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문詩門 열다
이재이
설렘 안고 그대 망막에 대한 노크
시신경을 통해 머언 기억을 망각에서 길어 올려
살아 있다 세우는 깃발
생수통 등에 진 채
부르튼 목소리로 속삭이는 영혼의 비명
그대의 동굴에 들어가기 위해 하얀 조명 뿌리고
맨몸으로 부딪는 몸부림
억새풀, 바람의 멈춤을 깨트리듯
시문詩門 열다
이재이
설렘 안고 그대 망막에 대한 노크
시신경을 통해 머언 기억을 망각에서 길어 올려
살아 있다 세우는 깃발
생수통 등에 진 채
부르튼 목소리로 속삭이는 영혼의 비명
그대의 동굴에 들어가기 위해 하얀 조명 뿌리고
맨몸으로 부딪는 몸부림
억새풀, 바람의 멈춤을 깨트리듯
황무지
이재이
너는 있는 듯 없다
처음부터 없지는 않았으나
어느 순간 무너져 평면이 되었다 그리고
씨앗 없는 4월과 무시되는 10월의 반복
너는 질문하지 않는다
입술 마른 채
햇빛 아래 오래 전
너의 방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봄은 움직이는 것마다
바람에 킁킁대며 뒤쫓는 당나귀 콧김을
네 앞에 불고 있음에도
너는 시간을 낳지 못하는 불임의 몸
사탕을 잃어버리고도 불평하지 않는 아이처럼
신발을 끌며 돌아서서
그나마 남아있던
목소리에 마스크를 씌우고
색을 삼켜버린 그림자의 몸부림처럼
비움에 빠져든다
비움은 채움의 소울메이트
서로를 향한 끈적한 의지를 잊고서
“이교에 물든 기독교”를 읽고
처음 2002년도에 원제 “Pagan Christianity?: Exploring the Roots of Our Church Practices”라는 책으로 프랭크 바이올라와 조지 바나가 공동 저술한 “이교에 물든 기독교”는 크리스찬으로서 우리의 예배와 신앙 생활을 되돌아 보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된 것만큼은 틀림이 없다. 한국에서도 거의 10년 전에 번역본이 출판된 책이며 교회의 관습들을 통해서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저자들이 오랫동안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그동안 ‘그냥 그렇게 해 왔으니까’ 하고 아무런 생각 없이 해 왔던, 교회 내의 여러가지 전통 및 관습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회가 건물을 가리키는가 아닌가에서부터 시작하여 심지어는 정장을 입고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까지도 바이올라는 언급하고 있다. 교회가 건물을 가리키는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사람들이 언급해 왔기에 어느 정도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성가대나 정장에 대해서는 다소 생소한 것들도 접하게 되었다. 또한 세례/침례에 대해서도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였다.
책의 구성
이 책은 제 1장에서 우리가 진정 성경대로 해왔는가 하고 질문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각각 차례대로, 교회 건물, 예배 순서, 설교, 목사, 주일 예배 의상, 음악 사역자들, 십일조와 성직자 사례비, 세례와 주의 만찬, 그리고 기독교 교육 등에 대해서 하나씩 그 기원과 유래를 추적해 보고 또 성경에 기록된 초대 교회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서 과연 현대의 교회의 모습이 얼마나 성경적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 후에 마지막 2개의 장들에서 다시 성경으로돌아가기를 권면하며 마친다.
목사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프랭크가 말하고 싶은 부분은 예배와 목사에 대한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면 프랭크는 교회 내에서 목사라는 직분자로 인해서 교회 자체가 제도화 되고, 성도들이 차등화 또는 계급화 되고, 또 성도들이 교회 내에서 담당해야 할 사역의 기회를 빼앗김으로써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올바른 예배가 무너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교회 내에 소위 말하는 ‘전문가’의 등장은 아주 소수의 전문가와 수많은 비전문가들을 구분하여 정의하게 하였고 또한 비전문가들을 분리시켜서 전문가 아래에 두는 제도로 이어졌던 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사실이다. 그래서 섬겨야 할 직분이 군림하는 직분으로 바뀌게 되었고, 사랑의 섬김은 입술에서만 존재하게 되는, 즉 소수의 전문가들이 실제적으로는 소위 ‘평신도’ 그룹의 수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모양이 되었다는 것 역시 역사적으로 사실이다. 이로 인해서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프랭크의 진단이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 때문에 프랭크는 책의 앞부분에 자기가 가장 중요하고 생각하는 바로 이 두 가지의 이슈, 즉 교회와 목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교회란 무엇인가와 목사란 어떠한 사람인가에 대해서.
