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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1.07 부끄럽고 슬픈 뉴스 기사
  2. 2020.10.30 예정과 기도 2
  3. 2020.10.30 마리오네트
  4. 2020.10.24 기독교의 위대함
  5. 2020.10.24 클래식 카페의 봄
  6. 2020.10.17 예수님의 제자
  7. 2020.10.17 황무지2
  8. 2020.10.10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
posted by 풀숨 2020. 11. 7. 03:10

부끄럽고 슬픈 뉴스 기사

 

지난 11 2일에 포털 사이트 다음의 뉴스란에 이런 기사가 떴다. 불교계가 개신교계를 향해서 발표한 성명서에 대한 기사인데, 개신교 신자들이 불교 사찰에 불을 지르지 못하도록 개신교단의 지도자들이 막아달라는 내용이었다 (https://news.v.daum.net/v/20201102194833486). 기사를 보고 처음엔 눈을 의심했고 기사의 사실성을 의심했을 정도로 충격이었다.

 

전에 지인과 나눈 대화를 소개하면 이렇다. 지인의 친한 친구 A 어떤 사건을 계기로 해서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어서 지인이 A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데 차마 복음을 전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용인 즉슨, A 오빠가 전에 어떤 사람과 법정 다툼을 벌였는데 상대방이 개신교인이었고 그의 교회 사람들이 법정에 몰려들어와서  A 오빠에게 욕설과 비방을 일삼으며 개신교인이라면 치를 떨게 만든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지인의 친구인 A 개신교인이라면 무조건 반감을 갖고 대하고 있어서 복음을 전하기가 정말 어렵고, 친구 관계까지 상할까 조심스럽다는 것이었다.

 

지인에게 얘기를 들으면서 지인의 친구가 너무도 안타까워 눈물이 났는데, 이번에 다음 뉴스에 기사를 보면서 너무도 안타까워 고개를 들지 못하겠고 마음이 먹먹하니 부끄러웠다. 도대체 개신교인들의 사랑은 선택적인 사랑 것일까. 교회 안에서는 서로 심장이라도 빼어 것처럼 정답고 살갑게 구는 사람들이 밖에 나가면 이웃에게 악을 행하고도 뻔뻔하게 구는 것일까 주위의 지인들로부터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크리스찬으로서 어떻게 행동하고 있나 하는 반성이 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대체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주변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것일까 하는 고민도 했던 차에 이번 기사를 보고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성경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바리새인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그들은 기댈 없는 과부의 재산을 빼앗는 사람들이었다. 입으로는 참으로 진실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길게 기도하며 채소의 십일조까지도 드리고 금식도 했지만 행동으로는 이웃의 재산을 갈취했다. 그들은 분명 자기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행동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은 귀담아 듣되 그들의 행동은 따라하지 말라고 하셨을까 싶다. 그들은 위선자였으며 필요한 때에만 상황에 맞는 행동을 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행동의 바탕에는 선민 의식이 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잘못된 크리스찬들의 머리 속에는 동일한 선민 의식이 있는 같다. 자기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해도 하나님을 위한 일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고, 따라서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별로 신경쓸 필요가 없고 오히려 떳떳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같다. 어쩌면 그러한 크리스찬들은 이단 종파에 소속된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이 이단 종파에 소속되었든 아니면 정통 개신교단에 소속되었든, 중요한 것은 교단을 막론하고 그러한 선민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특별하게 선택된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데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선택되었다 의식이 아니라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하는 점이다. 성경은 기록하기를, 이집트의 바로 왕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선택된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일을 열심히 했으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편에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낸 일에 쓰임을 받았다. 그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선택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떠한 일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판단과 결정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항상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한 일이다. 사랑과 공의와 신실하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역시 사랑과 공의와 신실함이 배어 있는 일이며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도록 하는 이다. 소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웃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해를 끼치는 일이 결코 하나님의 일이 없는 이유는 너무도 자명하다.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다고 해도 일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하여도 결코 그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심판은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일이지 사람이 임의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지어 다른 종교를 믿는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낸다고 없는 이유는 바로 사도들 중에 어느 누구도 그러한 일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며칠 동안이나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어느 귀신들린 소녀를 향해서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 오히려 귀신으로부터 놓이게 되는 은혜를 베풀었다. 로마의 이교도인들에게도 아무런 물리적 피해를 입히지 않고 오히려 친절하고도 간절하게 호소하며 하나님을 가르쳐 주었다. 어느 사도도 전도 여행을 하며 이교도의 지역에 들어가서 폭력을 행사하거나 해를 끼치지 않았다. 사도들은 오히려 폭력을 당했고 물리적, 경제적, 육체적 모든 피해를 입고도 이교도들을 저주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확신의 선민 의식에 가득차서 그러한 일을 벌이는 것은 하나님과는 전적으로 무관한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욕심을 채우며 자기 의를 드러내는 불과할 뿐이다. 이런 것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선택되었다 의식 때문이다. ‘선택되었다 의식은 아무래도 사람을 특별하게 만든다. 그것도 어떤 위대하고 대단한 존재에 의해 선택을 받았다는 의식은 더욱 그렇다. 어쩌면 이러한 선민 의식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해도 용납이 되고, 비록 일은 자기가 하지만  하나님을 대리해서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아주 크다. 오직 선민 의식 하나 때문에 이렇게 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선택된 사람들, 예를 들어 사도들을 보면,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며 공의의 하나님이며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드렸다. 어떠한 이유 때문이든 이웃에게 피해를 입히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은 피해를 당하는 쪽을 택했었다. 이교도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사도들을 핍박했을 때에도 핍박을 당하기만 하였다.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였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일부러 소출의 일부를 수확하지 않고 그들에게 허락했던 것처럼, 무지해서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당하여 줌으로써 폭력의 부당함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참된 공의를 알게 했던 것이다. 이상을 넘어서는 ,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심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일하였던 것이다. 사도들이 오히려 가장 경계했던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웃이나 교인들에게 해를 끼치며 악을 행하는 기독교인들이었다.

 

우리가 참으로 잊지 말아야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우리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지 우리가 무엇이라도 잘난 것이 있어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반항하며 무시하며 거짓을 일삼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되었다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사랑과 은혜에 힘입어 우리 이웃에게, 그가 어떠한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 ,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섬겨야 사명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도 모두 다른 종교 그것이 이방 종교이든 샤머니즘이든 심지어 무교라는 종교든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을 명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셨던 마음으로 우리도 우리 이웃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우리가 품어야 마음이다. 그래서 다른 종교를 믿는 이웃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향해 부끄러운 짓을 하지 말고, 안타깝고 측은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자.


진정으로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은, 자기가 마치 하나님을 대리하는 심판자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은혜를 이웃에게 베푸는 사람이다. 이웃을 위해 필요하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아는 사람이다. 은혜와 사랑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께 영광드리도록 자기 의를 버린 사람이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변화되어, 이런 부끄러운 기사를 이상 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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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10. 30. 20:50

