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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9.14 셰계관을 중심으로 본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복음 전도
  2. 2020.09.12 복음의 기초
  3. 2020.09.12 저녁의 꿈
  4. 2020.09.05 모든 일에 감사드리자
  5. 2020.09.04 초겨울 새벽
  6. 2020.09.04 기억의 시간
  7. 2020.08.29 영적 부족함을 절감하며
  8. 2020.08.29 예감
posted by 풀숨 2020. 9. 14. 09:54

세계관을 중심으로 본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복음 전도



사람들은 현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라고 말한다. 어느 하나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고 변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라고 이해하며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대체로 인정했던 “진리”마저 이제는 더 이상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고, 진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만 진리인 것이라고 주장하며 각 개인과 각 공동체의 개성을 존중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런 주장을 통해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결론으로 인도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를 사는 크리스찬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을지 간단하게나마 고민해 보고자 한다.

본 페이퍼는 이러한 고민을 위한 사고의 틀로서 세계관에 대한 고찰을 바탕으로 하고자 제임스 사이어의 두 책, “코끼리 이름짓기”와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을 중심으로 한다. 이는 세계관이야 말로 세상 사람들의 가장 근본적인 생각의 바탕을 정리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별히 본 페이퍼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을 중심으로 하여 이 시대를 공유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지혜롭게 전파할 수 있는 방법을 살펴 본다.


세계관이란

칸트가 잠깐 스치듯 언급하고 지나갔던, 그리고 독일 관념론 철학에서 처음 사용된 세계관이란 용어는 처음에는 상당히 풍부하고 광범위한 의미로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맥락에 등장하여 사용되었다. 따라서 어떤이들은 세계관이란 아주 모호한 개념이라고 보았고 또 모호하기 때문에 유용하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기독교 진영에서는 맨처음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신학자인 제임스 오르가 이 용어를 사용하여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하여 기독교를 보다 뚜렷하게 당대의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고자 하였다. 이 개념은 아브라함 카이퍼 등 다수의 기독교 신학자들을 거쳤는데, 카이퍼는 세계관을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삶의 체계”로 이해하며 전적으로 “하나님, 인간, 세상”이라는 관점에서 정립하고자 하였다. 제임스 사이어는 세계관을 이렇게 정의한다.


세계관이란 이야기의 형태로 혹은 실재의 근본적 구성에 대하여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일관적이든 비일관적이든) 보유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부분적으로 옳거나 완전히 잘못된)로 표현되는 것으로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몸 담을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주는 하나의 결단이요 근본적인 마음의 지향이다.


그가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마음의 지향”이라고 정의한 의미는 한 사람의 생각과 판단과 행위를 결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바탕이 바로 그 사람의 세계관이란 의미이다. 그리고 사이어는 세계관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다음의 7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세계관을 정의한다: “1. 진정으로 참된 실재는 무엇인가? 2. 외부의 실재 즉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3. 인간은 무엇인가? 4. 인간이 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5. 지식이 가능한 까닭은 무엇인가? 6.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7.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질문들은 존재론과 인간론, 인식론과 윤리등을 포괄하여 정신 체계의 전 영역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금석이 되는 질문들이다.

이러한 7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연구함으로써 이 세상에는 사람 숫자 만큼 많은 세계관이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지만 또한 중요한 세계관은 손가락을 셀 수 있을 정도 만큼 밖에는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압축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에서 모두 7개의 세계관을 정리하였다. “기독교 세계관, 이신론 세계관, 자연주의 세계관, 허무주의 세계관, 실존주의 세계관, 뉴에이지 세계관,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세계관”으로 정리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많이 참조하는 위키백과에 의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을 중시하는 모더니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로부터 시작하였다고 기술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어난 해체주의의 영향을 받아 예전에는 당연시 여겨지던 것들을 해체하여 새로운 경향을 세우고자 하였다. 이는 건축으로부터 시작하여 사각형의 상자 모양의 건축을 둥근 형태라든지 심지어 휘어진 형태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 경향은 다른 분야로 확산되어 그 다음에 문학이 영향을 받았고 철학으로 퍼져나갔다. 철학에서도 이성 중심에 의한 일률적인 것을 거부하고 다양성을 강조하며, 이성을 중시한 모더니즘의 철학도 하나의 담론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렇듯 이성에 의해 정형화된 구조주의를 해체하고 다양성과 다원성으로 나아갔다.

제임스 사이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분석함에 있어서 니체의 “광인”의 한 부분을 인용하여 모더니즘 시대의 마지막 부분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정의하였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 진리의 죽음, 곧 신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리요타르의 정의, 즉 포스트모던이란 “거대담론에 대한 불신”이라는 것을 인용하여 서구 사회가 인정해 왔던 하나의 거대담론을 거부하고 다양성과 다원성으로 나아간 것이 포스트모던한 삶이라고 분석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관의 가장 중요한 점은,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은 실재에 대한 존재론을 가장 우선적이며 모든 사고의 근본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이어는 하나의 세계관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7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중점적으로 분석하였다고 상기하였다. 그 첫번째 질문이 바로 “진정으로 참된 실재는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에 대한 질문이었다. 왜냐면 존재론이 의미론 보다, 즉 형이상학이 인식론보다 앞서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의 사고는 이것을 거부한다. 실재적 존재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인식론이 존재론보다 더 앞서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실재적 존재가 감추어져 있다 함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실재적 존재 자체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알 수 없고 언어로 정의되는 대로만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곧 언어 또는 문학에 대한 재정립을 요구하며, 미쉘 푸코는 언어가 권력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하였다. 언어로 정의된 대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질문에 대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렇게 답한다고 사이어는 분석하였다. “실재 자체에 관한 진리는 영원히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뿐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에서는 우리가 실재에 대해서 진실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재를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의 진정성은 단언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한다. 다만 언어는 어느 담론에 따르게 하는 힘, 곧 유용성만을 갖는다고 본다. 그래서 어느 담론에 대해서든 공동체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그 공동체 안에서 진리가 될 수 있다. 다른 공동체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말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일 뿐이다. 사이어는 이 부분에 대한 결론으로서 이렇게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속에는 (1) 계시에 의한 확정적 거대담론이라는 ‘전근대적’ 관념에서 (2) 대응의 진리에 이를 수 있는 인간 이성의 자율성이라는 ‘근대적’ 관념을 거쳐 (3) 우리의 목적에 걸맞는 언어를 구성함으로써 우리가 진리를 창조한다 – 비록 이런 언어가 분석의 순간에 해체되지만 말이다 - 는 ‘포스트모던’ 관념으로의 이행이 존재한다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렇게 답한다: “실체적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에 관해 묘사하는 그 언어에 의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존재다.” 사이어의 분석에 의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은 스스로 무엇을 할지 선택함으로써 자기자신을 만들어 가는 존재로 이해한다. 이것은 진화론적 사고에 의하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물론 진화론은 실체적 자아를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그러한 실체적 자아가 있다면 그것은 진화의 산물인 것이며 없다고 하여도 그것도 진화의 산물인 것뿐이다. 그러나 진화론 역시 인간은 지금도 진화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생각을 강화시켜 준다. 따라서 윤리란 어떠한 절대적인 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진리와 마찬가지로 공동체의 동의와 필요에 의해 정의되는 것일 뿐이다.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필요에 따라 정의되는 언어적 구성물일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인간에 대한 관점과 윤리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사이어는 이렇게 정리한다.