현대 교회들에서 목사는 절대적인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다. 한 지역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담임목사 한 사람에게 신앙 생활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만 생각해 봐도 목사는 지역교회 내에서 절대적인 존재이다. 마치 목사가 없으면 교회가 아닌 것처럼 생각되는 세태를 봐도 그렇다. 특별히 한국교회 또는 미국의 한인교회들은 카리스마적인 목사가 좋은 목사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며, 모든 성도들이 너무도 과도하게 (담임)목사에게 의존하다 보니 목사가 마치 하나님의 (직접적인) 대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그렇다면 목사는 성경적인 직임인가? 물론 그렇다. 프랭크도 인정하고 있다. 다만 프랭크가 지적하듯이 목사라는 직임은 다른 모든 직임 및 은사와 평등한 직임이지 그 위로 높여져서 목사가 직분이 된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프랭크는 교회 내의 직임 또는 기능(function)과 직분(office)을 구분하고 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목사는 기능이지 직분이 아니다. 기능이라 함은 어떤 사역에 대한 설명인 것이지 어떤 사람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감독과 집사는 사람에 대한 설명이기에 직분이다. 그러나 목사는 기능을 설명하기 위한 단어라고 이해한다. 에베소서 4장에 기록된 “목사와 교사”라는 단어 역시 비록 사람에 대한 명칭이긴 하지만 기능을 설명하기 위한 명칭이지 사람에 대한 설명은 아니라고 본다. 디모데서나 디도서에 기록된 감독/장로와 집사에 대한 설명은 사람의 자질과 자격에 대한 설명이므로 사람 자체에 대한 것이나, 에베소서에 기록된 목사라는 단어는 사람의 자질과 자격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어느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기능을 설명하기 위한 단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로버트 뱅크스와 달리 프랭크 바이올라는 디모데서나 디도서에 기록된 감독/장로와 집사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로버트는 “바울의 공동체 사상”의 부록에서 간단하게나마 감독과 집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프랭크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러나 프랭크의 다른 책인 <다시 그려보는 교회>에서는 감독과 집사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는데 이 책에서 그는 감독과 집사 역시 기능에 대해 사도 바울이 얘기하는 것이지 계급이나 직급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못박고 있다. 그리고 감독과 집사의 자격과 자질에 대한 설명 역시 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자격과 자질인 것이지 그런 자격과 자질이 있다고 해서 다른 성도들 보다 더 높은 계급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 나는 프랭크와 약간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데 감독과 집사 역시 섬기는 기능이 우선이라는 데에는 같은 견해이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감독과 집사의 자격과 자질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그 기능 못지않게 그 기능을 수행할 사람의 성품 역시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더 영적인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성도들 보다 더 높은 계급의 신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영적이기에 더욱 더 섬기는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교에 대해서
목사에 대해서 논하기 전에 프랭크는 설교에 대해서 먼저 논하고 있는데, 현대 교회에서 목사의 가장 핵심적인 임무가 설교이고 또 설교라는 제도로 인한 문제점들이 크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 보다도 심지어 수십년간 설교를 들었던 사람인데도 아무 것도 바뀌지 않고 여전히 젖먹이 정도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았을 때에 이러한 문제점들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혹은 설교의 기원과 문제점들은 목사라는 특수 전문가를 생산해 냈고 또 목사는 설교라는 특수 임무를 등에 없고 특별한 지위를 누려왔는지도 모르겠다.
현대 교회에서 목사라는 직분의 가장 큰 문제점은 목사는 나머지 모든 성도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데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목사가 성도들과 삶을 나눌 수 없고 또 서로의 삶에 대해 동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설교’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목사가 아무리 성경적인 설교를 할지라도 목사의 삶의 관점에서 바라본 설교이기에 성도들의 삶에 전혀 침투할 수도 없고 진정한 영향을 미칠 수도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과 사도들은 청중들의 삶에 직결되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였으나, 현대 시대에 교회라는 제도 아래에 있는 목사는 얼마만큼 교회의 성도들과 삶을 나누고 있을까?
