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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2.06 구원의 확신 2
  2. 2020.12.06 헌트 밸리의 가을
  3. 2020.11.28 달란트 비유 2
  4. 2020.11.28 추수감사절에 부르는 노래
  5. 2020.11.21 그리스도인의 산 소망
  6. 2020.11.21 그림자 일으키기
  7. 2020.11.14 믿음을 더하소서
  8. 2020.11.14 사과
posted by 풀숨 2020. 12. 6. 22:55

구원의 확신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후 13:5)

 

성도는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져야 하는가 아니면 절대 가져서는 되는 것인가.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게 보낸 서신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우리는 스스로 확증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직하게 자신에 대해 생각하면 정말 그런지 자신이 없다.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고 또한 때로 악한 생각들이 자신을 사로잡는 것을 때에 스스로 구원을 받았는지 또는 정말 믿음이 있는지 확신할 없는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이러한 생각을 우리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확하다. 그래서 청교도 목회자들은 교구의 신자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목회 상담의 사역에 힘을 쏟았다는 기록이 많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사람들이 잘못된 확신을 갖지 않도록 경계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과연 구원의 확신을 어떻게 가질 있는지 그리고 구원의 확신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확인할 있어야 한다.

 

구원의 확신은 어디서 오는가

구원의 확신이 어디서 오는지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 성령님으로부터 온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절대 아니다. 내가 스스로 구원을 이룰 없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도 내가 만들어 없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구원의 확신도 주어지는 것이며, 다만 성도는 그것을 스스로 확인할 있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가르쳐준 진리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을 보고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성령님을 통해 연합하시기 때문이다. 연합은 결혼과 같이 언약에 의한 연합이기에 결코 깨어질 없다. 결혼하면 부부는 몸이 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와의 연합도 몸이 되는 것이며 세상 무엇도 연합을 깨트릴 없다. 하나님이 보증하고 계시기 때문에 사망이나 높음이나 환난이나 무엇도 연합에 끼어들 없고 연합을 깨트릴 없다.


그렇다면 연합이 어떻게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준다는 것인가. 그것은 연합으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게 되고 생명은 반드시 우리의 삶에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선행을 하는 이전에 존재 자체가 바뀌는 열매를 먼저 맺는다. 우선은 죄를 싫어하게 된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우리도 싫어하게 된다. 현실의 삶에서 우리는 죄를 싫어하면서도 죄를 짓는 모순을 경험하며 절망하기도 하지만 절망 자체가 역설적으로 증거가 되며,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예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즐기던 것을 이제는 싫어하고 점차 멀리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 고민하게 된다. 단계가 지나면 선행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한편으로는 모순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민이 열매 맺는 선행이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선행은 나의 자아가 죽고나서 자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때에 삶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며, 모든 선행은 내가 스스로 인지하면서, 이로써 그리스도가 안에 계시는 확증하게 되는 것이다.

 

잘못된 확신에 대한 위험은 무엇인가

그러나 순서가 바뀌어서, 선행만을 생각한다면, 선행은 구원의 확신을 위한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착한 일을 했으므로 구원받은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를 착각의 늪에 가두는 것이다. 또는 찬송을 부르거나 기도 중에 눈물을 흘리며 감격한 것도 구원의 확신을 위한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나의 자아가 죽지 않고, 그리스도가 안에 계시지 않은 상태에서도 나는 나의 목적을 위해서 선행할 있으며, 나의 안위와 보증과 안심을 위해서 스스로 무언가에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착각 속에서 스스로는 마치 구원을 받은 것처럼 확신을 가질 수도 있으나 이것은 스스로의 속임이자 기만이다. 특별히 기독교가 부흥하는 시대에는 분위기나 상황에 휩싸여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착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경적 확신과 거짓 확신에 대해서 목록을 만들어서 조목조목 설명하며 거짓 확신을 경계하였다.

 

구원의 확신이 얼마나 피상적이며 거짓된 착각 속에서 수도 있는지 명확하게 알고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예전에 내가 섬기던 교회에서 성경공부 시간에 구원의 확신을 주제로 공부할 때에 이렇게 질문하며 나누었던 적이 있었다.

