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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23.01.20 개혁주의 예정론을 옹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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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22.04.15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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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22.03.08 생일 선물
  8. 2022.02.26 선교적 교회
posted by 풀숨 2023. 2. 8. 22:30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재연

 

1. 서론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흔하고 쉬운 주제는 사랑일 것이다. 수많은 문학 작품들과 노래들과 우리의 경험이 그렇다고 말하며, 또한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혹은 무엇을 사랑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더욱 그렇다. 가족이든지 또는 여자친구나 남자친구를 사랑하고 심지어 어느 아이돌 그룹의 멤버나 꽃미남 배우를 최애라고 하며 다양한 조공을 바치고 콘서트나 팬미팅에 가서 ‘사랑해요’ 하고 고백하기도 한다. 사랑은 이런 것인가? 한국의 아이돌 그룹인 BTS는 Fake Love라는 노래를 통해서 사랑에 대해 물음표를 던졌었다. 그들이 가짜 사랑이라고 정의한 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에게 나를 맞추는 삶이었다. “널 위해 슬퍼도 기쁜 척하고, 아파도 강한 척하며, 예쁜 거짓을 빚어내, 날 지워 너의 인형이 되려 하는” 사랑을 가짜 사랑이라고 했다. 그들은 가짜 사랑에 대해 노래함으로써 사람들이 진짜 사랑에 대해 고민하도록 했다.

    기독교에서도 사랑은 가장 큰 주제 중에 하나이다. 특히 요한일서 4장에는 전체 21구절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31번이나 나온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무엇인가? 요한일서 4장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그래서 첫째는 사랑이란 무엇인가와, 둘째는 진짜 사랑을 배우는 방법과, 마지막으로는 진짜 사랑이 우리의 현실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알아보자. 이러한 고찰을 통해서 기독교의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 무엇이 다르며 또 우리는 어떻게 기독교의 사랑을 배울 수 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2. 본론

    내가 생각해서 원하는 대로 상대에게 하는 것이 사랑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는 것이 사랑일까? 뭔가 그것도 아닐 것 같다. 또는 무조건 용서해 주는 것이 사랑일까? 이러한 것들은 사랑이 드러나는 모습의 예일 뿐이다. 보다 더 근본적인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사랑이란 인간이 혼자 있는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이루는 연합”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런가 하면, 인도의 명상가이자 런던의 “선데이 타임스”가 뽑은 20세기를 빛낸 1000 명의 위인 중 한 명인 오쇼 라즈니쉬는 사랑이란 아무런 조건 없이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런데 그가 정의하는 ‘자기’는 “자신이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깊은 침착함과 고요가 내면에 자리 잡는다”가 되는 자기이다. 뭔가 귀에 솔깃하긴 하다. 이 사랑이 맞는 것일까? 결코 아니다. 왜 아닌가 하면, 우리 크리스천은 ‘자기 자신’을 이 사람이 말하는 존재로 정의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내어주는 것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외에도 사랑에 대한 다양한 정의들이 있다. 하지만 비관적이든 긍정적이든 세상이 가르치는 사랑에는 하나님이 없다. 세상은 하나님을 거부하기 때문에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 없는 사랑, 즉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 사랑이 참 사랑이 될 수 있을까? 창조주를 거부하고 부정하며 창조주는 없다고 믿는 세상은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하겠지만, 창조주가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믿는 크리스천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2.1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가르쳐 주는 사랑은 대표적으로 사랑의 사도인 요한 사도를 통해서 기록되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3년을 넘게 생활하면서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고 눈으로 확인한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가 요한일서 4장에 기록한 사랑은 자기를 내어주어 상대의 자리에 서는 것이란 진리이다. 이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 가운데 전시되었기에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에 대한 이 정의는 인도의 명상가가 했던 말과 비슷하다. 그러나 다른점은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상대의 자리에 서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이며,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자기’라는 존재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는 것인데 우리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부터 파생된 존재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사랑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데 삼위일체가 바로 그런 의미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세상의 다른 모든 신들과 다르며, 그 결정적인 차이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유일하지만 삼위일체의 하나님이고 세상의 최고 신은 다 일원론적(monistic)인 신이라는 점에서 드러난다. 이 차이는 따라서 결정적인 결과를 낳게 되는데, 사랑은 반드시 동등한 대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아니면 사랑을 참되게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삼위일체를 조금 풀어서 설명하면 “Three persons in one essence”라고 한다. 그리고 또 달리 설명하는 표현이 Perichoresis (페리코레시스)이다. 이 단어는 강강수월래와 같이 서로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도는 춤, 즉 윤무(輪舞)를 의미한다. 자아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 모를 만큼 계속 돌고 도는 춤인데 이 춤을 통해서 삼위일체, 즉 ‘세 분이시지만 한 하나님’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마치 그 모습은 끊임없이 서로가 자기를 내어주고 서로의 자리에 서는 것과 같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명제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사랑을 존재 자체에 가지고 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기 때문에 유일한 참 사랑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성자 하나님께서 자기를 내어주어 예수님으로 사람이 되어서 오셨고, 피조물인 우리의 자리에 서셨으며,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의 모든 것을 감내하심으로써, 이 사랑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고 증명되었다.

    이제 우리 사람 차원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보자. 우리 차원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가장 기초적인 것은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존재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은 원래적인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닮도록 파생된 존재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담겨 있고 우리는 존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의존하며 닮아가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 있는 경우에만 우리 존재의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게 되며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자 하는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되었고, 이 자기중심성 때문에 우리에게 담긴 하나님의 사랑은 오염되고 훼손되어 많이 비뚤어진 사랑이 되었다. 단적인 예가 인간의 사랑 중에 가장 숭고하다는 어머니의 사랑마저도 오직 자기 자녀에게만 향하는 사랑이 되었으며 자기 자녀들 안에서도 더 사랑하는 자녀가 있고 소외되는 자녀가 있으며 사랑으로 인해 오히려 상처를 준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안에 들어가야 페리코레시스를 알게 되고 느끼며 참된 사랑을 받고 사랑하게 되는 상황에 놓였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기를 내어주어 상대의 자리에 서는 것이다. 그래야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하고 또 비뚤어진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참 사랑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랑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드러난 사랑으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는 말씀과 같다. 하나님의 사랑이 말에서, 행동에서, 삶에서, 생명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이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이 가르쳐 준다.

 

2.2 사랑을 배우는 방법

    어떻게 해야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며 배우고 또 사랑할 수 있을까? 먼저 세상은 어떻게 말하는지 BTS를 통해 살펴본다. BTS가 몇 년 전에 앨범을 내면서 그 주제를 Love Yourself로 했고, 그 앨범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수많은 BTS 팬들이 자기자신을 사랑하게 되었고 새로운 삶을 산다고 고백하는 장면을 유튜브 영상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리더 RM은 유엔 연설에서 “저는 김남준입니다. 단점도 많고 두려움도 많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였는지, 내가 누구이고 싶은지를 모두 포함해 나를 사랑하세요”라고 했다. 그의 연설은 전 세계의 수많은 청년들의 호응을 얻었고 심지어 미국의 많은 학교들에서는 학생들이 그의 연설문을 수업 시간에 다시 읽어보고 토론하기도 했다고 한다. RM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는 것을 통해서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니 먼저 자신을 사랑하라는 조언은 결코 잘못된 말이 아니다. 그의 말은 Fake Love는 나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에게 맞추는 것이므로 True Love는 내가 내 자신의 음성을 듣고 내가 좋아하는 것 또는 원하는 것을 충실하게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이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방법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듯싶다. 물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고 ‘나’라는 존재에 초점을 맞추며 또 나를 드러내서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당당하게 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참 사랑인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해서 받는 방법이라고 가르쳐 준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거듭난 우리는 계속 사랑을 받아서 성장하여 그 사랑이 나 자신을 사랑하게 하고 또 더욱 넘쳐서 다른 사람에게로 향하게 한다고 가르쳐 준다. 그래서 만일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참 사랑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고 가능한 사랑이기에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심지어 그 사랑이 지금도 계속 우리에게 부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랑이 잘 안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의 거듭남 때부터 이미 나에게 부어졌고 그 후에도 계속 부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사랑을 잘 배우지 못하고 어렵게 느껴진다. 왜일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고 명확하다.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를 제대로 올바르게 나누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교제에 서투른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주도권을 내가 갖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내가 교제를 이끌어 가기를 원해서 사귐의 대상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내가 주도권을 갖고 교제하고자 한다. 우리가 거듭났음에도 여전히 육신적 생각인 자기중심적 생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교제의 주도권을 갖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 중심적인 생각으로 바꿔서 하나님께 주도권을 드리고 나는 배우고 순종하며, 마치 어린 자녀가 아버지를 따르듯이 따라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이 사랑을 배울 수 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쌍방향의 사귐이 아니라 일방적인 사귐을 가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직접 보이지는 않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 없이 나 자신을 중심으로 일방적인 관계를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과 음성과 마음과 반응을 신경쓰지 않고 오직 나로부터 하나님께로 가는 일방적인 것만을 교제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도 않고 묵상하지도 않으면서도 기도하고 이루어지면 좋아하는 것으로 끝내버리거나 또는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평하며 끝내버린다. 이러한 관계는 결코 사귀는 사이가 아니다. 사귀는 사이에서는 마음의 교류가 있어야 한다. 서로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한다. 나의 마음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마음도 나에게 중요하고, 나의 말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말도 나에게 중요하며, 나의 반응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반응도 나에게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마음을 알려고 노력하며 하나님의 반응에 집중해서 하나님이 나랑 어떻게 사귀고 계시는지 알아야 진정한 교제를 이룰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성경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해야 하는 이유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 없이 하나님의 마음과 의도를 알 수 없으며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며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알아야 나의 상황과 환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제대로 된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내가 주도적이거나 나의 일방적인 교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마음과 반응에 집중해서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교제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진실하고 참된 교제가 가능하고 하나님을 배우며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눌 때에 우리는 정직하고 솔직해야 한다. 나 자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를 향해서도 솔직해야 한다. 만일 죄를 범하였으면 솔직하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죄에서 벗어나길 먼저 노력해야 하고, 또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뭔가를 했으면 하나님 아버지께 자랑하기도 해야 한다. 교만 섞인 자랑이 아니라 아주 어린 자녀가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과 같은 자랑은 오히려 우리를 솔직하게 만든다.

