피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각 교회마다 사정이 있고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교회 밖으로 피해를 주는 일은 없어야 하고, 최소한 이러한 고민을 심각하고 깊이있게 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한다. 우리의 이웃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본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며, 또한 사도 바울은 믿음이 약한 성도가 고기로 인해서 시험에 들까 걱정되는 경우에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가르친 이유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처럼 기독교적 신념이 무서운 이유는 사람이 자기자신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능력을 입었다고 또는 특별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확신하며 죽음마저도 경시하고 무조건적으로 밀어부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더욱 무서운 이유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가장 숭고한 것으로 포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어리석음에 눈이 가려진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기 때문에 자기가 무엇을 잘못하는지도 모르면서도 자기가 제일 잘 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거기에 더하여, 신념으로 무장한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그런 확신을 갖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숭고하고 기독교적 가치에 충실한 목적을 내세운다. 그래서 더욱 더 깊은 어둠에 빠지지만 결코 깨닫지 못한다.
성경에도 이러한 종교적 신념에 빠진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다. 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안식일에는 사람이 질병이나 사고로 죽어가는데도 치료하지 않는다. 그런데 소나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건져낸다. 그들은 구약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많이 그리고 자주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자기들이 만든 전통과 신념으로 인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무시해 버렸다. 더욱이 그들은 그들 자신들만 이러한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고 자신들을 종교적으로 아주 잘 포장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과 같은 신념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다함께 멸망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기독교적 신앙과 기독교적 신념은 얼핏 보면 비슷한 것 같지만 아주 다르다. 기독교적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믿음이지만, 기독교적 신념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이 자기의 사상과 주장을 믿고 따르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믿음이다. 이 두 믿음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비슷하지만 본질적인 기준이 다르다. 기독교적 신앙은 철저하게 성경이 기준이지만, 기독교적 신념은 기독교적 용어로 포장된 자기 주장이 기준이다. 그래서 기독교적 신념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장되지만 성경 말씀과 대조해 보면 금방 헛점이 드러난다.
그래서 기독교적 신앙과 기독교적 신념을 구별하는 기준은 오로지 성경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어 있기 때문에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무엇이 사람의 뜻인지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이 제시되어 있다. 디모데후서를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딤후 3:16~17). 하나님의 자녀들이 교육받고 하나님의 일꾼들이 능력있게 일해서 선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성경뿐이다. 더욱이 “모든 선한 일”을 하려면 반드시 성경만을 의지해야 한다. 이 디모데후서 말씀은 배타적인 말씀이다. 즉, 성경 말씀도 필요하고 또 적절하게 다른 조언들도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잘 알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면 결코 기독교적 신념으로 빠질 수가 없다. 기독교적 신념이 생기는 원인이 성경에 대한 무지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기도 하다. 사람이 성경을 하나님이 의미하신대로 올바르게 이해해야 하는데, 사람이 여러가지 이유와 욕심으로 말미암아 성경을 자기 뜻대로 이해하는 경우도 아주 비일비재하다. 그렇게 자기 생각대로 성경을 해석해 놓고는 마치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신념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가 더욱 치명적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믿고서 신념에 빠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을 절대로 듣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교훈을 주었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벧후 3:16).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서 선생님을 두 분 준비하셨다. 한 분은 성령님이시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요일 2:17) 말씀에 따르면 성령님께서 성도 각 사람 안에 거하셔서 직접 가르치신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목사와 교사’ 직분을 받은 하나님의 일꾼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르치신다 (엡 4:11). 이렇게 준비된 두 선생님을 통해서 양육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게 된다. 물론 이렇게 좋은 선생님들이 계시지만 배우는 학생의 의지와 노력과 자세에 따라서 배움의 결과는 많이 다르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또한 성령님은 결코 틀릴 수가 없지만 목사와 교사 직분자는 대부분의 경우에 도움이 되지만 때때로 틀릴 수도 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직접 가르치시며 교정하시고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독교적 신앙이 아니라 기독교적 신념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목사와 교사’ 직분자들이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달하는 것이며, 둘째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교회가 성경 해석의 방법들을 가르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성도들이 교회에서 모여 각자 해석한 성경 말씀을 나누고 또한 그 해석한 대로 적용한 결과들을 토론하여 서로가 서로를 가르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은 직접 참여하셔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 함께 하신다. 그래서 성도 각 개인뿐만 아니라 성도의 모임으로서 교회가 올바르게 성장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에서 성경 해석학 또는 성경 해석의 방법과 요령들을 가르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만일 없다면 담임 목사에게 당당하게 요청해야 한다. 목사나 장로들이 성경 말씀을 해석해서 삶에 적용하는 방식까지 알려주며 떠먹이는 것은 아주 어린 성도에게는 필요할 수 있으나 초신자를 벗어난 상태가 되면 곧바로 이러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교회로서,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몸으로서 기능하며 성장할 수 있고, 어느 한 성도라도 영혼이 병들지 않고 잘못된 길에 빠지지 않게 된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성경 공부가 다 목사들이 성경을 해석해서 그 해석한 결과를 가르치는 것이지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과 요령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학교에서 국어 시간에 소설, 시, 수필, 역사서 등등 다양한 문학 작품을 해석하는 방법을 배운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도 해석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부끄러운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장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성도가 예수님 안에서 제대로 살고 교회도 예수님 안에서 제대로 살게 된다. 목사와 장로는 성경 해석의 방법과 요령을 성도들에게 가르치라고 세움을 받은 직분자들이다.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처럼 목사는 성도가 성경 말씀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을 당하지 않도록 성도에게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실행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의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그래야 우리 모두는 서로가 서로를 세워서 아무도 기독교적 신념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올바르게 신앙할 수 있도록 서로 돕고 섬길 수 있다. 그렇게 되도록 교회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교회들은 성경 해석학을 가르치자. 성도들은 성경 해석학을 기초로 해서 성경을 해석하며 그 해석된 대로 자신의 삶에 적용하고 교회에서 모여 함께 나누어 보자. 그것만이 우리의 신앙이 기독교적 신념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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