구원의 확신이 있나요?” “

그럼 구원의 확신이 당신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나요?” “… …”

 

요즘에는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무조건 나는 구원받았다 생각하는 교인들이 아주 많다고 느껴진다. 아주 예전에는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다고 하면 조금 교만한 사람인 것으로 간주되다가 언제부터인가는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잘못된 것처럼 취급되기 시작했고 이제는 거의 모두가 무조건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대답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구원의 확신이 아직 없다고 하면 다른 사람의 눈치도 보이는 같고 뭔가 잘못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해서 애매하게 억지로라도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하는 분도 있는 같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태도와 권면은 명확하다. 스스로 깊이 생각해 보면 있다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모든 종교개혁자들과 후예들은 성도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며 살도록 목회 사역에 열심을 내며 권면했다. 특별히 시간을 내어서 구원의 확신 문제로 고민하는 성도들과 상담하며 그들이 구원이 어떻게 주어지며, 구원의 확신이 어떻게 오는지 알도록 돕고 설명해주고 그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도록 도왔다. 이러한 노력과 수고가 실천 신학이라는 것으로 열매 맺기도 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언제나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기를 원했고 삶은 그들이 온전하게 되는 (고후 13:9)이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성도는 이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기 때문이다. 다만 온전하게 되는 것이 단번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여정에서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아의 습성을 이겨내고 자아를 통해서 삶에서 온전히 발현되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과정에서 때때로 죄를 짓기도 한다. 그러나 온전하게 되는 것은 성도의 삶의 목표이다. 비록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완전하게 성취할 수는 없을지라도 한순간도 멈출 없는 목표이며, 어제보다 오늘 조금 이루어내는 기쁨이고,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만들어 가시는 은혜이다.

 

구원의 확신은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로부터 성령님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했는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다.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나의 삶의 목표가 바뀌는 것이며, 그래서 나의 삶이 바뀌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특별히 교회 밖에서의 이웃과 회사 동료와 친구들을 섬기며 사랑하는 삶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을 확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 내가 어떠한 상태에 있든지 무조건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은혜와 지혜가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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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12. 6. 22:52

헌트 밸리*의 가을



이재이



헌트 밸리 숲

붉은 바람은

거울 속 주름진 머리카락


햇빛 비쳐 나무 투명하게 빛날 때

시계처럼 울리는 단풍잎

하나 하나 따라서


걸어온 길

한 걸음 한 울음 회상으로 떠오르고

곁을 주었던 인연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온 몸으로

햇수 세는 법 배우며

그저 지나가려 더듬거렸던

자드락길이라도

우리라서 갈 수 있는 첫길이라 부르며


오르락 잿길 남아 있어도

머리를 염색하고 

홀가분하게 여행을 떠나는

꿈이라 한다


헌트 밸리 계곡

가시 찔린 바람 한소끔

품에 안고서



* 헌트 밸리: 미국 메릴랜드 북쪽에 있는 숲이 우거진 동네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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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11. 28. 00:19

달란트 비유

 

마태복음 25:14~30 말씀을 보면, 어느 주인이 3 명의 종들을 불러서 각각 5 달란트, 2 달란트, 그리고 1 달란트를 맡기고 나라로 떠났다가 한참 후에 돌아와서 종들과 결산하는 비유가 나온다. 5 달란트와 2 달란트를 맡았던 종들은 각각 5 달란트와 2 달란트를 남겨서 주인을 기쁘게 하였지만 1 달란트를 맡았던 종은 자기가 받았던 1 달란트를 그대로 속에 묻어두었다가 다시 그대로 1 달란트를 주인에게 돌려주었는데, 주인이 엄청 화를 내며 종을 저주하는 비유다.

 

비유를 보면서, 처음에는 조금 의아했던 것이, 물론 5 달란트와 2 달란트를 남긴 종들을 칭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1 달란트를 그대로 돌려준 종에게 주인이 너무도 엄청난 저주를 내리는 장면이었다. 사실 주인은 손해를 것이 전혀 없다. 종은 1 달란트를 받았다가 다시 그대로 1 달란트를 주인에게 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주인은 이렇게도 화를 내었을까?