예정과 기도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을 강조하는 개혁주의 신자들은 가끔 이런 의문을 갖는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하실 있으며 예정하셨다면 우리의 기도는 무슨 필요가 있을까 하는 질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리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우리의 필요에 따라서 채워주실 것을 믿기에 굳이 기도할 필요도 없고, 기도한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을 보면 무수히 많은 기도가 나온다. 시편은 거의 노래이면서 기도라 있고, 심지어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그러면 개혁주의 신학에서 예정과 기도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먼저 예정 또는 작정에 대해서 살펴보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자기 자신의 뜻으로 세우신 지극히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에 의해, 원하시는 대로,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변치 않게 정하셨다고 고백한다. 작정은 하나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작정하시며 성령님을 통해서 실현하신다. 작정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의지적 결정으로서 하나님이 우주의 최고 주권자로서 자유롭게 결정하시는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차원 자유롭게라는 단어이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차원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좋은 결정을 다른 어떠한 존재의 간섭과 영향 없이 전적으로 자유롭게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일방적인결정을 보면서 마치 어떤 독재적이거나 강제적인 의미의 느낌을 받는다면 한가지 아주 중요한 것을 잊은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와 신실함의 하나님이시다는 진리이다. 하나님은 어떠한 작정을 하실 때에도 항상 사랑과 공의와 신실하신 하나님으로서 작정하신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어떠한 일방적인작정도 사람의 인격과 자유의지를 무시하거나 로봇처럼 취급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뜻대로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그만큼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작정이 사람의 시공간 안에서 실현될 때에도 하나님이 강압적으로 사람의 의지와 생각을 강제하여 무조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자유의지가 손상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작정이 실현되도록 하시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 것인지 없는 것뿐이다. 우리의 이해와 지식으로는 절대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하게 아시는 것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만 한다. 아주 조심스러운 예를 들어보면, 이창호 같은 고수가 초등학생과 바둑을 두면서 초등학생이 다음 수를 어디에 둘지 이미 알고 있고 또한 그렇게 두도록 만들어 가면서 바둑을 둘지라도 초등학생이 자유의지가 없는 로봇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 초등학생은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최선을 다해서 바둑을 두면서 고수의 뜻을 조금이라도 배우는 것이다. 비록 예가 하나님의 작정이 시공간에서 사람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을 정확히 설명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 이 예에서 고수는 단지 초등학생의 수를 읽고 환경을 만들어주어서 다음 수를 이끌어 내는 것뿐이지만 실제 하나님은 이런 것을 포함해서 초등학생의 마음에 역사하신다 -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제한적으로나마 보여준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수많은 예언과 명령이 기록되었고 또한 성취되었지만 예언과 명령의 성취를 위해 어느 사람도 로봇처럼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이 사람을 존중하시면서도 심지어 반항하는 요나까지도 존중하시면서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다는 기록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이 사람의 자유의지와 양립될 없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과는 감히 비교조차 없을 만큼 차원이 다른 존재이시므로 하나님은 얼마든지 사람의 자유의지를 손상하지 않으시면서도 또한 완전히 자유롭게 예정하실 있다. 하나님의 예정을 높이면 사람의 자유의지가 손상되고 반대로 사람의 자유의지를 높이면 하나님의 예정의 자유가 제한된다는 생각은 하나님과 사람을 시소처럼 동일한 차원에 놓는 것이기에 성경적인 생각이 아니며 하나님을 우리의 이해와 지식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과 소통하는 수단이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함께 영적으로 호흡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수단이다. 따라서 기도드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인격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차원이 아닌 우리 사람의 차원으로 내려오셔서 우리의 대화의 상대가 되어 주시는 것이며, 우리와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나를 변화시키시는 은혜 것이다. 이것을 또한 예로 들자면, 아버지가 자녀의 모든 필요를 알며 그러한 필요를 채워주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녀와 대화하며 자녀의 필요에 대해서 듣고 응답하고 함께 함으로써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자녀가 아버지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간절하게 호소하고 뒤돌아 나가는 것을 소통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또한 마찬가지이다. 기도에는 우리의 간구가 포함되지만 그것은 아주 조그만 부분이다. 감사와 함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해야 한다.


다만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어떤 물리적인 소리를 듣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은 그렇게도 하실 있으시지만 그리고 성경의 인물들과 때로는 그렇게 소통하시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기도 가운데 성령님을 통해 성경 말씀을 생각나게 하심으로써, 또는 우리의 생각의 방향을 돌리심으로써, 또는 어떠한 사건의 의미를 깨닫게 되거나, 또는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 주신 조언을 상기시키시는 등등 다양한 방법으로써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소통할 없고 변화될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시고 채워주고 계시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고 계신다는 것을 인격적으로 있는 방법이 없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하고 계시며 어떠한 위치로 이끌어 가시는지 알려면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 시공간에 묶이고 유한한 존재가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과 소통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우리는 기도를 해야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를 나눌 있으며,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다 알게 되며, 사람의 유한성을 뛰어넘을 있는 것이다. 우리 주님도 마태복음 6장에서 기도를 가르쳐 주시며 말씀하시길,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필요를 이미 다 알고 계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질병에 걸렸다면 그는 분명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치유를 받기 원하는 기도보다 먼저 질병의 의미를 하나님께 여쭈어야 한다. 만일 어떤 죄로 인한 것이라면 회개하고 죄를 씻으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변화되기를 기도해야 하고, 또는 어떤 때문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고통이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장을 어떻게 이루며 그가 감당해야 위치가 무엇인지 기도해야 하는 것이며, 또는 다른 이유가 있을 있다. 그냥 무조건 며칠이고 하루 종일 엎드려 치유만을 간구한다면 그것은 그냥 떼쓰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질병을 통해서 그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기를 원하시는 것이지 그를 떼쟁이로 만들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예정/작정이 우리의 기도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예정으로 인해서 우리는 더욱 기도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과 소통을 통해서 우리가 변화되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기도해야만 한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인내해야 한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크고 높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에 항상 즉각적으로 반응하시지 않으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내하며 때를 따라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려야 하고 인내와 기다림 속에서 변화되고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작정은 우리를 향한 사랑과 공의와 신실하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항상 기도하며 소망을 잃지 않는 크리스찬이라면, 당신은 기도가 원하는


대로 응답받는 것보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에 더 많은 가치를 둘 것이다. 이것이 기


도의 궁극적인 목표이다"고 말한 조지 맥도널드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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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10. 30. 20:46

마리오네트



이재이



창이 운다

마스카라 누진 검은 울음

눈물로 쏟아낸다


목각 인형의 심장처럼 차디 찬

흐느낌

굳어버린 시간 속에


콘크리트 빌딩은 시계 추


인형의 손

매달고 묶여

잿빛 무대 위에서

춤 추는 몸짓 따라 울음 운다


피에타!


심장이 호꼼* 뛰기를

묶인 손 한 치만 놓이길

시간이 째깍이라도 가서

바람은 구름 흩어 쏟아져 오기를


세뿔투구꽃

비에 씻겨

창을 비친다




호꼼: ‘조금’이라는 의미의 제주도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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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10. 24. 02:05

기독교의 위대함

 

어떤 성도들은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한다. 사람이 만들어낸 종교들과 비교하여, 기독교는 진리이기 때문에 감히 종교라고 해서는 된다는 의미로 그런 말들을 하곤 한다. 물론 말은 다른 종교를 폄하하고자 하는 의도 보다는 기독교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싶은 의도로 하는 말이다. 기독교를 자랑하고픈 마음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자기가 가는 길이 정말로 맞는 길인지 스스로 확인하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의 위대함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또는 우리는 기독교의 길을 포기하지 않을까? 어떤 이는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이기에 또는 사랑의 종교이기에 위대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진리는 오직 기독교에만 있기 때문에 기독교가 위대하다고 하기도 하며, 또는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진짜 신이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것이다.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바로 기독교의 위대함이라는 등등의 다양한 이유를 제시할 것이다.


나는,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기독교의 위대함은 첫째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있고, 둘째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이 기독교의 뼈대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살이라 있지 않을까 싶다.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 안에서 정의되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기독교의 위대함의 첫번째이어야 것이며,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분명하고 풍성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기독교의 위대함의 두번째이다.


하나님의 존재 양식이 삼위일체이므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렇게 분이시지만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결코 의미가 없는 것들이 있다. 사랑, 공의, 믿음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만일 하나님이 단일한 분이시라면 그런 하나님은 관계적으로만 정의될 있는 사랑, 공의, 믿음을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사랑, 공의, 믿음을 반영할 없으며 실제적인 사랑이 아니라 기껏해야 상상의 사랑만이 존재했을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이며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불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존재의 시작이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삼위일체이시기에 처음부터 사랑과 공의와 신실함을 본질적 속성으로 가지고 계시며 순간도 사랑, 공의, 신실함이 아니신 적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에 대하여 초월성과 내재성 모두를 갖고 계신다. 만일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이지만 사랑, 공의, 신실함이 없는 하나님을 상상해 보라. 세상은 어떤 세상이 되었을까?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성자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동일하시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이요 진리요 공의이며 신실함 자체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 우리 사람을 위해 인간이 되어 죽음을 맛보셨으며 스스로 의로우시기에 죽음이 예수님을 가두어 놓을 없었고 예수님은 부활하여 의로우심을 스스로 증명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었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정확하게 세상에 드러내신 것이며, 예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전능의 하나님만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으로도 영광받으신 것이다. 더군다나 인간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죄성으로 인해서 눈이 가려지고 마음에 반항심만 가득찬 상태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 인간에게 찾아오셨고 인간의 반항심을 감내하면서 은혜를 베푸셨으며, 인간이 스스로 감당해야만 하는 죄의 결과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대신 치르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생각해 보자. 기독교의 위대함이 자신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내가 기독교를 믿고 있으므로 기독교의 위대함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 또는 기독교의 위대함 때문에 내가 기독교를 믿고 있다면, 위대함이 나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생각해 보자. 기독교의 위대함을 구구절절 자랑하면서도 위대함이 삶을 바꾸지 못한다면, 그것이 진정 위대함일까?