    사랑은 지식이 아니라 삶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이 방법을 머리로는 깨닫게 되어도 실제로는 잘 되지 않는다. 부단한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의 자기중심성은 쉽게 깨어지지 않기 때문에 머리로 아는 것이 삶에서 행동으로 드러나려면 먼저 하나님의 사랑에 푹 젖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자기중심성을 완전히 깨트려야 한다. 그리고나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부단히 노력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러니 처음에 잘 안 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음미하며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실천해 보고 또 하루에 십 분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들을 끊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온전히 배우지 못하며 우리의 삶에서 드러내지 못한다.

 

2.3 사랑의 역할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두려움에 대한 것인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현실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두려움이다. 악과 고통이 있는 세상에서 3차원 시공간에 갇힌 제한된 존재로 사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두려움을 마주하게 된다. 상황과 환경과 기타 여러 조건들이 만나면 두려움이 우리에게 덮친다. 두려움이 두려움인 이유는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미래를 알 수 없기에 우리는 우리의 상상으로 악과 고통으로 가득 찬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극대화시키면서 두려움을 갖는다. 이 두려움은 심지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덮쳤다. 열왕기에 기록된 엘리야 선지자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갈멜산에서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서 물에 푹 적셔진 제단이 불타는 기적을 체험하며 바알의 선지자 수백 명을 다 이기고 모두 죽였다. 그러나 불과 하루쯤 지나서 북 이스라엘 왕국의 왕후인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리라는 말을 듣고 갑자기 두려움에 휩싸여 광야로 도망하여 숨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천사를 통해 먹을 것을 보내 주시면서 회복시켜 주시고 다시 돌아오게 하셔야 했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선교 여행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7:5 기록처럼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라고 고백했다. 그가 처음 마케도니아로 들어간 것이 밤에 하나님이 주신 환상을 보았기 때문이었는데, 그 마케도니아에서 그는 두려움을 느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두려움은 임하기도 한다.

    특별히 사도 요한이 말하는 바와 같이, 마치 심판이 임한 것처럼 극심한 고통과 환난이 덮치면 두려움을 갖게 된다. 미래는 더욱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상상이 극대화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고백하였다. 우리가 일시적으로 두려움에 휩싸일 수는 있지만 결국 하나님의 사랑은 이 두려움을 없애주며 담대하게 해 준다고 고백하며 성도들을 권면하고 위로하였다. 로마 제국으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았던 시대를 살았던 사도 요한이 인생의 말년에 이렇게 고백한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그 어떠한 외부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이 잠시 우리에게 임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를 넘어뜨릴 수는 없으니,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 주시고 돌보아 주셔서 우리를 두려움에서 건져내신다.

    현대에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는 우리의 삶도 어쩌면 엘리야나 바울이나 요한 사도와 비슷한 면을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비록 극심한 박해는 없을지라도 하루는 담대하며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가 그 다음날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금방이라도 세상을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한다고 느낄 만큼 외롭고 두려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두려움 때문에 당황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도 단 한 번의 기도만으로도 우리는 평안을 회복하게 된다.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평안이 우리를 감싸주어 하나님 안에서 든든하게 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며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아시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사랑을 깨닫고 두려움을 극복하게 된다. 온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곧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자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사야서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는 말씀이다. 또한 로마서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뭔가 두려움이 임하거든 그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기도하면서 직시하면 극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반드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 줄 것이다.

 

3. 결론

    사도 요한은 서신서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는데,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는 요한 사도는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 가장 방대한 기록을 남긴 사도이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였고,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 주었으며,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현실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알게 하였다.

    삼위일체이기에 존재 자체가 사랑이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 보여주신 사랑이란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신을 내어주어 상대의 자리에 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이 되어 오셔서 사람으로 살면서 우리의 모든 의를 이루시고 마지막에는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감당하셨다.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 사랑을 먼저 알고 이 사랑을 받아야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체험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사랑을 통해서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또 교회와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닮아가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런데 교제가 결코 쉽지 않다. 그 이유는 내가 교제의 주도권을 가지려고 하든지 또는 쌍방향의 교제가 아니라 일방향으로 내가 원하는 것만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제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 마음을 살피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도 반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반응은 솔직하고 정직해야 한다. 나의 상황과 처지와 필요를 말씀드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살펴보면서 하나님과 쌍방향의 교제를 나누어야 하고, 만일 죄를 범하였으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닮아가며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배울 수 있다. 다른 방법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이 큰 사랑을 배우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지라도 참으로 연약한 우리는 때때로 두려움에 휩싸일 때가 있다. 그러나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더 가까이 그리고 더 깊이 알며 사랑하며 함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가르쳐 준 것처럼 우리는 사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참 사랑을 배우며 우리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현실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사랑은 그 현실마저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볼 수 있게 하며 나 자신을 사랑하고 또 교회를 사랑하며 결국엔 교회를 너머 이웃을 사랑하게 할 것이다. 그 삶이 얼마나 즐겁고 멋지고 아름다울지 예수님을 통해서 기대하며 우리의 본모습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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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3. 1. 23. 21:39

언약적 문맥으로 본 욥기

이재연



서론

욥기는 구약 성경에서 아주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주된 이유는 욥기의 주인공인 욥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과 욥의 생존 연대가 아브라함과 거의 동시대이고 욥기의 내용이 고난과 고통으로 가득 하기 때문이다. 욥기의 장르는 지혜 문학에 속하고 욥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화는 시적인 표현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욥기에 대한 이해는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예를 들어, 욥에 대항하는 엘리후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나누어져서 매우 긍정적 또는 매우 부정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욥기의 핵심 주제가 무엇인지, 욥기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성경적인지 알아보고 욥기의 가르침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의 배경에 언약신학을 놓음으로써 개혁주의 신학에 기반한 판단이 되도록 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욥기의 내용이 언약들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언약신학을 배경으로 할 수 있는지 먼저 알아보고, 언약신학을 배경으로 할 경우에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본론

일반적으로 욥기는 고난에 대하여 성도의 인내와 유익을 권면하는 책이라고 이해된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성도들이 욥기를 읽고자 하지 않는 이유가 된다. 누구라도 고난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욥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내용을 보면 마음 속에서 우선적으로 거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욥기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욥기를 정경에 포함시켜서 주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읽고 교훈을 얻으라는 것인데 이러한 잘못된 이유 때문에 읽지 않고자 한다면 욥기에 대한 이해가 뭔가 잘못된 것이라는 방증일 것이다.

 

우선 먼저 욥기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살펴보면, 롱맨과 달러드는 『최신 구약 개론』에서 욥기는 ‘고난과 관련하여 지혜의 근원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책이라고 보았고, 또는 돌시는 『구약의 문학적 구조』에서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주제를 욥기의 문학적 구조를 토대로 파악하기도 하였고, 박영선 목사는 『욥기 설교』에서 고난이 기계적인 인과응보적 법칙의 결과가 아니며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며 결국 축복을 위해 고난의 길을 허락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기도 하였다. 또한 언약신학을 바탕으로 구약성경 전체를 개괄한 클라인은 『언약과 성경』에서 욥기를 포함한 지혜서들은 어떻게 해야 언약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는지, 언약의 길을 가르쳐 준다고 이해하였다. 이 경우에 잠언이나 전도서는 직접적으로 지혜를 가르쳐 주므로 쉽게 언약의 길과 연결할 수 있지만 욥기는 지혜의 내용이 쉽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세부적인 고찰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지혜의 내용을 파악할 방법론이 필요한데 우리는 언약신학을 토대로 욥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따라서 언약신학에 대해서 기본적인 이해가 선행되고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욥기를 조명하여 욥기가 개혁주의 신학의 전제가 되는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어떠한 지혜를 주는지 알고자 한다.