 

주인과 종의 관계

이것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은화 1 달란트는 6 드라크마이고 1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금액이므로, 은화 1 달란트는 노동자가 20 동안 일해서 버는 금액이며, 미국의 임금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대략 1백만 달러 정도 되는 돈이다. 금화라면 액수가 것이고, 아무리 적게 잡아도 억원은 되는 돈이다. 대략 종에게는 5 백만 달러를, 다른 종에게는 2백만 달러를, 그리고 나머지 종에게는 1백만 달러를 맡긴 것이다. 먼저 한가지 분명한 것은, 금액들은 종들이 감히 꿈꿀 수조차 없는 돈이라는 것이다. 주인이 이렇게 돈을 종에게 맡길 정도면 주인과 종의 관계는 단순한 주인-종의 관계는 분명히 아니다. 주인은 은혜로이 종들을 신뢰하였고, 주인과 종은 분명히 은혜의 언약을 맺었다는 의미이다. 이는 주인이 그냥 아무 없이 돈을 맡기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나라로 떠났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고, 또한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과 결산을 했다는 것은 주인과 사이어 어떤 언약을 맺었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인과 종들은 은혜에 의한 신뢰의 관계와 언약의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있다. 종들의 생각이 어떠하든, 주인은 종들을 은혜로이 신뢰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종들과 언약을 맺고 나라로 떠났던 것이다.

 

신뢰와 언약의 관계에 대한 반응

이러한 배경을 이해한 후에 주인이 종들과 결산하는 장면을 살펴 보면, 5 달란트와 2 달란트를 맡았던 종들은 주인의 신뢰에 부응하며 언약을 맺은 대로 열심히 일해서 각각 5달란트와 2 달란트를 남겼기 때문에 주인은 기뻐했다.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이 아니라 종들이 주인의 신뢰에 부응하기 위해서 그리고 주인과 맺은 언약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열심히 충성을 다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종들은 비록 주인이 보이지도 않고 옆에 있지도 않았지만, 마치 주인이 옆에 있는 것처럼 충성을 다해서 많은 돈을 남겼던 것이다.

 

그러나 1 달란트를 맡았던 종은 주인의 신뢰를 무시했고 은혜로 맺은 언약을 무시했다. 그것이 비록 주인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종은 최소한 주인의 신뢰에 부응하기 위해서 그리고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며, 자기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으면 하다못해 이자라도 받으려고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런 언약을 맺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1 달란트를 속에 묻어두고서는 전혀 상관하지 않다가 나중에 주인이 돌아왔을 때에 그냥 다시 돌려주었을 뿐이다. 주인이 출타했던 동안을 그는 정말 주인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던 것이다.

 

종들이 열매맺기를 바랐던 주인

주인은 종들을 신뢰하며 자기가 베푼 은혜를 통해서 그들이 열매맺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들을 신뢰하는 증표로서 그들에게 돈을 맡기며 언약을 맺었다. 그러나 종은 언약을 처참하게 무시했고, 마치 주인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허송세월하며 시간을 보냈다. 종은 주인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기에 주인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저주를 받은 것이다. 종은 주인의 은혜로운 보호 아래에 있었지만 처음부터 주인에 대해 관심도 없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으며 자기 생각대로 사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사실이 드러났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주인이 종에게 화를 내며 저주를 내렸던 핵심적인 이유다. 마태복음 25:1 말씀에는 비유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라고 먼저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나라이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와 맺으신 언약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1 달란트를 맡았던 종처럼 주인과 무관한 삶을 살며 언약을 무시하고 세월을 허비한 사람은 자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청교도들이 게으름을 가장 죄악으로 간주했다는 것을 이해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

그러므로 달란트는 재능이나 능력 또는 경제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꿈도 없는 ,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라 있으며,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열매맺기 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신실하게 반응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은혜의 언약을 맺은 사람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고 성찬 예식을 거행할 때마다 우리는 언약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의 정황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비유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며 예수 그리스도를 열매맺는 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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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11. 28. 00:18

추수감사절에 부르는 노래

 

어제 2020 11 26일은 미국에서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 지난 동안 우리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기뻐하는 하루였습니다. 매일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이 되어야 하지만, 어제는 특별히 동안 얻은 땅의 소출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시편의 노래가 떠오릅니다 (시편 100):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아마도 저를 비롯한 많은 분들이 어쩌면 2020년은 힘들고 어려운 해였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러한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차고 넘쳤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노래를 부를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붙잡을 있습니다.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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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11. 21. 12:20

그리스도인의 산 소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벧전 1:3~5)


우리는 몇 해 전에 뉴스를 통해서 청년들이 3포 세대, 5포 세대, 7포 세대 또는 N포 세대라고 스스로 칭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출산, 결혼, 연애를 포기하였기에, 세가지를 포기한 세대, 줄여서 3포 세대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5포 세대는 여기에 인간 관계와 집을 포기한 것이고 7포 세대는 또 여기에 꿈과 희망까지 포기한 세대란 뜻인데,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여기 미국 이민 사회 역시 힘겨운 이민 생활로 인해서 하루하루의 삶을 자포자기하듯 사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저 하루를 넘기는 것만으로도 족한 삶을 살며, 하루를 살았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는 삶이나, 소망조차 갖을 수 없는 현실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지요.