기독교의 위대함이제 우리는 그것을 주장하기 보다는  먼저 위대함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돌아보아야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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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10. 24. 02:02

클래식 카페의 봄



이재이



통유리 어스레한 구석

클래식 협주는 징검다리처럼

흑백사진들 뜀뛰어 자리잡게 하고

머리 속은 비트 따라 까닥인다

시공간 움츠려 커피향이 변주하는

거품 같은 회상은

성공이나 실패 아닌 자아의

배고픈 젊음이 살아낸 시간 열어 이내

내처 가야할 길 응원하고

한모금 입 안 저은 커피는

감각을 지나 가슴에서 씁쓸함과 달달함을

예언처럼 읊조리고 산산이 흩어지는데

살아야 하는 것은 내 몫이다

꽃샘바람 견디는

커피 한 모금과 첼로 한 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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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10. 17. 21:36

예수님의 제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13:34~35)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일까... 이 질문에 어쩌면 우리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제자 훈련 한번도 받은 적이 없어서 아직 제자가 아니라고 하든지 또는 제자라는 말을 듣자마자 제자란 성도들 중에서 뭔가 특별한 위치에 있는 그룹의 사람이라서 난 아직 아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교회들, 아마도 여기의 한인교회들도 어느정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만, 한국교회들이 과거 한동안 제자 훈련에 열심을 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제자 훈련 교재들을 들고 다니며 열심히 성경공부하던 성도를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여기저기서 제자 훈련한다고 모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역사를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초창기에는 복음의 씨앗을 뿌리느라 온 힘을 기울였고 그 결과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까지 얻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 등으로 배교하는 자들이 생기고 일제의 핍박으로 인해서 성경을 제대로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고,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초창기에 받은 복음에 깊이를 더할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서둘러 부흥을 이루려는 열심으로 내몰렸습니다. 그때에는 먼저 국내에서는 부흥, 그리고 나서 어느정도 규모가 되자 이제 해외로의 선교에 집중하며 제자도를 내세웠습니다. 마태복음 28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대위임령,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따라 모두가 전도에 열심을 내어야 했고, 사영리나 전도폭발 등 여러가지 전도 관련 훈련들이 있었고 해마다 교회에서는 전도왕을 뽑아 시상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마음 속에는 자연스럽게 전도를 잘 하는 사람이 믿음이 더 좋은 사람 내지는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는 사람 등으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이야말로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인 것이고 나머지는 그저 그런 평신도라고 생각되었지요. 지금도 그런 생각들이 우리들 안에는 남아 있습니다. 제자의 의미를 이 대위임령에서만 찾아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려면 나부터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열심을 냈었고 그 결과는 전도와 선교로 나타나게 된 것이죠. 따라서 제자에 대한 개념이 조금은 성경과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열심이 오히려 이런 결과를 만들어 냈고 지금은 제자라고 하면 뭔가 특별한 성도를 의미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져 있습니다.


여기 미국에서의 한인 교회들 역시 한국의 교회들을 많이 닮아 갔습니다. 한국에서 이민오신 분들을 중심으로 해서 교회가 모이다 보니까 아무래도 한국 교회들을 닮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에 열심을 내려고 이민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서 어떻게든 그들을 교회로 인도해서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두면서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인터넷의 발전으로 인해서 그러한 프로그램들은 거의 다 없어졌지만 말이죠. 한인 교회에서도 제자라는 개념은 비슷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제자의 개념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생각했던 개념이 과연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일까요? 주님께서 주신 말씀에만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 오늘 봉독한 말씀을 다시 살펴 보겠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 말씀에서 맨끝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때서야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고 하셨나요 아니면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된다고 하셨나요? 제자가 되는 것과 제자로 알려지는 것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제자로 알려진다는 것은 그 사람은 이미 제자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제자’라는 단어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 앞에 ‘열둘’이라는 한정수식어가 붙어 있으면 특별히 열두 사도를 의미합니다만 일반적 의미에서 제자란 모든 신자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 중에 열둘을 택하셨다고 기록되어 있고, 6:66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6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파했던 그날에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제자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 특별히 주님과 구원자로 영접하고 따르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제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인가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말과 같고 또한 예수님을 주님과 구원자로 영접하였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제자라는 단어 안에는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무엇이든 반드시 순종하겠다는 다짐이 포함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실 것이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며 따른다고 하면서도 생각하기를 ‘먼저 좋은 것 주시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겠습니다’ 하지 않나요? ‘더 좋은 걸로 먹고 더 좋은 것 갖기를 원하니, 이것들 먼저 주시면 그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겠습니다. 먼저 주세요’ 하고 말이지요. 예수님을 나의 주님과 구원자로 고백하면서도 나에게 좋은 것 또는 뭔가 이익을 주는 구원자 부분은 오케이지만 나에게 뭔가 순종을 요구하는 주님 부분은 내가 하고 싶으면 오케이고 그렇지 않으면 적당히 오케이인 척만 하든지 아니면 은연 중에 무시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기록한 본문 말씀은 너무도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자라면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요. 그 사랑은 원수를 위해서도 목숨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새 계명인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도 레위기 19:18에 보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도 율법 전체를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정리될 수 있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그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는 정도까지의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원수를 사랑하는 정도까지, 예전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는데 이제는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내주고 5리를 함께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주고 겉옷을 달라 하면 덧옷까지 주며 예수님처럼 목숨까지도 내주는 사랑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새 계명인 것입니다. 제자는 마땅히 이런 사랑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줄 각오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3:16에서 사도 요한은 이것을 더욱 직접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리고 또한 요한복음 14장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는 온 유대를 돌며 세상 사람들에게도 자신을 나타내셨는데 십자가 이후로는 제자들에게만 하시고 세상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자 어느 제자가 질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세상에는 나타내시지 않으시려 하시나이까? 하고요.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하였습니다. 이제는 너희들이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과 연합된 자, 예수님을 닮은 자, 예수님으로 옷입은 자, 예수님의 대사이자 예수님의 향기가 나는 자인 우리가 세상에 예수님을 나타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서 예수님을 나타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 먼저 받았으니 다른 사람에게 줘야지요.


교회에서 목사를 비롯한 사역자나 직분자로 세워졌다는 의미는 예수님처럼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사랑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교회가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그 길에 서서 예수님을 그 정도까지 닮고 싶어서 애를 쓰는 사람임을 교회가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앞장서서 교회를 이끌고 관리/통제하라고 세워진 직분이 아닙니다. 앞장서신 분은 예수님이시니 그분을 닮아서 성도를 위해 서로 사랑하며 성도들이 예수님만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섬기라는 직분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주신 이러한 사명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겠다고 예수님 앞에 결심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요 우선입니다. 어디에서든 미운 사람, 싫은 사람,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을지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그 사람을 위해서도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음을 깊이 깨닫고 나도 예수님처럼 그 사람을 위해서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섬기며 사랑하는 길을 걷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든다고 또 내 기준에 너는 틀렸다고 잘라내고 분리하고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그 사람이 큰 잘못을 했을지라도 잘못했으니까 떨어져 있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단자가 아닌 한, 오히려 그 잘못으로 인해 겪어야 할 어려움까지 함께 겪어주며 함께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사랑을 보여야 합니다. 힘들겠지요. 어렵겠지요. 답답해서 심장이 터져버릴 것처럼 느껴지겠지요. 그래도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 기록된 사랑은 맨먼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면서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두들겨 맞아도 견디며 참아야 하는 인내를 감당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이러한 직분에 아직 세워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이 사랑의 영광스러운 직분을 바라보면서 그 길에 들어서 있음을 고백하기에 이 자리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쉽게 될까요? 저 이제 예수님 믿기로 했어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눈물을 흘리고 소리높여 찬송하면 저절로 될까요? 절대로 쉽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서 구해야 하고 또 구한대로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구하고 믿음으로 삶의 현장에 적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그 마음, 원수를 위해서라도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의 마음을 우리에게도 허락해 주시기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사업이 잘 되게 해달라고, 월급 많이 받는 직장 주시라고, 자녀들 좋은 대학 들어가게 해달라고, 몸이 좀 더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 저도 알고 싶어요 배우고 싶어요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어요 하고 먼저 기도해야 됩니다.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며칠씩 금식기도 하면서 이런 기도는 한번도 드린 적이 없다면 우리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내가 아는 예수님이 성경에 기록된 바로 그 예수님이 맞는지, 그리고 그분을 주님과 구원자로 영접한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가 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왜곡되고 뒤틀리고 비틀어져 버린 것은 아닌지 치밀하게 확인해 봐야 합니다. 이 모든 걸 혼자서 하기는 힘들고 어려우니까 함께 하라고 이 교회 공동체를 세워주셨습니다.


