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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8.29 봄의 다짐
  2. 2020.08.22 믿음, 소망, 사랑
  3. 2020.08.22 너에게서 가장 먼
  4. 2020.08.15 성경말씀 묵상하기 1
  5. 2020.08.15 하루의 묵상
  6. 2020.08.15 겨울 밤비 소리
  7. 2020.08.07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배워야 한다
  8. 2020.08.07 겨울, 그런 날이 있어
posted by 풀숨 2020. 8. 29. 05:15

봄의 다짐



이재이



웃음에 촛점이 없어도 좋다 친절에 마음이 없어도 좋다

너의 영역을 두드리기 위해 어설픈 웃음이면 어떻고

너의 눈길 맞추려 조금은 쑥쓰러운 친절이면 어떠랴

산그림자처럼 삐죽삐죽 도사리고 있는 쓴 맛 걷어내고

그나마 먹을 수 있는 맛으로 다가갈 수 있다면 무엇이든 어떠랴

아직은 쌀쌀해서 움츠러드는 발걸음 총총총총

파고다 공원 뒷길로 걸어가는 할아버지 붙잡고 “안녕하세요?”

어색한 듯 건네는 부끄럼이면 어떠랴

한 마디 말이 겪는 놀람의 파동으로 촛점이 생기고

마음이 형체를 만들어 뫼비우스띠가 묶인다

오늘에 친절 매어 너에게 보내며

주저앉아 더 이상 갈 수 없다며 떼 쓰는 너를 안고

한 걸음마다 무릎 꺽이는 걸음일지라도 웃음 담고 싶다

거창하게 사랑이라 용서라 하지 않고

이른 봄의 매화꽃 살랑살랑 흔드는 희망 쯤 된다고 하면 좋겠다

어제 지나고 오늘이 있다는 희망

출근하면서 너에게 “굿 모닝” 하는 입술들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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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8. 22. 04:45

믿음, 소망, 사랑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

 

모든 인격적 존재에게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가지 덕목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다. 왜냐하면 어느 존재가 인격적이려면 가지 덕목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지 덕목은 하늘과 땅을 사는 성도에게도 항상 필요한 덕목이기에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세상뿐만 아니라 주님의 재림 이후에도 적용되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믿음, 소망, 사랑이 무엇인지 막상 설명하려 하면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덕목에 대해서 조금 자세히 살펴보고 그리고 사랑이 제일인지 생각해 보자.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좋은 평판) 얻었느니라(11:1~2) 믿음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있다. 믿음을 통해서 봐야만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며, 믿음은 그저 맹목적인 신념이나 이상주의자들의 신념이 아니라 실제적인 무엇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진들이 믿음을 통해서 좋은 평판을 얻었기 때문이다. 선진들의 증거들에는 초자연적인 증거를 포함하기에 누구도 반박할 없는 좋은 증거를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있게 되었다.

 

믿음(신앙) 신념의 차이는 인격적 관계의 유무에 있다. 성경적 믿음은 인격적 존재 사이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적 믿음은 반드시 믿음의 대상과 믿음의 내용을 요구하며, 믿음의 대상으로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믿음의 내용으로서는 하나님의 모든 역사들과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필요로 한다. 믿음은 인격적 존재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믿음의 속성 역시 인격적일 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비인격적인 것들은 결코 믿음에 포함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사람이 고백하기를, 죽을 4 완전히 겹치는 4444 4 4일에 지구가 완전히 소멸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하여도 그것을 믿음(신앙)이라 없다는 것이다. 그저 그의 신념일 뿐이다. 그의 신념에는 아무런 인격적인 관계가 없고 스스로 그렇게 믿는 것뿐이다. 또는 어느 크리스찬이 고백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 아들이 무조건 명문대에 들어가도록 주실 것이라고 스스로 굳게 믿는다 하여도 그것을 믿음이라고 수는 없다. 그의 아들이 명문대에 들어가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지 그가 굳게 믿는다 해서 들어갈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그의 희망 섞인 신념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능력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의 문제).

 

성경적 믿음은 인격적 존재 사이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며 쌍방간의 관계이기 때문에 사람 편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뿐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사람에 대한 신뢰 역시 필요하다. 아버지가 자기 자녀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누가 자녀를 신뢰하겠는가. 다만 그의 자녀인 우리들은 너무도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이기에 우리 스스로 신뢰를 만들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우리 편에서의 신뢰까지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아버지와 독립된 존재로서의 자녀가 아버지께 신뢰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 안에서 아버지의 능력과 사랑에 힘입어 자녀가 신뢰를 쌓도록 아버지가 이끌어 주시는 것이다. 믿음은 이렇게 쌍방향이므로, 내가 잠시 믿음에서 실수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여전히 믿으시며 다시 믿음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시는 것이다.

