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풀숨 2020. 11. 21. 12:20

그리스도인의 산 소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벧전 1:3~5)


우리는 몇 해 전에 뉴스를 통해서 청년들이 3포 세대, 5포 세대, 7포 세대 또는 N포 세대라고 스스로 칭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출산, 결혼, 연애를 포기하였기에, 세가지를 포기한 세대, 줄여서 3포 세대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5포 세대는 여기에 인간 관계와 집을 포기한 것이고 7포 세대는 또 여기에 꿈과 희망까지 포기한 세대란 뜻인데,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여기 미국 이민 사회 역시 힘겨운 이민 생활로 인해서 하루하루의 삶을 자포자기하듯 사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저 하루를 넘기는 것만으로도 족한 삶을 살며, 하루를 살았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는 삶이나, 소망조차 갖을 수 없는 현실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지요.


장례식에 다녀왔을 때는 기분이 좀 가라앉습니다. 아는 분의 장례식이든 모르는 분의 장례식이든 장례식은 언제나 마음에 무거움을 줍니다. 그것이 선하게 작용해서 하나님을 더욱 찾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람은 반드시 죽음 앞에 서야만 한다는 무거움은 어쩔 수 없겠지요. 영국의 대문호인 세익스피어는 그의 4대 비극 작품 중에 <맥베스>에서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노래했습니다. 상황이나 환경 때문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감 때문에 이런 시를 지었습니만 소망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은 단지 걸어다니는 그림자 (윌리엄 세익스피어, 장영희 역)


    그리고 우리의 과거는 모두 바보들이 

    죽음으로 가는 길을 비춰줬을 뿐

    꺼져간다, 꺼져간다, 짧은 촛불이여!   

    인생은 단지 걸어다니는 그림자

    무대 위에 나와서 뽐내며 걷고 안달하며 

    시간을 보내다 사라지는 서툰 배우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소음과 분노로 가득 찬 바보천치의 이야기.