여기서도 (인간에 대한 관점에서도: 본 페이퍼가 삽입한 것임) 비슷한 변화를 볼 수 있다. (1)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존귀한 존재라는 ‘전근대’의 유신론적 관념에서 (2) 인간은 돌연변이와 적자생존에 근거한 무계획적 진화의 결과인 DNA 주형의 산물이라는 ‘근대적’ 관념을 거쳐 (3) 인간이란 스스로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에 의해 구성된 비실제적 자아라는 ‘포스트모던’ 관념으로의 변천이 그것이다.


(윤리에 대한) 변화의 추세를 정리해 보자. (1) 초월적인 하나님의 성품 – 스스로 선하시고 그 선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 에 근거한 ‘전근대’의 유신론적 윤리에서 (2) 보편적 인간 이성과 경험, 객관적인 선과 악을 분별하는 인간의 능력에 근거한 ‘근대적’ 윤리를 거쳐 (3) 도덕은 선과 악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복합적인 언어들이라는 ‘포스트모던’ 관념으로 변천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위에 기술한 특징들을 생각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언제나 유동적이며 상대적이며 다원적이고 개방적임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다 상대적일 뿐이다, 절대적인 진리란 없다, 또는 진리의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하나 밖에 없는 것이 아니다는 등등의 많은 이야기를 우리는 오늘날 우리 주변으로부터 듣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리요타르의 주장을 눈여겨 볼만 하다. “설사 어제 받았다 해도, 이미 받은 것은 모두 … 의심해야 마땅하다. … 어떤 작품이 근대적이려면 먼저 포스트모던적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발생 단계에 속하며, 그 상태는 언제나 계속되고 있다.”

이제 이러한 주장은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파고들어 동성애자와 같은 성소수자들 역시 그저 다른 사람일 뿐이지 잘못된 사람이거나 ‘죄인’일 필요가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는 필연적으로 다양성 및 다원성을 낳게 된다. 그리고 아무런 절대적 가치판단의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다양성 및 다원성은 무조건적인 포용 또는 공동체 우선주의로 결과될 수 밖에 없다. 모두의 주장을 다 동등하게 인정해서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나 또는 우리 공동체의 주장이 가장 우선시될 수 밖에는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푸코의 말처럼 언어가 즉 이야기 또는 담론이 권력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되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권력을 쥐게 된다. 이것은 더 이상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에 따라서 모든 것이 결정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되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곧 권력이 되는 것이다.

세계관에 대한 다른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면에서는 – 예를 들어, 우주에 대한 관점이나 진화에 대한 관점에서는 자연주의 세계관과 비슷하고, 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면에서는 무신론적 실존주의 세계관과 비슷하며, 또 인식론의 한 면에서 실재에 대한 아무런 이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의 극단으로 치우치거나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일 뿐이라는 극단으로 치우치면 결국 아무것도 참된 의미는 없다는 허무주의 세계관과도 비슷하기도 하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이 모든 세계관의 시대를 거쳤기 때문일 것이며, 다만 이렇게 자연주의나 실존주의의 전철을 밟고 있으나 거기에 언어적 색채를 가미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자연주의와 마찬가지로 인간 자체가 우연의 산물일 뿐인데 사후 세계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조차 없는 것이 된다.

마지막으로 사이어가 제기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을 살펴 보자. 사이어는 포스트모더니즘 관점의 긍정적 역할을 먼저 열거하는데, “첫째, 포스트모더니즘은 낙관적 자연주의를 정확하게 비판한다… 둘째, 언어가 권력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지적도 정확한 통찰이다… 셋째, 우리의 인식 작용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에 주목하는 입장은 우리가 유한한 인간으로서 제한된 관점을 갖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는 것들이다. 그러나 또한 그는 비판적인 입장에 포스트모더니즘의 부정적인 또는 모순적인 것들을 열거하였다. “첫째, 모든 거대담론에 대한 부정 그 자체도 하나의 거대담론이다… 둘째, 우리가 실재에 접근할 수 없다(사물의 진실을 지칭하는 의미에서 사실이라는 것이 없다)는 관념과 우리가 실재에 관한 이야기만 들려줄 수 있다는 관념은 서로 자가당착적 관계에 있다… 셋째, 언어의 불확정성을 주장하는 해체주의의 견해는… 해체주의자의 명제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넷째, 인간 이성의 자율성과 충족성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은 인간 이성의 자율성과 충족성에 기초한다”는 것들이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자체가 스스로 모순을 품고 있는 불완전한 세계관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과 전도의 방향

이제 기독교 세계관을 살펴보자. 이 세계관은 우리 크리스찬에게는 너무도 익숙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살펴도 충분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관과는 너무도 다르게 기독교 세계관은 가장 먼저 절대적인 유일신을 인정하고 그 존재로부터 다른 모든 것이 비롯되었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존재론이 인식론 보다 앞서는 것으로 가정하며 그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우주만물이 창조되어 존재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된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존재,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져서 언제나 하나님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한다. 하나님께서 정의하신 대로의 인간일 뿐이며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다양성을 가지고 사는 존재라고 주장하며, 모든 윤리와 가치 판단의 기준은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기독교 세계관은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가장 기본적인 시작점으로 삼기 때문에 이 우주는 열린 우주라고 주장한다.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주와는 차원이 다른 초월적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그 초월적 존재로 인하여 우주는 닫혀 있는 것이 아니고 열려 있는 것이 된다. 모든 존재가 우주를 벗어날 수 없고 그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우리도 닫힌 우주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고 초월자를 통해서 우주를 그리고 우리 자신을 넘어서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기독교 세계관과 다른 모든 세계관과의 가장 크고 뚜렷한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기독교 세계관을 아주 간단하게 살펴보기만 해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관과는 너무도 상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유신론적 절대자를 의지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뚜렷하게 반대편에 서 있다. 창조주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주는 처음부터 우연에 의해 생겨났고 모든 사물은 진화에 따른 우연의 결과일 뿐이며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절대적인 진리로 소개하고 선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소위 지성인일수록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반감이 심하여 창조주와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거부하기도 한다.