설교가 그리스-로마의 문화가 아니라 유대인의 회당에서부터 유래했다는 많은 신학자들의 견해에 대해서 프랭크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회당에서 정기적으로 구약성경을 읽고 그 읽은 성경말씀을 강론했다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 아니라, 회당에서도 정해진 한 사람만 강론했던 것이 아니었고 또 강론 중에 얼마든지 청중은 질문하고 서로 대화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프랭크는 설교의 기원을 그리스-로마의 연설/웅변 문화에서 찾는다. 프랭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모든 성도들이 함께 할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기에 현대의 설교는 회당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프랭크의 진단
결국 프랭크에게 있어서, 현대의 비뚤어진 교회관과 잘못된 목사관으로 인해서 교회다운 교회가 되지 못하고 아주 소수의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성도들이 다 수동적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역할을 다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 소수의 전문가와 다수의 수동적 회중의 관계가 정해진 이후에는 교회의 모든 것이 다 그 방향을 따라가게 된 듯 보인다. 세례/침례와 주의 만찬 역시 소수의 전문가가 집전하는 아주 특별한 의식이 되었고 성도는 수동적으로 참여하든지 아니면 거의 완전히 배제되어 구경꾼의 신세로 전락되었다.
교회, 예배, 설교, 그리고 목사에 대한 프랭크의 견해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무엇 보다도 중요한 것은 과연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와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일 것이다. 프랭크의 견해가 대체로 성경적으로 올바르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현대의 교회, 즉 제도적 교회를 다시 초대 교회와 같이 유기적 교회로 회복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만 한다. 비록 그 방법이 프랭크가 추구하고 시도하고 있는 방법과는 다르다 할지라도 우리는 뭔가를 해야만 한다. 현대 교회가 성경적이지 않은 면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는 성도로서 뭔가를 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 의식 가운데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또한 신학교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러한 사실에 실망하거나 좌절하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 소망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성경적인 삶이 줄 수 있을 것 같은 미래,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한 기쁨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 생활 전반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심지어 기독교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성경말씀으로 돌아가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게 된 기회는 참으로 소중하고 귀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몰랐다면 그냥 그렇게 넘어갔을 것을 이제라도 알게 되었고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되었으며, 또한 이전부터 신앙생활을 하면서 막연하게나마 ‘이건 아닌데…’ 했던 것들에 대해서 살펴보게 되어 큰 유익이 되었다.
또한 흥미롭게도 프랭크는 신학교나 성경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지식 전달이 목적이자 목표가 아니라 진정 기독교 신앙을 전달하는 신학교의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일방적인 지식의 전달이나 주입식 교육이 아닌 것들의 필요성이 신학교에서야말로 더욱 중요한 요소이므로, 소통과 질의 및 응답 형식의 수련회나 여름 캠프와 같이 교수님들과 학생들이 며칠이나마 함께 생활하며 토론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한 강의 시간에서도 질문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결론
결론적으로 프랭크 바이올라의 “이교에 물든 기독교”는 성경에 기록된 초대 교회의 모습을 추적하고 파악함으로써, 비록 이제는 엄청나게 변해버린 삶의 방식으로 사는 현대의 성도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책이다. 그렇기에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한번 이 책을 읽어볼 것을 추천드린다. 그냥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물론 프랭크가 제기한 많은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 지금 당장은 없다. 프랭크 역시 그 해결책을 다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우리 모두를 가르치시는 성령님이 계시므로 소망을 갖고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고민하고 올바르게 나아가려는 노력 가운데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반드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각 지역 교회의 특성에 맞게 하나님이 기뻐하실 교회의 모습으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예배를 드리는 그 날을 꿈꾸어 본다.
반지하방
이재이
폭폭하다는 것은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
가지 하나하나 바람에 흔들린다는 것
고민이 고민을 낳지 못하도록
달빛을 속이고
진통제 먹고
햇빛에 말리려 걸어놓아도
낮달이 뜬다
더듬이 더듬는 달팽이 너머
눈 덮인 산꼭대기 아이거 북벽 위에
낮달이 뜨면
빈손 깨워서
배고픈 새끼를 핥아주는 어미
길고양이 시선처럼
낮달이 뱉어낸 숨비소리
반지하방 골목에 가느랗게 퍼지며
길들여지지 않는 바람을
끝내 풀어놓고야 마는데
사람들의 발소리를 밤새
머리에 이고
반투명 콧구멍을 철창으로 낸 반지하방
창틀에 매달려 핀
민들레 꽃씨는
햇빛 들지 않는 아침에도
휘청 날아오른다
죄성에 대하여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22~24)
아마도 모든 성도들은 자기 속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죄성으로 인해서 절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노력해 보고 저렇게 노력해 봐도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성 때문에 자꾸만 못나게 행동하는 자신을 보면서 깊은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와 기쁨으로 가득하지 않고 어느새 내 생각, 내 욕심, 내 필요, 나 중심으로 가득찬 것을 보면서 흠칫 놀라며 답답해 한다.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참으로 간절하고 절실하게 드리고서는 기도가 끝나면 어느덧 다시 내 욕심대로 돌아가서 기도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산다. 주일에는 교회에서 예배드리며 눈물로 찬양을 드리고 설교 말씀에 아멘 아멘 화답하지만 예배 시간이 끝나고 하루 이틀 지나면 다시 나 중심으로 돌아가서 설교 말씀과는 전혀 다르게 산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도 바울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인생이 참으로 비참하며 곤고하다는 것을 고백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나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연합하여 신령한 복들을 받고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을 입고 사는 한 어쩔 수 없는 죄성의 지배를 경험해야 하는 미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처절하게 느꼈던 것 같다. 그는 위대한 사도였으므로 비록 나처럼 한심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픈 마음에 반항하는 어두운 마음을 느껴야 했고 고백해야만 했다.
