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에 대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즉 약칭하여 선악과라 하는 열매가 가끔 뜨거운 감자처럼 크리스찬 모임에서 열띤 토론의 주제가 되기도 하고, 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로 선악과를 들면서, 선악과로 사람을 시험해서 타락하게 만든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질문은 “왜?” 라는 것에 맞추어져 있고 선악과만 없었더라면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을 터이고 우리가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살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푸념 섞인 원망을 하기도 한다. 이 글은 그동안 이 동일한 질문을 끊임없이 하면서 지금까지 조금씩 정리한 성경적 진리들을 함께 나누고자 해서 올리는 글이다. (혹시 질문이나 반론이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아담의 타락 사건
창세기 1장에서 3장의 기록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온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으로 좋게 창조되었으며, 더욱이 아담은 하나님을 닮도록 하나님의 형상으로 흠없이 창조되었으나, 그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결국 먹음으로써 죄를 범하고 타락하는 기록이 된다.
하나님이 애초에 아담을 흠없고 원래적 의를 가지고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으므로 아담은 선악과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었다. 처음 명령이 주어진 시기로부터 그 명령을 어기는 순간까지 정확히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는 꽤 오랫동안 그 명령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는 하나님을 멀리 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명령을 소홀히 생각했으며, 마침내 사탄의 유혹이 오자 금방 그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먹고 말았다. 그 결과 그의 죄의 영향으로 온 세상이 무흠했던 상태에서 고통을 겪어야 하는 상태로 바뀌었고 사람은 영이 부패하고 오염되어 죄를 끊임없이 탐하는 상태로 바뀌었다. (여기에서 죄는 하나님의 명령/법/계명을 어기는 것을 의미한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주어진 하나님의 첫째 명령은 하나님을 온 맘과 정성 다해 사랑하라는 것이며 둘째 명령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선악과 나무를 에덴 동산에 심어놓지도 않으시고 또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주지도 않으셨다면 아담은 죄를 범하지 않았고 따라서 아담의 후손들은 아무런 고통도 없이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까?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 선악과 나무를 심어놓으시고 아담에게 그러한 명령을 주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두 가지 질문에 답을 하면 선악과에 대한 궁금증이 대부분 다 풀리게 될 것이므로 이 두 질문에 중점을 두고 생각해 보자. 먼저 두번째 질문부터 살펴보자. 왜냐면 두번째 질문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도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적 관점에서의 선악과의 의미
선악과 나무의 의미를 창세기를 중심으로 구약 성경에서 찾아보자. 이를 위해서 먼저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한다. 창세기1:26~28 말씀을 보면, 아담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고 온 땅에 충만하고 땅을 다스리며 정복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 명령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이라는 조건이 없다. 따라서 이 명령은 사람에게 의무를 부과하고 그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는 조건부 명령이 아니다. 아담은 정복하며 다스리는 능력과 위치에 있도록 창조되었으므로 그 능력을 마음껏 펼쳐보라는 명령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아담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으니 하나님을 대신하여 온 세상을 통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를 청지기적 위임통치라고 표현한다. 아담은 하나님을 대리하여 마치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게 온 세상을 통치하여야 했고, 또한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창조물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제사장이었다.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는 창조주와 위임통치권을 받은 청지기적 창조물의 관계였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의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명령의 의미는, 피지배층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폭력으로 지배하라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처럼 사랑과 공의로써 피지배계층을 이웃으로서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섬기며 함께 하라는 것이었다. 모든 창조물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얼굴로서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존재로 창조된 아담에게 있어서 선악과 나무와 선악과에 대한 명령은 창조주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 온 땅의 창조물 위에 왕으로서 존재하는 아담에게 오직 한 분, 하나님이 진정한 왕이자 창조주이시고 자신은 청지기인 창조물임을 끊임없이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시기에, 3차원 시공간에서 유한한 존재로 사는 아담에게 하나님이 언제나 창조주 하나님으로 임재하시기 위해 선악과 나무와 (명령의) 말씀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제 아담은 이 명령을 항상 기억해야 하고 또 기억할 때마다 마치 하나님이 바로 자기 눈 앞에 계시는 것처럼 그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제물로 하는 산 제사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그 명령에 항상 순종함으로써 아담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위임통치를 하는 청지기임을 기억하며 언제나 하나님의 성품에 맞는 통치의 결과들이 이루어지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다.