복음 전도에 있어서 당연하고도 기본적인 사항이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상대방을 이기려고 하거나 나의 생각으로 굴복시키려 해서는 안 되고 최선을 다해서 겸손하고 정성을 다해 대화하며 성령님께서 상대방의 영혼에 역사해 주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러한 자세에서 우리가 복음 전도를 위해 불신자와 대화를 나눌 때에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라는 생각을 먼저 불식시키고 뭔가 절대적인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진리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다만 다원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무조건 다 악하고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상대주의적 입장을 누그려뜨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대화의 시작으로써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이해하는 상대주의의 모순점, 즉 포스트모더니즘 세계관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주장은 과연 절대적인지 아니면 상대적인지 깊게 생각해 볼 기회를 먼저 주어야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앙처럼 확고한 그 주장이 절대적으로 올바른가 아니면 그것마저도 상대적인 것인가 하고 토론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주장은 명백하게 스스로 모순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이야기와 진리를 선포해도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 될 뿐이고 자기와는 상관없는, 자기는 다르게 생각하지만 옳은 것으로 그리고 그렇게 해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으로 결론내리게 될 뿐이다.

복음 선포를 위해서는 먼저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양성이 가져다주는 유익을 선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진리의 절대성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즉 일반은총 아래서 모든 사람이 누리는 다양성은 복된 것이지만 특별은총 아래서 특별하게 계시된 진리의 절대성은 더욱 복된 것이라는 확인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다 다르게 다양하게 만드셨지만 또한 그 다양함 가운데서도 하나의 절대적 진리를 알 수 있도록 양심과 온 우주에 심어놓으신 창조주의 지문을 이해하게 해야 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창조냐 진화냐 하는 논의로 이어지므로 세상 사람들이 과학이라고 믿는 진화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는 성소수자인 동성애자들의 인권운동에 대해 올바른 이해와 함께 그들을 크리스찬으로서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성경적인 판단을 가지고서 대화하여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이 문제를 마치 자기편과 아닌 편을 나누는 데 시금석처럼 사용하기도 하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하는데, 그들이 다원성과 다양성을 강조하고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데에는 그렇게 함으로써 창조주 앞에서 죄인이라는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특별히 동성애자들에게 심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현재 기독교 안에서도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동성애자 목사가 있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아예 동성애는 죄가 아니라는 주장까지도 서슴없이 공개적으로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기에 다양성과 다원성을 포용해야 하는 경우에 동성애의 경우처럼 복음에 따르면 죄인 것도 죄가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세상 사람들은 동성애는 죄가 아니고 원래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라며 동성애는 정신병도 아니고 죄도 아니며 하나의 자연스러운 신체적 및 정신적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경우에 동성애를 명백하게 죄로 규정하면서도 동성애자를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동성애가 죄이므로 동성애자도 죄인이며 따라서 그는 상종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취급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부르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 가신 길을 우리도 따라서 가야 한다. 동성애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처럼 다양성과 다원성 및 절대적인 진리 사이에서 올바르게 자리잡지 아니하면 복음 전도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사람들에게 점차 더욱 널리 퍼지는 이유는 이러한 다양성과 다원성에 대한 주장이 마치 자기들의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덮어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니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하지 말고 서로 다르면 다른 대로 인정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며 살자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에서는 복음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의 할 일은 먼저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능력 아래서 절대적 진리의 필요성과 상대주의의 허구성을 명확히 전달해야 한다. 복음을 듣는 사람이 상대주의적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절대적 진리가 어떻게 하나님 곧 창조주와 연결되는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진화론을 과학이라고 믿는 세상 사람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은 더욱 어려울 수도 있지만 창조주를 믿고 의지하는 길만이 유일하게 참 평안을 누리는 길임을 선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다양성의 참된 의미가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가능한 것인지 설명하여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다양성을 철저하게 버리고 오직 하나님이 주신 참 다양성의 의미를 알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그저 또 다른 진리일 뿐이고 그들은 그들 나름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복음을 거부할 것이다.


결론

우리는 크리스찬일지라도 시대를 벗어나서 살 수는 없다. 모두가 환경과 상황과 시대와 장소에 종속되어 살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우리 주님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할 의무가 있다. 아직 잃어버린 영혼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이 예수님께 돌아오도록 해야 할 사명이 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시대의 사람들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어떠한 가치판단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알아야 한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전하기 위해서 말이다.

사람들은 현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라고 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중요한 관점은 절대적인 진리를 거부하고 모든 것을 다 상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어제까지 진리라고 인정받던 것도 오늘 다시 의심해야 마땅한 시대가 된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진화론적 사고를 통해서 인간의 절대적 정체성과 가치는 그저 우연에 의한 산물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시대를 사는 우리 크리스찬들은 무엇보다 먼저 진리의 절대성을 올바르게 선포하고 또 증명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냥 단순하게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고 하는 말은 더 이상 세상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성경도 그저 하나의 담론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상대주의의 벽을 먼저 허물지 않고는 복음 전도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복음 전도자는 이 세상의 흐름을 명확하게 읽고 상대주의의 허점을 이용하여 먼저 상대주의적 사고방식을 허물어야 복음이 들어갈 여지가 생기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창조주의 창조와 진화론에 대해서도 세상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을 만큼의 지식과 이해를 가지고 그들과 대화해야 한다. 현 시대는 그저 내 말만 하고 그들의 말은 듣지 않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소통이 강조됨에 따라 일방적인 선포가 아닌 쌍방적인 대화와 그리고 그들과 함께 고민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일방적인 선포의 때가 있고 대화와 고민 나눔의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선포만 한다면, 그들은 이제 일방적인 선포를 강압과 폭력으로 인식하게 되고 따라서 무조건적인 거부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 역시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자는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은혜에 힘입어 겸손하면서도 확신있게 절대적인 진리를 선포함에 있어서 선한 다양성은 인정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모순들을 직시하면서 그들의 관점인 상대주의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며 창조주 하나님 앞으로 그들을 데려가기 위해 지식과 지혜와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대화해야 하고 그 이후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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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9. 12. 06:22

복음의 기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16~17)

 

전세계적으로 모든 지역교회들은 회중이 모여서 예배드리거나 성경 공부를 하거나 공동체적 활동을 하기에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모이더라도 소규모로 모여서 최소한의 거리를 지키며 떨어져 앉아야 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도 조심스럽고, 함께 식사를 하기에는 더욱 조심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공동체적 활동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쩌면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가장 기초로 돌아가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보는 것이 필요한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시기를 오히려 영적 재충전의 시기로 삼아서, 우리의 믿음의 기초로 돌아가 내실을 다지고 팬데믹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것이 좋을 하다. 그래서 우선 먼저 복음이 무엇이며 우리 믿음의 기초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복음을 풀어서 쓰면 기쁜 소식이다. 그렇다면 기쁜 소식일까. 무엇이 기쁜 것일까.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일까. 이것부터 알아보자.