장례식에 다녀왔을 때는 기분이 좀 가라앉습니다. 아는 분의 장례식이든 모르는 분의 장례식이든 장례식은 언제나 마음에 무거움을 줍니다. 그것이 선하게 작용해서 하나님을 더욱 찾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람은 반드시 죽음 앞에 서야만 한다는 무거움은 어쩔 수 없겠지요. 영국의 대문호인 세익스피어는 그의 4대 비극 작품 중에 <맥베스>에서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노래했습니다. 상황이나 환경 때문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감 때문에 이런 시를 지었습니만 소망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은 단지 걸어다니는 그림자 (윌리엄 세익스피어, 장영희 역)


    그리고 우리의 과거는 모두 바보들이 

    죽음으로 가는 길을 비춰줬을 뿐

    꺼져간다, 꺼져간다, 짧은 촛불이여!   

    인생은 단지 걸어다니는 그림자

    무대 위에 나와서 뽐내며 걷고 안달하며 

    시간을 보내다 사라지는 서툰 배우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소음과 분노로 가득 찬 바보천치의 이야기.


어느 시대나 대동소이 하겠지만 특히 요즘 시대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더욱 심각하게 자포자기 하는 세대 등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마치 소망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소망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사치인 것처럼 느껴질 만큼 소망을 말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찬으로서 우리에게 소망이 영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소망은 뜬구름 잡고자 하는 자기 스스로의 신념이나 희망이 아닙니다. 앞뒤 없이 무조건 ‘말하라 그러면 이루어질 것이다 (Name it and earn it)’ 수준의 신념이 아닙니다. 또는 복권이나 로또에 당첨되는 행운을 바라는 희망사항도 아닙니다. 이런 수준의 소망이라면 결론적으로 말하여, ‘몇 번 해 봤는데 아무 것도 얻어진 것이 없더라’가 되고 결국 소망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라는 결론으로 끝나고 소망 없는 삶을 살겠지요. 어쩌면 그것이 우리의 현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도했는데 안 되더라, 금식기도도 했는데 안 되더라, 하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사도 베드로가 가르쳐 주고자 하는 것은 ‘산 소망’입니다. 그냥 소망이 아니라 살아서 역사하는 소망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산 소망’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누가 무어라 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소망 그 자체로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어 있는 소망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죽어서 움직이지 않는 소망은 내가 가서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붙잡고 소유하여 그 안에 마치 뭔가 있는 것처럼 나의 신념으로 생명을 불어넣어서 이끌어 가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뭔가가 있기를 온 맘 다해 바라고 소원하여 마치 그것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스스로 생각하며 그것을 껴안을려고 애를 씁니다. ‘난 할 수 있어 I can do it, 희망이 있어, 다 잘 될 거야, 다 결국 지나가는 거야’ 하고 스스로 매일 되뇌이면서 마치 스스로 최면을 걸듯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기도 합니다. 그러다 결국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처절하게 좌절하며 극단적으로 치닫기도 합니다. 그러나 살아서 역사하는 소망은 다릅니다. 이 소망은 내가 만들거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미처 알기도 전에 이미 존재하며 또 나를 움직이는 소망입니다. 나의 상태나 환경, 또는 신념이나 철학, 사상이나 어떤 주의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이끌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살아있는 소망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에서 성도들을 정의하면서 먼저, 그들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따라 은혜로 선택된 사람들임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창세 전에 이미 우리를 아십니다. 그리고 은혜로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선택이 우리의 역사 가운데 실제로 이루어지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이루시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다시 낳으셨습니다. 따라서 산 소망의 근거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산 소망과 앞으로 받을 기업의 근거가 바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되었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우리는 믿음과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 인해서 알게 되고 누리게 되었듯이 소망 역시 하나님으로 인해서 알려지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죽어 있는 존재라면 죽은 소망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는 존재이기에 우리에게는 산 소망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소망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사도는 소망의 내용으로서 먼저 우리가 받을 기업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기업이 무엇인지 어떻게 이루진 것인지 그리고 왜 주어지는 것인지 등 세세한 것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깨닫게 되고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내용은 성경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구약성경의 개념을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모형적으로 제시되었던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진 바로 그 기업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 안에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아는 만큼 소망의 크기도 달라집니다. 