어느 시대나 대동소이 하겠지만 특히 요즘 시대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더욱 심각하게 자포자기 하는 세대 등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마치 소망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소망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사치인 것처럼 느껴질 만큼 소망을 말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찬으로서 우리에게 소망이 영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소망은 뜬구름 잡고자 하는 자기 스스로의 신념이나 희망이 아닙니다. 앞뒤 없이 무조건 ‘말하라 그러면 이루어질 것이다 (Name it and earn it)’ 수준의 신념이 아닙니다. 또는 복권이나 로또에 당첨되는 행운을 바라는 희망사항도 아닙니다. 이런 수준의 소망이라면 결론적으로 말하여, ‘몇 번 해 봤는데 아무 것도 얻어진 것이 없더라’가 되고 결국 소망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라는 결론으로 끝나고 소망 없는 삶을 살겠지요. 어쩌면 그것이 우리의 현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도했는데 안 되더라, 금식기도도 했는데 안 되더라, 하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사도 베드로가 가르쳐 주고자 하는 것은 ‘산 소망’입니다. 그냥 소망이 아니라 살아서 역사하는 소망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산 소망’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누가 무어라 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소망 그 자체로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어 있는 소망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죽어서 움직이지 않는 소망은 내가 가서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붙잡고 소유하여 그 안에 마치 뭔가 있는 것처럼 나의 신념으로 생명을 불어넣어서 이끌어 가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뭔가가 있기를 온 맘 다해 바라고 소원하여 마치 그것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스스로 생각하며 그것을 껴안을려고 애를 씁니다. ‘난 할 수 있어 I can do it, 희망이 있어, 다 잘 될 거야, 다 결국 지나가는 거야’ 하고 스스로 매일 되뇌이면서 마치 스스로 최면을 걸듯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기도 합니다. 그러다 결국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처절하게 좌절하며 극단적으로 치닫기도 합니다. 그러나 살아서 역사하는 소망은 다릅니다. 이 소망은 내가 만들거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미처 알기도 전에 이미 존재하며 또 나를 움직이는 소망입니다. 나의 상태나 환경, 또는 신념이나 철학, 사상이나 어떤 주의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이끌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살아있는 소망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에서 성도들을 정의하면서 먼저, 그들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따라 은혜로 선택된 사람들임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창세 전에 이미 우리를 아십니다. 그리고 은혜로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선택이 우리의 역사 가운데 실제로 이루어지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이루시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다시 낳으셨습니다. 따라서 산 소망의 근거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산 소망과 앞으로 받을 기업의 근거가 바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되었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우리는 믿음과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 인해서 알게 되고 누리게 되었듯이 소망 역시 하나님으로 인해서 알려지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죽어 있는 존재라면 죽은 소망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는 존재이기에 우리에게는 산 소망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소망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사도는 소망의 내용으로서 먼저 우리가 받을 기업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기업이 무엇인지 어떻게 이루진 것인지 그리고 왜 주어지는 것인지 등 세세한 것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깨닫게 되고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내용은 성경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구약성경의 개념을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모형적으로 제시되었던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진 바로 그 기업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 안에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아는 만큼 소망의 크기도 달라집니다. 많이 알고 많이 경험하는 사람은 더욱 큰 소망을 갖게 되는데 이는 소망은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막연하게 ‘다 잘 될 거야, 난 할 수 있어’ 식의 희망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통해서 알고 경험을 통해서 확증된 하나님의 성품에 따라서 확실한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찬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예수님은 살아서 역사하신다’라는 말은 논리적이며 이성적으로 가르치고 배워야 할 명제가 아니라 삶에서 경험되어야 할 실재에 대한 권면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고서 자기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이론적으로 가르치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부모는 항상 함께하고 경험되는 실재(Real Being)로서 인식되는 대상입니다. 실재에 대한 경험 또는 체험을 통하여 저절로 자연스럽게 부모가 존재하며 살아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부모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가르쳐 주어야 할 때가 있긴 합니다. 어느 경우인가 하면, 우리 부모와는 다른 부모를 가진 사람들, 곧 남의 자식에게는 우리 부모가 살아있음을 알리고 가르쳐 깨닫도록 설명해 줘야겠지요. 그들에게는 우리 부모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며 무슨 일을 하는지 등등 다양한 설명을 통해서 우리 부모를 알리고 확증해 주어야겠지요. 그러나 어느 부모라도 자기 자식에게 자기가 살아있음을 가르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라는 말은 교회 밖에서 외치고 선포하고 가르쳐야 할 말이지만 안에서는 과연 그러시다는 것이 교회 차원에서나 각 개인의 차원에서 경험되고 체험되어야 할 진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53~4절 말씀에서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우리가 아노라”. 여기에서 연단으로 번역된 단어를 킹제임스역에서는 체험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연단의 체험적 측면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체험하는 하나님을 통하여 소망을 갖게 된다는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어떠한 신념이나 생각이나 이상이나 희망사항이 아니라 체험에 바탕을 둔 실제적 존재로 말미암아 갖게 되는 산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체험되는 실재이며 그 체험을 통하여 소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욥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욥도 고난을 통하여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였고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생각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아무런 소망을 갖고 있지 않다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경험한 적이 한번도 없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성경은 가르쳐 주기를,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 자녀를 결코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는 마치 고아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산 소망이 없든지 아니면 내가 생각하고 희망하는 소망을 갖고서 모든 것을 내가 생각하여 신념대로 판단대로 나의 기준대로 신앙생활을 하며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인정합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맞으면 내가 틀린 것이고 내가 맞으면 성경이 틀린 것입니다. 성경이 틀릴 수는 없으니 내가 틀린 것이지요. 이런 경우 내가 진정 그리스도인인지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세상의 다른 어떠한 종교와도 다른 이유는 기독교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많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다른 모든 종교와 다르다는 말이 단순히 세상은 모르는 예수님이 기독교에는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교회와 및 모든 성도들과 인격적이고 실제적인 교제를 나누는 분으로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경험되고 체험되는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종교처럼 그냥 뭔가가 있으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식의 접근이 아니라 또는 사람 스스로가 깨우치고 알아내서 산꼭대기를 향해 저마다의 길을 따라 노력하고 애써서 올라가서 산꼭대기에 있는, 신이라 불리는 어떤 존재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산꼭대기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는 산 아래로 내려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인도하시고 가르치셔서 마침내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이끌어 내시겠다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산 아래로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살며 경험되고 인식되고 마침내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신 것이지요.