 

언약신학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행위언약과 은혜언약, 이렇게 두 종류의 언약이 있다고 확인하였다 (마이클 호튼의 『언약 신학』, 전정구의 『하나님 나라와 언약적 관점으로 보는 성경 신학』, 또는 벨쳐의 『The Fulfillment of the Promises of God』, 또는 워터스, 리드, 뮤더가 편집한 『성경적신학적역사적 관점에서 본 언약신학』을 참고하라). 행위언약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 무흠한 상태로 있던 때에 하나님이 아담 및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류와 맺은 언약으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과 그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저주 또는 반대로 명령 준수에 따른 영원한 생명을 맹세하는 언약이고, 은혜언약은 아담이 타락한 후에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맺은 모든 언약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언약이다. 그래서 은혜언약은 아담에게 주신 원시복음(primitive gospel)을 포함하여,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그리고 새 언약으로 정리된다. 그러므로 불신자는 행위언약에 의해 심판을 받으며 신자는 은혜언약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

 

욥기를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먼저 욥기에 행위언약 또는 은혜언약을 기반으로 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고 또한 언약의 행위를 권면하고 있는지 추적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이 발견되면 욥기가 지혜서로서 가르치는 언약의 길이 은혜언약의 길과 같은지 살펴보는 것이며 성경의 다른 책들, 특별히 은혜언약의 정점인 신약 성경과 어떠한 연관성을 갖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욥기는 1장과 2장의 프롤로그와 42장의 에필로그 이외의 모든 장들이 시적 표현의 대화이다. 먼저 욥과 세 친구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과의 대화(3장에서 31장까지)와 엘리후의 주장(32장부터 37장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욥의 대화(38장에서 41장까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욥의 주장과 세 친구의 주장, 엘리후의 주장과 하나님의 말씀들이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되는지 살펴봄으로써 욥기를 파악하도록 한다.

 

첫째, 세 친구와 엘리후의 주장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고난은 죄의 형벌이며 고난을 당하는 것은 죄를 범했다는 증거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위치할 자리가 없고 죄의 형벌로서의 고난은 법칙처럼 적용되므로, 역으로 고난은 죄의 증거임이 법칙처럼 알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주장은 은혜언약을 철저히 배제하고 죄와 죄의 결과를 규정하는 행위언약을 기계적인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오해한 것이다. 김성진은 “욥기 해석에 있어 엘리바스 비전(욥기 4:12~21)의 중요성”에서 엘리바스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에게 속아서 인과응보적 법칙을 주장한다고 보았다. 다른 친구들은 엘리바스를 따라서 근본적으로 동일한 주장을 하는 것이며 인과응보적 법칙의 증거로서 조상들로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나 창조 세계로부터 관찰할 수 있는 현상 등을 추가하여 주장했다. 따라서 엘리후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와는 달리 우리는 엘리후의 주장도 세 친구들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데, 그 근본 이유는 엘리후의 주장 역시 은혜언약에 대한 이해를 전혀 포함하지 않으며 행위언약에만 기초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다만 엘리후의 주장에는 세 친구들과는 다르게 창조에 대한 장문의 언급이 들어있는데, 그는 기계적 인과응보의 법칙이 창조 시부터 시작되었음을 주장하기 위하여 창조를 언급한 것이며,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말을 끊고 등장하셔서 창조에 대해 다시 언급하신다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세 친구들과 엘리후의 주장에서는 은혜언약에 대한 내용을 전혀 발견할 수 없고 법칙처럼 적용되는 죄의 형벌로서의 고난과 또한 역시 법칙처럼 적용되는 회개에 대한 주장만이 드러난다. 이 관점에서는 행위자로서의 욥의 행위에 따라서 고난과 복이 법칙처럼 적용되는 것이며 심지어 회개도 고난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둘째, 욥의 주장은 두 가지 내용이 뒤섞여 있다. 죄로 인한 고난의 가능성과 죄와 무관한 고난의 가능성이다. 욥기의 프롤로그인 1장에 욥은 완전한 사람이라는 판정이 이미 전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욥은 자신이 고난받는 것에 대해서 세 친구들과 논쟁하며 죄와의 관련성 (예: 9:2~3; 14:4), 이유 불문 (욥은 고난의 이유에 대해 계속해서 하나님께 여쭙고 싶다는 표현을 한다. 예: 10:2), 그리고 부당함 (예: 6:10) 등을 뒤섞어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는 마침내는 자신의 의로움을 욥기 31장에서 길게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을 분석해 보면, 욥은 처음에는 은혜언약의 핵심인 대속적 의에 대해서 희미하게 인식하며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논쟁을 통해서 점점 대속적 의에 대해 확신을 가졌고 마침내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었다고 본다 (욥은 자기의 자녀들이 잔치를 열어 먹고 마시고 놀면서 혹시 죄를 범하였을까 하여 속죄의 번제를 드리는 내용이 욥기 1: 4~5 말씀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욥기 19:25~26 말씀을 통해 욥은 대속자를 기대하며 또한 영원한 삶을 기대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6:19 말씀에서는 중보자에 대한 기대를 드러낸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그 어떠한 인간도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완전한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욥이 마침내 31장에서 자신의 완전한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힘입어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파편들을 종합해 보면 욥은 처음에는 확신을 가지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러한 기대를 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세 친구들이 인과응보적 법칙에 따른 고난을 주장했을 때 그 주장을 거부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다른 근거들은 6:10; 7:21; 10:5~7, 15; 23:10; 27:5~6; 28:28 말씀들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법칙이 아니라 인격적인 분으로 인식하는 근거, 곧 언약주로서 인식하는 근거는 7:14, 17~18; 10:15; 16:19; 23:16~17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욥은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모두 알았지만 이 두 언약들 사이에서 처음에는 대속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가 점차 은혜언약을 확신하기 시작했고 결국 욥 19:25~26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고백처럼 대속적 의, 즉 은혜언약과 그에 따른 삶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했다고 보여진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욥기가 지혜서로서 지혜의 근원뿐만 아니라 지혜의 내용도 가르쳐 주는 책이어야 하기 때문인데, 욥기가 모든 지혜서들과 마찬가지로 지혜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준다는 데에는 의문이 없으나 지혜의 내용은 고난에 대한 인내와 그 결과로서 주어지는 축복이라고 하기에는 욥이 하나님을 향하여 보이는 자세에서 고난에 대한 인내만을 보여주지는 않으므로 지혜의 내용이 고난에 대한 인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내용이 바로 은혜언약의 길을 따르라는 교훈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야 지혜서로서의 욥기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셋째, 욥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38 장에서 41 장까지 기록되어 있으며 우주 창조와 창조 세계의 돌봄으로 요약되는데, 특히 땅에서 가장 강력한 베헤못이 있을지라도 그리고 바다와 공중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인 리워야단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온 세상을 돌보시며 특별히 사람을 돌보신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시편 8편과 비교해 보면 둘 다 창조와 구원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계속되는 돌보심은 구원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창조의 목적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증거이며 창조는 생명나무로 표현된 것처럼 영원한 삶이라는 종말을 지향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반드시 은혜언약을 통과해야만 하기 때문에 욥기의 하나님의 말씀은 은혜언약을 가리키고 있으며, 욥은 창조와 보전 및 돌보심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중에라도 은혜언약을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욥이 중보자로서 세 친구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그들의 허물이 용서되는 경험을 하나님의 돌보심과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창조와 관련하여 욥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욥을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라 욥을 창조의 권능의 자리와 돌봄의 다스리심의 권좌로 초대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욥이 세 친구들과 엘리후의 주장을 끝끝내 거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욥은 친구들과는 다르게 은혜언약을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었고 그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는 은혜언약이 약속한 대속적 의에 대해서 아직 온전히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때때로 흔들리기도 했지만 결코 대속적 의에 대한 소망을 버릴 수 없었고 결국 확신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 마침내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욥이 옳다고 확인해 주셨다. 그리고 욥에게 두 배나 되는 복을 더하여 주셔서 건강을 되찾고 더욱 큰 부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런데 자녀들은 고난을 받기 전과 동일하게 10명을 주셨는데, 이에 대하여 여러 주석들은 욥의 고난 과정에서 죽은 자녀들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여전히 천상에서 삶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위클리프 주석, 매튜 헨리 주석, 옥스포드 주석, 그리고 카일&델리취 주석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결국 욥은 자녀들도 두 배로 받은 셈이 된다. 이처럼 하나님은 욥의 믿음을 확증해 주셨고 믿음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를 더욱 성장하게 해 주셨다.

 

믿음의 성장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일어난다. 믿음은 믿음의 대상과 믿음의 내용으로 세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욥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해 더욱 큰 신뢰를 갖게 되었고, 믿음의 내용이 더욱 확장되며 깊어지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직접 경험하며 알게 되었고, 또한 희미하게 알았던 은혜언약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았고 멀리서나마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아브라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날을 볼 것을 기대했던 것과 같다 (요 8:56). 따라서 욥기가 지혜서로서 단순히 지혜의 근원이 무엇인지 또는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지를 가르쳐 주는 책뿐만 아니라 지혜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함께 가르쳐 주는 책이다. 사람이 자기의 의를 이루기 위한 인과응보적이고 율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도록 대속적 은혜의 사고를 가르쳐 주며, 율법에 대해서 표면적, 형식적, 문자적인 순종이 아니라 은혜적, 복음적 순종이 참된 순종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순종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 가르침으로 인해서 욥기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교훈이 된다. 이스라엘이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자기의 의로 삼으려고 하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며 율법은 모세보다 더 뛰어난 선지자인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임을 깨닫게 한다 (갈 3:24). 그리고 선지서들에서 약속된 이스라엘의 회복은 은혜언약을 기초로 한 욥의 회복을 기억하게 한다.