많이 알고 많이 경험하는 사람은 더욱 큰 소망을 갖게 되는데 이는 소망은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막연하게 ‘다 잘 될 거야, 난 할 수 있어’ 식의 희망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통해서 알고 경험을 통해서 확증된 하나님의 성품에 따라서 확실한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찬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예수님은 살아서 역사하신다’라는 말은 논리적이며 이성적으로 가르치고 배워야 할 명제가 아니라 삶에서 경험되어야 할 실재에 대한 권면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고서 자기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이론적으로 가르치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부모는 항상 함께하고 경험되는 실재(Real Being)로서 인식되는 대상입니다. 실재에 대한 경험 또는 체험을 통하여 저절로 자연스럽게 부모가 존재하며 살아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부모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가르쳐 주어야 할 때가 있긴 합니다. 어느 경우인가 하면, 우리 부모와는 다른 부모를 가진 사람들, 곧 남의 자식에게는 우리 부모가 살아있음을 알리고 가르쳐 깨닫도록 설명해 줘야겠지요. 그들에게는 우리 부모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며 무슨 일을 하는지 등등 다양한 설명을 통해서 우리 부모를 알리고 확증해 주어야겠지요. 그러나 어느 부모라도 자기 자식에게 자기가 살아있음을 가르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라는 말은 교회 밖에서 외치고 선포하고 가르쳐야 할 말이지만 안에서는 과연 그러시다는 것이 교회 차원에서나 각 개인의 차원에서 경험되고 체험되어야 할 진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53~4절 말씀에서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우리가 아노라”. 여기에서 연단으로 번역된 단어를 킹제임스역에서는 체험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연단의 체험적 측면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체험하는 하나님을 통하여 소망을 갖게 된다는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어떠한 신념이나 생각이나 이상이나 희망사항이 아니라 체험에 바탕을 둔 실제적 존재로 말미암아 갖게 되는 산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체험되는 실재이며 그 체험을 통하여 소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욥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욥도 고난을 통하여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였고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생각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아무런 소망을 갖고 있지 않다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경험한 적이 한번도 없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성경은 가르쳐 주기를,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 자녀를 결코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는 마치 고아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산 소망이 없든지 아니면 내가 생각하고 희망하는 소망을 갖고서 모든 것을 내가 생각하여 신념대로 판단대로 나의 기준대로 신앙생활을 하며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인정합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맞으면 내가 틀린 것이고 내가 맞으면 성경이 틀린 것입니다. 성경이 틀릴 수는 없으니 내가 틀린 것이지요. 이런 경우 내가 진정 그리스도인인지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세상의 다른 어떠한 종교와도 다른 이유는 기독교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많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다른 모든 종교와 다르다는 말이 단순히 세상은 모르는 예수님이 기독교에는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교회와 및 모든 성도들과 인격적이고 실제적인 교제를 나누는 분으로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경험되고 체험되는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종교처럼 그냥 뭔가가 있으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식의 접근이 아니라 또는 사람 스스로가 깨우치고 알아내서 산꼭대기를 향해 저마다의 길을 따라 노력하고 애써서 올라가서 산꼭대기에 있는, 신이라 불리는 어떤 존재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산꼭대기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는 산 아래로 내려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인도하시고 가르치셔서 마침내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이끌어 내시겠다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산 아래로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살며 경험되고 인식되고 마침내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신 것이지요.