 

사람의 기본적인 상태 본질상 진노의 대상

사람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쳐 주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 중에 하나는, 아담의 타락 이후에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가운데서 태어나서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며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51:5; 3:9~20; 2:1~3).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받아서 사람으로 흠없이 창조되었으나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죄를 범하며 타락해버린 것이다. 이제 사람이 영적으로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죽은 자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사람은 자신을 창조해 주신 창조주를 향해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영적이라 함은 지식과 이성이나 감성과 같은 사람의 자연적 능력에 대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은 자연적 상태에서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정성 다해 경배할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을 무시하고 멀리 하며 하나님께 반항하는 상태에서 발자국도 벗어날 없으며 심지어 자기가 그러한 상태에 빠져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의 결과가 아담 사람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않고 아담의 후손들까지 영향을 미치게 것은 아담이 아담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로 이루어지는 모든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명령한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을 죄라고 부른다 아담은 계약을 위반하였고, 결과 아담의 영이 죽었으며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아담과 같이 영이 죽은 상태로 태어나게 것이다. 이것은 마치 나라의 왕이 전쟁에서 패배하면 나라의 모든 국민들이 노예의 상태로 전락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이유이다. 왕을 대표로 하여 나라의 모든 국민들은 안에 묶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대표자인 왕이 전쟁에 패배하면 그의 모든 국민들이 패배하는 것이 되는 역사적 상황과 동일한 것이다. 국민이 자기는 전쟁에 나가지도 않았고 왕과 무관하다고 주장할지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율법의 역할 모든 사람이 가운데 있음을 알게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선 먼저 사람이 자기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알도록 율법을 주셨다. 사람이 이러한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바로미터가 율법이기 때문이다. 도둑질 하지 말라는 율법이 없으면 도둑질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없는 것처럼,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율법이다. 성경에 있는 모든 율법을 세세하게 정리하면 613 개의 조문이 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이며 더욱 요약하면 오직 2개의 계명으로 정리되는데, 하나님을 다해서 사랑하라는 것과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우리가 율법을 안다고 하더라도 모든 율법을 항상 완전하게 지킬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들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서 무지하며 반항적인 기본 성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모든 율법을 언제나 지킬 수가 없다. 아무리 착한사람이라 할지라도 양심에 따라 어느 정도 지킬 수는 있으나 모든 율법을 항상 완전히 지킬 수가 없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선악과를 먹은 것을 죄라고 부르는 것처럼, 사람이 율법을 어기는 것을 죄라고 부르는데, 모든 사람은 영이 죽었기에 죄를 범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율법이 오기 전에는 이것을 알지 못했으나 율법이 주어지자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성경은 가르치기를, 의인은 없나니 사람도 없다고 하였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윤리적인 혹은 도덕적인 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인 영적인 , 하나님을 다해 경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며 모든 인격의 원형이시기에 하나님을 다해 경배하며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그런데 바로 하나님을 무시하며 반항하는데 다른 존재를 사랑할 있겠는가.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기만 사랑은 결코 완전한 사랑이 없는 이유가 바로 가장 핵심인 하나님 사랑이 빠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착한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하나님 앞에 죄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의 후손으로서 모든 사람은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람이 하나님의 기준에 완전히 합당하도록 요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에 맞는 합당한 책임을 지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것이므로, 창조물이 창조주와 영원히 분리되어 창조주의 은혜를 하나도 받지 못하고 아무런 희망 없이 철저히 부패한 영혼으로 끊임없이 고통받아야 하는 존재가 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은 이러한 진노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졌고 누구도 예외가 없었다.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할 방법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한가지 예외가 있는 것은 하나님 자신 뿐이었다. 창조주는 창조물인 아담 밖에 계신 분이시므로 예외가 있었고 또한 예외를 만들어내실 있는 분이셨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진노를 벗어날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외를 만드셔서 두번째 아담을 모든 사람을 위해 주셨다. 두번째 아담은 첫번째 아담과 동일한 사람이어야 하므로 사람의 아들이었고 또한 예외이어야 했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첫번째 아담과 동일한 사람이었으나 그와는 다르게 타락하지 않았다. 끝까지 하나님의 율법을 모두 항상 완전히 지키셨고 완전한 의로움을 이루셨다. 첫번째 아담도 타락하지 않고 죄를 범하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그는 타락을 선택했다. 반면에 두번째 아담인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께 신실했다. 그래서 사람이 첫번째 아담의 후손으로서 진노의 대상이었다면 이제 두번째 아담인 예수님의 후손이 되면 진노의 심판을 받지 않아도 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인 이유는 이처럼 사람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이제 예수님으로 인해서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두번째 아담이 첫번째 아담의 후손이어야 했던 이유는, 그가 첫번째 아담과 동일한 사람이어야 다른 사람이 범한 죄의 책임에 따른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감당할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받아야 죄의 결과는 죄를 지은 사람이 직접 감당하거나 또는 다른 무죄한 사람이 대신해서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천사나 또는 어떤 동물이 사람을 대신해서 감당할 없었다. 그리고 두번째 아담이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했던 이유는 그가 대신해서 감당하는 죄값을 무한대로 감당할 있어야 세상의 모든 죄값을 치를 있기 때문이었고, 또한 그의 의로움이 자신의 모든 후손들에게 나누어질 만큼 무한대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다.

 

십자가의 의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증명

이제 예수님은 아담을 비롯한 모든 사람의 죄값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죄인인 것처럼 취급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치러야 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 형벌을 받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친아들이자 유일한 아들인 예수님이 이처럼 비참한 상태를 겪은 것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그리고 우리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아버지를 사랑하시기에 아버지의 뜻을 기꺼이 이행하며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위해 참으로 비참하게 죽음을 맛보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예외적인 길을 예수님이 몸소 직접 수행하신 것이다. 십자가 형벌을 받음으로써 율법이 정한 죄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이제는 세상과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죄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생겼다.