 

성경적 믿음에 있어서 믿음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과 하나님의 약속들이다. 맨처음에 창조주로서 우주를 창조하신 일부터 바로 오늘까지 역사하신 모든 것들과 하나님의 약속들이다. 모든 것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 나와 관련하여 하신 모든 일이 나의 삶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공적 기록이며 나의 삶은 사적 기록이다. 그래서 나의 삶에 근거한 사적 기록은 공적 기록을 바탕으로 판단해야 올바르게 있다. 공적 기록 중에서도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생애, 죽음과 부활은 믿음의 내용 중에서 핵심이 된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과연 무엇을 믿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 우리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제시해야만 한다. 그리고 덧붙여 우리는 공적 기록에 근거한 믿음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설명할 있는 우리의 사적 기록을 제시해야만 한다.  

 

이렇듯 성경적 믿음은 인격적 존재로부터의 증거를 바탕으로 한다. 아무런 증거도 증언도 없이 자기 혼자만의 상상으로 믿음을 가질 수는 없다. 인격적 관계에서는 서로 간의 과거의 증거로부터  현재의 믿음이 조금씩 형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은 과거적 현재로서의 믿음이다.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에 근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이시다. 따라서 시편에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는 표현과 하나님의 말씀에 소망을 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소망은 근거가 없는 어떤 일방적인 바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질 것에 대해 기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록된 약속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서 성취될 많은 약속들이 소망의 내용이며, 하나님이 소망의 성취자이시다. 소망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기에 절대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기대감을 갖고 담대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소망은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한다. 소망은 우리 영혼의 닻과 같아서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한다.

 

또한 넓은 의미에서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모든 것이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을 살면서 우리의 삶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따라 갖게 되는 소망이 있게 된다. 우리들 각자의 삶에서나 또는 교회 공동체의 활동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적으로 갖게 되는 소망도 소망이다. 다만 사적인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처럼 공적으로 주어진 소망과는 다르게 세상의 삶으로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소망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운데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미래에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현재의 기대로서 작용한다. 미래적 현재로서의 소망은 미래에 반드시 이루어질 일들에 기대어 현재의 삶의 방향을 맞추게 함으로써, 비록 현재를 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미래를 맛보며 현재를 살게 하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구별될 있다. 로마서에 기록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요한일서에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고린도전서에 정의된 것과 같이 이웃을 섬기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모든 사랑은 뿌리에서 나왔으니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이웃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 여기서도 이웃 사랑에 대해 살펴보자. 이웃 사랑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까지 하신 바로 사랑이다. 따라서 우리의 이웃 사랑은 예수님이 자신의 삶에서 몸소 보여주셨던 것처럼, 오래 참고 온유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자랑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사랑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여기에서 오래 참는 것은 오랫동안 고통을 감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냥 적당히 무시하며 끝날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며 넘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훨씬 적극적인 의미에서, 이웃으로 인해 받게 되는 고통을 오랜 기간 동안이라도 감내하며 자신보다는 오히려 이웃을 위해 실제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랑이 어렵다. 나의 자아가 조금이라도 살아있으면 처음엔 뭔가 되는 같다가도 이내 원래의 나로 돌아와 버린다.

 

또한 내가 때에 이웃이 원하는 같은 것을 적당히 해결해 주는 것을 사랑이라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어 그리스도 안에서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을 사랑이라 한다. 여기에는 반드시 고통이 뒤따르기에 사랑은 오랫동안 고통을 감내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자신을 내어준다는 것은 나의 육체적 목숨을 내어주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때에 따라 필요하다면 그래야겠지만 나의 자아를 죽이고 안의 그리스도가 역사하셔서 이웃을 위해 그리스도의 생명을 살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책망하셨던 것처럼 때로는 오히려 부딪쳐야 때도 있다. 그러나 부딪침이 나의 사적 만족을 위해서가 아님은 너무도 명백하다. 나의 자아를 죽이는 것부터가 얼마나 고통인지

 

그래서 사랑은 항상 현재적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항상 현재에서만 발현되기 때문이다. 내일 이웃을 사랑할 것이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제 이웃을 사랑했다는 것도 의미가 없다. 오늘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제 이웃을 사랑했다는 것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믿음, 사랑, 소망에 대해서 살펴보았으니 사랑이 제일인지 살펴보자. 이것은 먼저 간단한 비유로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나무를 비유로 들어보면, 믿음은 나무의 뿌리이고, 소망은 나무의 줄기이며, 사랑은 나무의 열매이다. 믿음이 단단히 받쳐주고 소망이 앞을 보며 성장하게 한다면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맺는 열매이다. 열매를 이웃이 먹는 것이며 때로는 자신도 열매를 먹으며 즐거워 하는 것이다. 믿음이 있어야 소망이 생기며 소망이 있어야 오랜 고통을 감내할 있게 된다. 어느 사람이 믿음과 소망이 없는데 혼자 자기만의 신념으로 사랑의 행위를 한다고 해도 성경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다. 사람의 영혼의 부패성은 사람의 모든 행위를 오염시키기 때문에 먼저 부패성을 완전히 해결하지 않고서는 어떤 선하고 아름다운 것처럼 보이는 행위라 할지라도 부패성에 조금이라도 오염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아주 조금이라도 오염된 것은 받지 않으신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에 의해 거듭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뿌리로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품고 자라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농축된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농부가 나무를 심는 것은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사랑이 제일인 것이다.

