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성에 대하여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22~24)
아마도 모든 성도들은 자기 속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죄성으로 인해서 절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노력해 보고 저렇게 노력해 봐도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성 때문에 자꾸만 못나게 행동하는 자신을 보면서 깊은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와 기쁨으로 가득하지 않고 어느새 내 생각, 내 욕심, 내 필요, 나 중심으로 가득찬 것을 보면서 흠칫 놀라며 답답해 한다.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참으로 간절하고 절실하게 드리고서는 기도가 끝나면 어느덧 다시 내 욕심대로 돌아가서 기도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산다. 주일에는 교회에서 예배드리며 눈물로 찬양을 드리고 설교 말씀에 아멘 아멘 화답하지만 예배 시간이 끝나고 하루 이틀 지나면 다시 나 중심으로 돌아가서 설교 말씀과는 전혀 다르게 산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도 바울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인생이 참으로 비참하며 곤고하다는 것을 고백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나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연합하여 신령한 복들을 받고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을 입고 사는 한 어쩔 수 없는 죄성의 지배를 경험해야 하는 미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처절하게 느꼈던 것 같다. 그는 위대한 사도였으므로 비록 나처럼 한심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픈 마음에 반항하는 어두운 마음을 느껴야 했고 고백해야만 했다.
죄성의 가장 무서운 점은, 죄성은 절대로 뿌리 뽑히지 않고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점점 더 죄성에 사로잡히게 만든다는 점과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증거들이 있어도 단 하나의 거짓을 합리화시켜 우리가 그 거짓을 믿게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스운 얘기로 이런 얘기가 있다. 여기에 검은 개와 흰 개가 있는데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기겠는가 하는 이야기이다. 정답은 밥을 많이 먹인 개가 이긴다는 것이다. 검은 개에게 밥을 많이 주고 흰 개에게 안 주면 검은 개가 이길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그렇다. 검은 개에게 매일 밥을 많이 주고 흰 개에게는 잘 안 주면서 흰 개가 이기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기대를 품고 산다. 죄성이 우리 안에서 그런 기대를 품게 만드는 것이다.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조차도 나 자신에게 가장 적합하게 합리화시켜서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만드는 능력을 죄성은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죄성은 우리를 자꾸만 어둠으로 끌고 간다. 어둠 안에서는 죄가 보이지 않으므로 거짓 평안에 안주하게 된다.
이렇게 거짓 평안에 빠져 있을 때에는 어떠한 유혹에도 쉽게 죄를 짓는다. 마르틴 루터가 말한 것처럼, 새가 우리 머리 위를 날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우리 머리에 둥지를 짓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죄성은 우리 머리에 둥지를 짓고 우리는 죄성에게 밥을 자꾸만 먹이는 결과가 되어 결국 죄 속에 살게 된다. 그리고는 눈물로 반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용서와 도움과 은혜를 구하지만 또 다시 죄를 짓는다. 도둑질이나 거짓말이나 간음이나 탐심과 같은 명시적인 죄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나 중심적인 생각에서 내 기준으로 사는 것이 곧 죄이므로 참으로 고단한 인생이다. 죄인 줄 몰랐을 때에는 그냥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넘어갔지만 이젠 그럴 수도 없으니 이 얼마나 고달픈 인생인가…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사는 한, 죄성을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다는 것은 로마서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고백 뿐만 아니라 요한일서에 기록된 사도 요한의 경고 때문에 알 수 있다. 우리들 중에 그 누구도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면 – 죄가 없었다 하며 과거형이 아니라 죄가 없다는 현재형이다 –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라는 말씀을 보면 우리는 너무도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것 같다. 더군다나 사탄이 울부짖는 사자처럼 매일매일 우리의 틈을 노리고 있으니 더욱 암울하다.
그러나 또한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죄성이 우리를 완전히 멸망시키는 수준으로까지는 떨어질 수 없다는 말씀에 위로와 용기를 얻어야 한다. 아무리 죄성이 강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계속해서 죄를 지으며 죄에 함몰될 수는 없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통해 항상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성이 아무리 강하고 뿌리 깊다고 하더라도 죄성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
히브리서 12장에서 성령님은 우리가 죄성과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대항하여 싸우라고 권면하신다. 따라서 죄성이 너무도 강해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싸워야 한다.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계시므로 우리가 죽기를 각오하고 죄성과 싸우면 우리는 최소한 비참하게 절망하지는 않는다. 모든 전투에서 다 이길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처참한 실패를 맛보지는 않으며 점점 더 많은 승리를 누리게 된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자신이 참으로 비참한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바로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드린다고 하였다. 자신이 비참해서가 아니라 그런 상태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어제도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며칠 동안에도 나는 참으로 많이 절망했다. 그리고는 또 희망을 발견한다. 내 안에 있는 죄성을 바라봐야만 하는 상황에 있으면서도 또한 역설적으로 그 끔찍한 죄성을 이기도록 도우시는 주님을 알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알기 때문이다.
지난 어느 날엔가는 너무도 절망적이어서 거의 포기할 뻔 했던 적도 있었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여서, 도저히 희망이 없는 것 같아서, 이젠 죄성과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그저 죄성이 가는 데까지 가야 하나 하고 주저앉을 뻔 하였다. 나 자신이 정말 밉고 싫어서 거울을 보기도 힘들 만큼 절망적이었다. 모든 생각이 다 악하고 어둡게 느껴졌기에 눈물로 기도하며 몇 날 며칠을 간구했는데도 빛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완전히 포기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주님이 일으켜 주셨다. 주님의 사랑이 나를 일으켜 주셨다. 그래서 지금은 안다, 다시는 결코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주님께서 반드시 지켜주시고, 죄와 싸우게 하시며, 또한 함께 싸워주실 것을.
그러므로 우리 안의 죄성이 너무도 뿌리 깊고 너무도 강해 보일 때에 오히려 주님을 붙잡고 주님을 바라보자.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으리라.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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