 

예수님이 열어놓은 방법,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할 있는 방법이 사람에게 적용되려면 이제 사람은 첫번째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후에 두번째 아담인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의 후손이 되어야 했다. 성경은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한다. 다만 사람이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거듭날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낳아주셔야 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사람만이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있게 것이다. 사람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필요한 것이며, 예수님과 연합해야 했기에 예수님 안에서 태어나야 했고, 사람 스스로 낳아질 없기에 성령님이 낳아주셔야 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 예수님의 의에 대한 증명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음의 형벌을 받으신 것이 그가 하신 전부였다면 사람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신의 죄값에 대한 용서를 받는 것이 전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상의 것을 하셨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33년의 일생을 통해서 율법을 모두 온전히 지키시고 그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획득하셨다는 것이다. 그의 부활은 그의 의로움의 증명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후손들은 예수님과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죄값에 대한 용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의로움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후손들을 마치 예수님처럼 간주하셔서 그의 무죄함과 의로움에 따라서 그의 후손들도 무죄하며 의롭다고 보신다. 만약에 이렇게 전가받은 의로움이 없었다면 사람은 용서 받은 이후에 자신의 삶에서 의로움을 쌓아서 하나님께 대해 합당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야만 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그의 후손에게 전가됨으로써 그의 후손들은 스스로 의로움을 이룰 필요가 없어졌다. 그들은 예수님의 후손답게 사는 것으로써 예수님으로부터 의로움을 전가받았다는 것을 증거하면 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새로운 삶에 대해서는 글을 보면 도움이 된다: https://comfortye.tistory.com/24?category=799636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각각 동떨어진 개의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사건의 가지 측면이다. 죽음은 사건의 시작이요 부활은 사건의 결말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결코 분리될 없다. 이렇게 분리될 없기 때문에 그의 죽음에만 의미를 둔다거나 또는 부활에만 의미를 두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언제나 그의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강조하고 동시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속죄의 적용 하나님의 예정과 사람의 믿음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살게 것을 하나님 차원에서 표현한 단어가 바로 예정이며, 사람 차원에서 표현한 단어가 믿음이다. 그래서 사람의 차원에서 사람에게 말할 때에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고, 하나님 차원에서 하신 일에 대해 말할 때에는 하나님이 예정하셨다고 말하는 것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속죄가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을 설명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예정을 가르쳐주는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에베소서 1장에서 있다. 따라서 예정에 대해서 논할 때에 결론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면 논의는 뭔가 잘못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정은 하나님 차원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 차원을 넘어서는 예정에 대해서 전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예정의 일부분에 대해서는 논리적 이해를 떠나서 그냥 받아들여야만 한다. 만일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예정을 전부 이해했다고 말한다면 그는 어쩌면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과 동등한 차원으로 올려놓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서 수도 없고 전혀 이해할 수도 없으므로, 전도의 문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것이 수밖에 없다. 믿고 후에야 하나님의 예정을 표면적으로라도 알게 되고 그때에서야 하나님의 사랑에 따른 예정을 깊이 이해할 있게 된다. 이것을 확장해서,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자유의지에 대해 생각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의 차원에서 일어나서 사람 창조세계의 차원까지 전파되는 것이며, 사람의 자유의지는 사람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서로 동등하게 비교될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마치 시소처럼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면 사람의 자유의지는 무시되고 반대로 사람의 자유의지가 강조되면 하나님의 주권이 무시되는 것처럼 생각하면 이것은 명백하게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있다.

 

하나님이 무조건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셔서 모든 사람을 실제적으로 구원하시지 않고 심판하시는 이유에 대해 우선 가지를 제시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은 자신이 직접 하신 말씀인, 죄의 결과로서 영원한 죽음이 것이라는 말씀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만일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다면 죄에 대한 의미가 없어져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과 섬기는 것이 동일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죄에 대한 심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의 결과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자신의 말씀은 반드시 지키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물을 사랑하셔서 일부라도 선택하여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다만 어느 누구는 구원으로의 선택을 받고 어느 누구는 선택을 받지 못하게 되는 기준을 우리는 결코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달린 일이기 때문이며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속속들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택의 기준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한가지는, 기준이 우리의 어떠한 능력이나 혈통이나 자격이나 무엇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을 받았다고 해서 우쭐대거나 으시댈 수가 없다. 그저 엎드려 감사드리는 전부일 뿐이다. 그리고 행여라도 선택받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도 우월감을 가질 수가 없다. 오히려 선택받지 못한 사람을 위로해야 한다. 혹시 나중에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어 그가 선택받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복음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기쁜 소식이며, 복음에 참여하는 것이 아무런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기에 기쁜 소식이며, 사람이 영원히 죽어야 하는 형벌을 벗어버리는 길을 가르쳐주고 있기에 기쁜 소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복음에 참여한 사람은 참으로 기쁘고 기뻐해야 한다. 이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생명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해 보자. 코로나 팬데믹의 상항 아래에서나 또는 팬데믹이 지나간 후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길이 무엇일는지 고민해 보자.


posted by 풀숨 2020. 9. 12. 06:13

저녁의 꿈



이재



콩나물국에 밥을 먹고

나무의자에 모로 앉아 잠든 너는

차가운 목욕을 하는 중이다

TV는 하얀 벽을 치고 질식한 채

벽화처럼 섬이 되고

나는 섬에 혼자 남은 노란 신호등

너에게 담요 한 장 덮어주는 것이 전부다

꿈은 너의 식어버린 몸에도 내릴까

커피향 창가에 

야생화 한 다발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바다의 성벽에 새 글자 새겨질까

밤은 더욱 부풀어 올라 깨지 않고

할로겐 불빛을 봉인하는데

나는 푸른 바다에 서서 너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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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9. 5. 00:04

모든 일에 감사드리자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 18)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1)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3:17)

 

코로나19 팬데믹이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현 시점에서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최소한 일정부분이라도 우울한 기분이나 무기력한 느낌 또는 두렵고 초조하고 메마른 마음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뭔가 위축되고 마음 한켠이 답답하며 스트레스 받아서 뭔가에 집중도 잘 안 되고 좀 공중에 붕~ 떠있는 듯한 상태에서 지내고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어려운 상황을 겪어야만 하는데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을까?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고 권면한다. 모든 일에는 당연히 이처럼 어려운 상황도 포함된다. 어렵고 힘들어서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과연 그럴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어쩌면 이 팬데믹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기회를 발견할 수도 있다.

 

성경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며 또한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마음 상태 중에서 어떠한 상태일 때에 감사가 나오는 것일까? 또는 그 반대의 경우일까? 사도 바울은 악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는 것이라고 로마서1:21말씀에서 가르쳤다.

 

감사드리는 마음은 어떻게 오는가

감사란 뭔가 받았음에 대한 반응이기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먼저 우리에게 주셔야 우리의 반응으로서 감사드리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고 아무 것도 주지 않으셨는데 우리가 그냥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감사드릴 수는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모든 감사의 기초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주셨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며 우리를 위해서 모든 필요한 것들을 주셨기에, 또한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주관하시며,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 생명을 주셨기에 감사드릴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감사드리는 마음은 겸손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즉 마음이 가난한 사람만이 감사드릴 수 있다. 몸이 건강하고 가진 것이 많아서 아무런 걱정과 염려가 없이 호의호식하며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을 갖을 수 없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주님의 말씀(19:24)을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몸의 상태나 경제적 상태나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이 가난해진 사람은 숨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다. 그러나 자아로 똘똘 뭉쳐 스스로 모든 것을 다 이루었고 세상의 중심에서 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감사드리는 마음은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의 결과가 인식될 때에 생긴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늘 살펴보며 하나님의 역사의 결과가 어떻게 내 삶에 작용하는지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없이는 결코 감사드리는 마음을 가질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우리는 성경말씀을 늘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언제, 어떻게 하셨는지 그리고 우리의 삶에 어떻게 관여하실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감사의 유익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가르쳐 주신 말씀인 마태복음 5장의 첫 머리에 보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항상 일하시며 우리를 위해 주무시지도 졸지도 아니하시고 은혜로 역사하시므로 우리의 마음이 가난하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다. 그리고 감사드림을 통해서 우리는 천국의 삶을 맛보며 즐거워 하고 기쁨이 넘치게 된다. 생명의 활력이 샘솟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존감이 높아지고 아버지와 더욱 친밀해졌다는 감정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고백해 보라, “하나님 아버지, 생명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고백해 보라. 생명의 활력이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첫번째 유익이다.