죄성의 가장 무서운 점은, 죄성은 절대로 뿌리 뽑히지 않고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점점 더 죄성에 사로잡히게 만든다는 점과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증거들이 있어도 단 하나의 거짓을 합리화시켜 우리가 그 거짓을 믿게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스운 얘기로 이런 얘기가 있다. 여기에 검은 개와 흰 개가 있는데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기겠는가 하는 이야기이다. 정답은 밥을 많이 먹인 개가 이긴다는 것이다. 검은 개에게 밥을 많이 주고 흰 개에게 안 주면 검은 개가 이길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그렇다. 검은 개에게 매일 밥을 많이 주고 흰 개에게는 잘 안 주면서 흰 개가 이기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기대를 품고 산다. 죄성이 우리 안에서 그런 기대를 품게 만드는 것이다.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조차도 나 자신에게 가장 적합하게 합리화시켜서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만드는 능력을 죄성은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죄성은 우리를 자꾸만 어둠으로 끌고 간다. 어둠 안에서는 죄가 보이지 않으므로 거짓 평안에 안주하게 된다.
이렇게 거짓 평안에 빠져 있을 때에는 어떠한 유혹에도 쉽게 죄를 짓는다. 마르틴 루터가 말한 것처럼, 새가 우리 머리 위를 날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우리 머리에 둥지를 짓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죄성은 우리 머리에 둥지를 짓고 우리는 죄성에게 밥을 자꾸만 먹이는 결과가 되어 결국 죄 속에 살게 된다. 그리고는 눈물로 반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용서와 도움과 은혜를 구하지만 또 다시 죄를 짓는다. 도둑질이나 거짓말이나 간음이나 탐심과 같은 명시적인 죄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나 중심적인 생각에서 내 기준으로 사는 것이 곧 죄이므로 참으로 고단한 인생이다. 죄인 줄 몰랐을 때에는 그냥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넘어갔지만 이젠 그럴 수도 없으니 이 얼마나 고달픈 인생인가…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사는 한, 죄성을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다는 것은 로마서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고백 뿐만 아니라 요한일서에 기록된 사도 요한의 경고 때문에 알 수 있다. 우리들 중에 그 누구도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면 – 죄가 없었다 하며 과거형이 아니라 죄가 없다는 현재형이다 –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라는 말씀을 보면 우리는 너무도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것 같다. 더군다나 사탄이 울부짖는 사자처럼 매일매일 우리의 틈을 노리고 있으니 더욱 암울하다.
그러나 또한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죄성이 우리를 완전히 멸망시키는 수준으로까지는 떨어질 수 없다는 말씀에 위로와 용기를 얻어야 한다. 아무리 죄성이 강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계속해서 죄를 지으며 죄에 함몰될 수는 없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통해 항상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성이 아무리 강하고 뿌리 깊다고 하더라도 죄성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
히브리서 12장에서 성령님은 우리가 죄성과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대항하여 싸우라고 권면하신다. 따라서 죄성이 너무도 강해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싸워야 한다.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계시므로 우리가 죽기를 각오하고 죄성과 싸우면 우리는 최소한 비참하게 절망하지는 않는다. 모든 전투에서 다 이길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처참한 실패를 맛보지는 않으며 점점 더 많은 승리를 누리게 된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자신이 참으로 비참한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바로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드린다고 하였다. 자신이 비참해서가 아니라 그런 상태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어제도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며칠 동안에도 나는 참으로 많이 절망했다. 그리고는 또 희망을 발견한다. 내 안에 있는 죄성을 바라봐야만 하는 상황에 있으면서도 또한 역설적으로 그 끔찍한 죄성을 이기도록 도우시는 주님을 알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알기 때문이다.