 

이것은 또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각각에 대해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믿음은 과거적 현재요, 소망은 미래적 현재이며, 사랑은 현재적 현재임을 생각할 때에 자명해진다. 과거와 미래가 오히려 항상 현재로 소급되어 현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우리는 언제나 현재를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웃과 나누는 것은 언제나 현재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웃과 과거를 나눌 없고 미래를 나눌 없다. 오직 현재만을 나눌 있다.

 

또한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말씀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11:1)라는 말씀에서도 있는 것처럼,  믿음은 소망으로 연결되고, 믿음과 소망은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이며 우리의 이웃은 우리로부터 나오는 사랑을 누리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믿음과 소망은 성경적인 믿음과 소망이 아니며, 성경적인 믿음과 소망은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열매 맺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 세계를 이렇게 운영하신다. 그리스도가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1:3) 말씀과 같다. 창세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을 만드시고 붙드실 뿐만 아니라 만물을 위해 그리스도를 내어주셨다.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영원히 항상 있을 것이며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말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는 소망을 누려야 한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명이 사망하는 현실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항상 있도록 하신다. 사랑은 세상을 뒤흔들 있는 사랑이다. 2000 전에 우리 주님과 제자들이 보여주셨으며 시대와 역사를 따라서 주님의 성도들이 보여준 것처럼. 그러므로 우리도 힘을 내자. 우리 하나님은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비교할 없이 크신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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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8. 22. 04:39

너에게서 가장 먼



이재



싸락눈 첫눈 온다

올해 처음 온 눈은 아니지만 첫눈이다


첫눈이 되는 기준은 눈에서 가장 먼 여름이다


너를 안아 머리를 받치느라

늘어진 티셔츠에 밴 너의 여름을 찾는다


평생 한번도 사랑한다고 말한 적 없는,

쌀을 벌기 위해 다니다 밤비탈 굴러 며칠 앓아누웠어도

누워 있던 며칠을 미안해 했던, 내 나이의 아버지는 나의 여름이다


마당에 쌓인 쌀알 치우느라

맹그로브 숲처럼 얽힌 너의 입술에서 가장 먼 말 지우느라

가슴 뻐근한 하루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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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8. 15. 08:26

성경말씀 묵상하기

 

 

먼저 것은 성경의 모든 대언(예언) 사사로이 것이 아니니 대언(예언)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임이라 (벧후1:20~21)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6~17)

 

우리는 성경말씀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결코 온전히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며 성경은 계시된 말씀의 보존이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은 때에 따라 어떤 특정 사건이나 사물을 통해서도 자신을 계시하시지만 그러한 경우는 드물고, 또한 그렇게 계시된 하나님을 명확하게 이해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언어를 통한 계시가 가장 확실하다. 언어를 통한 계시는 명확할 뿐만 아니라 보존될 있으며 시대를 초월해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확인할 있고, 더욱이 사건이나 사물을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를 판단할 있는 기초가 된다. 그러나 언어가 갖는 한계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왜곡되고 오해될 있기에 올바른 해석은 아주 중요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해석학은 아주 기초이면서 중요한 학문이다.

 

성경 해석의 기본은 역사적, 문자/문법/문학적, 그리고 신학적 해석이다. 말은 성경 해석은 언어 자체의 문법과 문학, 언어의 시대적 용법 역사적 시대의 상황, 그리고 성경 전체의 문맥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번역의 문제까지 고려하면 더욱 복잡해진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대부분의 성경말씀은 이해하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아서 초등교육을 마친 사람도 쉽게 이해할 있다. 다만 번역본에 따라서 어렵게 번역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성경 해석은 성경말씀의 올바른 의미를 찾는 작업이다. 그래서 때로는 히브리어, 아람어나 고대 그리스어 또는 라틴어 언어에 대한 지식이나 성경 고고학이나 고문서학 등의 도움도 필요하며 역사적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반면에 성경적 묵상은 올바른 성경해석을 바탕으로 하여 성경말씀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마음 또는 하나님의 인격에 깊이 들어가서 하나님께 안기는 작업이다. 따라서 성경적 묵상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연합되어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는 훈련을 포함해야 한다.

