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과 기도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을 강조하는 개혁주의 신자들은 가끔 이런 의문을 갖는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고 다 하실 수 있으며 다 예정하셨다면 우리의 기도는 무슨 필요가 있을까 하는 질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리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고 우리의 필요에 따라서 채워주실 것을 믿기에 굳이 기도할 필요도 없고, 또 기도한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을 보면 무수히 많은 기도가 나온다. 시편은 거의 다 노래이면서 기도라 할 수 있고, 심지어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그러면 개혁주의 신학에서 예정과 기도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먼저 예정 또는 작정에 대해서 살펴보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자기 자신의 뜻으로 세우신 지극히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에 의해, 원하시는 대로,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변치 않게 정하셨다고 고백한다. 즉 작정은 하나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작정하시며 성령님을 통해서 실현하신다. 작정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의지적 결정으로서 하나님이 온 우주의 최고 주권자로서 자유롭게 결정하시는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차원’과 ‘자유롭게’라는 단어이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차원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좋은 결정을 다른 어떠한 존재의 간섭과 영향 없이 전적으로 자유롭게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일방적인’ 결정을 보면서 마치 어떤 독재적이거나 강제적인 의미의 느낌을 받는다면 한가지 아주 중요한 것을 잊은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와 신실함의 하나님이시다는 진리이다. 하나님은 어떠한 작정을 하실 때에도 항상 사랑과 공의와 신실하신 하나님으로서 작정하신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어떠한 ‘일방적인’ 작정도 사람의 인격과 자유의지를 무시하거나 로봇처럼 취급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뜻대로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그만큼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작정이 사람의 시공간 안에서 실현될 때에도 하나님이 강압적으로 사람의 의지와 생각을 강제하여 무조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자유의지가 손상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작정이 실현되도록 하시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것뿐이다. 우리의 이해와 지식으로는 절대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하게 아시는 것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만 한다. 아주 조심스러운 예를 들어보면, 이창호 같은 고수가 초등학생과 바둑을 두면서 초등학생이 다음 수를 어디에 둘지 이미 다 알고 있고 또한 그렇게 두도록 만들어 가면서 바둑을 둘지라도 초등학생이 자유의지가 없는 로봇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 초등학생은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최선을 다해서 바둑을 두면서 고수의 뜻을 조금이라도 배우는 것이다. 비록 이 예가 하나님의 작정이 시공간에서 사람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을 정확히 다 설명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 이 예에서 고수는 단지 초등학생의 수를 읽고 환경을 만들어주어서 다음 수를 이끌어 내는 것뿐이지만 실제 하나님은 이런 것을 포함해서 초등학생의 마음에 역사하신다 -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제한적으로나마 보여준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수많은 예언과 명령이 기록되었고 또한 성취되었지만 그 예언과 명령의 성취를 위해 어느 사람도 로봇처럼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이 사람을 존중하시면서도 – 심지어 반항하는 요나까지도 존중하시면서 –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다는 기록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이 사람의 자유의지와 양립될 수 없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차원이 다른 존재이시므로 하나님은 얼마든지 사람의 자유의지를 손상하지 않으시면서도 또한 완전히 자유롭게 예정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예정을 높이면 사람의 자유의지가 손상되고 또 반대로 사람의 자유의지를 높이면 하나님의 예정의 자유가 제한된다는 생각은 하나님과 사람을 시소처럼 동일한 차원에 놓는 것이기에 성경적인 생각이 아니며 하나님을 우리의 이해와 지식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과 소통하는 수단이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함께 영적으로 호흡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수단이다. 따라서 기도드린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인격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차원이 아닌 우리 사람의 차원으로 내려오셔서 우리의 대화의 상대가 되어 주시는 것이며, 우리와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나를 변화시키시는 은혜인 것이다. 이것을 또한 예로 들자면, 아버지가 자녀의 모든 필요를 알며 또 그러한 필요를 다 채워주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녀와 대화하며 자녀의 필요에 대해서 듣고 응답하고 함께 함으로써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자녀가 아버지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간절하게 호소하고 뒤돌아 나가는 것을 소통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또한 마찬가지이다. 기도에는 우리의 간구가 포함되지만 그것은 아주 조그만 부분이다. 감사와 함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해야 한다.
다만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어떤 물리적인 소리를 듣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은 그렇게도 하실 수 있으시지만 그리고 성경의 인물들과 때로는 그렇게 소통하시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기도 가운데 성령님을 통해 성경 말씀을 생각나게 하심으로써, 또는 우리의 생각의 방향을 돌리심으로써, 또는 어떠한 사건의 의미를 깨닫게 되거나, 또는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 주신 조언을 상기시키시는 등등 다양한 방법으로써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소통할 수 없고 변화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시고 또 다 채워주고 계시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고 계신다는 것을 인격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하고 계시며 어떠한 위치로 이끌어 가시는지 알려면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 시공간에 묶이고 유한한 존재가 그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과 소통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우리는 기도를 해야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를 나눌 수 있으며, 그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다 더 알게 되며, 사람의 유한성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주님도 마태복음 6장에서 기도를 가르쳐 주시며 말씀하시길,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필요를 이미 다 알고 계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질병에 걸렸다면 그는 분명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치유를 받기 원하는 기도보다 먼저 그 질병의 의미를 하나님께 여쭈어야 한다. 만일 어떤 죄로 인한 것이라면 회개하고 죄를 씻으며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도록 변화되기를 기도해야 하고, 또는 어떤 죄 때문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고통이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장을 어떻게 이루며 그가 감당해야 할 위치가 무엇인지 기도해야 하는 것이며, 또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냥 무조건 몇 날 며칠이고 하루 종일 엎드려 치유만을 간구한다면 그것은 그냥 떼쓰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질병을 통해서 그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기를 원하시는 것이지 그를 떼쟁이로 만들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예정/작정이 우리의 기도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예정으로 인해서 우리는 더욱 기도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과 소통을 통해서 우리가 변화되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기도해야만 한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인내해야 한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높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에 항상 즉각적으로 반응하시지 않으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내하며 때를 따라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려야 하고 그 인내와 기다림 속에서 변화되고 하나님을 더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작정은 우리를 향한 사랑과 공의와 신실하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항상 기도하며 소망을 잃지 않는 크리스찬이라면, 당신은 기도가 원하는
대로 응답받는 것보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에 더 많은 가치를 둘 것이다. 이것이 기
도의 궁극적인 목표이다"고 말한 조지 맥도널드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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