 

그러므로 욥기에 대한 언약신학적 이해는 욥기를 새 언약 안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하도록 만들어서 욥기를 단순히 구약 성경 속에 위치시키지 않고 신약 성경과 연결되도록 한다. 신약 시대에도 성도들이 겪는 고난으로 단순히 인내와 연결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새 언약의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안식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으로 연결시킨다. 따라서 욥기는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지혜서로서 기능하며 새 언약의 길이 결국에는 하나님에 의해 영광의 길이 될 것이라는 위로를 준다. 행위언약이 아니라 은혜언약을 바라봐야 하며, 고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한다는 교훈을 통해서 새 언약의 길을 걷도록 한다.

 

결론

욥기는 지혜서로서 지혜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책이다. 그런데 대부분 학자들은 욥기가 가르쳐 주는 지혜의 내용에 대해서는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파악하지 않고, 상식적인 선에서 고난에 대해 인내를 권면하는 내용 정도로 이해하고 만다. 그러나 욥의 인내는 그냥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고 그는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인데 언약신학은 그가 가졌던 소망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이 소망에 따라서 그의 믿음은 성장할 수 있었다.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믿음의 내용에 따라서 더욱 깊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인격적인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시기를 원하시며 (고전 1:9), 그 교제에는 반드시 진리의 내용이 따라야 한다. 대속적 의에 대한 소망은 욥이 마침내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고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욥과 친구들은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 논쟁한 것이 아니라 의의 근원에 대해서 논쟁했던 것이다. 친구들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룬 의에 대해 주장하였기 때문에 고난은 죄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욥은 대속적 의와 복음적 순종에 대해서 주장했기에 고난은 반드시 죄의 결과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고난은 이 대립을 촉발시킨 소재였고 하나님은 욥에게 이 진리를 가르쳐 주시며 더 깊은 교제를 갖기 원하셨다. 믿음은 믿음의 대상과 믿음의 내용이 모두 충족되어야 한다. 믿음의 대상이 인격적이신 분이 아니면 그 믿음은 그저 환상일 뿐이며 믿음의 내용이 없으면 그 믿음은 맹신이 될 뿐이다. 하나님을 향한 욥의 믿음은 고난에 대해 친구들과의 대립을 통해서 그 내용이 은혜언약을 향하여 보다 더 확장되며 깊어지게 되었다. 대속적 의와 복음적 순종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며 이것은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날들을 바라보며 기뻐했던 것과 동일하다.

 

언약신학은 욥기를 이렇게 파악하도록 인도하는데, 그 이유는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대립은 마치 욥의 친구들과 욥의 대립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모든 결과는 반드시 행위적 원인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기계적인 인과응보의 사상은 인격적이시고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초월적일 뿐인 이신론적 하나님을 만들고 말았는데, 이것은 행위언약을 왜곡한 결과이며 은혜언약을 철저히 배제한 결과이다. 심지어 대속적 의미를 갖는 번제(욥 1:5)조차도 죄값을 해결하는 수단으로만 인식될 뿐이었다. 그러나 욥은 비록 처음에는 희미하게 은혜언약을 알고 있었지만 논쟁을 통해 점차 은혜언약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대속적 의와 복음적 순종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욥이 옳다는 것을 확인해 주셨다.

 

그러므로 욥기를 언약신학에 기반하여 이해하는 것은 성경 전체와, 특별히 신약 성경과도 연결된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게 한다. 이것은 욥기를 단순히 구약 성경의 한 부분으로 위치하지 않고 욥기가 성경 전체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며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현대의 크리스찬에게도 복음적인 의미를 준다는 것을 알게 한다. 따라서 욥기는 지혜서로서 지혜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지혜의 내용에 대해서도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책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오늘날 교회에서도 욥기를 가르치며 함께 공부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용기를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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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3. 1. 20. 11:42

개혁주의 예정론를 옹호하며

 

이재연

 

요즘 유투브에서 방송된 홀리컴뱃은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 꽤 흥미로운 점들을 시사한다. 대부분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역을 하는 분들이 각자의 신학적 그리고 신앙적 견해를 밝히며 논쟁하면서 판정단의 심사에 따라서 탈락자를 정하고 마지막까지 남는 분이 우승하는 방식을 따르기 때문에 예능적 요소도 있어서 시청하는 재미도 주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복음이 선포된다면 반가운 일이다. 그러한 점에서 홀리컴뱃은 좋은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몇 편의 시리즈로 방송된 홀리컴뱃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는 예정론인 것 같다. 수백 개의 댓글도 달리고 토론 시간도 길게 할당되었으며 또 사람들의 의견이 다양하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예전부터 예정론에 대한 논쟁은 항상 그래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곳에서든 누가 논쟁에 참여하든 여러 의견들이 대립했고 뜨겁게 논쟁했다. 그리고 나의 기억으로는 이 논쟁들이 별로 유쾌하지 못했고 결과도 항상 찝찝했다. 결론은 대부분 감정 폭발로 끝났다. 이러한 과거의 경험들과 현재의 홀리컴뱃 토론을 보면서 한 가지 확신이 드는 것은 예정론 논쟁에 대해서 반드시 먼저 짚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예정론 – 또는 칼빈의 예정론이나 이중예정론이라고도 하며 – 교리에 대해서 너무도 심각한 오해의 선입견이 만연해 있으며, 이 오해를 바탕으로 불필요하게 소모적인 비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개혁주의 예정론은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든다는 비판이다.

 

개혁주의 예정론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에 대한 가르침을 성경 안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한 교리이다. 대표적으로 에베소서 1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예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수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 물론 초대교부들로부터 시작된 견해들을 포함하여 – 하나의 교리로 정립한 것이다. 따라서 이 교리는 무엇보다도 개혁주의 신학의 전제와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비록 교리 자체는 몇 개의 문장으로 진술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진술이 결정되기까지 선결되는 전제들이 있으므로 그 전제들을 먼저 알고 교리를 파악해야 개혁주의에서 주장하는 예정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개혁주의 신학의 예정론의 전제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예정은 운명론이나 결정론의 결정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로보트처럼 다루시지 않으며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신다. 이것을 부정하는 신학자는 단 한 명도 없다.
  2. 예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3. 예정의 전제적 상황은 사람의 타락이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은 이미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한 상황에서 일어난다. 여기서 사람의 타락은 역사적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하나님의 의지적인 미리 아심에 의해 알게 된 타락이다.
  4. 예정의 실현은 사람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다.
  5. 예정론의 결과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결론이어야 한다.

 

이러한 전제를 먼저 이해하고 이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는 도르트 신경을 보자. 칼빈(1509~1564) 이후 불과 50여년이 지나서 1618 년에 진술된 도르트 신경은 이렇게 고백한다. 그리고 이 고백은 1648년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으로 이어진다:

 

선택은 하나님의 불변하는 목적이며 이 목적에 의해 하나님은 다음의 것들을 실행하신다: 세상의 기초가 놓여지기 이전에, 순전한 은혜에 의해, 하나님의 의지의 자유롭고 선한 기쁨에 따라서, 하나님은 전체 인류 중에서 일정 부분의 특정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해 주시기로 선택하셨다. 그들은 원래의 순수함으로부터 자신들의 잘못에 의해 죄와 멸망으로 떨어진 자들이었다. 그러한 선택된 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거나 더 뭔가를 받을 만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공통의 비참함에 놓여 있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을 하셨으니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영원 전부터 중보자로, 모든 택자들의 머리로, 그들의 구원의 토대로 임명하셨다. (첫 번째 교리의 제7항)

그러나 일부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서 선택 받지 못했거나 지나침을 받게 되었다 – 즉, 하나님의 전적인 자유, 최고의 의로움, 책망받을 수 없고 불변하는 선한 기쁨의 기초 위에서 하나님은 다음의 결정을 내리셨다: 하나님의 공의를 전시하기 위하여 그들의 불신앙과 다른 죄들로 인해서 공통의 비참함에 있는 그들을 스스로의 잘못에 의해 자신들을 내던진 상태로 그대로 두시며, 그들에게 구원하는 믿음과 회심의 은혜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결국 정죄와 영원한 형벌을 받게 하신다 (그들 자신의 길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고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아래에 두시며). 그리고 이것이 유기의 결정이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신성모독적 생각!)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죄의 두려운, 책망받을 수 없는, 의로운 심판자와 보응자로 만드는 것이다. (제15항)

 