은혜가 참으로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비록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도 우리를 찾아주시고 우리를 위해 피흘려 죽으시고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면 반드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까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까지도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무엇인들 주시지 않겠습니까? 요한복음 157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다만 요즘 시대 미국의 상황에서 이웃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경우는 쉽게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자신이 정하신 때에 우리를 그러한 상황에 두시기 전에는 그런 경우는 평생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옛 사람을 죽이고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낼 기회는 항상 있습니다. 교회에서나 가족 중에서나 이웃 중에서 내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또는 밉고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서, 지금까지는 그 사람과 마주칠 때 얼굴 보기가 싫어 다른 길로 돌아가거나 서로 스쳐지나갈 때에 얼굴을 돌린다거나 아무런 말도 섞지 않고 무시했다면, 이제 그 사람을 마주칠 때 먼저 인사를 건네고 눈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우리 주위에서 훈련할 수 있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하나님께 구하시고 실제 삶의 현장에서 실행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주실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을 더욱 닮아가는 기쁨을 누리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한가지 꿈을 꾸기를 바랍니다. 내가 섬기는 교회가 이러한 사랑으로 넘쳐서 예수님의 제자로 드러나기를 바라는 꿈을 꾸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세상 사람들이 ‘저 교회에 가면 예수 그리스도를 느낄 수 있어’ 하고 말하는 날이 오기를 바래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글을 준비하며 이렇게 영광스러운 꿈을 꾸면서 저 자신은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뭐가 된 것처럼 여기저기서 성경말씀을 가르치고 나름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랑하며 열매맺으며 사는 것처럼 저 자신에 대해 생각해 왔었는데 이 글을 준비하면서 냉정하게 되돌아보니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더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이제 좀 더 알고 더욱 성장하여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싶어요, 그 사랑 제게도 주세요, 간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조차도 어려워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스럽겠지만 이제 코로나가 종식되고 교회가 다시 모이게 될 때에 우리는 어떠한 교회가 되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또 다짐해야 합니다.


결론을 내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어 그분을 주님과 구원자로 고백하는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말이 갖는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고픈 것, 갖고픈 것, 먹고픈 것, 이루고 싶은 것이 먼저이고 하나님 나라와 의는 나중에’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제자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과 같이 제자가 그 선생님을 닮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으신 분이셨지만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도 내놓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죄와는 아무 상관도 없고 죽음을 맛보셔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지만 단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선생님이십니다. 그분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라면 말입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고 사도 요한은 권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서 이것이 쉽게 되지 않기에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고 싶다고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고 그 사랑 나에게도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뭔가를 받고 싶어서 금식기도했던 것 이상으로 간절하게 구해야합니다. 그리고 구한대로 우리의 삶에 적용해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는 미운 사람, 싫은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서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삶에는 기쁨이 넘친다고 주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렵고 힘들고 고난의 길 같지만 그렇지 않다고, 오히려 평안과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삶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다함께 이 길을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성령님께서 묶어주신 한 공동체로서 모두 함께 손에 손잡고 이 길을 가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성하게 발산하는 교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는 길을 가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그렇게 결단하는 이 시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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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10. 17. 21:35

황무지 2



이재이



네 머리 위의 하늘은 지겹도록 푸르고

네 배는 소의 가죽을 뚫고 피를 빠는 파리처럼 붉디 붉다

너를 스쳐간 마른 뼈들은 심장을 비켜서

다 자라지 못한 강아지풀처럼 여기저기 박혀 있다


어릴 적 세웠던 전망대는 녹슬어 사다리마저 끊어졌고

지평선은 감옥처럼 선을 그어놓았다


넌 언젠가 한동안 바닥에서 지냈는데

네가 걷지 않음으로 인해 바닥은 사방에 창을 내었고

너는 언제나 창틀에 매달려 있었을 뿐


그러고 보니 네가 가끔 하늘을 보긴 했다

샛별이 가장 밝게 빛날 무렵이면 손을 뻗었다

환희와 소유욕을 혼동하며

두려움을 알지 못한 채

두려움은 비명과 함께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가 옳았다

4월은 시리게 잔인한 달*

너는 이른 비 내려도 붉게 토하기만 하는

파도 파도 인큐베이터를 발견할 수 없는 땅

오늘을 내일에 팔고 또 오늘이면 내일에 파는 벗은꽃




*엘리엇의 시 “황무지”에서 따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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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10. 10. 01:36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

 

 

존재 및 사람의 존재의 근원에 대해서 기독교를 위시하여 다른 모든 고등종교뿐만 아니라 철학이나 자연과학에서도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으며 또한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비록 철학에서 한동안 인식론을 중요시하고 형이상학을 거의 무시하기도 했지만 현대에 다시 형이상학을 조명하고 있는데, 이는 존재 및 존재의 근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세계관과 가치관이 달라지고 근본적인 사고방식이 완전히 바뀌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기독교 신학적인 측면에서 사람의 존재의 근원을 하나님의 형상을 기준으로 하여 고찰하고, 또한 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해석이 시대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역사적 흐름을 살펴보고, ‘하나님의 형상을 근거로 한 인간론이 기독교 신학의 다른 부분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간단하게 살펴본다.

 

1.     들어가는 말

2.     하나님의 형상이란

a.     언어적 고찰

b.     근대까지의 신학적 고찰

3.     하나님의 형상에 의한 구원론

a.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

b.     동방교회의 인간의 신화(Theosis)’

4.     하나님의 형상과 자연신학

a.     로마 카톨릭 교회와 종교개혁자들의 논쟁

b.     바르트와 브룬너의 논쟁

5.     현대 개혁주의에서의 하나님의 형상

a.     바빙크, 벌콮 및 베르까우어

6.     맺는 말

 

 

1.     들어가는 말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기사는 창세기와 요한복음을 비롯한 여러 책에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에 의하면, 처음에 하나님께서 첫째 날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빛을 만드셨고, 둘째 날에 궁창들을 만드시어 물들을 분리하셨고, 셋째 날에 하늘 아래의 물을 모으시어 땅이 드러나게 하시고 나무를 비롯한 온갖 식물을 만드셨고, 넷째 날에 하늘에 광체들을 만드셨으며, 다섯째 날에 온갖 날짐승과 물고기를 만드셨고, 여섯째 날에 땅에 온갖 동물을 만드셨고 맨마지막에 사람을 만드셨으며,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을 때에는, 다른 창조물과는 다르게, 먼저 사람을 어떻게 만드실 것인지에 대해 숙고하시는 설명이 나온다. 창세기 1:26~27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기록대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모양에 따라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졌으므로 사람의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 기록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 전체를 고찰해야만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고찰함에 있어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세 가지 질문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죄와 사람의 타락은 이 형상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 죄성의 사람의 형상에 어떤 결과가 주어졌는가? 이다. (본고에서는 처음 두 개의 질문을 중점적으로 고찰하겠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고찰하는 것은 사람의 창조와 타락, 죄와 구원, 그리고 우리 주님 그리스도 예수님 및 하나님에게까지 이르는 고찰에 광범위하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데, 자브리스키는 말하기를, “신학의 역사상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교리는 언제나 동시대적인 신학의 흐름 속에서 더 도전적인 목회적 상관성이나 더 자극적인 신학적 함의를 갖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초대교회 시기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교리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 그리고 이 교리와 관계되는 다른 교리들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는 것은 사람의 존재의 근원을 고찰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살펴보는 기회가 된다.

 

2.     하나님의 형상이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창 1:26~27 뿐만 아니라 창 5:1~3, 9:6~7, 3:9, 고전 11:7 말씀이 증거하고 있으며, 기독교의 전 시대에 걸쳐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논의는 상기한 세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논의는 먼저 언어적으로 형상과 모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는 것이었고 또한 신학적으로 살펴보는 것이었다.

 

A.    언어적 고찰

 

형상과 모양에 대응하는 히브리어 원문에 있는 원어 단어가 첼렘(צַלְמֵ)과 데무트(דְמוּתֵ)이다. 그리고 히브리 원문에는 첼렘과 데무트 사이에 아무런 접속사가 없으나 칠십인역과 라틴 불가타역에 ‘and’에 해당하는 단어를 넣어서 번역함으로써 첼렘과 데무트가 서로 다른 별개의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느낌을 주고 있다. 이것은 각각의 고유한 언어적 특징 때문이며, ‘and’를 넣었다고 해서 첼렘과 데무트가 반드시 서로 별개의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첼렘은 새기다(to carve)’는 의미를 가진 어근으로부터 유래되었기에 이 단어는 동물이나 인간을 조각한 모양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데무트는 비슷하다(to be like)’는 의미를 가진 어근으로부터 파생되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모양이란 말은 형상이 닮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첼렘이란 말이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은 원형이시고 인간은 그 모형이라는 사실이고, 데무트란 말은 그 상()이 모든 면에서 원형과 일치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두 용어의 병행법적 용례로부터 알 수 있는 사실은 이와 같은 표현 양식을 통해서 인간이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관념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또한 첼렘과 데무트와 함께 사용된 전치사를 살펴봄으로써 첼렘과 데무트의 의미를 나누려 했던 시도들이 있었으나 이 단어들과 함께 사용된 전치사들이 상호 교환적이었기에 전치사를 통해서 그 의미를 구분하려 했던 시도들은 무의미하다.

