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제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13:34~35)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일까... 이 질문에 어쩌면 우리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난 제자 훈련 한번도 받은 적이 없어서 아직 제자가 아니라고 하든지 또는 제자라는 말을 듣자마자 제자란 성도들 중에서 뭔가 특별한 위치에 있는 그룹의 사람이라서 난 아직 아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교회들, 아마도 여기의 한인교회들도 어느정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만, 한국교회들이 과거 한동안 제자 훈련에 열심을 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제자 훈련 교재들을 들고 다니며 열심히 성경공부하던 성도를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여기저기서 제자 훈련한다고 모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역사를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초창기에는 복음의 씨앗을 뿌리느라 온 힘을 기울였고 그 결과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까지 얻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 등으로 배교하는 자들이 생기고 일제의 핍박으로 인해서 성경을 제대로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고,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초창기에 받은 복음에 깊이를 더할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서둘러 부흥을 이루려는 열심으로 내몰렸습니다. 그때에는 먼저 국내에서는 부흥, 그리고 나서 어느정도 규모가 되자 이제 해외로의 선교에 집중하며 제자도를 내세웠습니다. 마태복음 28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대위임령,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따라 모두가 전도에 열심을 내어야 했고, 사영리나 전도폭발 등 여러가지 전도 관련 훈련들이 있었고 해마다 교회에서는 전도왕을 뽑아 시상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마음 속에는 자연스럽게 전도를 잘 하는 사람이 믿음이 더 좋은 사람 내지는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는 사람 등으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이야말로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인 것이고 나머지는 그저 그런 평신도라고 생각되었지요. 지금도 그런 생각들이 우리들 안에는 남아 있습니다. 제자의 의미를 이 대위임령에서만 찾아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려면 나부터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열심을 냈었고 그 결과는 전도와 선교로 나타나게 된 것이죠. 따라서 제자에 대한 개념이 조금은 성경과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열심이 오히려 이런 결과를 만들어 냈고 지금은 제자라고 하면 뭔가 특별한 성도를 의미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져 있습니다.
여기 미국에서의 한인 교회들 역시 한국의 교회들을 많이 닮아 갔습니다. 한국에서 이민오신 분들을 중심으로 해서 교회가 모이다 보니까 아무래도 한국 교회들을 닮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에 열심을 내려고 이민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서 어떻게든 그들을 교회로 인도해서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두면서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인터넷의 발전으로 인해서 그러한 프로그램들은 거의 다 없어졌지만 말이죠. 한인 교회에서도 제자라는 개념은 비슷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제자의 개념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생각했던 개념이 과연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일까요? 주님께서 주신 말씀에만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 오늘 봉독한 말씀을 다시 살펴 보겠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 말씀에서 맨끝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때서야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고 하셨나요 아니면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된다고 하셨나요? 제자가 되는 것과 제자로 알려지는 것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제자로 알려진다는 것은 그 사람은 이미 제자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제자’라는 단어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 앞에 ‘열둘’이라는 한정수식어가 붙어 있으면 특별히 열두 사도를 의미합니다만 일반적 의미에서 제자란 모든 신자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 중에 열둘을 택하셨다고 기록되어 있고, 요 6:66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6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파했던 그날에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제자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 특별히 주님과 구원자로 영접하고 따르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제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인가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말과 같고 또한 예수님을 주님과 구원자로 영접하였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제자라는 단어 안에는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무엇이든 반드시 순종하겠다는 다짐이 포함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실 것이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며 따른다고 하면서도 생각하기를 ‘먼저 좋은 것 주시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겠습니다’ 하지 않나요? ‘더 좋은 걸로 먹고 더 좋은 것 갖기를 원하니, 이것들 먼저 주시면 그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겠습니다. 먼저 주세요’ 하고 말이지요. 예수님을 나의 주님과 구원자로 고백하면서도 나에게 좋은 것 또는 뭔가 이익을 주는 구원자 부분은 오케이지만 나에게 뭔가 순종을 요구하는 주님 부분은 내가 하고 싶으면 오케이고 그렇지 않으면 적당히 오케이인 척만 하든지 아니면 은연 중에 무시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기록한 본문 말씀은 너무도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자라면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요. 그 사랑은 원수를 위해서도 목숨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새 계명인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도 레위기 19:18에 보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도 율법 전체를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정리될 수 있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그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는 정도까지의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원수를 사랑하는 정도까지, 예전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는데 이제는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내주고 5리를 함께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주고 겉옷을 달라 하면 덧옷까지 주며 예수님처럼 목숨까지도 내주는 사랑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새 계명인 것입니다. 제자는 마땅히 이런 사랑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줄 각오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3:16에서 사도 요한은 이것을 더욱 직접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리고 또한 요한복음 14장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는 온 유대를 돌며 세상 사람들에게도 자신을 나타내셨는데 십자가 이후로는 제자들에게만 하시고 세상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자 어느 제자가 질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세상에는 나타내시지 않으시려 하시나이까? 하고요.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하였습니다. 이제는 너희들이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과 연합된 자, 예수님을 닮은 자, 예수님으로 옷입은 자, 예수님의 대사이자 예수님의 향기가 나는 자인 우리가 세상에 예수님을 나타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서 예수님을 나타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 먼저 받았으니 다른 사람에게 줘야지요.