도르트 신경의 고백처럼, 즉 스스로의 잘못에 의해 죄와 멸망으로 떨어진 모든 사람 중에서 일부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해 주시기로 선택하셨다는 고백처럼 하나님의 선택의 전제는 사람의 타락이다. 그리고 선택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선한 기쁨이다. 사람의 그 무엇을 보시고 그 사람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즉 요 1:13 말씀처럼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한 기쁨에 따라서 선택하셨다. 그리고 이 선택은 결정론의 결정처럼 강제로 로보트처럼 프로그램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을 그냥 무작위적으로 ‘넌 천국, 넌 지옥’ 하듯이 선택하셨고 그대로 프로그램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예정은 운명론이나 결정론의 결정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시고 자유의지를 인정하신다. 개혁주의 신학은 곧 언약신학이라는 말과 같이, 하나님이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담을 언약의 상대로 인정하셨다는 것이고 또한 아담도 인격적 자유의지를 가지고 언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약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개혁주의 신학의 토대를 놓는 것과 같다. 언약이란 언약을 맺는 쌍방 모두 인격적이고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서 서로가 서로에게 결속하기를 맹세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택과 유기가 예정되었다고 해서 사람이 죄를 범하도록 프로그램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으로 생각해야 한다. 언약을 지켜야 했던 사람이 자유의지로 언약을 어김으로써 죄를 범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상태에 빠졌고,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일부의 사람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셨고 나머지 사람은 그대로 유기하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만일 사람이 자유의지로 죄를 범하는 것을 하나님이 막으셨다면 사람은 자유의지가 없는 것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사람의 타락을 모르셨다거나 사람의 타락이 하나님의 능력 밖의 일이라서 하나님이 막으실 수 없으셨다는 것도 아니다. 사람의 타락도 하나님의 영역 안에 있었다. 이것을 표현하는 단어가 ‘허용’이다. 비록 칼빈은 ‘허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 표현은 하나님이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강제적 결정의 실행이 아니었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을 창세 전에 의지적으로 ‘허용’하셨으며 – 강조는 ‘의지적으로’에 있어야 한다 – 따라서 아담은 역사 가운데 실제로 타락했다. 그리고 이제 모든 사람이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 ‘허용’이라는 표현은 때로는 하나님이 마지못해 사람의 타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더욱 강하게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사람의 타락도 ‘예정’되었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지만, 예정은 결코 운명론이나 결정론의 결정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타락을 예정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사람을 강제로 결정해서 타락시켰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래서 아담은 분명히 자신의 자유의지로 죄를 범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의지 밖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어야 하므로, 아담의 타락에 대해 우리로서는 이해와 표현 상의 한계를 지닌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허용’이란 단어로 표현하기도 하겠지만,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는 그냥 ‘예정’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차이로 인해서 대체로 개혁주의 신학자는 ‘타락 후 예정’이라는 용어를 지지하고 다른 일부 개혁주의 신학자는 ‘타락 전 예정’이라는 용어를 지지함으로써, 선택과 예정 자체는 논리적으로 무엇보다도 아담의 타락을 전제로 하는 것임을 강조하고자 하였거나 또는 논리적으로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아담의 타락도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음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어쩌면 차라리 ‘아담의 타락에 대한 허용적 예정’ 또는 ‘의지적 허용’이라는 표현과 ‘타락 후 예정’이라는 용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것이 오해를 줄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는 합신대 조직신학 교수인 이승구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칼빈은 ‘타락 후 예정’을 주장하였다. (https://kirs.kr/data/calvin/calvin158.pdf 참고)

 

 

따라서 개혁주의 신학자가 말하길 하나님이 아담의 타락을 예정하셨다고 한다면 그 의미는 하나님이 아담의 타락을 강제로 무조건 결정하셔서 아담이 타락하도록 로보트처럼 프로그램해 놓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 인격적 존재로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타락하도록 미리 정하셨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기 때문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것이 모순처럼 느껴져서 다른 방식으로 예정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예를 들어, 하나님은 사람이 어떻게 결정할지 예지하시고 그 결과 그렇게 되도록 예정하셨다는 예정론이 있다. 개혁주의 신학이 그러한 다른 예정론을 거부하는 이유는 그 예정론은 하나님을 사람에게 조건화 시켜서, 사람이 자유의지로 결정하기 전까지는 논리적으로 하나님도 알 수가 없고 따라서 하나님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다는 이론이 되기 때문이다. 또는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은 구원의 방법이지 개인에 대한 예정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예지적 예정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구원의 방법만 예정하셨고 사람이 그 구원의 방법을 선택할지 아닐지에 따라서 구원받음이 결정되는 것이고, 결국 사람의 선택이 결정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은 그 사람의 종말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주의가 성경에 따라서 이해하는 하나님은 자충족하시며 자존하시며 절대적으로 독립적이시다 – 독립적이시라는 의미는 그 무엇과도 관계를 갖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삶과 지식과 판단과 능력을 위해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으시며 종속되지 않으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창조세계가 필요하기 때문에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자유롭고 기쁜 뜻에 의해 창조세계를 창조하시고 사람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사람처럼 낮아지신다고 할지라도 그건 하나님으로서 낮아지신 것이지 하나님이기를 포기하면서 낮아지신 것이 아니다. 낮아지심의 대표적인 예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사람으로서 단 한순간에도 하나님이 아니신 적이 없으시다. 다만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오셨다. 이렇게 예수님은 또한 사람으로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사시면서 우리와 교제를 나누셨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초를 바탕으로 개혁주의 신학은 자신의 예정론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예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차원 – 자충족하시고 자존하시고 독립적인 하나님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우리는 결코 예정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다 알 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 말은 우리는 예정을 우리의 차원으로 끌어내려서 이해하려고 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내용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예정을 사람의 차원으로 끌어내려서 마치 사람의 능력 안에서 예정을 이해하고 그 실현이 사람의 영역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처럼 생각하면 필연적으로 예정에 대해서 오해하게 된다. 오히려 예정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으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내용만을 토대로 해서 예정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예정이 사람의 역사 안에서 실제적으로 실현될 때에는 사람의 차원인 사람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의 인격과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기에 로보트처럼 프로그램해서 일방적이고 강제적으로 무조건 예정이 이루어지게 하시지 않고, 사람이 자유의지로 예정을 이루도록 하신다. 하나님의 차원이 사람의 차원으로 투영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될 수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성육신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결과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인격과 자유의지가 무시되거나 배제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예정을 이루신 이후에야 우리는 알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과 사람의 자유의지를 동일한 차원에 놓고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예정이 강조되면 사람의 자유의지는 무시되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또는 사람의 자유의지가 강조되면 예정이 무시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도 강조하면서 사람의 자유의지도 강조한다. 다만 하나님의 예정이 사람의 차원에서 어떻게 실현되는지 그 구체적인 방식을 우리의 지성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정이 사람의 역사 안에서 실현될 때에는 사람의 인격과 자유의지가 존중되는 방식으로 실현되기 때문에 – 우리는 이것을 제1원인과 제2원인으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언제나 제1원인이시며 사람은 제2원인이다 –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소망하고 고대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예정을 구원과 관련하는 것으로 한정하지 않고 사람의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해서 생각하는 신학자도 있다. 그것을 ‘하나님의 작정’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또는 예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 점심에 내가 무엇을 먹을지 미리 예정하셨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 역시 내가 메뉴를 선택해서 먹었을 때에야 비로소 바로 그 메뉴가 하나님의 예정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이 내가 무조건 오늘 그 메뉴를 강제적으로 먹도록 프로그램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결코 사람의 인격적 자유의지를 배제하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구원으로 선택된 사람인가 아닌가’ 하고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은 닿을 수 없는 무지의 영역을 홀로 헤엄치는 것과 같다. 내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선택이 예정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믿으려고 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에는 믿음과 회개에 대한 권면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게 된다. 사람이 인격적인 존재로서 자유의지가 배제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예정이 이루어져서 사망과 멸망만이 남아있는 우리를 은혜로 구원해 주셨으니, 에베소서 1장 6, 12, 14절에서 강조하는 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고 선택과 예정과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칼빈과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요점이다. 오직 은혜의 선택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선택과 예정을 개혁주의 구원론의 주요 교리로 포함시켰다. 그래서 예정론에 대한 이해와 토론의 결론이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으로 정해지지 않으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이 선택과 예정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 것은 우리가 그것을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으므로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비록 우리가 이해할 수 없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제 예정이라는 단어를 만나거든 은혜로 바꿔놓고 이해하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마음 깊은 곳에서 저절로 터져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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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2. 7. 26. 10:38

우리는 세상에 만연한 악과 고통을 바라보면서 우리 스스로의 무력감에 빠져 공중에 대고 불평한다. 세상이 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가, 하고 말이다. 그러면서 악과 고통을 근거로 해서 무신론자가 되기도 하고 또는 그 반대로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았다고 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능력으로 악과 고통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존주의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모두 그냥 내던져진 존재일 뿐이기에 그냥 그런 세상에 던져진 것뿐이다. 적어도 악과 고통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느껴진다.