 

또한 진정한 감사는 받은 사람을 준 사람에게 연합시켜 주는 것처럼, 감사드림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연합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다. 친밀해진 사이에는 교감을 통해서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시는지, 얼마나 안타까워 하시는지, 또는 얼마나 애타게 부르고 계시는지 알게 된다. 이것이 두번째 유익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닮게 된다. 하나님의 마음에 순종하며 하나 되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이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셨다. 요한복음 15장에서 17장까지의 말씀을 보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름다운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 하나님을 닮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닮게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웃을 돌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세번째 유익이다.

 

또한 감사드림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발견하게 된다. 감사드리는 마음은 하나님의 계획과 미래에 이루어질 일들에 대해서 기대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이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모든 것들에 대해 소망을 갖게 한다. 이것이 네번째 유익이다.

 

또한 많은 유익들이 있지만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유익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에는 두려움이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다. 요한일서 4장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쫓아낸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두려움도 내쫓으며 평안을 가져온다. 감사드림은 바로 그 사랑에 대한 고백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셨음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모두 포함하는 고백이기에 감사드리는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감사드릴 때마다 이러한 유익을 누릴 수 있으며 감사가 넘칠수록 이러한 유익도 더욱 넘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 감사드리는 마음의 중요성

우리가 어떤 특정한 일이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겠으나 모든 일에 감사드리는 것은 믿음을 필요로 한다. 마치 그냥 저절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 일이나 또는 내가 잘 해서 이루어진 일처럼 보이는 것조차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려면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자녀들을 사랑하셔서 우리의 모든 일에 다 함께 하시고 간섭하시며 인도해 주셔서 열매맺도록 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기도로 질병이 나았다든지 또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기적적으로 해결되었다든지 하는, 뭔가 특별하고 굉장한 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기에 참으로 하찮고 별볼일 없는 것 같은 모든 일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며 함께 하신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마치 세상의 모든 식물이 태양의 열기를 벗어나서는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모든 일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처음에는 선택적으로 특별한 일에만 감사드렸던 것이 이제는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모든 일에 감사드리게 된다. 믿음이 점점 성장하는 것이다. 내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깨닫고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먹을 것이라고는 김치와 간장밖에 없는 형편일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하나님은 이러한 형편 가운데서도 역사하시며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감사드리는 마음은 나 스스로에게서 시작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가르쳐 준 말씀대로, 악한 마음은 결코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는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에 의해 거듭나기 전에는 하나님께 반항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며 감사하는 마음 자체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고, 먼저 주셨고, 또한 먼저 깨닫게 하셨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어떠한 특정 부분이 아니라 내 삶 전체, 나의 존재 전부를 새롭게 하신 것이기에 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다.

 

또한 모든 일에 감사드리는 마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나의 자아가 살아서 작용하는 한, 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없다. 어느 특정 부분만큼은  내가 이룬 것이 되고, 최소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를 칭찬하며 스스로 뿌듯해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감사드리는 마음은 내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이야말로 영생을 맛보며 천국의 삶을 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일에 감사드리는 마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며 이웃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모든 일에 감사드리는 마음에는 실망이 없고 두려움이 없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면서 행여라도 받게 되는 상처, 즉 유한한 존재끼리 어쩔 수 없이 어긋나게 되고 오해하게 되는 부분까지도 감싸도록 도와준다. 모든 일에 감사를 드림으로써 이 상처가 하나님 안에서 치유되고 우리는 새 힘을 얻어서 항상 평안 가운데 앞으로 나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 감사드리자

모든 사람에게 요즘은 참으로 어렵다. 매일매일 뉴스를 보는 것이 우울한 일이 되어버렸을 만큼 모두에게 요즘의 상황은 어렵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역사하시며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또한 나아가 바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내게 또는 우리에게 주신 것들로 인해서 감사드리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어려움을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있고 두려움 없는 소망을 가질 있다. 더욱이 어느 특정한 것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면 보다 계획을 있게 된다.

 

때로는 삶의 고통이 너무도 심해서 욥처럼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자꾸만 생긴다 하더라도, 참으로 하찮은 것처럼 생각되는 무엇이라도 발견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려고 노력해 보자. 하늘에서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없으며,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예수님께 나아갈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며,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상황을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들과 더욱 친밀해지는 기회로 삼고 그들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감사드리는 마음이 없으면 절대로 이러한 기회를 바라볼 수조차 없다.

 

그러므로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하나님께 집중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좋은 것들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고 고백해 보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넓게 퍼지면서 기쁨과 소망을 발견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이 이상 중요한 것이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이 우리의 전부이시며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즐거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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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 새벽



이재이



안경을 바로 쓰며 뒤돌아 보았다


앞은 깨진 가로등 길

뒤는 멀리 있고 손잡이는 닿지 않는다


어둠의 두께를 만질 수 있다면

가시 같은 구멍이라도 시도해 볼 텐데


시력 잃은 까마귀처럼

개똥바람에 구르다 예배당 문간에 부딪쳐

양팔 벌린 채


엎드려 기도한들

어차피 앞은 낙엽 차가운 새벽


갯벌 속에서

발걸음 혼자 하루를 삼킨다


핏자국 낙엽 위를 뒹굴어야 넘어가는

오르막 언덕 아래

생수 배달 트럭이 툭툭툭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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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시간



이재이



누나는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어서

기억을 잃는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내일을 계획하지 못한다

이십 년 전, 제왕절개수술 받을 때 사고로 인해서

아이를 낳기 전까지의 일들은 기억하지만

그후의 일들은 이십 분 동안만 기억할 수 있다

내 얼굴도 내 이름도 알지만 내 아이는 기억하지 못한다

자기 아이의 이름은 매일 아침에 입력된다

엄마를 만나러 와서는 왜 이리 주름이 늘었냐고 묻고는

엄마 보고 싶어 왔다가 돌아가신 아빠를 만나고 간다


우리집 현관문도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가끔 문을 열어주지 않아 저녁마다 내 얼굴을 확인시킨다