교회에서 목사를 비롯한 사역자나 직분자로 세워졌다는 의미는 예수님처럼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사랑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교회가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그 길에 서서 예수님을 그 정도까지 닮고 싶어서 애를 쓰는 사람임을 교회가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앞장서서 교회를 이끌고 관리/통제하라고 세워진 직분이 아닙니다. 앞장서신 분은 예수님이시니 그분을 닮아서 성도를 위해 서로 사랑하며 성도들이 예수님만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섬기라는 직분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주신 이러한 사명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겠다고 예수님 앞에 결심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요 우선입니다. 어디에서든 미운 사람, 싫은 사람,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을지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그 사람을 위해서도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음을 깊이 깨닫고 나도 예수님처럼 그 사람을 위해서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섬기며 사랑하는 길을 걷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든다고 또 내 기준에 너는 틀렸다고 잘라내고 분리하고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그 사람이 큰 잘못을 했을지라도 잘못했으니까 떨어져 있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단자가 아닌 한, 오히려 그 잘못으로 인해 겪어야 할 어려움까지 함께 겪어주며 함께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사랑을 보여야 합니다. 힘들겠지요. 어렵겠지요. 답답해서 심장이 터져버릴 것처럼 느껴지겠지요. 그래도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 기록된 사랑은 맨먼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면서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두들겨 맞아도 견디며 참아야 하는 인내를 감당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이러한 직분에 아직 세워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이 사랑의 영광스러운 직분을 바라보면서 그 길에 들어서 있음을 고백하기에 이 자리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쉽게 될까요? 저 이제 예수님 믿기로 했어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눈물을 흘리고 소리높여 찬송하면 저절로 될까요? 절대로 쉽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서 구해야 하고 또 구한대로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구하고 믿음으로 삶의 현장에 적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그 마음, 원수를 위해서라도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의 마음을 우리에게도 허락해 주시기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사업이 잘 되게 해달라고, 월급 많이 받는 직장 주시라고, 자녀들 좋은 대학 들어가게 해달라고, 몸이 좀 더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 저도 알고 싶어요 배우고 싶어요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어요 하고 먼저 기도해야 됩니다.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며칠씩 금식기도 하면서 이런 기도는 한번도 드린 적이 없다면 우리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내가 아는 예수님이 성경에 기록된 바로 그 예수님이 맞는지, 그리고 그분을 주님과 구원자로 영접한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가 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왜곡되고 뒤틀리고 비틀어져 버린 것은 아닌지 치밀하게 확인해 봐야 합니다. 이 모든 걸 혼자서 하기는 힘들고 어려우니까 함께 하라고 이 교회 공동체를 세워주셨습니다.
은혜가 참으로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비록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도 우리를 찾아주시고 우리를 위해 피흘려 죽으시고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면 반드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까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까지도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무엇인들 주시지 않겠습니까? 요한복음 15장 7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다만 요즘 시대 미국의 상황에서 이웃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경우는 쉽게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자신이 정하신 때에 우리를 그러한 상황에 두시기 전에는 그런 경우는 평생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옛 사람을 죽이고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낼 기회는 항상 있습니다. 교회에서나 가족 중에서나 이웃 중에서 내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또는 밉고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서, 지금까지는 그 사람과 마주칠 때 얼굴 보기가 싫어 다른 길로 돌아가거나 서로 스쳐지나갈 때에 얼굴을 돌린다거나 아무런 말도 섞지 않고 무시했다면, 이제 그 사람을 마주칠 때 먼저 인사를 건네고 눈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우리 주위에서 훈련할 수 있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하나님께 구하시고 실제 삶의 현장에서 실행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주실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을 더욱 닮아가는 기쁨을 누리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한가지 꿈을 꾸기를 바랍니다. 내가 섬기는 교회가 이러한 사랑으로 넘쳐서 예수님의 제자로 드러나기를 바라는 꿈을 꾸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세상 사람들이 ‘저 교회에 가면 예수 그리스도를 느낄 수 있어’ 하고 말하는 날이 오기를 바래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글을 준비하며 이렇게 영광스러운 꿈을 꾸면서 저 자신은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뭐가 된 것처럼 여기저기서 성경말씀을 가르치고 나름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랑하며 열매맺으며 사는 것처럼 저 자신에 대해 생각해 왔었는데 이 글을 준비하면서 냉정하게 되돌아보니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더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이제 좀 더 알고 더욱 성장하여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싶어요, 그 사랑 제게도 주세요, 간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조차도 어려워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스럽겠지만 이제 코로나가 종식되고 교회가 다시 모이게 될 때에 우리는 어떠한 교회가 되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또 다짐해야 합니다.
결론을 내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어 그분을 주님과 구원자로 고백하는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말이 갖는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고픈 것, 갖고픈 것, 먹고픈 것, 이루고 싶은 것이 먼저이고 하나님 나라와 의는 나중에’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제자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과 같이 제자가 그 선생님을 닮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으신 분이셨지만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도 내놓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죄와는 아무 상관도 없고 죽음을 맛보셔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지만 단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선생님이십니다. 그분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라면 말입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고 사도 요한은 권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서 이것이 쉽게 되지 않기에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고 싶다고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고 그 사랑 나에게도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뭔가를 받고 싶어서 금식기도했던 것 이상으로 간절하게 구해야합니다. 그리고 구한대로 우리의 삶에 적용해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는 미운 사람, 싫은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서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삶에는 기쁨이 넘친다고 주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렵고 힘들고 고난의 길 같지만 그렇지 않다고, 오히려 평안과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삶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다함께 이 길을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성령님께서 묶어주신 한 공동체로서 모두 함께 손에 손잡고 이 길을 가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성하게 발산하는 교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는 길을 가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그렇게 결단하는 이 시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