 

악에 대한 기존의 이해

    무엇보다 크리스찬으로서 우리는 악과 고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나님께서는 왜 세상에 악을 허용하셨을까?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고통받는 것을 즐기시는 것일까? 여러가지 다양한 물음이 떠오른다.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안 계시기 때문에 이런 것은 아닐까? 크리스찬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 이레니우스, 라이프니쯔와 같은  오래전 크리스찬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많은 신학자들이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나름의 설명을 제시하였으며 심지어 존 힉과 같은 종교철학자들도 관심을 가지고 나름의 설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뭔가 깔끔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여러가지 다양한 설명이 제시된다는 사실만 봐도 이 문제는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이 문제는 뒤로 나중으로 놓여진다. 지금은 잘 모르지만 나중에 마지막 때가 되어 모든 것이 분명하게 될 때에는 알게 되겠지, 하고 후퇴해 버린다. 아마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것에 대해 우리가 생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은 지극히 작기 때문에 더 많은 초월적 지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때가 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 문제를 이해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과 악의 관계에 대한 문제, 특별히 “의롭고 선하시며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악을 허용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학문 분야를 신정론이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신정론을 다루었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문제를 입구에서 바라보았다. 즉, 선하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는 세상에 어떻게 악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하여 그 시작점을 항상 고민해 왔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어서 출구에서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 그것을 고민해 보면 이 문제에 대해 뭔가 다른 통찰과 이해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논의된 신정론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처럼 악 자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악 자체는 비존재이며 선의 결핍으로 이해하였으며 실제적인 악보다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악을 주로 다루었다. 다른 하나는 이레니우스나 라이프니쯔처럼 악을 인간의 영적 성장을 위한 과정에 필요한 수단으로 이해하는 시도이다. 모든 신정론은 하나님을 악의 창시자로 주장하지 않는다. 악은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왜 악을 허용하셨는가 하는 점이다. 심지어 과정철학에 기반한 과정신학이나 열린 신론의 경우에는 하나님조차 악을 어떻게 하실 수 없으며 하나님도 악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을 악의 창시자로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른 한편에서는 신정론 자체를 거부한다. 악의 존재는 하나님을 부정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능하시며 사랑이 넘치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 세계에 악을 허용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악이 불가능하든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든지 둘 중에 하나만 참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악은 실재하므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런데 과연 악의 존재는 하나님의 비존재를 증명하는 것인가? 악이 실재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존재하지 않아야만 하는 것인가?

    결론을 먼저 말하면, 이 문제는 인간들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인간과 자연 밖의 것을 탐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에 묶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무리 이성을 사용하여  초자연적인 것을 탐구한다고 하여도 그것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자연을 연구해서 초자연에 대해서 참인 진리를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뭔가 알아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확인할 기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것이고 각 의견이 나름 일리는 있지만 결정적으로 확실하다고 인정받을 방법은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창조주에 대한 증거라며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하지만, 다른 사람은 자연의 고통을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창조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동일한 자연에서 완전히 상반된 주장들이 나온다. 자연으로부터 초자연적인 진리를 연역할 수도 없고 귀납적으로 추론할 수도 없다. 모두 다 각자 가지고 있는 전제에 따라 해석한 자기 나름의 주장일 뿐이다. 악에 대한 문제도 동일한 것이다.

 

악에 대해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기

    이제 악과 고통의 문제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싶다. 입구에서만 바라보지 말고 출구에서 바라보면 뭔가 다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지금까지 대부분 악과 고통의 문제를 입구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아주 다양한 주장들이 제시되었지만, 출구에서 바라보면 훨씬 단순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악이 현재의 세상에 실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이 악과 고통의 문제에서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것과 그렇지 않다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우리에게 합리적인 것일까? 입구가 아니라 출구에서 보면 – 만일 출구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 당연히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것이 무조건 더 좋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끝장내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악의 문제에서 출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악은 영원할 것이며 자연과 인간은 영원히 고통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아마도 무신론자들은 이것을 감수하겠다고 할 것이다.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이며 인간은 그런 세상에 내던져진 것일 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만일 출구가 있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할까? 그냥 악과 고통이 너무도 끔찍해서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함이 전부일까 아니면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악과 고통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부자이고 건강하며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지라도 악과 고통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악과 고통의 문제를 출구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오직 두 개밖에는 없다. 악이 그 자체로 영원하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악을 끝장내고 악과 고통이 없는 세상이 미래에 나타든지, 이 둘 중에 하나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악과 고통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 심지어 무신론자들도 세상의 악과 고통을 바라보며 한탄하며 악과 고통이 없는 세상이 왔으면 정말 좋겠다고 말한다. 비록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말은 한다. 그러한 말이 그냥 하는 말인지 아니면 그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희망인지 그들 자신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증거라고 한다. 우리가 악과 고통의 문제를 출구에서 바라보면 우리 모두는 한 가지를 바라게 된다. 악과 고통이 반드시 끝나는 때가 올 것이라고 바란다. 악과 고통을 끝장낼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초월적인 존재, 곧 하나님뿐이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바라고 있다. 그리고 이 바람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며 언젠가 악과 고통을 끝장내실 것이라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악과 고통이 아무리 넘친다고 하더라도 희망을 갖고 인내하자. 하나님께서 언젠가 반드시 악과 고통을 없애실 것이다.

   이렇게 출구에서 바라보면 입구에 대한 생각도 조금 바뀐다. 만일 악과 고통이 영원하다면, 그것은, 만일 시작이 있다면, 처음부터 악과 고통이 존재했던지 아니면 세상이 곧 악과 고통이든지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악에는 어떤 목적도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그냥 악인 것이며 인간과 자연이 존재하지 않으면 악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에게 고통이기에 악이라고 명명된 것뿐이며 선과 악에 대한 궁극적 기준이 없다. 여기에서 불합리가 발생한다. 악은 영원한데 시공간에 묶인 인간과 자연에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서, 하나님께서 악과 고통을 언젠가 끝내실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악과 고통을 통제하실 수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허용하신 이유와 목적이 반드시 존재한다. 비록 지금 우리는 그것을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중에는 분명히 알게 될 것이며 우리 모두 충분히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악과 고통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힘을 갖게 되고 악과 고통에 짓눌려 살지 않게 되기에 서로를 위로하며 서로를 포용할 수 있게 된다.

 

결론

    이제 결론을 내려보면, 악과 고통에 대해 입구에서 바라보면 마치 미궁에 빠진 듯한 생각을 갖게 된다. 아주 다양한 주장들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도 명쾌하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초월적이며 초자연적인 것을 인간이 자기자신과 자연을 탐구하며 그것에 대해 결론을 내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을 출구에서 바라보면 매우 단순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모두가 악과 고통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만큼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바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이므로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언젠가 악과 고통을 반드시 끝내실 것이다. 그러므로 악과 고통에 대해 입구에서만 바라보며 의심에 찬 질문들만 던져놓지 말고 이제는 출구에서 바라보며 확신과 위로와 평안을 누려야 한다. 악과 고통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악과 고통에 대해서 입구에서만 바라보지 말고 출구를 향하여 생각해 보자. 그 어떤 무신론자라도 악과 고통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바람이 이루어지기 위한 유일한 희망은 오직 초월적인 존재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희망 없이 살든지 아니면 희망을 가지고 초월자를 바라보든지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 무엇을 진정 바라는지 마음 속 깊이 생각해 보기를 우리 모두에게 권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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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2. 4. 15. 14:32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외치신 외침으로 잘 드러난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예수님께서 이렇게 시작하신 사역의 결과로서 지금 현재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장차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과도한 집중에 의해 가려져 있어서 우리의 현재의 삶과 괴리되는 현상이 발생하며 우리가 종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심각한 결함을 일으킨다. 따라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이해하고 이에 따라 종말론을 파악함으로써 지금 현재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 고민해 보자.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의 의미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후에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하였다는 것을 선포하셨다. 대표적인 말씀이 마태복음 12:28 말씀과 누가복음 11:20 말씀으로 “만일 내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귀신들을 내어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신 말씀이다. 과연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힘입어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시고 그들의 질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오순절 이후에 성령님께서 신자들에게 내주하심으로써 신자 각 사람이 성전이 되었다는 진리를 통해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고전 3:16). 이는 한글 성경에서 나라 또는 왕국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명사 ‘바실레이아’는 ‘왕국’뿐만 아니라 ‘왕권’ 또는 ‘왕의 통치’를 의미하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뜻하는 성전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의미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리델보스는 그의 저서인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탁월하게 구분하여 설명한다. 이 구분에 따라 현재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사이에서 긴장 관계에 놓여서, 현재에는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누리지만 아직 완전히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아니며 미래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하나님 나라는 완성될 것이라고 제시한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해 이렇게 요약했다.

 

"앞에서 우리가 강조한 것은 미래에 속한 하나의 웅대한 나라가 현재적인 실체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 나라가 가진 근본적으로 종말론적인 성격은 과정의 문제로 이해된다. 그것은 구원과 심판을 위해 세상에 임한 거대한 나라이며 하나님의 임하심이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미래가 현재에 침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절정에 달하는 사역들의 총체자인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가 이 세상의 현재 시간 안으로 그 길을 밀고 나가고 있다. 이것은 너무도 새로운 사실이며, 여러 면으로 볼 때에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라고 칭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거대한 심판의 때가 임하기 전에 시작될 것이며, 그때는 ‘세상의 종말’ 이전에 성취된다."