 

성경 해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교훈과 명령을 올바르게 이해했을지라도 이것이 결코 마지막 단계가 되어서는 된다. 교훈과 명령은 쉽게 교훈/명령을 내린 분과 분리될 있으며 교훈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만족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말씀을 교훈이나 명령으로만 받아들이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가려지고 그저 사랑하는 행위 하나로 모든 것이 만족되는 것처럼 마무리될 있다. 십계명이나 주기도문 또는 시편 23 등등의 성경말씀을 단편적으로 취해서 교훈으로 삼고 주문처럼 되뇌이며 그것을 행하기에 열심을 수도 있다. 겉으로 보기엔 매우 신실한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알맹이가 없다. 그는 십계명은 알아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적 묵상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명상과는 다르다. 단적인 차이는, 명상은 비움을 목적으로 하고 묵상은 채움을 목적으로 한다. 명상은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호흡을 따라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비워서 무념무상의 상태를 만들어 허무한 것에 마음을 뺏기지 않으려 하는 것인 반면에,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마음에 채워서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것이다. 개역개정의 시편에서는 묵상을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으로 자주 표현하였다 (49:3; 63:6; 71:24; 77:12; 119:15, 23, 48, 78, 97, 99, 148; 143:5; 145:5; ). 물론 개역개정에는 묵상이라는 단어도 나오는데 (1:2; 19:14; 24:63; 1:8), 단어만으로는 의미를 알기 어렵지만 당시의 용례를 살펴서 이렇게 풀어서 번역했고, 묵상은 명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성경적 묵상은 거듭난 사람만이 있고 따라서 성령님과 이미 연합된 상태에서 시작되고 묵상의 모든 과정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기에, 묵상의 결과로 성령님을 만나는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물론 묵상의 결과로 하나님과 친밀해졌다거나 성령님의 뜻을 깨닫거나 수는 있다. 하지만 묵상의 목적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묵상이 아니라 명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성경적 묵상은 시작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서 깊은 의미를 깨닫고 말씀으로 계시된 하나님께 더욱 다가가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묵상의 과정에서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조명과 인도하심은 어떤 것일까.

 

첫째, 성경말씀의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뜻을 조명해 주신다 (지식과 지혜).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때때로 왜곡되고 오해될 있는 여지가 있다. 문맥에 상관없이 구절만 떼어내서 해석하려고 한다든지 또는 성경이 말씀하려는 의미보다는 나의 선호도에 따라서 주관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든지 하는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서 성경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할 있다. 그러나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은 항상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시므로, 우리가 묵상의 과정에서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한다면 언제나 바르게 깨닫도록 하신다.

 

둘째, 성경말씀의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마음을 조명해 주신다 (사랑과 소망). 무엇을 하라 또는 하지 말라는 교훈 자체가 아니라, 사건과 상황과 교훈과 명령과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조명하시고 인도해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말씀을 구절, 문맥 또는 장을 반복해서 읽으며 집중하면서 표면적인 문자 뒤에 계시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가, 원하시는가, 화를 내시는가, 안타까워 하시는가, 실망하시는가, 칭찬하시는가, 기뻐하시는가, 슬퍼하시는가 등등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시며, 무슨 마음을 내게 전달하고자 하시는가 집중해서 고민하며 살펴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마음이신지 깨닫고 우리가 마음을 받아들이도록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신다. 모든 과정에는 성령님으로 인해 우리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사랑에 닻을 내리고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따라가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우리도 싫어하게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우리도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을 하늘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보내신 편지라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단순히 문자적인 내용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편지를 보내실 때의 아버지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고 문장 하나하나에 스며있는 아버지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며 마음을 자녀가 알고 거기에 부응하는 것을 기뻐하시기에 편지를 보내신 것이다.

 

셋째, 성경말씀의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인격을 조명해 주신다 (법칙이 아니라 사랑과 공의). 하나님은 지금 우리 눈에 보이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마치 멀리 떨어져 계시며 법칙과 율법으로 우리를 주관하시는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격적 존재로 생각하지 않고 마치 인과응보의 법칙이나, 또는 하늘 재판석에 앉아 있는, 피도 눈물도 없는, 검사나 심판자 정도로만 생각하고, 성경의 교훈대로 행해서 하나라도 복을 받도록 노력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쉬운 예로는, 어느 성도가 병에 걸리거나 직장을 잃었을 때에 그가 뭔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무조건 반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또는 내게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에 무조건 회개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감정과 의지와 생각과 지식과 지혜와 능력과 사랑과 공의와 생명의 하나님이시다. 우리 생명의 근원이시며, 우리 인격의 원형이시며 온전히 완전한 인격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의 차원에서는 불변하시지만 우리의 차원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대하실 때에는 감정도 변하고 계획도 바뀌고 한탄하시며 후회하시기도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처럼 되셔서 우리의 인격을 대해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의 차원으로만 밀어놓고 마치 우리의 차원에서는 역사하시지도 않고 인격적 존재도 아닌 분처럼 간주하며 하나님의 인격을 무시하고 법칙으로 치환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이시기에 우리와 대화를 하시는 것이다. 우리처럼 낮아지시며 우리를 인격적 존재로 대해주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며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윤리와 도덕 교과서일 .