 

하나님의 형상 또는 신()의 형상에 대한 문화 및 종교적 사례를 살펴보면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왕을 신의 형상으로서 묘사하였다. 특히 이집트 문헌의 경우에는, ‘신 형상이 신의 모습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어떤 특권 또는 신의 속성을 가리키는 단어로 나타나고 있다. 비록 신을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형상의 원래 목적은 신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최초의 장소를 나타내고자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형상의 중요성은 기술된 방법이나 신에 대한 묘사에 있지 않고, 그 자신을 드러냈던 상(, image)에 있다. 그러므로 신의 존재와 축복은 형상을 통해서 영향을 끼쳤고, 이것이 형상의 중요성이며, 이는 구성된 형식보다 상의 기능에 그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또한 고대 근동에서는 군주들이 한 지역에서 자신의 힘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자신의 형상을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의미로부터 살펴보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이란 의미는 사람이 하나님 소유이거나 달리 표현하면 사람은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제 기독교에서 논의된 하나님의 형상을 살펴보면 루터 이전까지는 첼렘과 데무트를 서로 다른 의미로 구분하여 대부분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어떤 속성이나 본질로 이해해 왔으나, 루터는 형상(첼렘)과 모양(데무트)를 동일한 의미의 단어를 단순한 반복으로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서, 형상과 모양을 서로 다른 것으로 나누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루터 이전이나 이후에 모두 형상에 대해 여러가지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였다.

 

스탬(J. J. Stamm)형상에 대한 해석의 역사를 검토하고서 1940년을 기점으로 해석이 나누어진다고 하였다. 그 이전에는 형상(첼렘)에 대하여 4 가지의 그룹이 있었다: 1) 형상은 사람의 영적 자질: 자의식, 자기결정, 능력, 영원과 진리와 선에 대한 이해, 이성, 개성, 태생적 고귀함, 2) 자연에 대한 통치, 3) 하나님과 사람의 직접적인 관계에 대한 개념, 4) 하나님과 비슷한 사람의 모양. 그러나 1940년 이후로는 스탬의 분석에 따르면, 궁켈(Gunkel)은 형상이 외형적 형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험버트(P. Humbert)는 창 1:26 말씀의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어구가 사람은 신성과 동일한 물리적 형태로 창조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쾰러(L. Koehler)는 다른 셈족 언어들에서 사용된 첼렘을 검토하여 비슷하게 생각하였는데, 첼렘은 우선적으로 직립 형태이고 하나님의 형상(첼렘)은 사람의 직립 자세, 좀 더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의 첼렘에 따르는 사람의 창조, 즉 형태의 의미에서의 그분의 형상에서 우선적으로 보여진다고 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일부 학자들은 사람의 물리적 특성이 형상의 어느 부분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로울리(H. H. Rowley)는 구약성경의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물리적 형태를 전혀 갖지 않으시는 분으로 인식되었다고 하였고, 덩커(P. G. Duncker)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과 육체적으로 비슷하게 창조되었다면 하나님은 양성(bisexual)적이신 분이어야 한다며 하나님의 초월성은 이러한 것을 제외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과 공유하는 어떤 특질이라고 다시 정의하게 한다. 이처럼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현대에는 사람의 물리적 특성도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해서 전인적인 이해를 지향해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하며, 또한 어느 그룹은 형상모양을 동일한 의미로 이해하며 다른 그룹은 여전히 형상모양을 각각 다른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대해서 언어적 측면에서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학자들 사이에 통일된 견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말씀에 명확한 설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말씀 전체를 살펴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반영하는 말씀들을 토대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는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해석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인간론, 은총론, 구원론, 기독론 등을 검토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대한 이해가 올바른지 확인할 수는 있다.

 

B.     근대까지의 신학적 고찰

 

밀라드 에릭슨은 그의 조직신학 저서인 <복음주의 조직신학>의 인간론에서 현재까지 논의되어 온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견해를 세 가지, 실재론적 견해, 관계적 견해, 그리고 기능적 견해로 구분하였는데, 역사적으로는 실재론적인 견해가 가장 먼저 나타났고 거의 대부분의 시기를 점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실재론적 견해는 다시 넓은 의미의 형상과 좁은 의미의 형상으로 나누어져서 아담의 타락 후에 아담으로부터 상실된 형상과 여전히 아담에게 남아 있는 형상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먼저 초대교회 시기에 교부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 보면, 초대교회의 거의 모든 기독교 사상가들은 실재론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헬라 철학의 이분법적 사고의 영향 아래서,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속성인 이성, 도덕성, 인격성, 자율성, 영혼 불멸성 등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클레멘스와 오리겐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여하한 신체적 특성을 거부하면서 인간 영혼에서 그것을 발견하고자 하였고 모양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은 자질로서 계발되기도 하고 상실되기도 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레니우스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구분하여,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에게 주어진 자연적인 은사로 보았고, 하나님의 모양은 초자연적인 은사로 보았으며, 애초의 창조시에 불완전하게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까지 성장해야 하는 존재로 보았다. 또한 그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초자연적인 은사를 잃어버렸으나 자연적인 은사는 그대로 남아있으며, 그 잃어버린 초자연적 은사는 중생 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회복되는 것으로 보았다.

 

터툴리안 역시 하나님의 형상(imago, εικων)과 모양(similitude, ομοιωσις)을 구분하여 형상을 신체적 특성으로, 모양을 영적 혹은 성품의 특성, 곧 영혼 혹은 이성으로 보았다. 그는 이것을 다시 형상과 모양을 구별하여, 형상은 인간의 이성과 정신적 자유로 이해하고, 모양은 하나님의 은총으로써 완전해지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로 이해하였다.  또한 아타나시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키릴은 자연과 초자연적인 것을 구별하고 형상과 모양을 이중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았다. 형상은 덕을 목표로 한 이성 속에 주어졌으나, 모양은 성령의 은사로서 신적 본성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반면에 클레멘트와 오리겐과 닛사의 그레고리 등은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별로 구별하지 않았다.

 

어거스틴은 최초로 하나님의 형상을 관계의 의()’라는 윤리적 혹은 사회적 개념으로 새롭게 이해하였으며, 그에 의하면 인간은 본래적 의(justitia originalis, 源義)’를 가지고 있었는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본래적 의를 상실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마음 안에 기억, 이해, 의지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으며 이것이 인간 안에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흔적으로 보았다.

 

반면에 펠라기우스를 중심으로 한 펠라기우스파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에게 부여된 통치적 또는 주권적 능력이라고 보았다.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에 반대하여, 만일 인간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창조주에 대한 모독이라고 하면서, 인간 본성의 무조건적인 자유 의지와 책임이라는 관념으로 인간론을 이끌어 갔다. 그에 의하면 인간 본성의 능력에는 세 가지 기능이 있는데, 능력, 의지작용, 그리고 행동이다. 의지와 행동은 인간에만 관련된 것이고 하나님과는 무관한 것이며, 하나님은 오직 능력에만 관계한다고 하였다.

 

로마 카톨릭의 중세 신학자들은 초대교회의 관점들을 대체로 수용하고 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의 주장을 강력하게 계속 지지하였으나 그는 인간의 이성을 더 강조하였고, 스코투스는 인간의 의지를 더 강조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이러한 관점들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루터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전인적 인간 이해였다. 루터는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알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과 관계한 상대자로서의 자신만 알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행위로부터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관계적 인간 이해이다. 루터의 이러한 전인적 인간 이해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본 회퍼는 자신의 논문 성도의 교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격 그리고 공동체 개념은 본래상태, , 그리고 화해의 개념을 통하여서 자세히 설명된다. 인격과 공동체 개념 모두,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변증법 안에서만 극복되어질 수 있다.” 루터는 또한 아담의 타락을 어거스틴이 정의한 본래적 의의 완전한 상실로 보았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인간론을 살펴보면 그 역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실재론적인 견해를 드러내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과 이웃에 관계하는 사회적 존재로 보는 관계적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또한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본체를 반영하는 실체라는 관점에서 또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거울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는 이 관점에서 우주 만물, 성경말씀, 예수 그리스도, 인간이 하나님의 본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다.