 

    리델보스가 말한 ‘과정의 문제’란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세상을 끝내고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단번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거쳐서 완성되므로 항상 일정 부분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마지막 때에 종말의 완성이 이루어지게 된다. 또한 그의 설명에서 눈 여겨 봐야 할 부분은 ‘미래가 현재에 침투하는 것’이라고 말한 부분이다. 앞으로 이루어질 것이 지금 현재에 침투되어 이미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현재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미래와 동떨어진 시간이 아니라 반드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인해서 이 땅에 임하기 시작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확증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나라의 백성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능동적 순종으로 인해서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백성을 예수님께서 직접 만들어 내신 것이며 예수님께서 그 백성의 시조이시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그리스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실체가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대위임령을 통해 명령하시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그 명령의 근거를 설명하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한 모든 권세가 – 하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땅에 대해서도 – 예수님께 주어졌으니 이제 예수님의 통치를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인 것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누려야 하는 실체이며 그 실체를 우리가 얼마나 현재에 누리느냐에 따라 예수님의 복음에 얼마나 충실한 것인가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 그리고 이 실체는 로마서 8:38-39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그 어느 누구도 무엇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실체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기되는 한가지 문제가 있다. 우리는 과연 그 나라를 우리의 실제 삶에서 누리고 체험하며 살 수 있을 만큼 그 나라는 우리에게 실체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와는 동떨어진 어떤 선언적인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느낄 수 있는 체험적인 실체인가 하는 문제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 우리의 삶에서 체험적인 실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그 나라를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거짓인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뭔가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의 진리성은 예수님의 부활이 확증하였기 때문이다.

       

종말론과 연결되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천년왕국론으로 표현되는 종말론은 크게 전천년설, 후천년설, 그리고 무천년설로 구분된다. 전천년설은 다시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 전천년설로 나누어지는데, 한국 교회에서 대다수는 전천년설을 지지한다. 전천년설은 예수님의 재림이 천년왕국 이전에 이루어진다는 종말론으로 천 년 동안 예수님이 왕으로서 지상에서 다스리심으로서 하나님의 통치가 지상에서 이루어지고 그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왕국으로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후천년설은 예수님의 재림이 천년왕국 이후에 이루어진다는 종말론으로 지금 성도들은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복음을 전파하여 세상이 복음으로 가득차는 천년왕국이 지나고 나서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무천년설은 예수님의 초림 이후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이 천년왕국 시대이므로 따로 구별된 천년왕국이 없으며 예수님의 재림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종말론들을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함께 숙고할 경우, 만일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실제적이고 성경적인 진리로 인정하면 전천년설은 크게 약화되는데  메리데스 클라인은 그의 저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서 이와 동일한 주장을 하였다. 그는 아마겟돈의 어원을 추적하면서 천년왕국의 의미를 파악하였는데, 결국 지금 현재 곧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 천년왕국의 기간임을 성경신학적으로 풀이하였다. 결론적으로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 보좌에 앉아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하였다면 – 비록 온 우주에 극치로 완전히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는 아직 아닐지라도 – 예수님께서 천 년 동안 모든 사람들을 이 땅에서 물리적으로 다스리시는 특정한 기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샘 스톰스 역시 그의 저서 『개혁주의 무천년설 옹호』에서 전천년설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전천년설에 의한 천년왕국의 필요성 자체에 큰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며 이미 천년왕국이 시작되었다는 관점에서 보면, 전천년설의 천년왕국과 현재의 하나님 나라의 차이점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현시적으로 직접 다스리시는지 아니면 하늘 보좌에서 성령님을 통하여 다스리시는지 하는 점일 뿐이다. 천년왕국이 기록된 요한계시록 20장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현시하셔서 다스리신다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탄이 쇠사슬에 묶여 무저갱에 가두어진다는 말씀이 예수님의 현시적 직접 통치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이 말씀은 사탄이 어떤 대상에 대하여 아무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씀이다. 따라서 그 대상이 무엇인지를 성경 말씀을 토대로 파악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사탄의 결박당함이 세상에 대하여인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인지 살펴야 한다. 이 판단을 위해 데살로니가 후서 2:6-7 “너희는 지금 그로 하여금 그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이 있는 것을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는 말씀과 사도 베드로가 이 땅의 성도들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칭했던 말씀을 중요한 기초로 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설명할 때 그 현재성은 마귀들을 쫓아냄으로써 증명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면 사탄의 결박당함은 성령님으로 인해서 사탄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쇠사슬’ 그리고 ‘무저갱’ 즉 ‘바닥이 없는 구덩이’와 같은 엄중한 표현을 사용하여 사탄의 결박을 설명하는 이유는 사탄은 창세기와 욥기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늘과 땅을 자유롭게 다니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침투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참소하여 무너뜨리며 온 우주를 자기의 통치 아래 두었던 것이 예수님의 초림 이후에 이제는 완전히 불가능하게 되어 하나님 나라에 침투할 수 없고 하나님의 백성을 절대 무너뜨릴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나타내야 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비록 사탄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으나 헛수고일 뿐이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통치하시며 역사하심으로 인해서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을 절대로 삼킬 수 없다. 그리고 사탄이 천 년 후에 잠깐 풀려나서 온 세상의 추종자들을 모아 하나님께 대항하는 마지막 전쟁을 벌인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 시에 있을 심판을 의미한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 잠깐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들어가 추종자들을 모으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넘어가지 않고 세상에 있는 어둠의 세력들만 사탄을 추종하게 된다. 사탄을 그들을 데리고 하나님께 반항하지만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서 철저하게 멸망을 당하고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과 동등한 무게를 가지고 숙고한다면 전천년설보다는 오히려 무천년설이 가장 성경적이며 타당한 주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재가 천년왕국의 시기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무천년설을 현천년설로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한 이해와 적용을 어떻게 결정하는가에 따라서 현재의 삶뿐만 아니라 종말론에 대한 관점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의하여 현재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 삶이 바로 종말의 시대를 사는 삶이며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결론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해서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리델보스의 이해를 근거로 삼아서 하나님 나라는 과연 지금 현재에 이미 임하였다는 점을 증명하였다. 따라서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진리가 확정되면 그 진리는 종말론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어 전천년설이 성경적인 근거를 상실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클라인과 스톰스는 전천년설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며 무천년설을 옹호하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만일 무천년설 혹은 현천년설에 대해 거부감이 든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너무도 연약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우리가 자신의 삶을 살펴야 한다.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따라 능력을 드러내며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누릴 때에 우리의 생각이 바뀔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한 진리는 성경의 가르침이기에 단순히 지식적인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 우리의 삶이 바로 종말을 사는 삶이어야 하며 그 삶은 하나님 나라에서 살며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과 미래에 완전히 성취될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이 진리가 우리의 삶에서 확증될수록 우리는 현재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삶이 될 것이므로 이 진리를 굳게 붙들며 이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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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2. 3. 27. 10:17

사람들이 요즘 꼰대라는 말을 부쩍 자주 사용하는 것 같다. 처음에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한정적으로 사용되던 말이 요즘에는 비교적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사용되면서 그 의미도 조금 변한 것으로 보인다. 꼰대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처음에는 그냥 은어로서 ‘늙은이’ 또는 ‘선생님’을 가리키는 말이었느나 요즘에는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강요하는 사람’ 정도로 모아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이가 젊은 사람도 꼰대가 될 수 있다. 사상적으로 개인주의, 다양화, 포스트모더니즘 등 자기 주장이 강화되는 시대에 다른 사람의 강요를 무턱대고 순순히 받아들일 사람은 없다. 게다가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서 이제 현대의 젊은이들은 세상의 지혜를 노인으로부터 듣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었다. 언제 어디서든 필요하면 스마트폰을 열어서 자기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검색해서 자기가 결정하면 된다. 듣는 지혜가 아니라 찾는 지혜의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예전의 구태의연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현상은 이제 나이나 성별이나 지역을 가리지 않고 아무에게나 나타날 수 있게 되었다.

 