지난 어느 날엔가는 너무도 절망적이어서 거의 포기할 뻔 했던 적도 있었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여서, 도저히 희망이 없는 것 같아서, 이젠 죄성과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그저 죄성이 가는 데까지 가야 하나 하고 주저앉을 뻔 하였다. 나 자신이 정말 밉고 싫어서 거울을 보기도 힘들 만큼 절망적이었다. 모든 생각이 다 악하고 어둡게 느껴졌기에 눈물로 기도하며 몇 날 며칠을 간구했는데도 빛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완전히 포기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주님이 일으켜 주셨다. 주님의 사랑이 나를 일으켜 주셨다. 그래서 지금은 안다, 다시는 결코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주님께서 반드시 지켜주시고, 죄와 싸우게 하시며, 또한 함께 싸워주실 것을.
그러므로 우리 안의 죄성이 너무도 뿌리 깊고 너무도 강해 보일 때에 오히려 주님을 붙잡고 주님을 바라보자.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으리라.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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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 그리고
이재이
아침구름 아래 까마귀
깍깍 내지르는 비틀린 울음
차 한 잔 마시는 동안
열 번 울었다, 흐린 날씨를 들이킨다
반쯤 감긴 눈동자는
점점 늘어지는 고무줄처럼
뇌세포의 전기신호 늪에 빠져들어
나의 오늘은
환청같은 자유를 위한 홀로그램
지금 여기
무중력이다, 지금 여기 빈집이다
한 뼘 뇌세포 안에서
수고로운 소음을 오늘에 묻고
공중에 매달린 입술은
바람의 파동을 일으키지 못하고
물방울처럼 떨어진다
누구일까 빗속을 뚫고
압력밥솥에서 퍼지는 밥냄새처럼
내게로 띵동 초인종을 울리시는 분
선악과에 대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즉 약칭하여 선악과라 하는 열매가 가끔 뜨거운 감자처럼 크리스찬 모임에서 열띤 토론의 주제가 되기도 하고, 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로 선악과를 들면서, 선악과로 사람을 시험해서 타락하게 만든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질문은 “왜?” 라는 것에 맞추어져 있고 선악과만 없었더라면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을 터이고 우리가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살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푸념 섞인 원망을 하기도 한다. 이 글은 그동안 이 동일한 질문을 끊임없이 하면서 지금까지 조금씩 정리한 성경적 진리들을 함께 나누고자 해서 올리는 글이다. (혹시 질문이나 반론이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아담의 타락 사건
창세기 1장에서 3장의 기록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온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으로 좋게 창조되었으며, 더욱이 아담은 하나님을 닮도록 하나님의 형상으로 흠없이 창조되었으나, 그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결국 먹음으로써 죄를 범하고 타락하는 기록이 된다.
하나님이 애초에 아담을 흠없고 원래적 의를 가지고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으므로 아담은 선악과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었다. 처음 명령이 주어진 시기로부터 그 명령을 어기는 순간까지 정확히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는 꽤 오랫동안 그 명령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는 하나님을 멀리 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명령을 소홀히 생각했으며, 마침내 사탄의 유혹이 오자 금방 그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먹고 말았다. 그 결과 그의 죄의 영향으로 온 세상이 무흠했던 상태에서 고통을 겪어야 하는 상태로 바뀌었고 사람은 영이 부패하고 오염되어 죄를 끊임없이 탐하는 상태로 바뀌었다. (여기에서 죄는 하나님의 명령/법/계명을 어기는 것을 의미한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주어진 하나님의 첫째 명령은 하나님을 온 맘과 정성 다해 사랑하라는 것이며 둘째 명령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선악과 나무를 에덴 동산에 심어놓지도 않으시고 또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주지도 않으셨다면 아담은 죄를 범하지 않았고 따라서 아담의 후손들은 아무런 고통도 없이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까?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 선악과 나무를 심어놓으시고 아담에게 그러한 명령을 주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두 가지 질문에 답을 하면 선악과에 대한 궁금증이 대부분 다 풀리게 될 것이므로 이 두 질문에 중점을 두고 생각해 보자. 먼저 두번째 질문부터 살펴보자. 왜냐면 두번째 질문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도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적 관점에서의 선악과의 의미
선악과 나무의 의미를 창세기를 중심으로 구약 성경에서 찾아보자. 이를 위해서 먼저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한다. 창세기1:26~28 말씀을 보면, 아담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고 온 땅에 충만하고 땅을 다스리며 정복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 명령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이라는 조건이 없다. 따라서 이 명령은 사람에게 의무를 부과하고 그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는 조건부 명령이 아니다. 아담은 정복하며 다스리는 능력과 위치에 있도록 창조되었으므로 그 능력을 마음껏 펼쳐보라는 명령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아담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으니 하나님을 대신하여 온 세상을 통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를 청지기적 위임통치라고 표현한다. 아담은 하나님을 대리하여 마치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게 온 세상을 통치하여야 했고, 또한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창조물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제사장이었다.