1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지금도 보지 못하나 믿고…” 베드로는 편지의 수신자들인 성도들에게 이 말씀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베드로 자신은 예수님을 보았고 경험했고 함께 살았으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이후에도 계속 해서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사도였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경험했던 자신과 비교해서 보았을 때, 비록 편지의 수신자들은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뵙고 경험했던 적이 없지만 그리고 지금도 보지도 못하지만 그들 역시 자신처럼 동일한 믿음으로 동일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직접 경험하고 함께 살았던 베드로와 동일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그들 역시 어떤 식으로든 예수님을 경험하였고 동일한 믿음에 이르게 되었으며 그러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모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히브리서 11: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러한 삶, 비록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게 됨으로써 산 소망과 영광스러운 기쁨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성도들 역시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을 보는 것 같이 경험하고 믿으며 모든 환난과 고난 가운데 인내하며 마침내 소망을 명백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망은 결코 부끄럽지 않은 것이며 살아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을 무시하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이고 내 삶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면 할수록 더 많이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든 중대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든 어떤 것이든 하나님께 맡기고 마치 하나님께서 바로 옆에서 항상 동행하고 계시는 것처럼 하나님과 함께 하면 하나님을 늘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훈련 중에 하나가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형식이 아니더라도 자식이 아버지와 대화하듯이 또는 부부가 대화하듯이 모든 일에 대해서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의 응답과 인도하심에 관심을 기울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내 삶에 간섭하시며 함께 하시는지 반드시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각 개인의 삶에서나 교회 공동체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여 발견되는 소망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각자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결론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소망과 성경이 말하는 소망의 차이점을 정리하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세상의 소망은 죽은 소망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산 소망이며, 둘째, 세상의 소망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만 유효한 소망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영원한 소망이며, 셋째, 세상의 소망의 내용은 내가 만들어 내는 소망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소망의 내용은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발견되고 깨달아지는 소망이며, 마지막으로는 세상의 소망은 나의 신념이나 희망사항 또는 요행을 말하지만 성경의 소망은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조금 더 명확하게 보이나요? 사람은 선행이나 윤리적 또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통해서 더 나은 존재로 발전해 나가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 아예 크리스찬처럼 타락한 세상과는 구별되는 존재, 곧 성령님으로 거듭난 존재로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과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적으로 앎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품게 된다는 것, 바로 이것을 보아야 합니다. 참소망은 내가 하나님을 아는 만큼, 경험하고 순종하는 만큼, 나에게 주어지며 내가 발견하는 것이지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누리며 어떠한 고난을 통해서도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드리며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사람들입니다. 단지 윤리나 도덕이나 철학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 그리고 세상이 말하는 가장 선하다는 차원을 훨씬 넘어서 하나님의 차원으로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는 특권을 누리며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동행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지금 완전하게 이룰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이러한 소망을 품고 살아도 오히려 죄로 인한 좌절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소망을 맛보며 그것이 완전히 이루어졌을 때를 기대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심지어 죄를 범한 후에라도 이 소망으로 인해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소망이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지요. 소망을 만들어서 붙잡으려 하지 마시고 소망이 나를 이끌어 가도록 나를 맡겨야 합니다.


우리 각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방향의 차이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크리스찬은 조금 더 앞서 있어서 영광의 소망을 좀 더 잘 알고 더 기대하며 하나님과 더욱 동행하는 삶을 살겠지만 그렇지 못한 크리스찬도 있습니다. 조금 더 앞에 있든 조금 뒤에 있든 모두가 같은 길에 서서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며 한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것이지요. 조금 앞에 있는 성도는 뒤에 있는 성도에게 모범을 제시하며 이끌어 주고, 조금 뒤에 있는 성도는 성장함으로써 앞서 있는 성도에게 기쁨과 자극과 도전을 주며 모두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15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 우리는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특별히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외출이나 여행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떠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 소망의 이유에 대해 대답할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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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일으키기



이재이



낡은 운동화에 묶인 그림자

뿌리 드러낸 채 누워 있다

나는 손 내밀지만

그림자를 일으키지 못하고

오히려 검은 중력에 이끌려 무릎 꿇는데

넘어지지 않으려 왼발에 채워진 무게를 끌어

시멘트 벽에 기대어 앉는다


참새도 제 그림자 무거워

덤불숲에 들어가 안식하는 시간

벽을 짚고 일어나

네게 딱딱한 등이라도 내어주고 싶다

그림자 안아 세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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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11. 14. 07:18

믿음을 더하소서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17:5~6)