목사들은 꼰대스러운 사람으로 변하기가 훨씬 더 쉽다. 그들은 수천 년도 더 지난 경전을 들고 수백 년도 더 지난 신학과 교리를 설파하는 사람들이니 얼마나 쉽게 꼰대가 되겠는가 말이다. 게다가 목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보다는 자기 말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니 무슨 말만 하면 수백 년도 더 지난 얘기를 강요하는 것처럼 해대니 꼰대도 이런 꼰대가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고 목사는 개신교 시스템 상으로도 꼰대로 변하기 쉬운 환경에 놓이게 된다. 한 번 목사나 장로가 되면 거의 평생 그 위치에 있게 되고 또 자신을 견제하거나 제지할 권위를 가진 사람이 주변에 거의 없으며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며 충고하는 역할만 수십 년 동안 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과 상황에 오랫 동안 빠져있으면 목사는 자기만의 우월한 세계에 빠지기가 너무도 쉽다. 그러니 구태의연한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데, 그런 구태의연한 생각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작용하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이 강요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린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신실한 목사가 더욱 꼰대스럽다는 사실이다. 자기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굳게 ‘믿는’ 상황이 되면 절대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크리스찬이, 특히 목사가 꼰대가 되면 안 되는 절대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꼰대는 소통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꼰대스러움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구태의연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부분이 아니라 그 생각을 강요하거나 그 생각을 주장하기 위해서 나이 또는 경험을 들어서 상대방을 압박한다는 것에 있다.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모든 말이 여기에 속한다. 요즘처럼 자유분방한 시대에 생각의 강요는 자유로운 소통이 불가능하게 만들고, 따라서 진정한 대화는 꼰대스러움의 꼰만 나타나도 실종되는 것이다. 대화하는 당사자들 모두가 서로서로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공감하고 수용하려는 자세를 취해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한데 꼰대스러운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모든 대화가 그 사람으로 인해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듯 소멸된다. 꼰대 한 사람의 주장을 수용하든지 아니면 말든지로 끝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꼰대 목사가 되는 것은 끼리끼리의 정치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을 아우르는 목회가 아니라 꼰대 목사의 말을 듣는 몇몇 사람들만 모여서 자기들이 공동체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상태로 만들며 그 안에서 안주하는 목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가르치기를, 이러한 사람은 아주 초보 신앙인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신앙인은 결코 꼰대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앙이 자라서 성숙할수록 다른 사람의 의견과 주장을 경청하며 공감하고 한마음을 이루는 데 소홀함이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편지했던 내용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 3:16~17). 이 말씀에서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라는 가르침에 주의해야 한다. 이 말씀은 서로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려면 곧 서로서로 배우고 권면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말씀이 에베소서에도 기록되었는데 약간 다른 점은 이러한 가르침이 성령 충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엡 5:18~21). 이렇게 두 말씀들을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듯이,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는 것’은 ‘피차 복종하는 것’이며 이는 성령 충만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따라서 꼰대 목사는 성령 충만하지 못한 목사이며 전혀 성숙하지 못한 신앙인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단서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신실한 사람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역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하며 하나 됨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공동체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공감하고, 나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며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게 하려고 애쓰게 된다. 피차 가르치며 피차 권면하며 피차 복종하는데 노래가 나오고 기쁨과 감사가 터져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 충만하며 신실한 사람은 결코 꼰대스럽지 않다. 자기만의 확고한 신학이 있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한마음이 될 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심을 생각과 체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목사를 비롯한 어느 성도라도 자기가 성령 충만한지 아닌지 고민스러울 때에는 자기가 꼰대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면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세대간의 차이를 넘고 인종과 성의 차이를 넘어서 어느 누구와도 진실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따져보면 알 수 있으며, 뿐만 아니라 그 대화를 통해서 상대방과 나, 곧 우리 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며 상대방을 통해서 주시는 가르침을 적극 수용하고 나의 삶에 적용하는지 아닌지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사람은 때로 어리석어서 자기 스스로에게 속아넘어갈 수도 있어서 겸손도 꾸며낸 겸손이 가능하고 스스로 즐겁다고 생각하고 억지로 감사드릴 수도 있다. 그러나 피차 가르치고 피차 권면하며 피차 복종하는 것은 결코 꾸며낼 수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공동체와 하나 된 사람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꼰대 목사는 공동체를 파괴한다. 공동체를 나누고 분리시키고 자기와 뜻이 맞지 않는 그룹을 왕따시키며 무너지게 한다. 그래서 목사는 어떠한 노력을 통해서든 꼰대 목사가 되는 것을 피하여야 한다. 이것이 목사가 성령 충만하기를 반드시 노력해야 하는 이유이며 행여라도 그렇지 못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꼰대가 되는 것을 어떡하든 피하려고 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님이 피값을 주고 사신 공동체를 파괴하고 흩어지게 하며 해치는 목사가 되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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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2. 3. 8. 11:05

생일 선물

 

 

이재이

 

 

생일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손글씨 카드와 포장된 선물

 

케익에 숫자를 켜고

잠시 눈을 감은 채 후- 부는 것은

기대하는 마음의 준비

 

만년필과 시집을 받고

시집 속지에 쓴다

- 2019년 5월 5일 생일 선물로 받다

 

선물 열어

첫 시를 읽는다

 

시집을 곁에 두는 것은

펜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것

태어난 기념으로

수고하는 인생을 시로 남기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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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2. 2. 26. 21:57

선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명령이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기록에서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교회에 주신 마지막 명령이 선교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선교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양한 방법으로 선교를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교회가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다고 해서 또는 선교단체를 많이 후원한다고 해서 그 교회가 선교를 잘하고 많이 하는 교회일까? 그리고 교회가 선교팀을 운영하며 선교에 대해 교육하며 선교를 위해 헌신된 마음을 갖는 것이 선교를 잘하는 것일까? 우리는 과거에 선교에 대해 이러한 자세를 취해 왔다. 그래서 어느 교회는 선교단체 몇 개를 후원하고 있다더라 또는 어느 교회는 지금까지 선교사를 몇 명을 파송했다더라 하며 이렇게 선교하는 교회라는 것을 ‘자랑’했다. 그리고 그런 교회의 교인들은 자기들에 예수님의 명령을 잘 지키는 교회, 곧 선교하는 교회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말씀부터 뭔가 조금 다른 것 같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8~20).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명령에 해당하는 부분은 굵은 글씨체 부분이며 명령을 받은 사람은 모든 제자들이다. 또한 이 명령문을 분석하면 직접적인 명령어는 ‘제자를 삼으라’는 동사이고 나머지 동사처럼 보이는 ‘가서’, ‘주고’, ‘지키게 하라’는 분사이어서 ‘제자를 삼으라’는 동사를 수식한다. 그리고 ‘가서’의 의미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머물고 있는 장소인 예루살렘에서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씀에 나온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은 점진적인 개념이라기 보다는 동시적인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예루살렘에서 전도를 다 마치면 그 다음에 온 유대로 가서 전도하고 또 그 다음에는 사마리아로 가고 그리고나서 땅 끝까지 가서 전도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어디서든 머무는 곳과 물리적으로 가야 하는 모든 곳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 나오는 ‘가서’라는 단어는, 원문에 수동태 분사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성령님에 의해서 ‘감을 당해서’ 또는 ‘보냄을 받아서’의 의미로 보아야 하고, 지리적으로 어느 특정한 곳만으로 가라는 의미보다는 ‘머무는 곳이 어디든 세상으로 들어가서’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은 어디에 있든 세상으로 들어가서 – 다시 말해서, 너희끼리만 살지 말고 – 예수님의 대사가 되어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며 예수님을 증거하라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선교적 교회란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고 선교단체를 많이 후원하는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 보다 먼저는, 모든 교인이 자기들의 삶의 자리에서 세상을 향하여 예수님의 대사 곧,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교회가 바로 선교적 교회인 것이다. 이러한 교회가 하나님의 능력과 은사를 받아서 선교사도 파송하고 선교단체도 후원하면서, 세상의 모든 곳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아 예수님의 자녀로 살며 예수님을 증거하여 선교의 지평을 더욱 넓히는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작은 일에 충성할 때에 더 큰 일이 주어지는 것이지 자기 일도 못하는데 큰 일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선교적 교회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정의한다면, 그러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가장 기초적인 필요조건은 바로 교회가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교회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확립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이다. 또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의 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일꾼도 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일에 투입되어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결과를 얻는 일꾼으로 일하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교회는 구원의 확신이 충만한 모임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려는 몸부림이 충만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 몸부림이 예수님에 대한 증거가 되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각 개인의 몸부림을 통해서도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몸부림을 통해서도 예수님은 증거를 받는다.

 

모든 교회가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 함은 너무도 마땅한 일이다. 교회에 대한 정의 상, 교회는 선교적 교회일 수밖에 없다. 그저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것으로 또는 선교단체를 후원한다는 것으로 선교적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먼저 교회 자체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교회는 선교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또는 우리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단체를 후원하므로 선교적인 교회라는 생각은 뭔가 초점이 잘못 맞춰진 것이다. 우리 교회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고 있으므로 선교적인 교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적 교회라는 말은 이중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먼저는 교회 자체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공동체가 된다는 의미이고, 그리고 또한 복음을 모르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님을 증거하거나 또는 그러한 사람을 도와서 함께 한다는 의미이다. 첫번째 의미를 지키지 않는데 두번째 의미를 지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첫번째 없이 두번째만을 지키는 것은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복음은 전파되겠지만 교회에는 아무 유익이 없다. 오히려 자기 만족에 의해 교만이 싹틀 가능성이 더 크다. 따라서 교회는 먼저 첫번째 의미에서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 하고 또한 두번째 의미도 힘이 닿는대로 애써야 한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전하며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에 보낸 편지들은 바로 이러한 권면을 포함하였다. 교회는 먼저 예수님을 증거하는 공동체가 되고 또한 힘이 닿는대로 기도와 물질로 바울의 선교팀을 돕고 또 다른 교회들을 도우라는 권면이다.

 

2000년대 초에 일어난 일로 기억한다. 어느 대형교회 앞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교회 주차장이 좁다 보니 어느 교인이 차를 골목에 주차했었다. 다른 차가 지나갈 여유를 주지 못하고 주차하다 보니 연락처 쪽지만 차 유리에 놓고서 급하게 예배에 들어갔다. 조금 지나서 핸드폰으로 연락이 왔다. 이웃 사람이 지나가야 하니까 차를 좀 빼달라는 연락이었다. 그런데 이 교인이 말하길, 지금은 예배 중이니 나중에 예배 끝나고 빼주겠다고 하며 핸드폰을 끊었다는 것이다. 이 순간에, 제사를 드리러 성전에 가는 도중이라도 이웃과 화해할 일이 생각나거든 먼저 이웃과 화해하고 제사를 드리라는 주님의 말씀은 이 교인에 의해 철저히 무시되었고 예배는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단어가 되고 말았다. 벌써 10여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지금은 나아졌을까 싶다.

 

우리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했다고 해서 또는 선교사나 선교단체를 후원하고 있다고 해서 선교적 사명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그것보다 먼저 우리 교회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어 서로 돌보며 화합하고 있는지,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서 온 맘 다해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자. 이것이 선교이며 기초이다. 부족하면 하나님께 구하자.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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