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는 창조주와 위임통치권을 받은 청지기적 창조물의 관계였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의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명령의 의미는, 피지배층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폭력으로 지배하라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처럼 사랑과 공의로써 피지배계층을 이웃으로서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섬기며 함께 하라는 것이었다. 모든 창조물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얼굴로서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존재로 창조된 아담에게 있어서 선악과 나무와 선악과에 대한 명령은 창조주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 온 땅의 창조물 위에 왕으로서 존재하는 아담에게 오직 한 분, 하나님이 진정한 왕이자 창조주이시고 자신은 청지기인 창조물임을 끊임없이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시기에, 3차원 시공간에서 유한한 존재로 사는 아담에게 하나님이 언제나 창조주 하나님으로 임재하시기 위해 선악과 나무와 (명령의) 말씀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제 아담은 이 명령을 항상 기억해야 하고 또 기억할 때마다 마치 하나님이 바로 자기 눈 앞에 계시는 것처럼 그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제물로 하는 산 제사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그 명령에 항상 순종함으로써 아담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위임통치를 하는 청지기임을 기억하며 언제나 하나님의 성품에 맞는 통치의 결과들이 이루어지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다.
선악과의 의미가 왜 아담에게 중요했는가 하면, 하나님의 통치만이 온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 의도대로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비록 아담을 통한 위임통치일지라도 본질은 하나님의 통치와 동일한 것이므로, 아담은 반드시 창조주 안에서 창조주의 뜻과 성품과 의도대로 통치해야 했으며 그렇게 하고 있다는 명시적인 증거가 바로 선악과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임통치가 아니라 아담이 독립적으로 자기만의 통치를 한다는 의미가 되며, 유한한 창조물이 온 세상을 자기 뜻대로 통치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실패와 고통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위임통치의 의미는 단순히 대리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 통치자인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하심과 능력과 영향 아래에서 통치한다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유한한 창조물인 아담은 결코 독립적인 통치자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신약성경적 관점에서의 선악과의 의미
요한복음 1장은 창세기의 창조 기록을 예수님 중심의 기록으로 다시 기술했다. 그리고 창조주가 직접 창조물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이에 따라 선악과의 의미도 창세기와 구약성경적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신약성경적 관점에서 재해석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에덴 동산에 심어진 선악과 나무도 창조의 한 부분이며 예수님으로인해서 창조의 의미가 새롭게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약성경적 문맥에서 창조주와 청지기적 창조물의 관계 안에서 정의되었던 선악과와 선악과 명령은 이제 신약성경적 문맥에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안에서 정의되도록 확장되어야 한다. 창세기 문맥에서 아담은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청지기로서의 왕이었다. 온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명령을 받았으나 위임통치의 권한이었다. 선악과는 아담이 위임통치자로서 청지기적 왕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표지였다. 그런데 이제 신약성경의 문맥에서 두번째 아담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지만 사람의 아들 측면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면, 그는 성령님의 권능으로 부활을 통해 의로우심이 증명되었고, 사람의 아들이지만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으며, 예수님 안에서 선택받은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사람의 아들인 두번째 아담을 통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열린 것이다. 유한한 창조물이 무한하신 창조주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두번째 아담의 관계는 창세기의 문맥인 창조주와 위임통치권을 받은 창조물의 관계를 넘어서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확장된다. 그리고 아들이면 상속자이므로, 이제는 창조주로부터 위임을 받아서 창조주의 소유물들에 대해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상속자로서, 즉 창조주의 소유물이 곧 상속자의 소유물이 되었으므로 아들은 자기 소유물에 대해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서 소유물이란 내 맘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대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기에 사랑의 대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통치의 방식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이웃을 위해서 죽음까지도 감수하는 사랑으로 통치하는 것이며,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는 방식이다. 따라서 가장 높은 자는 하나님을 가장 닮은 자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가장 닮은 자들에게 그리고 하나님을 가장 닮은 자들로부터 약한 자들에게 하나님 안에서 사랑과 섬김이 점차로 아래로 확장되는 방식이다.