선악과의 의미가 왜 아담에게 중요했는가 하면, 하나님의 통치만이 온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 의도대로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비록 아담을 통한 위임통치일지라도 본질은 하나님의 통치와 동일한 것이므로, 아담은 반드시 창조주 안에서 창조주의 뜻과 성품과 의도대로 통치해야 했으며 그렇게 하고 있다는 명시적인 증거가 바로 선악과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임통치가 아니라 아담이 독립적으로 자기만의 통치를 한다는 의미가 되며, 유한한 창조물이 온 세상을 자기 뜻대로 통치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실패와 고통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위임통치의 의미는 단순히 대리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 통치자인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하심과 능력과 영향 아래에서 통치한다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유한한 창조물인 아담은 결코 독립적인 통치자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신약성경적 관점에서의 선악과의 의미
요한복음 1장은 창세기의 창조 기록을 예수님 중심의 기록으로 다시 기술했다. 그리고 창조주가 직접 창조물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이에 따라 선악과의 의미도 창세기와 구약성경적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신약성경적 관점에서 재해석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에덴 동산에 심어진 선악과 나무도 창조의 한 부분이며 예수님으로인해서 창조의 의미가 새롭게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약성경적 문맥에서 창조주와 청지기적 창조물의 관계 안에서 정의되었던 선악과와 선악과 명령은 이제 신약성경적 문맥에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안에서 정의되도록 확장되어야 한다. 창세기 문맥에서 아담은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청지기로서의 왕이었다. 온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명령을 받았으나 위임통치의 권한이었다. 선악과는 아담이 위임통치자로서 청지기적 왕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표지였다. 그런데 이제 신약성경의 문맥에서 두번째 아담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지만 사람의 아들 측면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면, 그는 성령님의 권능으로 부활을 통해 의로우심이 증명되었고, 사람의 아들이지만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으며, 예수님 안에서 선택받은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사람의 아들인 두번째 아담을 통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열린 것이다. 유한한 창조물이 무한하신 창조주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두번째 아담의 관계는 창세기의 문맥인 창조주와 위임통치권을 받은 창조물의 관계를 넘어서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확장된다. 그리고 아들이면 상속자이므로, 이제는 창조주로부터 위임을 받아서 창조주의 소유물들에 대해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상속자로서, 즉 창조주의 소유물이 곧 상속자의 소유물이 되었으므로 아들은 자기 소유물에 대해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서 소유물이란 내 맘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대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기에 사랑의 대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통치의 방식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이웃을 위해서 죽음까지도 감수하는 사랑으로 통치하는 것이며,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는 방식이다. 따라서 가장 높은 자는 하나님을 가장 닮은 자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가장 닮은 자들에게 그리고 하나님을 가장 닮은 자들로부터 약한 자들에게 하나님 안에서 사랑과 섬김이 점차로 아래로 확장되는 방식이다.
이러한 관점을 통해서 선악과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이제 선악과와 선악과 명령은 단순히 아담의 위임통치만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자녀이며 상속자가 되는 길을 열기 위한 장치로서 주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는 거룩한 전으로서 성령님이 임하시는 자리가 되었다. 창세기의 문맥에서 선악과와 선악과에 대한 명령 말씀으로써 임하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직접 자녀에게 연합적으로 임하셔서 자녀를 거룩한 전으로 삼으신다. 따라서 선악과와 선악과에 대한 명령은 자녀의 영혼에 임하시는 성령님에 대한 표상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물에게 임하시는 가장 기초적인 표상을 통해서 장차 이루어질 진정한 임재를 예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창조물로서의 사람이 창조주에게 연합됨으로써 창조물의 유한성을 창조주 안에서 초월할 수 있는 길을 받았다는 것이다. 모든 창조물은 창조 세계 안에 종속되어 있다. 오직 창조주만이 창조 세계를 초월하실 수 있는 존재이다. 사람도 창조물로서 창조 세계 안에서 닫힌 우주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제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서 창조 세계를 초월하고 열린 우주를 경험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선악과와 선악과에 대한 명령은 아담이 창조물로서의 한계와 유한성을 절감하게 하지만 또한 역설적으로 창조물의 유한성을 초월할 수 있는 길을 가리키는 표지였다. 첫번째 아담은 실패했으나 두번째 아담은 끝까지 하나님께 신실함으로써 이 길을 열어준 것이다.