 

하나님의 형상을 중심으로 한 칼빈의 인간론에 대해 여러 학자들이 그동안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하여 왔다. 어느 학자는 칼빈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구원론적 관점에서 보기도 하였고, 또 다른 학자는 기독론과 성령론을 연결시켜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칼빈이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인가 아니면 영혼의 기능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는 이에 대해 여러 시각으로 말해서 때로는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오시안더가 하나님의 형상을 몸과 영혼까지 확대해서 해석한 것을 칼빈이 신랄하게 비판한 것을 보면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과 영혼을 구별한 것이 틀림없다. 그는 몸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거나 영혼 그 자체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의 어떤 자연적인 요소가 아니라 어거스틴이 말하는 본래적 의, 곧 원의인 거룩, , 지식과 긴리 속에서 영적인 반영이라고 생각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또한 아담이라는 존재 전체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보았기에 영혼과 하나님의 형상이 구별되지 않는다고 암시하였다

 

칼빈이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타락과 함께 설명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자연적 형상과 초자연적 형상으로 또는 좁은 의미의 형상과 넓은 의미의 형상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렇게 두 가지의 형상으로 나누어서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초자연적 형상은 완전히 상실되었고 자연적 형상은 부패되어 무서우리만치 변형된 채 남아 있다고 하였다. 또한 칼빈은 천사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하였다: “천사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지고의 완전성은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의 이 주장은 비판을 받고 있는데, 현대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몸을 포함하는 전인적인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자연과 정신에 대한 진화론적 사상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우주 중심적이고 진화론적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이러한 해석은 일부에서 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로마 카톨릭과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한편, 기독교 진영에서는 종교개혁자들의 새로운 해석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웨슬리는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을 세 가지의 형태, 즉 본질적 형상, 도덕적 형상, 그리고 정치적 형상으로 구분하였다. 근대 이후 현대의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진영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는 5장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된다.

 

3.     하나님의 형상에 의한 구원론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가 구원론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보여주는, 기독교 역사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논쟁 중 하나인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사이의 논쟁을 살펴보고, 또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가 동방교회의 구원론을 어떻게 달라지도록 하였는지 살펴봄으로써 인간론과 구원론의 관계를 간단하게 파악해 본다.

 

A.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

 

기독교 초기에 있었던 대표적인 논쟁 중에 하나가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와 벌였던 것으로 기본적으로는 은총론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 특성상 구원론 및 예정론에 대한 논쟁도 포함되었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가 논쟁을 벌인 그 핵심에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놓여 있어서, 인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따라서 그들의 신학이 완전히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되었다.

 

우선 어거스틴 신학의 핵심은 하나님 중심이었다. 어거스틴은 인간 이해에 있어서도 하나님 중심적인 인간론을 주장하였으니, 그는 요 1:16 말씀,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는 말씀에 기초하여, 인간의 존재와 인간이 누리며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고백하고 있다. 결국 가장 연약하고 비참한 존재인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어거스틴은 명확하게 증거하였다.

 

어거스틴이 하나님 중심의 신학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는 아담의 타락 후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전적으로 (, 모든 면에서) 부패한 것으로 보았기에, 인간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온전한 선을 어느 것이든 절대로 행할 수 없고, 또한 인간에게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희망도 소망도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만 소망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을 더욱 더 알면 알수록 인간의 무능과 초라함은 드러나게 되어 더욱 은총을 의지하게 된다고 하였다.

 

반면에 펠라기우스의 신학은 인간 중심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들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행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계명을 주셨을 리가 있는가? 우리는 언제든지 선이나 악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으며, 이 자유로운 선택의 기능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가 생득한 최고의 선이다.”고 언급하면서 인간 중심적인 신학의 형태로 나아갔다.

 

펠라기우스도 하나님의 은총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동방교회의 전통의 영향으로 인해서 은총의 자리에 본성과 자유의지를 놓고, 법이나 교육으로 대체했다. 그는 근본적으로 죄에 의한 인간 본성의 타락과 부패를 부인하였기에, 인간이 죄없이 살 수 있으며, 인간 본성은 죄에 의해 변화되거나 약화되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펠라기우스에 의하면 인간 본성은 선을 행할 수 있다. 다만 본성의 세 가지 기능 중에 능력은 너무 약해서 하나님이 은혜로 도와주셔야 하지만, 의지와 행동은 인간 의지의 샘에서 흘로 나와야 한다. 따라서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지만 그 책임은 크다고 하며 인간을 구원 과정의 중심에 놓았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부과하셨은 즉, 인간은 그것을 성취할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하였고, 또한 인간이 선택의 자유를 누린다면 그것은 창조주의 명확한 은사로 말미암은 것이고 인간은 그 자유를 그분의 목적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선을 스스로의 능력으로 행할 수 있고, 의로울 수 있다는 인간론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는 은총을 인간 본성과 의지에 도움을 주는 힘으로 묘사하였다. 인간 본성은 죄로 인해서도 전혀 부패하지 않았고 전혀 허물이 없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죄를 위한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는 신앙의 모범으로 신자가 살아야 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펠라기우스의 은총론은 하나님의 은총을 부수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결과적으로 완전히 부정하기에 이르렀고 인간의 책임과 행동만 강조하는 인간 중심적인 신학 체계를 형성함으로써 급기야 정통적인 교회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드는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잘못된 인간론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은총론으로 나아갔고 그것은 또한 잘못된 구원론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주후 431년에 에베소 총회는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이나 펠라기우스의 은총론은 인간론을 기반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 이유가 인간 존재의 필연적인 필연성 때문인 것이기에, 인간에 대한 이해가 은총론의 기반이 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은총론이 구원론으로 확장되고 구원의 방법을 논하는 예정론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B.     동방교회의 인간의 신화(神化, Theosis, Deification)’

 

현재에는 그리스 정교회로 대표되는 동방교회의 구원론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인간의 신화(Theosis, 또는 Deification)라고 할 수 있다. 신화(神化)는 정교회를 특징짓는 요소이며, 정교회 신학의 전체 구조에 있어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주요한 정교회 신학자들은 이 교리를 중심으로 해서 전체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정교회에서 신화는 하나님의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며 인간 실존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속사도들에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신화의 개념은 이그나티우스 및 저스틴을 그 시작으로 본다. 저스틴은 시편 82:6~7 말씀을 인용하면서 신자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진정으로 신들이라고 불리워질 것을 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화의 개념은 이레니우스에게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데 그는 신화에 대해서 여러가지 말을 남겼다. 그 역시 저스틴처럼 시편 82편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처음부터 신들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인간들이었고 결국에는 신들이 된다고 하였으며, 또한 만일 말씀이 인간이 되었다면, 그것은 곧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하였다. 그 후에 아타나시우스가 4세기에 이레니우스의 말을 거의 비슷하게 반복했으며, 바질은 인간은 신이 되라는 명령을 받은 피조물 외에 다름 아니다고 했고, 닛사의 그레고리는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의 본성에 연합시키셨는데, 이는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과 연합함으로 인해 신화되게 하기 위함이다.”고 하였다. 교부들의 이러한 전통을 따라서 정교회는 인간의 신화 교리를 구원론과 모든 정교회 교리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리스 교부들 그리고 신앙적 경험을 중요시 했던 그레고리 팔라마스는 인간의 신화에 대한 가르침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전제 위에 기반하였다. 첫째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따른 인간의 창조, 둘째는 하나님의 로고스의 성육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교제할 수 있는 힘이다. 이 세 가지 전제는 인간의 신화의 인간론적, 기독론적, 그리고 삼위일체적 기초를 형성하는 것이다.

 

세 가지 전제의 그 첫번째인 인간론에 대해서는 이레니우스에게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그의 인간 이해,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모양에 따라 창조된 인간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리스 교부들은 형상과 모양을 구분했다. 다마스커스의 요한은, 형상은 이성과 자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모양은 덕을 통해 하나님과 닮아감으로 보았다. 또한 형상은 창조 시부터 부여받은 능력이지만, 모양은 처음부터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목표로 삼아야 하고 점진적으로 획득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형상은 죄에 의해서 상실되지 않지만 모양은 죄로 인해서 파괴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인간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모양을 다시 획득할 때 신화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동방교회의 교부들은 신화를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하나님의 모양’ – 또는 닮음으로의 움직임이라고 묘사한다. 이것은 거듭난 사람이 의지적으로 하나님과 협력하여 신화되어야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의 협력을 강조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동방교회가 신화의 개념에 따라서 구축한 구원론을 간단하게 살펴 보면, 동방교회는 구원을 영혼의 치유 개념으로 이해한다. 인간은 유전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하고 인간의 순수지성이 무감각하게 되어 전 본성이 병들게 되었다. 이것은 법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라 의학적인 의미이다. 그리서 막시무스는 그 결과로 거짓된 지식을 갖게 되며, 보편적 진리에 대해서 무지하게 된다. 그리고 정욕적인 생각에 빠지며, 죄에 동의하는 습성을 가지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정화되고 치유되기 위해서는 순수지성과 마음이 정화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동방교회의 이러한 인간의 신화개념은 그 개념 자체 보다는 오히려 그 개념이 기술되고 있는 문맥에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인간의 신화를 철저하게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인 문맥에서 이해하지 아니하고 개방되거나 이방종교적 문맥이나 신비주의적 문맥에서 이해하면 속사도들이나 초대 교부들이 말하고자 했던 인간의 신화가 아니다.