이러한 관점을 통해서 선악과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이제 선악과와 선악과 명령은 단순히 아담의 위임통치만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자녀이며 상속자가 되는 길을 열기 위한 장치로서 주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는 거룩한 전으로서 성령님이 임하시는 자리가 되었다. 창세기의 문맥에서 선악과와 선악과에 대한 명령 말씀으로써 임하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직접 자녀에게 연합적으로 임하셔서 자녀를 거룩한 전으로 삼으신다. 따라서 선악과와 선악과에 대한 명령은 자녀의 영혼에 임하시는 성령님에 대한 표상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물에게 임하시는 가장 기초적인 표상을 통해서 장차 이루어질 진정한 임재를 예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창조물로서의 사람이 창조주에게 연합됨으로써 창조물의 유한성을 창조주 안에서 초월할 수 있는 길을 받았다는 것이다. 모든 창조물은 창조 세계 안에 종속되어 있다. 오직 창조주만이 창조 세계를 초월하실 수 있는 존재이다. 사람도 창조물로서 창조 세계 안에서 닫힌 우주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제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서 창조 세계를 초월하고 열린 우주를 경험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선악과와 선악과에 대한 명령은 아담이 창조물로서의 한계와 유한성을 절감하게 하지만 또한 역설적으로 창조물의 유한성을 초월할 수 있는 길을 가리키는 표지였다. 첫번째 아담은 실패했으나 두번째 아담은 끝까지 하나님께 신실함으로써 이 길을 열어준 것이다.
이처럼 신약성경의 문맥에서 보면 선악과 나무와 선악과 나무에 대한 명령은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를 위해서 주신 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악과 나무를 통해서, 구약성경의 문맥에서 하나님은 창조주, 전능자, 그리고 공의의 하나님이 강조되었고, 신약성경의 문맥에서는 창조주, 전능자, 그리고 공의의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자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된 것이다. 자녀의 성장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처럼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이 드러난 것이다. 사람이 창조물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창조물에 머물지 않고,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합되는 존재로 성장하기를 바라고 계셨던 것이다.
종말론적 관점에서의 선악과의 의미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두 개의 특별한 나무를 심어놓으셨는데, 하나는 선악과 나무이며 다른 하나는 생명 나무였다. 따라서 선악과 나무는 반드시 생명 나무와 함께 그리고 생명 나무에 대비되어 이해되어야 한다. 비록 선악과 나무는 아담의 타락으로 그 효용이 다했지만,에덴 동산에 있던 생명 나무에 이르는 길은 아담의 타락 직후에 아담의 타락 때문에 폐쇄되었고 생명 나무는 사라진듯 했지만 요한계시록에 다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선악과 나무는 생명 나무에 대비되어 종말론적 의미를 지닌다.
선악과 나무와 생명 나무는 한 쌍으로서 에덴 동산에 심어졌고 아담에게 주어졌다. 선악과 나무는 이 땅을 바라보게 하고, 생명 나무는 하늘을 바라보게 하였다. 아담이 선악과 나무에 대한 명령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생명 나무에 이르는 길은 언제나 열려있고 생명 나무의 열매를 언제나 먹으며 하나님을 즐거워 할 수 있었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의 관점에서 보면 생명 나무는 하나님의 뜻을 가리키고 있었으므로, 선악과 나무는 생명 나무와 한 쌍으로서 현재와 미래에 대해 하나님의 포괄적인 의도를 나타내었다. 선악과 나무와 그에 대한 명령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종말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기초였던 것이다. 그것이 첫번째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무너졌으나 두번째 아담은 실패하지 않고 그 기초를 증명하였고, 이에 따라서 생명 나무에 이르는 길이 다시 열린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 나무와 그에 따른 명령은 신구약 성경 전체의 문맥에서 보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종말론적 관점 안에서 종말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기초였고, 또한 생명 나무를 바라보면서 장차 이루어질 창조 세계의 완성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기대하게 하는 디딤돌이었다.
선악과 나무가 없었으면 아담은 타락하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선악과 나무와 선악과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명령의 의미를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살펴 보았다. 그러면 이제 첫번째 질문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만일 선악과 나무가 없었다면 아담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았을까?