이처럼 신약성경의 문맥에서 보면 선악과 나무와 선악과 나무에 대한 명령은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를 위해서 주신 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악과 나무를 통해서, 구약성경의 문맥에서 하나님은 창조주, 전능자, 그리고 공의의 하나님이 강조되었고, 신약성경의 문맥에서는 창조주, 전능자, 그리고 공의의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자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된 것이다. 자녀의 성장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처럼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이 드러난 것이다. 사람이 창조물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창조물에 머물지 않고,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합되는 존재로 성장하기를 바라고 계셨던 것이다.
종말론적 관점에서의 선악과의 의미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두 개의 특별한 나무를 심어놓으셨는데, 하나는 선악과 나무이며 다른 하나는 생명 나무였다. 따라서 선악과 나무는 반드시 생명 나무와 함께 그리고 생명 나무에 대비되어 이해되어야 한다. 비록 선악과 나무는 아담의 타락으로 그 효용이 다했지만,에덴 동산에 있던 생명 나무에 이르는 길은 아담의 타락 직후에 아담의 타락 때문에 폐쇄되었고 생명 나무는 사라진듯 했지만 요한계시록에 다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선악과 나무는 생명 나무에 대비되어 종말론적 의미를 지닌다.
선악과 나무와 생명 나무는 한 쌍으로서 에덴 동산에 심어졌고 아담에게 주어졌다. 선악과 나무는 이 땅을 바라보게 하고, 생명 나무는 하늘을 바라보게 하였다. 아담이 선악과 나무에 대한 명령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생명 나무에 이르는 길은 언제나 열려있고 생명 나무의 열매를 언제나 먹으며 하나님을 즐거워 할 수 있었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의 관점에서 보면 생명 나무는 하나님의 뜻을 가리키고 있었으므로, 선악과 나무는 생명 나무와 한 쌍으로서 현재와 미래에 대해 하나님의 포괄적인 의도를 나타내었다. 선악과 나무와 그에 대한 명령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종말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기초였던 것이다. 그것이 첫번째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무너졌으나 두번째 아담은 실패하지 않고 그 기초를 증명하였고, 이에 따라서 생명 나무에 이르는 길이 다시 열린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 나무와 그에 따른 명령은 신구약 성경 전체의 문맥에서 보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종말론적 관점 안에서 종말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기초였고, 또한 생명 나무를 바라보면서 장차 이루어질 창조 세계의 완성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기대하게 하는 디딤돌이었다.
선악과 나무가 없었으면 아담은 타락하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선악과 나무와 선악과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명령의 의미를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살펴 보았다. 그러면 이제 첫번째 질문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만일 선악과 나무가 없었다면 아담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았을까?
아담에게 있어서 선악과 나무는 단순히 먹지 말라는 명령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선악과 나무와 그에 따른 명령은 생명 나무와 함께 하여 너무나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아담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충만하게 성장하여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자로 내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시작이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 온 세상을 다스리는 청지기적 왕의 직분이었다. 따라서 아담이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구현하는 위임통치에 실패하는 것이 곧 아담의 타락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아담 자신의 기준을 내세우는 것이 곧 죄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타락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분명히 아니었다. 두번째 아담인 예수님이 이것을 몸소 증명하셨다. 첫번째 아담과 완전히 동일한 사람으로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항상 완전히 지키셨고 부활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증명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키는 데 아담보다 훨씬 더 쉬웠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키는 데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게 하셨다면 예수님의 공로는 사람의 아들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룩한 것이 되고 우리 사람에게는 아무런 공로적 유익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예수님처럼 타락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또한 타락할 수도 있는 존재였으며, 어떠한 방식으로든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통치가 아닌 아담 스스로의 독립적인 통치를 꿈꾸며 실현하는 순간에 아담은 죄를 범하고 타락하는 것이다.