 

심지어 성경적기독교적 문맥에서 인간의 신화를 이해할지라도 칭의와 성화, 전인적 인간의 중생 후 현재의 상태와 장차 하나님의 왕국에서의 영화로운 상태, 그리고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및 하나님의 성품에의 참여 등을 혼동한다면 인간의 신화는 기독교적 문맥 밖으로 벗어나는 것이 되며, 일단 벗어나면 어디로 향하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초대 교부들 사이에서 인간의 신화에 대한 거부나 반대의 견해가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들은 분명히 이것을 철저하게 기독교적인 문맥에서만 이해했다는 증거라 할 수 있으며, 또한 기독교 역사상 처음의 일곱 공의회들에서 인간의 신화에 대한 어떠한 토의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인간의 신화(잘못되었다는 관점으로는)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다는 증거라고도 할 수도 있고, 또는 토의할 만큼 어떤 확실성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신화교리는 4세기 이후에야 동방교부들 사이에서 구원론의 핵심으로서 정립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현재의 동방교회가 인간의 신화를 초대교부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아닌지 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할지라도, 우선적으로는 철저하게 성경적인 문맥에서 인간의 신화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4.     하나님의 형상과 자연신학

         

A.    로마 카톨릭 교회와 종교개혁자들의 논쟁

 

중세기의 로마 카톨릭 신학에서도 형상과 모양을 구분하고 있었다. 형상은 자연적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모양은 초자연적인 형상으로 구분하였다. 자연적인 형상은 인간이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없어지지 않은 인간 본래의 것,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연적인 은사들로 주신 것으로 영혼의 영성, 인간의 이성, 의지의 자유, 육체의 불멸성 등이며, 초자연적인 형상인 모양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잃어버린 본래적 의를 뜻하였으며, 아담의 타락 후에는 결국 하나님의 형상만이 인간 본성의 특징으로 남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것은 인간의 인간다움에 속하는 본질적 특성이므로, 원죄로 인한 타락으로도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중세기의 로마 카톨릭 신학자로서 가장 대표적인 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형상개념, 즉 영혼의 삼중성인 기억, 지성 및 의지가 인간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을 계속 지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관점으로 하나님의 형상개념을 재해석하여, 이성적 동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자연적 형상이며 또한 하나님의 초자연적 형상이기도 하다고 하였다. 전자는 인간이 그의 이성과 정신 속에서 하나님을 반영하는 의미에서 창조의 형상이고, 후자는 새 창조의 형상 또는 은총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의 형상이라고 보았으며, 아담의 타락 후에도 자연적 형상은 그대로 남아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믿기 위하여 이해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순수이성에 의해 하나님의 존재나 인간 영혼의 불멸에 대한 신념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제시한 논증 가운데 하나가 우주론적 논증인데, 이것은 자연 세계를 관찰함으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와 같이 주장함으로 말미암아, 본래 창조된 대로의 인간은 본래적 의가 없었으나 또한 죄도 없었고 다만 죄의 결과를 낳기 쉬운 경향을 가진 것 뿐이었는데 타락 후에 인간은 본래적 의가 상실되었을 뿐이어서 타락했어도 창조된 때와 같은 상태에 있다고 하였다.

 

로마 교회의 인간 이해에 대한 이러한 이원론적 이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 고급한 이성을 인간의 본질로 부여하셨으나 동시에 육체적 요소로 인해 저급한 세력들(inferiors vires)이 공존하여 서로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초자연적 은총의 선물(supernaturalis donum gratiae)’을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이 선물은 아담의 타락 시에 상실되었고 구원을 통해 다시 회복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인간을 본질적인 것과 추가적인 것, 즉 자연과 은총으로 분리하여 인간의 전적타락 또는 전적부패와 무능을 부정하는 자연신학의 배경이 되었다. 그리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성이나 양심 자체는 구속 없이도 정상적으로 창조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작동한다는 자연신학을 주장한다.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이러한 자연신학을 철저히 배격하였는데,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로서 인간의 전적 타락과 전적 부패와 무능이 깔려 있다.

 

B.     바르트와 브룬너의 논쟁

 

19 세기에 전성기를 누렸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다시 정통주의 신학으로 돌아갈 것을 천명했던 대표적인 신학자들이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룬너이다. 위기의 신학 또는 변증법적 신학으로 일컬어지는 그들의 신학은 신정통주의라고 불리우며, 실존주의적 철학과의 관련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철저하게 성경을 바탕으로 하여 관계의 개념에서 이해한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인간 이해는 단순히 인간의 현상을 다루는 것이지 실제적인 인간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기독론적으로 인간 창조와의 상관 관계,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로서가 아니라 관계의 유비(analogia relationis)’로 이해하였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은 계약이라는 관계 개념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구약과 신약 성경에 대한 바르트의 주석적 이해에 의하면, 인간의 존재는 남성과 여성, 이 양성의 유비에서 창조주와 -의 관계에 있다. -여의 -관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기초 원리가 된다. 이것이 바르트가 말하는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원형으로서,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모형으로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바로 이 원형과 모형이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의 관계와 구별이다. -의 관계는 하나님 자신의 본질 속에 있는 원형(archtype)’,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본질이라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홀로 계신 하나님이 아니고 사랑 가운데 서로 교제하고 계신 하나님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사랑의 교제가 하나님의 삶을 규정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이고 사랑받는 자이고 영원한 사랑이시다. 바로 이 삼위일체성 속에 모든 나-너 관계의 원형과 샘이 존재하고 있다고 하였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사랑의 유비이고, 더 나아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사랑의 유비로 보았다.

 

바르트는 이 관계의 유비개념을 본회퍼에게서 받아들였다. 본회퍼는 그의 창조와 타락에서 남자와 여자의 창조를 해석함에 있어 처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의 유비로서 관계의 유비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하나님의 형상에 비유된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관계의 유비 개념을 발전시켜서 인간은 하나님의 계약 파트너라고 보았고 이에 근거하여 계약신학을 이끌어 냈다.

 

한편 브룬너는 하나님의 형상의 본래적인 의미를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것, 즉 사랑에서 생겨나서 사랑에 스스로 책임지는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여, 인간을 책임적인 존재로 보았다. 여기에서 브룬너는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로 보고 있음이 엿보인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형식적(formal) 형상과 실질적(material) 형상으로 구별한다. 그리고 형식적 형상 가운데서 인간이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피조된 존재임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전적인 타락을 통하여 실질적 형상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브룬너에게 있어서 형식적 형상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하나의 보편적인 접촉점이고, 이 형식적 형상을 통하여 인간은 창조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할 수 있고, 이러한 인식에서 인간은 역사 안에서의 책임적인 삶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결국 브룬너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접촉점은 인간론의 틀 안에서 인간의 형식적 형상, 혹은 자연신학의 영역 안에서의 창조질서인 것이다. 이 형식적 형상을 통해서 인간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브룬너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의 인식능력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타락 후의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유한한 죄인이 어떻게 무한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능력을 얼마만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인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인간의 자연능력을 묻는 것이다. 이것을 접촉점이라 하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브룬너는 형식적 형상이 타락 후의 인간에게도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고 함으로써 모든 자연적 인간의 능력 속에 하나님을 알고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는 것이었다.

 

이에 1934 년부터 바르트와 브룬너의 자연신학 논쟁이 시작되었다. 바르트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히 상실되고 파괴되었으며, 이 파괴는 예외없이 인간의 존재 전체에 미쳤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에 있어서 접촉점은 필요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 성령은 그 어떤 접촉점도 필요하지 않으며 친히 접촉점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와 같은 인간 예수가 계시며 바로 그분만이 진정한 접촉점이 될 수 있다고 하며, 브룬너의 자연신학 가능성을 부정하였다.