 

넷째, 성경말씀의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계획을 조명해 주신다 (주권과 섭리). 하나님은 세상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하나님의 자녀 각각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자녀의 성격과 체질과 성향에 따라서 다른 계획이다. 어떤 자녀는 목사로서의 삶을, 어떤 자녀는 청소부로서의 삶을, 어떤 자녀는 의사로서의 삶을, 어떤 자녀는 엔지니어로서의 삶을, 이렇게 다양한 위치에서 다양한 삶을 살지만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삶을 살게 하신다. 날짜나 시간표로 정리된 계획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길에 대한 계획을 가르쳐 주신다. 계획은 숨겨져 있다가 어느날 불현듯 나타나기도 해서, 어떤 자녀가 갑자기 선교 여행을 떠나겠다고 수도 있고, 또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교에 들어갈 수도 있으며, 반대로 목사의 대신에 청소부의 삶으로 변경했으나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삶에서 발현되도록 인도하시며 능력을 주신다 (역사하심).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올바르게 이해하고 하나님과 교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삶에서 발현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자기 형제조차 사랑하지 않으면 교제는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자기가 위선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성령님은 내가 하나님을 알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능력을 주신다.

 

이상과 같이 성경적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이 변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묵상을 하면서 깨달은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하나님을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을 완전하고 역사하시는 인격적 존재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 하면 받고 잘못 하면 받는 법칙 정도로만 생각하거나, 혹는 말로만 또는 피상적으로만 하나님이란 존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완전한 아버지 받아들이는 것이다 (육신적 아버지에 대해 가슴 아픈 기억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하기가 무척 어려울 수도 있지만 어떤 대안을 찾아서라도 하나님을 완전하신 인격체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시편 91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전염병에서 건지시며 수많은 사람이 곁에서 쓰러져도 재앙이 결코 성도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시리라고 노래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보면 많은 크리스찬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사망하였다. 그래서 시편에 대해 이해하기를, 성경 말씀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완전히 모든 성도들을 지켜주신다는 의미는 아니다고 하거나 혹은 하나님은 대부분의 성도들은 지켜주시는데 일부는 어떤 심각한 죄를 범했거나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라는 정도로 생각한다.

 

다른 예를 보자. 욥기를 살펴 보면, 욥은 온전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1:1, 1:8; 2:3) 거듭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심한 고통과 고난을 당한다. 그래서 어떤 성도들은 욥기를 읽으려 하지 않는다. 두려움 때문이다. 신실한 사람도 이렇게 심한 고난을 당할 있으니 같은 사람은 얼마든지 고통을 당할 있겠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면서 욥기 중간에 있는 문장만 떼어내서 주문처럼 외우고 다니기도 한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누가 무슨 의도로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의미가 좋으니 암송할 만한 구절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오해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하나님은 일종의 무조건적 법칙, 중력의 법칙이나 에너지 보존 법칙처럼 무조건적으로 적용되어야만 하는 인과응보율을 집행하는 심판자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자녀들을 어떠한 전염병에서도 지켜주시는 분이시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녀의 필요에 따라서 자녀를 위해서 자녀에게 전염병을 허락하시기도 하는 분이시다. 하나님 안에서는 전염병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과 인격을 알고 있다면 어느 쪽이든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된다. 더욱이 욥의 경우처럼 온전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고난을 허락하셔서 그의 영적 성장을 도와주신다. 그래서 욥은 나중에 하나님 옆에 서게 되는 영광을 누리며 하나님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하나님과 훨씬 친밀해졌다. 욥기를 읽으면서 이처럼 자녀의 성장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순종하여 어떠한 고난조차도 기쁨이 되며 궁극적으로 이겨내게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더욱 활기차게 살아야 한다. 이것이 성경적 묵상의 과정과 결론이다.

 

그렇다면 이제 구체적으로 어떻게 묵상할 것인가. 성경적 묵상은 어떤 하나의 루틴이 아니다. 매일 동일하게 반복해야만 하는 어떤 판에 박힌 과정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성령님의 자유로운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가지 고려해야 것들은 있다.

 

첫째, 묵상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을 정리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쁨을 누리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생각이나 경험, 자랑, 지식을 먼저 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해서 읽고 반복해서 읽으면서 오직 말씀만이 마음에 가득차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배하게 해야 한다.

넷째, 위에서 언급한 대로 하나님의 마음과 인격과 계획을 찾고 구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안에 품어야 한다. (오늘 성경본문에서 계시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마음을 느꼈는가)

다섯째, 하나님의 마음이 삶에서 드러나고 하나님의 인격이 나의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마지막으로, 묵상을 꾸준히 비록 매일은 아닐지라도 계속해야 한다.

