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 대한 무관심
올해 5 월에 갤럽에서 한국인의 종교 상황에 관한 리포트를 발표했다. (참고: https://www.gallup.co.kr/gallupdb/reportContent.asp?seqNo=1208 )
전체적으로 종교인의 분포를 보면, 먼저 개신교가 17 퍼센트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불교가 16 퍼센트, 천주교가 6 퍼센트였으며 종교가 없다고 응답한 사람은 60 퍼센트가 되었다. 연령대로는, 20대의 사람들은 22 퍼센트, 30 대는 30 퍼센트, 40 대는 32 퍼센트, 50 대는 43 퍼센트, 그리고 60 대 이상은 59 퍼센트가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응답했다. 이 비율은 2004 년에 54 퍼센트로 정점을 찍은 후에 계속 내리막이어서 40 퍼센트까지 왔다. 이 변화 추이에서 놀라운 점은, 2014년과 비교했을 때에 40 대의 감소폭이 19 퍼센트로 가장 컸으며 50 대의 감소폭이 그 다음으로 17 퍼센트였다. 인구 분포의 허리에 해당하며 가장 영향력이 있는 연령대에서 종교를 믿는 사람의 비중이 제일 많이 감소했다.
또한 종교가 없다고 응답한 사람들에 대한 심층 조사에서는, 과거에는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람들 중에 52 퍼센트의 사람들이 과거에 믿었던 종교가 바로 개신교였다. 또한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호감이 가는 종교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개신교를 대답한 사람은 6 퍼센트 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이 교회를 떠난 이유 그리고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그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그것은 기독교가 사람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또한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자기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무관심한 것이다. 기독교가 그리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무종교인에게 아무런 관심거리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기에 주변을 잠깐만 돌아보아도 눈에 띄는 수많은 십자가가 그들에게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가 무관심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 것은, 먼저 사회적으로는 기독교인들이 공정과 정의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오히려 기득권 세력에 편승하여 약자를 이용해서 자기 배를 불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기독교인들이나 무종교인들이나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삶에서는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신앙하면서 멋지고 매력적인 인격을 갖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서 전전긍긍하고 거짓과 술수를 이용하는 약삭빠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무종교인들이 하는 행동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기에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차이가 있다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끼리끼리 자기네들끼리 뭉쳐서 잘 어울려 다닌다는 것 정도뿐이다.
사실 기독교가 사회 정의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과 같은 단체들이 그런 노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유투브에도 많은 기독교인 유투버들이 의로운 삶과 사회 정의에 대해서 열심히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고 무관심의 대상이 된 이유는 그런 단체들의 사회 정의를 향한 노력이 그렇지 않은 기독교인들의 비윤리적 부정의적 행태에 오히려 압도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의 수많은 집단 이기주의적 행태가 뉴스에 오르내리는 것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특히나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이웃들에게 코로나 감염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교회들이 앞장 서 모범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염의 위험을 몇 배나 증폭시키는 모임을 숨어서 개최하고, 그것이 들통나자 목사나 장로들이 서슴없이 거짓말을 하는 지경까지 TV 뉴스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니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나 훌륭한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적 사회 정의를 위해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기독교인들의 위선만 드러날 뿐이다.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교회에서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많은 설교가 행해졌지만 2010 년 이후에는 복에 대한 설교보다는 공의와 사랑에 대한 설교가 더 많아졌다고 보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의 삶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불의하고 기회주의적이며 돈만 좇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교회 내에서도 무리를 만들어 서로 대립하고 자기 맘에 맞는 사람들과만 어울리며 다른 무리에 속한 사람과는 담을 쌓고 살거나 배척하며 사랑의 모습을 전혀 보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사기치거나 이간질하고 왕따를 시키기도 한다. 눈 앞에서는 상냥하고 친절한데 뒤에서는 없는 말도 만들어서 험담을 하고 다니기도 한다. 마태복음 23장을 읽어보라. 여기에 기록된 위선자들의 삶이 뉴스에 나오는 한국 교회들과 무엇이 다른지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지역 교회들에서 발생하고 있는 부정적인 모습들만 본다면 교회나 세상이나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다. 이렇게 차이가 없으니 그냥 차라리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회에서 시간 들이고 돈 들이고 에너지와 노력을 들이고도 세상과 차이가 없는 게 뻔히 보이는데 누가 교회에 출석하려 하며 기독교인이 되려고 하겠는가. 이게 현실이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청년들이 교회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자기를 본받으라고 권면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도가 자기 자랑을 하고자 했거나 또는 교만해서 그런 말은 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의 삶의 예시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복음이 선포된 곳에서 당연하게 따라오는 질문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으면 현재의 삶이 어떻게 바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 ‘나를 보아라’ 하고 답한 것이다. 사도 바울의 삶의 정황에서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삶이 무엇인지 예를 보여주며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예수님을 본받아 살기를 권면했던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이렇게 청년들에게 말할 수 있는가? 나를 보아라, 나처럼 예수님을 믿는 삶을 살아라, 하고 청년들에게 권면할 수 있는가? 이러한 성도가 있는 지역 교회가 과연 한국에 몇 개나 있을까? 또는 교회의 청년들이 본받고자 하는 목사나 장로나 집사가 있는가? 그런 교회는 복받은 교회다. 이제 우리는 교회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는 예수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말 심각하게 반성하고 회개해야 한다.
사도행전은 성령님의 역사가 어떻게 세상에 전파되어 가는지 잘 보여준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의 삶이 극적으로 달리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도 할 수 있다. 우리의 삶도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것처럼 극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보아야 한다. 그는 자기의 의에 빠져서 위선적인 삶을 살다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뵙고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예수님을 본받아 살았다. 세상적 명예와 자기의 의를 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는 의와 사랑과 참된 평안을 위한 삶이었다. 그리고 사도 바울과 함께 다른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을 보면 예수님은 정말 다른 삶을 사셨다. 어마어마한 능력과 지혜와 지식을 가지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권력이나 부나 명예나 그 어떤 것도 탐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서 모든 치욕과 수모와 고통과 어려움을 다 감당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따를 수 없는가. 우리는 많은 것을 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세상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면 된다. 이웃에게서 이익을 빼앗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하지 않고 남의 여자를 탐하지 않고 돈이 전부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을 정직하게 섬기는 삶이면 된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 매일 10 분 기도하고 20 분 성경말씀을 읽어보자. 그리고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성령님이 감동을 주시고 은혜를 주신 대로 하루의 삶에 무조건 그냥 무조건 적용해 보자. 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살도록 해주신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증거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지하철이나 공공장소에서 소리쳐 “예수님을 믿으세요” 하고 외치지 않더라도 삶으로 증거하는 외침이 더욱 크게 사람들에게 느껴진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향기요 하나님의 나라의 대사 직분을 받은 사람이므로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각자의 삶의 정황에 따라서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고 부르실 만큼 진심으로 감당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가 오히려 세상 사람을 지옥으로 안내하는 위선자가 될 뿐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 주님 다시 사셨다! 이 말씀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말씀이 나의 삶을 그리고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자. 이 말씀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것을 인정하자. 그리고 만일 이 말씀이 마음에 울린다면 삶을 바꾸어 보자.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