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 화목제물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후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의 1 절 가사이다. 우리는 교회에 함께 모여 이 찬송을 수없이 불렀다. 그런데 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는가? 마치 연인의 사랑을 책으로 배운 것처럼 혹시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는 책으로 배웠거나 관념적이고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가 그 사랑을 알고는 있으나 생명이 없고 역사가 없고 권능이 없으며 아무런 열매가 없는 사랑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스스로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성경 전체가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은 우리 하나님은 우상들과 다르시다는 것이다. 우상들은 모두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고 입이 있으나 말하지 못하며 손과 발이 있으나 아무런 역사를 만들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보시고 들으시고 말씀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다. 또한 하나님은 감정을 가지신 분으로 기쁨, 슬픔, 분노, 질투, 좋음, 싫음 등의 감정을 표현하신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하나님은 진정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구절까지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느끼고 알고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사랑이다. 그냥 관념적이어서 머리로만 아는 그런 사랑이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하나님의 사랑을 뉴스처럼 들으려고 한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랑이나 혹은 주변의 어느 누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마치 TV에서 뉴스를 듣는 것처럼 먼 나라에서 일어난 이야기처럼 듣는다. 그 동일한 사랑이 바로 지금 나에게도 부어지고 있으며 나는 그 사랑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자꾸만 머리 속에 붙잡아 놓으려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우상과 똑같이 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결코 그럴 수는 없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분의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느끼며 경험할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가르치기를,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지고 있다고 로마서 5장에서 말하였다. 그냥 좀 사랑이 느껴진다는 정도가 아니라 통째로 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분명히 뭔가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제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명확하고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면 절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가 없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 대신에 나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높이며 하나님을 철저히 무시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진정으로 수긍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러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거나 멸망시키시지 않고 우리의 배신과 반항까지도 품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그 사랑이 실제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역사에서 드러난 사건은 이러하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기에 우리의 배신과 반항, 즉 우리의 죄를 그냥 없었던 것으로 하실 수는 없으므로 어떻게 하든 그에 따른 형벌을 내리셔야 했다. 그런데 사람은 그 형벌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스스로 감당하신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친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의 모든 죄의 형벌을 우리 대신에 다 받게 하셨다. 그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이렇게 기록하였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의 죄가 얼마나 깊고도 큰지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2000 년 전에 역사 속에서 드러난 그 사랑,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사랑은 지금 이 시간에도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우리의 삶에서 느껴지는 사랑이므로 우리는 그 사랑을 우리의 삶에서 알 수 있다. 책으로 배우고 머리 속에만 있는 사랑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이 사랑을 먼저 알고 나야 우리의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작은 사랑들도 알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가장 크고 위대한 사랑조차 사랑으로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그 외의 다른 사랑을 어떻게 사랑으로서 경험할 수 있겠는가.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써 나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셨는데 그렇게 큰 사랑을 사랑으로서 깨닫지 못하면서 하루의 음식과 거처를 마련해 주신 사랑을 과연 사랑으로서 느낄 수 있을까.
그 사랑을 알고 깨닫고 나면, 이제 우리가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보았을 때에 ‘아 그때 그랬던 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특별히 내 삶에 개입하셨던 거였구나!’ 하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생각나게 된다. 사랑은 사건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냥 아무런 일도 없으면, 즉 어떤 사건을 통해 사랑을 표현하지 않으면 사랑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난 세월을 되돌아 보면서 하나님을 믿은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이러한 사랑의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다면 정말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인지 고민해 봐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를 결코 그냥 혼자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아버지로서 사랑으로 반드시 그의 삶에 개입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순간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든지 아니면 내가 지독하게도 무감각하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러니 이 사랑은 우리가 혼자서 상상하며 짜릿해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잔잔히 스며들어 가슴을 적시면서도 부모님의 사랑처럼 실제적으로 느껴지는 사랑인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화목한 가정이 중요하다.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성장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따른다.) 잘 했을 때에도 느껴지는 사랑이고 잘못 했을 때에도 느껴지는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삶에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때로는 놓칠 수도 있지만 잠시만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 보더라도 금방 깨달을 수 있는 사랑이다. 심지어 우리가 질병과 고통과 고난과 아픔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동안에도 느껴지는 사랑이다. 오히려 이러한 동안에 더 잘 느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 세계를 초월하므로 이 땅에서는 사랑이 아닌 것처럼 보여지는 것도 영원한 세계에서는 너무도 큰 사랑이기 때문이다. 마치 부모님의 징계를 받는 아이처럼 징계를 받는 동안에는 그 징계가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 징계를 받는 동안에도 부모님은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회초리로 징계를 받은 후에 하나님이 우리의 아픈 상처에 약을 발라주신 것을 우리는 깨달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사랑의 회초리를 맞아본 적이 없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히브리서는 기록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가 기록한 성경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많은 내용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의 서신서인 요한1서는 5 개의 장, 105 구절로 이루어진 비교적 짧은 서신이지만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구절이 30 구절이나 될 만큼 사랑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고 있다. 요한1서를 읽어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실제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6)고 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또한 그 사랑 안에 머무르며 그 사랑으로 살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랑을 느끼며 경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쁘게 순종한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며 마음껏 하나님을 사랑하자.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되어 하나님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광을 누리며,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넘치도록 우리가 사랑의 통로 역할을 감당하자. 사랑은 그 어떠한 두려움도 이기게 하며 고난과 어려움도 인내하게 하고 소망을 품으며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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