 

이러한 단계들은 묵상의 수준별로 나누어지는 것들이 아니고, 첫째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해야 묵상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단계씩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나의 경우로 보면, 아마도 다섯째 단계가 가장 중요한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서 이루었을 때의 기쁨은 무엇보다도 크며 더욱 하나님께 나아갈 있는 동력을 얻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의 올바른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다고 하더라도 삶에서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내게서 떠나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은 내게서 멀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말은 제대로 하나님의 마음을 안에 품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넷째 단계가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삶에서 드러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동일하다 ( 반성하는 )

 

시편 23편이나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다. 지금까지는 암송하는 것이 전부였다면 이제부터는 묵상을 해보자. 편에서 내게 좋은 의미만을 발견하려고 애를 썼던 방식을 버리고, 시편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찾아보고 하나님의 인격을 발견해 보자. 그리고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늘 아버지이심을 기뻐하며, 아버지께 안겨서 아버지의 마음에 합당한 삶을 누려보자. 성경말씀을 묵상하는 기쁨과 재미를 알게 것이며, 나날이 성장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묵상을 하자.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시니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말고 묵묵히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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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8. 15. 08:24

하루의 묵상

 


이재이


 

탯속에선 아랫배로 쉬던

자라면서 얕고 거칠어져 가슴에 머무는데

끝에서 들락이는 숨의

열을 내리고

추를 달아 아래에 쌓으면 문답 없는 침묵이 온다

 

무릎꿇고 엎드려

단어들을 침묵에 담그는 연습을 한다

 

의심에 단어들은

흙만 털어내 뿌리째 담그고

살맛 나는 단어들은

씻어서 소금에 절여 담가야 한다

 

자전거를 처음 배웠을 때처럼

무릎과 팔꿈치 상처에 딱지가 앉을

 

질그릇 항아리 열고

날숨으로 문장 하나 길어 올려

십자가에 담아 일어선다

태곳적부터 내려온, 지금은 잊혀진 지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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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8. 15. 06:15

겨울 밤비 소리


이재이



왕벚나무 맨몸으로 버티는 겨울

유리창에 매달려 살짝 들여다 보고 밀려간

밤비는 야윈 고양이 발걸음


공항 너머 세상 너에게

호오잇 주문 걸며 문자를 보내는데 어둠은

길을 내어주지 않고 더욱 짙어진다


우연일까

답장의 진동일까

유리창에서 촉촉, , 소리!


게임 매장에서 너를 위해

열두 번만에 따낸 곰인형처럼

밤은 먼 거리를 덮고


나는 마침내 겨울과 밤비는 창 밖에 두고

소리는 내 방에 들어와

배고픈 고양이를 침대 옆에 묶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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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8. 7. 22:04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배워야 한다

 

1900년대 초에 발생한 스페인 독감 이후로 백여 만에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엄청난 상황에 인류는 직면했다. 더욱이 이번 상황은 인류 역사상 노아의 홍수 다음에 처음으로 세상 모든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으로서 선진국이든 개발도상국이든 저개발국이든 상관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확산되었고, 지금도 확산되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서 세계적으로 벌써 수천만 명이 감염되었고 수십만 명이 사망하였으며 오늘도 새로운 감염자와 사망자가 나오는 상황이다.

이렇게 엄중한 상황을 이해하고자 기독교계에서 저명한 분들이 자신의 생각을 이미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으며 또한 많은 목사님들 역시 자신들의 생각을 교회를 통해서나 인터넷을 통해서 나누고 있는데 (구글을 통해서 코로나 기독교또는 코로나 파이퍼 라이트 검색하면 다양한 글들을 찾을 있다), 이러한 글들이 때때로 서로 극단적인 대척점이 있는 경우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미 이렇게 많은 글들이 있지만 접근방향을 다르게 생각해 보고자 한다. 글은 상황의 원인이나 이유를 찾는 또는 어떻게 이겨낼까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상황에서 무엇을 배울 있을까를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중국 우한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전파되기 시작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중국보다는 오히려 선진국이라 불리는 서구권 국가들에서 엄청난 속도로 퍼져서 수천만명이 감염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다.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유럽과 미국이다. 이로 인해서 서구권 국가들의 경제는 엉망이 되었고 미국의 경우 2020 2분기에 -32% 성장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였다.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국가에서 지급하는 실업수당에 의지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으며 다른 수천만 명의 사람들은 언제 직장을 잃을지 몰라 노심초사하며 삶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음을 두려워한다. 더욱이 이들 국가들과 호주, 캐나다, 남미 국가들 등은 소위 말하는 기독교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들이며 전세계의 대부분의 기독교나 천주교 신자들이 국가들에서 거주한다. 그런데 이들 국가들에서 가장 많은 감염자와 사망자가 나온다. 8 현재 미국이 압도적으로 1위이며, 세상에서 가장 예수님 동상이 세워져 있는 브라질이 2위이다. 러시아가 3위이고 인구가 많은 인도가 뒤를 잇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의 생명을 염려하는 미국 방송사들이나 바이러스 전문가들은 한국을 방역의 기준으로 삼아서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켜서 바이러스 감염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매일 매일 소리높여 외치고 있으나, 미국에서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개인의 쾌락을 위해 별로 호응을 하지 않으며 또한 장년층에서도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마스크를 쓰지 않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루에 새로운 감염자가 7 명씩 증가하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나만 아니면 상관없다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각자의 방식대로 즐기며 산다.