다만 그 타락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로서 선악과 나무가 에덴 동산에 존재했던 것이며, 명시적이었기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이와 반대로, 선악과 나무는 역시 그 성공을 명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장치였으며, 만일 아담이 실패하지 않았다면 그의 성공 역시 명시적이었기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또는 아담이 사탄의 유혹을 받을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막아주셨더라면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다. 하나님은 자녀를 만드신 것이지 종을 만드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전부 막아주시는 것을 처음부터 의도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종에게는 모든 일을 일일이 지시하고 종이 순종하지 않으면 형벌만을 내리지만, 자녀에게는 자녀를 믿는 믿음으로 기다리며 모든 것을 아버지가 자녀와 함께 감당하시는 것이다.
처음부터 아담을 타락할 수 없도록 만들지 않으신 이유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셨을 때에 처음부터 아담의 영혼에 성령님이 임하셔서 아담이 절대로 타락하지 못하게 하셨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온 우주를 경영하시는 궁극적 통치자로서 경륜적 필요에 따라서 창조물에게 임하셔서 다양한 능력과 은혜를 베푸시기도 하고 또 창조물에게서 떠나기도 하신다. 아담은 흠없이 완전히 사람으로서 창조되었으나 아직 그의 영혼에 성령님이 연합적으로 임하시지는 않으셨다. 왜냐하면 성령님의 연합적 임재는 완전히 의롭다고 증명된 자녀에게만 임하시기 때문에, 비록 아담에게는 원래적 의로움이 있었지만 아직 공로적 의로움이 완전히 증명되지는 않았고 그 증명의 과정과 상속자가 되는 과정에 있었으므로 성령님이 아담의 영혼에 연합하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 곧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신 것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연합의 수준으로 임하신 것이기 때문에 아담에게처럼 필요에 따라 임하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신약 시대에는 두번째 아담인 예수님의 의의 공로로 인하여 이러한 연합의 수준으로 성령님이 사람에게 임하시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의와 상관없이 무조건 처음부터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되어 성령님이 사람의 영혼에 항상 임재할 수 있게 사람을 창조하시지 않은 이유는 성경에 계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뚜렷하게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유한한 창조 세계에서 유한한 창조물이 무한하신 하나님과 연합되기 위해서는 창조 시에 받은 원래적 의로움 뿐만 아니라 창조물 자신의 공로적 의로움 없이 가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담은 종이 아니라 자녀로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과의 연합이 가능한 그릇이라는 것을 충분히 증명해야만 했을 것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자녀에게 공로적 의로움을 요구하셨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할 뿐이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천사를 비롯한 다른 어떤 창조물에게도 허락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허락된 지극히 크고 큰 영광이다).
한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책임인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사람의 자유 의지가 무조건 타락으로 결과되지는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다는 것이 아담의 타락에 대해 하나님의 책임의 근거로서 거론될 수는 없다. 첫번째 아담의 타락은 자신의 자유 의지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며, 또한 두번째 아담의 성공은 자신의 자유 의지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두 가지 모두의 경우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궁극적 통치자로서 온 우주를 섭리로써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첫번째 아담의 실패는 첫번째 아담의 책임일 뿐이다. 하나님은 오히려 첫번째 아담의 실패 가운데서도 창조 세계와 창조물을 포기하지 않으신 것이다.
선악과 나무에 대한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그것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은 아주 깊고 심오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창조로부터 종말까지, 그리고 첫번째 아담뿐만 아니라 두번째 아담에게도 적용되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의 기록을 통해서 계시된 진리는 신약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보다 더 풍성하고 깊은 의미를 가지며 종말에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 나무와 그에 대한 명령은 우리에게 걸림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의 지혜와 경륜의 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표상이 되어야 한다. 선악과 나무에 대한 명령에 실패한 아담의 죄책과 모든 사람의 죄과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감당하심으로써 선악과 나무를 넘어서 이제 생명 나무로 우리를 인도하셨음을 깊이 깨닫고 기뻐해야 마땅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하나님이 이러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과연 이러하다면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상속자로서 어떠한 통치 –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는 통치를 해야 하는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을 지성적으로만 아는 데서 머무르지 않고 우리의 전존재가 하나님을 닮은 자녀이며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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