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지 비유
마태복음 13장에는 여러가지 비유의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가라지 비유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고,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가 보여서 그의 종들이 주인에게 가라지를 제거할까요 하고 물으니, 주인이 말하기를 둘 다 추수할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하며 또한 추수할 때에 추수꾼들이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자기의 창고에 넣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비유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나서 다시 이 비유를 풀어서 설명까지 해주셨다. 좋은 씨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고,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이며, 밭은 세상이고,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사탄 마귀이고, 추수 때는 세상의 끝이며, 추수꾼은 천사들이어서, 세상의 끝에 예수님이 그의 천사들을 보내어 세상에서 불의한 자들을 거두어 내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을 의미하는 비유였다.
이 말씀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얼마나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시는지 잘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은 행여나 종들이 가라지를 뽑다가 실수라도 해서 곡식을 상하게 할까 염려하여 전문 추수꾼들이 추수하기 전까지는 가라지를 그냥 그대로 두고 나중에 추수꾼들이 전문적으로 판별하여 아무런 실수 없이 가라지를 다 모아서 불에 태우도록 하시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 의지에는 가라지를 위한 것이 전혀 없다. 오직 곡식만을 위해서 이러한 결정을 내리셨고 때가 되면 하나님의 의지는 확고하고도 충만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이러한 뜻을 거슬러 잘못을 저지른다. 그 잘못은 바로 하나님이 만류해 놓으신 종들의 행위를 우리가 조심성 없이 일반적으로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가라지가 곡식들에 많은 해를 입힌다. 곡식이 햇빛을 받지 못하도록 하고, 뿌리가 자라는 것을 방해하고 또 땅의 양분을 빼앗아 가는 등 여러가지 방식으로 곡식에 해를 입힌다. 그러나 주인이 보기에 그 해들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종들이 가라지를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곡식을 다치게 하거나 심지어 뽑아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이 종들을 말렸던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교회 안에서 사람들과 너무도 쉽게 관계를 단절해 버리고 심지어 교회를 떠나게 한다. 우리는 추수꾼처럼 완전히 영적인 눈이 떠진 것이 아니기에 누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누가 가라지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우리가 가라지를 명확하게 판별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그 ‘가라지’를 교회에서 쫓아내기까지 한다.
물론 교회에서도 가라지가 자라고 있다. 교회도 세상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회에 가라지가 들어와서 자라는 것을 막을 방법이 현재로서는 없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그 주인과 같다고 한 것이다. 곡식을 위해서 그 안타까움과 조바심과 간절함을 주인이 감당하겠다는 것이다. 곡식이 가라지로부터 해를 입으면 상하게 되지만 그것까지도 주인이 감당해서 주인이 더 잘 돌보아 곡식이 열매 맺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 주인만을 위해서라면 가라지가 결코 자랄 수 없어야 하겠지만 곡식을 위해서 현재 세상에서는 가라지를 일정부분 허용해 주시고 곡식의 아픔을 함께 감당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되어 곡식이 다 열매를 맺고 나면 가차없이 가라지를 쳐내서 묶어 불 속에 던져 넣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세상에서 살 때에 이 비유의 말씀이 가르치는 요점을 명심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함부로 가라지를 구별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둘째, 참으로 어쩔 수 없이 가라지를 분류해야 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는 하나님께 요청하고 최대한 곡식을 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하나님께서 가라지를 쳐내는 마지막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이 곡식에게 있으므로 가라지가 아무리 설치고 나댄다 하더라도 결코 곡식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그래서 곡식은 어느 밭에 있든지 잘 자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에 우리는 지역교회가 하나의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도적 시스템 아래에서의 지역교회는 흥하다가도 문을 닫을 수 있고 또 언제라도 다시 문을 열 수도 있다. 그러나 눈으로 볼 수 없는 교회, 즉 참 성도로만 이루어진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성장하고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에 지역교회의 상태가 암울하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지역교회가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많고 정체되어 있고 심지어 망해 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곡식을 알고 계시며 추수 때에 거두어 곳간에 들여 놓으실 것이다. 그래서 이 비유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동일시 된다.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직접적으로 충만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가라지에 집중하느라 ‘좋은 씨’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좋은 씨가 되는 기준은 단 하나이다. 열매를 많이 맺는 씨가 좋은 씨이다. 그런데 주인은 이미 좋은 씨를 알고 있으며 그 좋은 씨를 밭에 심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씨가 잘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있을까. 가라지의 방해와 기후와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 잘 자라기도 하고 조금 힘든 적도 있겠지만 주인과 종들의 보살핌 아래 결국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주인에게 좋은 씨가 아닌 것은 없다. 주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씨는 다 좋은 씨이고 그 씨를 밭에 심었으니 마땅히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 주인이 기대하는 것은 이처럼 좋은 씨가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러니 행여나 좋은 씨가 열매 맺지 않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다. 주인과 종들의 보살핌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은 필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가라지를 허용하시는 것이므로 세상에서나 교회에서나 가라지 ‘같은’ 사람을 발견했다고 해서 우리는 실망할 필요도 없고 우리가 나서서 가라지를 제거하기 위해 뭔가를 하려고 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가라지랑 한통속이 되어 가라지를 닮아가도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가라지를 제거하는 일에 한해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추수꾼들이 궁극적으로 처리할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들의 보살핌 아래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가라지의 방해를 이겨내고 항상 노력하며 열매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위해 노력하며 가라지로 인해서 상처를 받고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마지막 때에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소망을 얻고 위로를 받아 굳건히 견디며 밝고 멋진 삶을 살아내는 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함이 마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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