실제로 어떤 분은 말하기를, 회사에서 마스크 쓰기를 의무화 한다면 회사를 그만두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마스크를 쓰지 않겠다고 하며 심지어 그러다가 죽으면 어떻게 거냐고 물어도 그냥 죽어도 된다고 하였다. 마스크를 쓰든 쓰든 그건 자기 개인의 자유인데 그것을 회사에서 또는 정부에서 강제하냐고 한다. 그리고 청년들은 금요일 오후가 되면 삼삼오오 모여서 이번 주말에 어느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며 즐기고 놀지 서로 낄낄대며 이야기한다. 심한 경우는 주정부의 마스크 쓰기와 외출 자제령을 거부하며 수백명씩 총을 들고 모여 데모를 하기도 하며, 동양인이나 흑인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며 대낮에 폭행을 가하기도 한다. 이렇게 사회가 불안해지자 총기류의 판매가 수십 퍼센트 증가했다는 뉴스가 나오며 이제는 백인 성인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과 동양인들도 총을 사는 비율이 엄청 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살펴보면, 서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기주의와 쾌락주의이다. 개인주의를 넘어서 개인이 마치 세상의 중심이 듯한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보이고 있다. 그들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의 이익과 쾌락이 가장 중요하며, 어느 누구도 그것을 침해해서는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유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무엇이든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회에서는 자기 이익과 즐거움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에 심지어 죽음에 이르도록 하여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국가의 최고 지도자라는 대통령이 이런 자세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가 배워야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기독교 문화가 가장 왕성한 곳에서 이러한 이기주의가 팽배하게 때까지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이기주의는 결코 기독교 정신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 베드로는 분명히 가르치기를,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자유로 악을 가리는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 하였고, 또한 사도 바울 또한 고린도전서에서 가르치기를, 자신은 고기를 먹을 자유가 있으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유를 평생 동안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였고, 갈라디아서에서는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노릇 하라 율법은 이웃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5:13~15)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수천만 명이나 되는 미국에서 이러한 이기주의가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전혀 주저함 없는 정도가 되었다는 것에 우리는 놀라지 않고 우리는 반성하며 회개하지 않는가. 우리의 눈은 도대체 어디를 향해 있단 말인가.

또한 백신이 아직 완성되기도 전에 미국과 영국과 일본이 백신 13억회 분량을 싹쓸어 갔다는 뉴스가 들린다. 가난한 나라들은 백신을 구입할 수조차 없게 만큼 부자 나라들이 백신을 입도선매 하고 있는데 그게 미국과 영국이다. 상대적으로 힘이 없고 가난한 나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다른 힘없는 나라들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백신을 구입하고자 한다는 소식이 들리는 상황에서도 미국은 많은 백신을 미리 찜해놓고자 수십조 원을 지출하며 다방면으로 힘을 쓰고 있으며 이미 전체 미국인이 백신을 두번씩 맞을 있을 만큼을 구입했다고 한다. 성경책을 손에 들고 나와서 TV 앞에 서는 대통령과 신실한 기독교인이라는 부통령이 최고 지도자인 미국에서 다른 힘없는 나라를 위한 배려는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우리는 우리 지도자들의 이러한 행위를 보면서 놀라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이러한 엄중한 상황이 6개월 넘게 이어지고 있는데도 상황으로부터 진지한 배움을 얻기 위해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엎드리자는 운동이 우리 기독교계에서 전혀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또한 무엇인가. 그저 항상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니 조금만 버티고 이겨내면 된다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오직 평안만을 선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다 왕국이 멸망할 즈음에 예레미야가 평안이 아니라 멸망을 선포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는가. 우리 기독교계의 덕망있는 분들이나 지도자들은 엄중한 사태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평안만을 선포하는가. 인류 역사상 처음 겪는 상황에 대해서 지금까지는 너무도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워서 어쩔 몰라 했더라도 이렇게 6개월이 넘도록 이어지며 점점 심해지고 있다면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여쭙고 엎드려 기울여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캘리포니아의 어느 유명한 목사님은 주정부의 교회 폐쇄 지침에 반발하여 벌써 주째 주일마다 교회문을 열고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며 하루도 중단할 없는 일이다. 그러나 교회 건물을 폐쇄하는 것과 교회를 폐쇄하는 것은 다르다. 교회 건물이야 폐쇄되고 허물어지고 심지어 다른 종교 시설로 팔릴 수도 있지만, 교회는 결코 폐쇄되지도 허물어질 수도 없다. 우주의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교회 건물이 폐쇄되어도 교회는 모여서 예배드릴 있다.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안전하게 예배드릴 있다. 모두 같은 장소에 모여 서로 얼굴을 직접 마주하며 입을 모아 찬양드릴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성령님 안에서 영으로 모여 얼마든지 함께 예배드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 상황을 통해서 성도들이 교회 건물로 나와서 의무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서로 함께 영으로 하나 되어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시려고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한국 교회의 실정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미국보다는 훨씬 좋은 상황일지라도 여전히 모두 마스크를 쓰고 생활해야 하며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서 모임을 자제해야 하므로 예전처럼 얼굴을 마주보며 예배드릴 없는 실정은 미국 교회의 상황과 동일하다. 이는 아마도 전세계의 모든 지역 교회들이 동일하게 마주하고 있는 현실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상황을 통해서 무엇을 배워야만 것인가. 첫째, 우리는 먼저 진정한 자유를 배워야 한다. 세상 사회가 개인주의를 넘어서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기주의와 이기적 쾌락주의로 빠져드는 동안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조차 동화되었음을 깨닫고 회개하며 다시 주님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둘째, 우리가 주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세상에 전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유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교회 안으로만 향해 있는 시선을 밖으로 돌려서 이웃을 위로하고 보듬어주며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셋째, 지도자를 구별할 아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4년전에 소위 바이블 벨트라고 불리는 미국 남부 지역들이 선택한 대통령이 지금은 어떠한 사람으로 드러났는지 생각해 보고 여기서 교훈을 얻어야 하며, 이제는 주님께 구하여 올바른 지도자를 구별할 아는 지혜를 간구해야 한다.    