오늘 저녁에는 나를 뒤따라오는 발자국을 받아들이지 않고 문을 닫는다

발자국을 거두지 못한 나는 하루를 기억하지 못한다

집에 들어온 것은 기억하는데 아침과 오후는 모자이크에 빠졌다

어느 정도 과거를 잊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정신과 전문의가 TV에 나와서 했던 말이 기억났다

잊을 건 잊어야지,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하는 나이든 엄마와

무슨 일이든 이십 분 동안만 슬퍼할 수 있는 누나와

현관문 앞에서 문을 열지 못해 끙끙대는 나는 기억의 식구다

누나와 다툴 일이 없어도

누나를 안아줄 기억이 없어도

식구들과 하루를 만들고 잊고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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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8. 29. 05:22

영적 부족함을 절감하며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1:4~5)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3:1)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5:18)

 

주변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데 이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으며 이것에 대해서 소그룹 모임에서나 개인적으로 함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심지어 때로는 섬기기는커녕 오히려 자기의 부족함만을 절감하며 눈물로 기도하고 엎드려 간구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도 예외는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순간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하나님과 동행하여 성령의 열매를 그리스도 안에서 맺고 싶은데, 어느 정도 되는 같다가도 나의 부족함을 절감하며 하나님께 엎드려 도움을 간구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경우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는지 살펴보았고 내게 가르쳐주신 것을 함께 나누어서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 어려운 시기에 더욱 힘을 내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섬기며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기본적인 열망을 가지고 있다.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 말씀을 듣거나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감동을 받고서,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아버지를 더욱 사랑하고 그리스도처럼 모든 것에 순종하고자 결심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이 결심한 만큼 되지 않고 오히려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어리석고 형편없는 존재인지 절감하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우리가 언제 이런 부족함을 더욱 심각하게 느끼는가 하면, 우리가 그런 결심하고서 진정으로 열심을 내는데 오히려 시험이나 시련을 겪으며 좌절하게 되면서 주로 그렇게 느낀다. 이런 결심과 열심을 하나님께서 보시고서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주실것으로 기대했는데, 기대와는 다르게 시험을 받고 자꾸 넘어지거나 시련을 겪으면서 자꾸 도망치게 되는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께 실망하고 스스로에게 실망하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는, 그냥 아무 없이 가만히 있을 때에는 부족함을 느낄 이유도 없고 마치 모든 일이 되고 있는 것처럼 넘어가기에 그게 차라리 좋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우리의 DNA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도록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해 놓았기 때문에, 잠시 어떤 비정상적인 상태에 빠져 있지 않는 , 우리 영혼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이 끊임없이 솟아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결심을 하게 되고, 따라서 그냥 아무 없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또한 그냥 모든 일이 되고 있는 것처럼 느낄 만큼 영적 센스가 무디어질 수도 없다. 성령님께서 끊임없이 우리의 영혼을 일깨우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우리가 열심과 실망 사이에서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끼는 것은 유한한 존재인 우리로서는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부족함의 감정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스리고 극복할 필요가 있다.

 

먼저 어떻게 해서 우리가 이런 부족함으로 빠져드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가 열심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진정 우리의 열심에 반응하시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부족함으로 빠져드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자녀가 열심히 아버지를 본받으려고 하고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하는데 아버지가 자녀의 열심을 무시하고 본체만체 하겠는가. 아버지는 당연히 자녀를 인도하시고 용기를 주시고 지혜도 주시며 자녀의 열심이 열매를 맺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그럼 우리의 열심은 실망으로 끝나게 되고 우리의 부족함만을 절감하며 낙심하게 되는가 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열심이 어느 순간 아버지의 인도하심에 따라 걷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열심의 시작은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되었는데, 뭔가 이루어지는 같거나 또는 감동을 우리의 삶에서 실현시키고자 , 성령님의 가르침대로 이루어 나가지 않고 어느 순간 우리의 욕심과 정욕과 뜻으로 열심을 이루려 하면, 우리의 열심은 반드시 실망으로 끝나게 된다. 우리가 처음에 열심을 내고자 때에는 그러는데 막상 열심을 또는 열심이 조금 열매를 맺는 같을 ,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열심이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우리의 욕심을 혼동하게 하고 마치 우리의 욕심을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착각하게 만들어서, 결국 성령님이 아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하는 것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래서 처음엔 뭔가 되는 같다가 나중으로 갈수록 힘들어지고 실망스럽게 변하더니 결국엔 실패하게 되고 자신의 부족함만을 절감하며 끝나는 경우인 것이다. 구약 성경에 여러 인물들이 있지만 아마도 사울왕이나 삼손이 대표적인 예가 것이다. 삼손은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받고 엄청난 힘을 갖게 되었지만 참으로 세상적인 이유로 힘을 잃어버리고 블레셋의 노예가 되었다. 신약 성경에서는 마가를 대표적인 예로 있을 것이다. 마가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선교 여행을 갔다가 도중에 포기하고 혼자서 돌아와 버렸고, 일로 인해서 나중에 바울과 바나바는 이상 동역하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마가는 선교 여행을 포기했을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했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성경에서도 성도의 삶에서도 너무도 흔한 것처럼 보인다. 사도 바울도 경고한 대로, 성령님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냐고 갈라디아 교회를 책망했던 것처럼, 시작은 성령님으로 인해 이루어졌으나 도중에 사람의 욕심대로 정욕대로 자기 보기에 좋은 대로 변질되어 스스로 시험에 들게 되고 결국 실패로 마치게 되는 어리석음이 우리에게는 항상 존재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죄의 습성이 남아 있는 육신을 입고 사는 존재하는 가능성이다. 그런데 시작이 성령님에 의한 것이었기에, 그것에 관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각이 성령님에 의한 것이 것이라고 쉽게 착각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의 욕심은 언제든지 성령님을 밀어내고 마음을 차지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언제든지 실수와 실망의 가능성이 존재하는데, 자기 욕심으로 결국 실패하고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열심을 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대로 순종하며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데도 어려움과 시련에 부딪쳐서 좌절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성령님으로 인해 시작했고 좋은 열매도 맺고 있고, 더욱이 성령님만을 의지하며 순종하는데도 어려움을 겪게 되므로 심히 혼란스럽고 우리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 아버지가 자녀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순종하는 자녀에게 때로는 힘에 부치도록 시련을 허락하셔서 자녀가 이전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는 경우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알지 못하므로 혼자서 시련을 극복하려 하다가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주저앉으며 좌절과 실망 부족함을 절감하게 된다. 영적 성장을 이루어서 하나님 아버지의 보다 뜻을 알기 전까지는 자신의 부족함만을 절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인 우리의 잘못을 비록 모든 잘못에 대해서는 아닐지라도 징계하시며 교정하시기 위해서 어려움을 허락하시지만, 또한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도 어려움을 허락하신다. 욥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욥은 온전하고 악에서 떠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심한 고난을 받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하나님 바로 옆에서 깨닫게 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가 때때로 혹독한 고통에 참으로 괴로워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기도 하기도 하였지만 친구들의 시험에 굴복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였기에 시련을 이기게 되었고 하나님 아버지와 더욱 친밀해졌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녀들의 영적 성장을 이끌어 주시기도 한다. 그러나 욥이 만일 시련 속에서 좌절하였다면 그는 참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했을 것이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몸에 있는 가시를 주님께서 없애주시기를 간구했으나 주님은 은혜가 족하다고 하시며 들어주지 않으셨지만 바울은 오히려 더욱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배웠다.

