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풀숨 2021. 10. 23. 02:44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아마도 우리가 성경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장 오해하는 구절이 바로 이 구절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2).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이해하기를, 사람이 자기 죄를 용서받으려면 먼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야 하며,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는 식으로 한다. 그러면서 이 말씀은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 말씀이므로 다른 말씀들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선행을 해야 나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의 말씀이 그런 의미일까?

 

마 6:12 구절은 이 구절만 보면 언뜻 그런 의미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바로 조금 뒤에서 용서에 대한 비유가 나오면서 전혀 다른 의미일 수 있다는 힌트가 주어진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장면이 마 18장에 기록되어 있다. 어느 임금에게 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이 있었다. 금으로 만 달란트면 대략 만 곱하기 20억원 정도이므로 20조원으로 보면 된다. 상상하기 어려운 만큼 큰 금액이다. 그렇게 큰 금액을 그 임금은 전액 탕감해 주었다. 즉, 모든 금액을 한번에 용서해 준 것이다. 그런데 그 용서받은 자가 밖에 나가서는 자기에게 천만원 정도 빚진 자를 용서해 주지 않았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그 임금은 만 달란트를 용서받은 사람을 다시 불러서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지 않는 그도 이젠 용서해 주지 않고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둔다는 비유이다. 이 비유에서 용서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난다. 용서받은 측면과 용서하는 측면이다.

 

사도 바울은 이 비유의 말씀을 직설적으로 풀어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에베소서 4:32 말씀을 보면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받았기에 이제 서로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서로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용서받은 측면과 용서하는 측면이 다시 설명되고 있다. 용서하는 것은 이미 용서받음을 증명하는 것이지 용서함을 통해서 앞으로 용서받음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마 6:12 말씀도 이러한 힌트들을 기초로 해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사람이 선행을 하면 자기의 죄가 선행에 상응해서 용서를 받는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용서를 받은 사람이므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인지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먼저 마 18장의 비유나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보면 한가지 전제가 있다. 먼저 용서를 받는 것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 6장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이렇게 먼저 용서를 받는 것 같은 장면이 없다. 이것은 곧 비유나 바울의 가르침처럼 이 말씀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먼저 용서 받는다는 전제가 마 6장에도 나오지만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쉽게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즉 주의 기도라고 불리는 이 기도의 시작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가. 아무나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악인들과 죄인들은 그렇게 부를 수 없다. 하나님은 악인들과 죄인들을 싫어하시기 때문이다. 의인들은 그렇게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의 기초이자 시작이자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가. 용서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용서받았기에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될 수 있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대전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이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며 기도하면서 이제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가 되었음을 고백하고, 우리가 어떻게 용서받았는지 회상하면서 그 의무를 잘 수행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용서받았음을 현재에 증명하며 용서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용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어서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서 그 능력을 간구해야 한다. 결국 우리가 이웃을 용서함에 있어서 대전제는 우리가 먼저 용서받았다는 사실이기에 이것을 깨닫고 그 용서받음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서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용서는 이론으로는 쉬우나 실제에서는 너무도 어렵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한다는 것은 때로는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것 같은 정서적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크리스찬은 용서를 지혜롭게 잘 해야 한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찬의 의무라고 해서 무조건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냥 의무감으로 용서한다고 해서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진정한 용서와 화해는 어느 한편에서 일방적으로 혼자 용서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쌍방 모두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해야 비로소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어렵기 때문에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질 때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구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이 완전히 녹아지고 풀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가능해지며 그 시작이 열린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먼저 용서해야 – 또는 선행을 해야 – 우리도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결론적으로 우리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우리의 용서에는 우리 자신을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열심을 내겠지만 목적이 충분히 달성될 때까지 우리는 늘 불안할 것이며, 사실 그 목적이 달성되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용서해 주신 것은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며 또한 안식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먼저 용서해야 우리도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이나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나 하나님의 용서의 목적을 기반으로 가늠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이며, 과거에 용서받았음으로 인해서 현재에 다른 사람을 용서함으로써 그 용서받았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고 아뢸 때에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것과 이제는 이웃을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았음을 확인할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간구하는 것이다. 이 기도를 통해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기다리고 그 능력을 통해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며 하나님께 받은 용서를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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