넷째, 모든 성도들이 주님 안에서 영으로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기쁨을 배워야 한다. 아직은 어리고 연약한 성도들을 포함해서 교회 공동체의 모든 성도들이 다함께 주님 안에서 영으로 하나 되는 기쁨을 배워야 한다. 하나 됨이 없는 상황에서 지금 소외된 지체들이 얼마나 헤매고 있을 것인지 우리는 가슴 아파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주님 안에서 영으로 하나 성도들이 이렇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서로 섬기며 서로 위로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교회 공동체의 모든 성도들이 온라인으로라도 다함께 모일 없는 상황에서 소그룹으로 /오프라인으로 모여 서로의 안전을 배려하면서도 서로를 섬기며 위로하며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나누도록 해야 한다. 소그룹 모임이 활성화 되어서, 비록 교회 전체가 모이지는 못하더라도, 교회 안에서 작은 교회를 이루어 서로 섬기며 사랑하며 용기와 소망을 잃지 않도록 보듬어주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모든 배움들을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것은 우리 스스로의 반성과 회개이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꿇고 엎드려 우리의 지난 날들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회개가 먼저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참다운 배움을 배울 수가 없다. 기껏해야 뭔가 흉내를 내다가 뿐이다. 진정한 회개가 있으면 성령님의 조명과 인도하심을 받을 있고 무엇을 배워야 할지 성령님께서 가르쳐주실 것이다.

모두들 팬데믹 상황이 언제나 끝날까 하며 그날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땅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상황을 하루라도 짧게 해주시기만을 간구하고 있다. 상황은 언젠가는 분명히 끝난다. 비록 팬데믹 이전의 삶의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지라도 뉴노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국가들의 가치 기준이 바뀌었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들은 다시 얼굴을 마주하며 모여서 서로 함께 하는 방식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공동체 구성원들의 모임을 필수로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보화 기술이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서로 얼굴을 대하며 함께 모여야만 하는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질서는 영원히 유지될 것이다.

따라서 아직 팬데믹 상황이 이어지는 동안 우리는 주님 안에서 겸손히 배우면서, 팬데믹 이후의 삶을 준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 삶의 근본적 변화이다. 편안한 현실에 안주하고 복음을 세상과 타협하여 적당히 하루하루를 넘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를 요청하시며 또한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살기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주변에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있으면 그들을 돌봐주어야 한다. 바이러스에 희생된 사람이 있으면 가족들과 함께 슬퍼해야 한다. 진정한 회개는 이렇게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셀라)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시편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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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8. 7. 21:46

겨울, 그런 날이 있어



이재이



주머니에서 툭! 떨어진 눈물을 따라가다 잠시 길을 잃었다 가을 다음에 겨울이 오는 것처럼 골목에 들어섰으니 막다른 골목이었다 우편배달부의 오토바이 소리가 반대편 도로에서 들려왔다 뒤돌아보았으나 낯선 곳이다


새해가 빙판길에서 시작되어도 기쁨이던 시절에 가을은 축복이었다 새벽잠과 바꿔 오랫동안 계획한 여행을 독감에 걸려 취소해야 하는 그날부터는 지렁이가 되었다 입 안에서 굴러다니는 통보리처럼


빈 우편함은 취소된 여행이다 무엇으로든 되돌릴 수 없다 옆집 우편함에 편지가 꽂혀 있으면 겨울은 더욱 가난해 보이고 빈 자리는 뇌리에 천공을 만들고 뇌수가 흘러나온다 전기요금 고지서가 일회용 밴드가 되다니!


사라지는 오토바이 소리를 방향 삼아 골목을 나선다 겨울은 무감각해질 만도 하건만 체온 때문에 꿈틀거린다 은사시나무 낙엽 타는 냄새가 택배로 배달되면 사막을 기다리는 낙타처럼 창문을 열고 부끄러운 손을 땅에 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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