 

브룬너는 바르트와의 논쟁에 있어서, 자연신학에 대한 자신의 관심은 교의학적인 것이 아니라 방법론적인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하고, 또한 인간이 자연 가운데 계시된 일반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지식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독립적인 자연신학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으나, 바르트는 자연과 은총을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자연신학의 실재 뿐만 아니라 가능성까지도 거부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계시를 극단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자연신학을 강하게 거부했던 바르트는 일반계시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었는데, 이는 일반계시를 인정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5.     현대 개혁주의에서의 하나님의 형상

 

A.    바빙크, 벌콮 및 베르까우어

 

종교개혁자들을 이어서 개혁주의 토대에 서 있는 바빙크는 인간론에서도 종교개혁자들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따라서 바빙크도 하나님의 형상을 넓은 의미의 형상과 좁은 의미의 형상으로 이해하고 아담의 타락 후에는 좁은 의미의 형상은 상실되었고 넓은 의미의 형상만이 인간에게 남아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바빙크는 하나님의 형상을 전인적으로 이해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이해하였고, 인간의 몸을 하나님의 형상에서 제외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바빙크의 인간 이해에 있어서 독특한 점은 인간을 천사와 구별되는 존재로 보면서,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종족(geslacht)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바빙크가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첫째,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일치성이 형상과 모양이라는 두 낱말로 표시되어 있으며, 둘째,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였으며, 셋째,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함과 동시에 목적을 가지셔서 문화명령을 주셨다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첫 사람인 아담의 무죄한 상태에 대해 기술하기를, 아담은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으로 창조되었다고 함으로써 혹자들의 주장인 진리와 거짓 또는 선과 악의 중립적인 위치로 창조되었다는 말을 거부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첫 사람 아담을 지나치게 영화로운 존재로 표현하기를 거부한다. 그에 의하면 아담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였지만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고, 부패될 수 없고 영생을 아직 소유하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그 존속에 어떤 조건의 성취에 달려 있었던 과도기적인 불멸성을 받았다. 아담은 타락의 가능성을 안고 창조되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벌콮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개혁주의 안에 있는 다양한 견해를 간단하게 소개한 후에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의 구성요소는 a) 인간의 영 또는 혼, 즉 단순성ㆍ영성ㆍ불가시성ㆍ불멸성과 같은 자질들, b) 합리적인 인간의 신체적인 힘과 기능들, 즉 다양한 기능을 갖춘 지성과 의지, c)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을 통하여 나타나는 인간 본성의 지적이고 도덕적인 순전성, d) 물질적 실체로서가 아닌, 불멸성을 공유하는 영혼의 적절한 기관으로서, 동시에 하급 피조물을 지배하는 도구로서의 인간의 몸, e) 땅에 대한 인간의 지배 등이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가 아닌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개혁주의 신학은 단연코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하였고, 아담의 타락으로 상실된 것은 형상의 도덕적 완전성이라고 하였다.

 

바르트 이후의 신학자인 베르까우어는, 신약 및 구약성경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론의 중심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존재의 유비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들 일부 초대교회 교부들, 로마 카톨릭 교회, 동방 정교회 등 을 거부한다. 여기에는 창 1:26~27 말씀의 형상모양을 구별하여 해석하는 것에 대한 반대가 있다. 그는 형상모양을 히브리어 문법 상의 중첩어로 파악하였다.

 

베르까우어는 바르트의 하나님의 형상이해에 대해서는 계승하고 있는 것도 있지만 두 가지 점에서 비판하고 있는데, 1:27 말씀에 대한 주석 상의 문제와 남녀 관계성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함에 대한 비판이다. 베르까우어는 바르트가 이해한 대로의 관계의 유비를 수용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과 관계성을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으로 파악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은총의 대상이라는 측면에서 구원의 실재성 속에 있는 관계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그는 인간이란 하나님과의 떨 수 없는 인간의 관계성과 의존성 속에서 살아가는 실존적이며 전인적인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영적인 것에만 국한시킨다든지 아니면 육체적인 것들에만 국한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인간의 영성과 육체성을 동시에 인정하는 전인에 관계시킨다.

 

베르까우어는 관계의 유비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으로서 이해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말을 성경에서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이란 말이다. 이외에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라는 말이 있다. 그는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할 때 참되고 믿을 만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베르까우어가 이해한 성경적 인간은 영과 육의 통일체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하나님과 이웃과 세계 앞에서 책임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현실적 인간이다.

 

그렇다면 타락한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 베르까우어는 전적 타락과 전적 타락 속에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인 잔재물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그는 잔재물을 타락한 인간 속에 최종적으로 남아 있는 어떤 보존물이 아니라, 죄의 부패의 힘에도 불구하고 이탈될 수 없는 부분, 즉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는 인간도 역시 인간이며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성과 부여된 재능에서 떠날 수 없다는 것으로 이해하였고, 이는 잔재물을 인간의 어떤 영적 속성 또는 능력의 일부분과 같은 존재론적 특질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소외 속에서도 전인적인 면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브룬너의 형식적 형상에 대한 개념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형상의 이중적 국면을 드러내는데, 넓은 의미의 형상은 타락한 인간, 즉 자연인에게도 남아 있는 인간의 인간성이기에 타락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인간인 것이며, 또한 좁은 의미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회복되어져야 할 과제이라고 보았다.

 

다른 한편으로 호크마는 하나님의 형상을 구조적이며 기능적인 면과 관계적인 면으로 구분하기도 하였고 종말론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살펴 보고자 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을 전인적이며 관계의 유비로 보았을 때의 결론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즉 사람을 어떠한 존재로 창조하실지 그 존재의 속성과 능력과 자질을 결정하기 전에, 이미 그 원형과 모형의 관계를 갖도록 창조하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이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를 그대로 사람에게 심어주어서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며 하나님 앞에 서는 존재로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고 또한 그 사랑의 관계를 사람과 사람에게로 심어주시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관계가 존재에 선행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인격적 관계는 인격적 존재를 기반으로 하여 발생하기 때문에 관계의 유비존재의 유비를 어느 정도 함의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존재의 유비관계의 유비안에서 상고하지 않고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뒤틀어지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가 불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대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존재의 유비로 간주하는 일체의 설명을 모두 거부한다. 반틸이 지적했던 것처럼 존재의 유비는 사람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피할 수 있다는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창 1:26~27 말씀의 형상모양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전인적이며 관계의 유비로서 이해하여 인간론을 전개한다.

 

6.     맺는 말

 

지금까지 본고에서는 기독교적 인간론의 핵심인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견해가 초기 기독교 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변화되어 왔고,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여러가지 신학적인 차이를 발생시키는지 예를 들어 살펴 보았다.

 

초기 기독교 시대로부터 하나님의 형상은 거의 대부분 실재론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 왔으나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이러한 견해는 근본적으로 변화를 맞게 되어 현대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영과 육의 통일체로서의 전인적인 인간이며 또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으로서 이해되고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데엔 커다란 어려움과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신약 및 구약 성경 모두 인간론의 핵심에 하나님의 형상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간접적으로 파악하고 확인해야 한다. 더욱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선포하고 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렇듯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는 인간론뿐만 아니라 구원론과 기독론, 심지어 신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봄으로써 올바른 견해를 확립할 수 있고 또한 확인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보면 비록 시대적 환경이나 기독교적 이해가 성숙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 ‘하나님의 형상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기독교에 해악을 끼친 사례들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그 예로서 펠라기우스를 제시하여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그의 잘못된 이해는 잘못된 구원론을 주장하게 하여,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이끌었으며, 또한 인간을 미완성의 존재로 이해한 동방교회는 인간의 신화(神化)를 주장하도록 이끌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중세기에는 역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해석을 함으로써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게 되었고 자연신학의 기초를 놓았으며, 종교개혁자들은 중세기의 이러한 견해를 강하게 부정하고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견해를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해석으로 인하여 발생한 자연신학에 대한 논쟁은 20세기에서도 바르트와 브룬너를 통해서 다시 나타났고 그들의 신학은 계승되기도 하였고 또 비판되기도 하였다.

 

현대 개혁주의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여전히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대체로 인정하는 몇 가지 공통적인 점들도 있다. 첫째는 창 1:26~27 말씀의 형상모양에 대한 구별을 거부하고 하나의 의미를 중첩적으로 표현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이나 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의 통일체로서의 전인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이 그 가장 기본이라는 것이며, 넷째는 아담의 타락 후에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게 되었으나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라는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점 등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올바른 견해가 정립되어 있으면 인간론의 가장 기초가 확보되며 이에 따라 죄와 타락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하여, 심지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올바른 관점을 정립할 수 있게 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으로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전인적인 존재를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리고 더욱이 창세기의 표현대로 우리의 형상우리의 모양의 복수성을 따라서,  삼위일체 안에서의 사랑의 관계가 사람의 창조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다. 사람은 결코 혼자 존재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도록 창조되었으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교회론으로도 이어져야 한다. 우리는 집합적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창조되었기에 각자의 삶에서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뿐만 아니라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의 중요성과 교회의 중요성을 깊이 생각해야 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교회론으로 확장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이 글은 필자가 오래 전에 다른 블로그(truthnlove.tistory.com)에 올린 글을 조금 수정하여 여기에 다시 올린 것임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