요즘 신앙생활 하기가 어떠신가요? 아마 쉽다고 여기시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듯 싶습니다. 신앙생활이 왜 이리 어려운가 싶기도 하다가 또 어떤 때는 조금 괜찮은 것 같기도 하면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좀 답답하면서도 대체로 어렵다고 느끼실 것 같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성도들이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소년 다윗처럼, 물매돌 5개를 들고 거인 골리앗에 맞서 담대하게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갔던 다윗처럼 그런 강하고 담대한 믿음이 나에게도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마음 깊은 곳에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사업을 결정하는 것처럼 큰 일이 닥쳤거나, 또는 자녀들의 진로를 고민하거나 직장 문제 아니면 여러가지 가정 내의 크고 작은 문제들에 있어서 뭔가를 결정하려고 할 때 이런 저런 고민과 염려에 휩싸여 담대하게 결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에서 스스로 그렇게 느끼실 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저런 고민들 속에서도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은 이런 고민을 나만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고민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닌지 오래 되었든 얼마 되지 않았든 우리들 삶 가운데 고민은 끊임없이 있었고 그 순간마다 믿음으로 담대히 결정하지 못하고 어려워하는 자신을 보면서 ‘아 나의 믿음은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오늘은 그것에 대해서 함께 나누며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해결책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7:5~6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고난 주간에 들어서기 조금 전에 제자들과 대화하셨던 내용입니다. 사도들이 3년을 넘게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함께 지낸 후에 예수님께 요청드렸던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을 더하소서’ 또는 ‘우리의 믿음을 증대시켜 주세요’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많은 기적들, 죽은 자를 살리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의 눈을 고쳐주시고, 수 천명의 사람들을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먹이셨던 여러가지 기적들을 바로 옆에서 체험하고 살펴보고 함께 그 현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음이 적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 스스로도 너무 답답했었는지 마침내 예수님께 이렇게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요청했을 것입니다: 제발 믿음을 자라게 해주세요!!!!!!


우리 주님께서도 때때로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고 책망하셨으니 그들이 이렇게 요청할 때에 예수님께서 그 정도면 됐다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해결책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을 가만히 살펴 보면 좀 어리둥절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그런 요청을 받으면 ‘자 내가 가르쳐 줄테니 잘 따라 해봐라’ 하시면서 ‘첫번째 이렇게 하고, 두번째 이렇게 하고…’ 등 어떤 구체적이고 절차적인 해법, 그래서 제자들이 쉽게 따라해서 믿음이 금방 커질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해주시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해법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부분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우리도 어떻게 해야 믿음이 자랄 수 있는지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지금 이 세상에서 어떤 크리스찬이 말로 명해서 나무 하나를 뿌리째 뽑아올려서 멀리 바다에 심어놓았다면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은 엄청난 믿음의 사람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전 세계적으로 순식간에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알려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가만히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엄청난 믿음의 사람이어야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두 잘 아시다시피 겨자씨는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은 씨앗이었습니다. 대강 크기가 1mm 정도의 작은 씨앗입니다. 그 작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으로도 그렇게 엄청난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해 주신 의미를 4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믿음에 대한 개념 자체가,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당시의 사도들이나 오늘날 우리들은 믿음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흔히 내가 뭔가 이루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도들도 그렇게 하다가 도저히 안 되니까 예수님께 요청했던 것입니다. 믿음을 뭔가 관념적이고 추상적이고 뜬구름 잡는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믿음을 내가 수고하고 노력해서 이루어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잘 안 되니까 어렵게 느끼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러한 생각 둘 다 아니기에 믿음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고 힘이 있어서 내가 믿음을 소유하고 가져야 하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을 바꿔서, 믿음은 우리 각자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 사이의 신뢰 관계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와 관계를 맺고 이어가고 깊게 할 수는 있지만 관계를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관계는 소유되는 것이 아니고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믿음을 소유하고자 했습니다. 그것도 크고 좋은 믿음을 소유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매번 실패했던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소유하거나 이루어내는 어떤 것 또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신뢰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우리에게 은혜로 선물로 맺어주시는 사랑의 관계가 믿음입니다.