 

그렇다면 어떤 어려움이 자기의 욕심에 따른 시험인지 아니면 영적 성장을 위한 시련인지 어떻게 수가 있을까. 그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욥의 경우처럼, 항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 부딪히는 어려움은 시련인 것이고, 비록 시작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었지만  결국에는 나의 욕심과 뜻을 이루려 하다가 당하는 어려움은 시험인 것이다. 시험을 받아야만 나의 욕심이 드러나기 때문에 시험은 당연한 것이며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내는데 어려움이 닥쳐서 열심은 사라지고 실망과 낙담과 부족함만이 드러나면, 자신을 살펴서 열심의 시작과 과정과 열매가 하나님 안에 있는지 아니면 어느 것이라도 욕심을 따라갔던 것인지 살펴야 한다. 그래서 만일 욕심을 따랐다면 회개하고 다시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며 나의 부족함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능력의 부족함을 위한 간구가 아니라 먼저 성령님으로 충만하기를 간구해야 한다. 성령님으로 충만할 때에만 나는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온전히 인내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나의 영적 성장을 위한 시련이라면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발견하기를 간구해야 한다. 소망만이 시련을 이겨낼 있는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어느 쪽인지 보다 구체적으로 자세히 알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혜를 구하면 후히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하나님의 지혜를 배워서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한다. 그래서 언제 어떠한 욕심이 나를 이끌어 갔는지, 혹은 혼자 힘으로 일어서려 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만일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시험에 들어서 실패한 것이면 어떻게 나의 자아를 죽이고 어떻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며 끊임없이 인내할 있는지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해야 한다. 결코 스스로 인내를 온전히 이룰 없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또는 만일 나의 영적 성장을 위한 시련이라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발견하고 소망으로 가득 차도록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해야 한다. 소망이 가득하면 인내는 쉽다.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매면 쉬운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부족함을 절감했을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부족함을 혼자 힘으로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부족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부족함을 극복해서 다시 해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향으로의 진행은 부족함을 거듭 절감하게 되고 결국 열심을 포기하게 되며 한동안 무기력하게 지내도록 만든다.

 

부족함과는 반대로, 성경에는 충만함을 받으라는 명령이 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것과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은 사실상 동일한 의미이다. 성령님의 열매가 사랑이며,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면 인내를 온전히 이룰 있다. 그런데 성령충만은 조금 추상적인 느낌이 든다. 이것은 성령님으로 충만한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충만을 구체적으로 있도록 표현하면 말씀충만이라 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므로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면 진리의 말씀으로 충만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진리의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충만은 소망충만이 되고, 소망충만으로 인해 인내는 쉬워진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 자신이 성령님으로 충만한지 아닌지 알고자 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지 또는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한 소망으로 충만한지 살펴 보면 된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우리가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장하고 있는 증거일 있기 때문이다. 마치 키가 크려면 음식이 고프고 당겨서 부족함을 느끼는 것과 같다. 다만 이때 포기하지 말고 오직 인내로 부족함을 채워야 실제적인 성장이 이루어지므로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해서 실제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우리가 부족함을 절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없는 이유는 부족함을 통해서 겸손과 온유와 절제를 배우며 성령님 안에서 다음 단계를 바라볼 있기 때문이다. 삼손과 마가도 분명히 자신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내가 그때 조금 인내하지 못했을까하나님을 조금만 믿고 신뢰했다면 좋았었을 텐데…’ 하면서 자책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부족함을 절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인내하며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를 구하며 오히려 성장했다. 그래서 삼손은 마지막으로 한번 기회를 얻었고, 마가는 결국 사도 바울과 베드로의 동역자가 되었고 마가복음을 기록하는 영광을 얻었다.

 

마지막으로 시편 23 말씀을 살펴보자.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말씀은, 주님을 나의 목자로 삼았으니 이제 내가 원하는 받으면서 마음대로 있다는 의미가 결코 절대로 아니다. 주님이 나의 목자이시므로 나는 전적으로 목자에게 순종하겠다는 의미이며, 주님은 전능하시고 사랑의 목자이시므로 주님께 순종함으로써 내게는 부족함이 있을 없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행여 실수하더라도 부족함으로 끝나지 않고 목자의 돌보심으로 인해, 부족함을 통해서 오히려 목자의 사랑을 배우며 더욱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순종에는 인내의 고통이 반드시 따른다. 그러한 인내의 고통 가운데 있더라도, 잃어버린 마리의 양을 찾아서 들판을 헤집고 다니는 목자처럼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를 결코 버려두지 않으신다. 우리의 부족한 부분까지도 살펴서 때에 맞게 채워주시고 성장하도록 이끄신다. 주님은 과연 그러하시다. 그러나 주님을 우리가 명목상의 목자로 만들고 우리의 욕심을 채우려 우리는 실패와 실망만을 맞이하게 뿐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부족함이 우리를 절망하게 하지 말고, 부족함을 절감할 때에 오히려 주님을 바라보며 인내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이루어주실 영적 성장을 기대하자.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채우고 소망 가운데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 결국 열매 맺는 삶으로 나아가자.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삶은 이처럼 멋지고 아름답고 능력있는 삶이다. 고통이 고통으로만 끝나지 않으며 절벽과 같은 고통이 아니라, 소망 있는 고통이다. 그러니 실망과 후회와 한탄과 패배감과 원망을 버리고 주님 안에서 소망과 기대와 능력과 만족과 사랑으로 충만하자. 우리의 삶은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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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8. 29. 05:16

예감



이재이



언제나 떨림으로 온다

별의 흔들림을 담아야 했기에

새로운 소식의 엔트로피를 느껴야 했기에.

태곳적에

모두가 사제였던 흔적이

유전자에 밀봉되어 있다가

어느날 불현듯 몸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슬픈 예감이 틀리지 않는 것은

슬픔에 길들여진 몸이 더 잘 감응하는 것이다.

제단 잃은

평민의 삶이 훨씬 더 고단한 까닭이다.

무의식적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저녁 시간은 늑대의 하울링

고장난 엘리베이터에 갇혀서 거는 비상전화

떨림을 예비하는 의식이다.

새벽녘 별의 뒷목이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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