1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지금도 보지 못하나 믿고…” 베드로는 편지의 수신자들인 성도들에게 이 말씀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베드로 자신은 예수님을 보았고 경험했고 함께 살았으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이후에도 계속 해서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사도였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경험했던 자신과 비교해서 보았을 때, 비록 편지의 수신자들은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뵙고 경험했던 적이 없지만 그리고 지금도 보지도 못하지만 그들 역시 자신처럼 동일한 믿음으로 동일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직접 경험하고 함께 살았던 베드로와 동일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그들 역시 어떤 식으로든 예수님을 경험하였고 동일한 믿음에 이르게 되었으며 그러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모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히브리서 11: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러한 삶, 비록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게 됨으로써 산 소망과 영광스러운 기쁨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성도들 역시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을 보는 것 같이 경험하고 믿으며 모든 환난과 고난 가운데 인내하며 마침내 소망을 명백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망은 결코 부끄럽지 않은 것이며 살아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을 무시하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이고 내 삶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면 할수록 더 많이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든 중대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든 어떤 것이든 하나님께 맡기고 마치 하나님께서 바로 옆에서 항상 동행하고 계시는 것처럼 하나님과 함께 하면 하나님을 늘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훈련 중에 하나가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형식이 아니더라도 자식이 아버지와 대화하듯이 또는 부부가 대화하듯이 모든 일에 대해서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의 응답과 인도하심에 관심을 기울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내 삶에 간섭하시며 함께 하시는지 반드시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각 개인의 삶에서나 교회 공동체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여 발견되는 소망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각자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결론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소망과 성경이 말하는 소망의 차이점을 정리하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세상의 소망은 죽은 소망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산 소망이며, 둘째, 세상의 소망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만 유효한 소망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영원한 소망이며, 셋째, 세상의 소망의 내용은 내가 만들어 내는 소망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소망의 내용은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발견되고 깨달아지는 소망이며, 마지막으로는 세상의 소망은 나의 신념이나 희망사항 또는 요행을 말하지만 성경의 소망은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조금 더 명확하게 보이나요? 사람은 선행이나 윤리적 또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통해서 더 나은 존재로 발전해 나가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 아예 크리스찬처럼 타락한 세상과는 구별되는 존재, 곧 성령님으로 거듭난 존재로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과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적으로 앎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품게 된다는 것, 바로 이것을 보아야 합니다. 참소망은 내가 하나님을 아는 만큼, 경험하고 순종하는 만큼, 나에게 주어지며 내가 발견하는 것이지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누리며 어떠한 고난을 통해서도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드리며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사람들입니다. 단지 윤리나 도덕이나 철학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 그리고 세상이 말하는 가장 선하다는 차원을 훨씬 넘어서 하나님의 차원으로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는 특권을 누리며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동행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지금 완전하게 이룰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이러한 소망을 품고 살아도 오히려 죄로 인한 좌절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소망을 맛보며 그것이 완전히 이루어졌을 때를 기대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심지어 죄를 범한 후에라도 이 소망으로 인해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소망이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지요. 소망을 만들어서 붙잡으려 하지 마시고 소망이 나를 이끌어 가도록 나를 맡겨야 합니다.


우리 각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방향의 차이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크리스찬은 조금 더 앞서 있어서 영광의 소망을 좀 더 잘 알고 더 기대하며 하나님과 더욱 동행하는 삶을 살겠지만 그렇지 못한 크리스찬도 있습니다. 조금 더 앞에 있든 조금 뒤에 있든 모두가 같은 길에 서서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며 한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것이지요. 조금 앞에 있는 성도는 뒤에 있는 성도에게 모범을 제시하며 이끌어 주고, 조금 뒤에 있는 성도는 성장함으로써 앞서 있는 성도에게 기쁨과 자극과 도전을 주며 모두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15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 우리는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특별히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외출이나 여행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떠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 소망의 이유에 대해 대답할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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