둘째는 믿음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어서 믿음의 내용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 자체에 능력이 있다면 큰 믿음으로는 큰 일을 하고 작은 믿음으로는 작은 일만 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믿음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능력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믿음의 크기와는 다르게 믿음의 결과는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으로도 이렇게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큰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보면서 우리는 더욱 큰 믿음으로 성장해 갈 수 있겠지요. 그러나 큰 믿음을 갖고 있기에 큰 일을 행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크기 보다는 구하는대로 실천을 하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다시 말씀드리면 구하는 내용을 내 삶의 현실에 현장에 적용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맛있게 보이고 신선한 사과가 옆에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먹지 않으면 내게는 아무런 영양분을 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또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때로는 눈물도 흘리고 때로는 찬송부르며 소리높이 외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말씀 안에서 구하는대로 내 삶에 적용하여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믿음의 행함입니다. 믿음의 꽃은 행함입니다. 꽃이 피지 않으면 열매가 맺히지 않듯이 행함이 없으면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셋째는 믿음의 대상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우리의 능력이나 믿음 자체나 그 무엇이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구하는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 말씀을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7절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주님께서 포도나무와 가지를 비유로 해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해 주시면서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기만 하면 당연히 열매를 맺게 된다고 설명해 주시고나서 이렇게 7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기만 하면 즉 우리가 예수님 믿기만 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기만 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자동적으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일까요? 물론 한 측면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측면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구하면, 즉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구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셔서 이루시겠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성장하려면 부지런히 양분을 나무로부터 흡수하고 농부가 수고하는대로 잘 양육받아야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관계를 토대로 해서 구하여 아버지가 이루어주는 관계, 양방향의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 보시면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시겠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구하는 이유는 우리 능력으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이루어주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시고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구하는 대로 이렇게 이루어주시는 분이시구나 하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 자체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이 일하셔서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로만 구하고 내 삶 속에서는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대로 내 삶 속에 적용해 봐야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지방에 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이 심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아침 한 목사가 가족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비를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나서 일하러 나가는데 그냥 나가자 어린 아들이 그 아빠 목사님을 불러서 말하기를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했으니 조금 있으면 비가 올 것인데 우산을 가져가야 하지 않겠냐고 하였답니다. 그 목사님은 아들의 말에 충격을 받아서 자신의 믿음을 되돌아 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는 기도를 삶의 현실에 적용하지 않고 말로만 구하고는 정작 삶에서는 자기의 기도를 무시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하는데 이렇게 사는 사람의 믿음으로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까요?


물론 그 목사님이 비가 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우산을 가져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날 비를 내려주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목사님과 가족들은 최소한 한가지는 하나님으로부터 배웠습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나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구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비가 내리는 데에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다는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단순히 비가 내리게 해주시기를 바라는 기도가 나중엔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기도로 변화되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비가 내리는 날을 소망 가운데 기다리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 성장의 비결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한대로 받았다고 해서 마치 내가 무슨 능력이 있는 사람처럼 또는 내 믿음에 무슨 특별함이 있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7절부터 10절까지 예수님께서 계속 이어서 가르쳐 주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을 때에는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내가 순종해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을 때에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내가 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어리석은 생각, 내 순종이 아니었다면 하고 나의 순종을 높이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도구로 쓰여졌다는 것만으로도 감사드리며 모든 감사와 영광 오직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 단계로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여기에서 실패하여 처음엔 크게 쓰임 받다가 마지막엔 비참하게 끝난 사람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의 열매를 맺은 후엔 반드시 겸손해야 다음 단계로 더욱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우리 모두는 다 공통된 한가지 소망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나의 믿음이 자라서 나도 다윗처럼 아브라함처럼 사도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고 사랑하고 싶다는 소망일 것입니다. 매일매일 믿음이 성장하여 하나님께 쓰임받고 싶다는 소망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이 자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고백하지만 정작 우리 삶에 간섭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 믿음으로 구했더니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을 한번도 뵌 적이 없다면 참으로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해법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크기에 연연해 하지 말고, 믿고 구하는대로 우리 삶의 현실에서 현장에서 적용해 보는 것이 가장 확실한 해법이라는 것입니다. 믿음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며 큰 일을 하는 신자의 믿음에 뭔가 특별함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큰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또 체험적으로 만나야 우리 믿음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믿음의 크기에 대해서 고민하지 말고 실제 삶의 현실에서 현장에서 실천적인 발걸음을 내밀어야 합니다. 처음엔 망설여지고 안 되면 어떡하지 여러 고민이 생길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조차 다 하나님께 맡기고 실제로 믿음대로 구하는대로 삶에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꽃은 행함입니다. 행함이 있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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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11. 14. 07:17

사과



이재이



사랑해사랑해,

수줍게 휘리릭 고백하는 입술에서

사과 깨무는 소리가 난다


네가 보고픈 날이면

방 구석에 쪼그려 앉아 빨간 사과

눈 감고 입 맞추듯 베어문다


사랑해사랑해,

가슴으로 넘어간다

머언 하늘이 환하게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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