아담에게 있어서 선악과 나무는 단순히 먹지 말라는 명령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선악과 나무와 그에 따른 명령은 생명 나무와 함께 하여 너무나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아담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충만하게 성장하여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자로 내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시작이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 온 세상을 다스리는 청지기적 왕의 직분이었다. 따라서 아담이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구현하는 위임통치에 실패하는 것이 곧 아담의 타락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아담 자신의 기준을 내세우는 것이 곧 죄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타락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분명히 아니었다. 두번째 아담인 예수님이 이것을 몸소 증명하셨다. 첫번째 아담과 완전히 동일한 사람으로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항상 완전히 지키셨고 부활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증명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키는 데 아담보다 훨씬 더 쉬웠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키는 데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게 하셨다면 예수님의 공로는 사람의 아들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룩한 것이 되고 우리 사람에게는 아무런 공로적 유익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예수님처럼 타락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또한 타락할 수도 있는 존재였으며, 어떠한 방식으로든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통치가 아닌 아담 스스로의 독립적인 통치를 꿈꾸며 실현하는 순간에 아담은 죄를 범하고 타락하는 것이다.
다만 그 타락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로서 선악과 나무가 에덴 동산에 존재했던 것이며, 명시적이었기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이와 반대로, 선악과 나무는 역시 그 성공을 명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장치였으며, 만일 아담이 실패하지 않았다면 그의 성공 역시 명시적이었기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또는 아담이 사탄의 유혹을 받을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막아주셨더라면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다. 하나님은 자녀를 만드신 것이지 종을 만드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전부 막아주시는 것을 처음부터 의도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종에게는 모든 일을 일일이 지시하고 종이 순종하지 않으면 형벌만을 내리지만, 자녀에게는 자녀를 믿는 믿음으로 기다리며 모든 것을 아버지가 자녀와 함께 감당하시는 것이다.
처음부터 아담을 타락할 수 없도록 만들지 않으신 이유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셨을 때에 처음부터 아담의 영혼에 성령님이 임하셔서 아담이 절대로 타락하지 못하게 하셨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온 우주를 경영하시는 궁극적 통치자로서 경륜적 필요에 따라서 창조물에게 임하셔서 다양한 능력과 은혜를 베푸시기도 하고 또 창조물에게서 떠나기도 하신다. 아담은 흠없이 완전히 사람으로서 창조되었으나 아직 그의 영혼에 성령님이 연합적으로 임하시지는 않으셨다. 왜냐하면 성령님의 연합적 임재는 완전히 의롭다고 증명된 자녀에게만 임하시기 때문에, 비록 아담에게는 원래적 의로움이 있었지만 아직 공로적 의로움이 완전히 증명되지는 않았고 그 증명의 과정과 상속자가 되는 과정에 있었으므로 성령님이 아담의 영혼에 연합하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 곧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신 것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연합의 수준으로 임하신 것이기 때문에 아담에게처럼 필요에 따라 임하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신약 시대에는 두번째 아담인 예수님의 의의 공로로 인하여 이러한 연합의 수준으로 성령님이 사람에게 임하시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의와 상관없이 무조건 처음부터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되어 성령님이 사람의 영혼에 항상 임재할 수 있게 사람을 창조하시지 않은 이유는 성경에 계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뚜렷하게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유한한 창조 세계에서 유한한 창조물이 무한하신 하나님과 연합되기 위해서는 창조 시에 받은 원래적 의로움 뿐만 아니라 창조물 자신의 공로적 의로움 없이 가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담은 종이 아니라 자녀로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과의 연합이 가능한 그릇이라는 것을 충분히 증명해야만 했을 것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자녀에게 공로적 의로움을 요구하셨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할 뿐이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천사를 비롯한 다른 어떤 창조물에게도 허락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허락된 지극히 크고 큰 영광이다).
한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책임인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사람의 자유 의지가 무조건 타락으로 결과되지는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다는 것이 아담의 타락에 대해 하나님의 책임의 근거로서 거론될 수는 없다. 첫번째 아담의 타락은 자신의 자유 의지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며, 또한 두번째 아담의 성공은 자신의 자유 의지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두 가지 모두의 경우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궁극적 통치자로서 온 우주를 섭리로써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첫번째 아담의 실패는 첫번째 아담의 책임일 뿐이다. 하나님은 오히려 첫번째 아담의 실패 가운데서도 창조 세계와 창조물을 포기하지 않으신 것이다.
선악과 나무에 대한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그것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은 아주 깊고 심오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창조로부터 종말까지, 그리고 첫번째 아담뿐만 아니라 두번째 아담에게도 적용되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의 기록을 통해서 계시된 진리는 신약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보다 더 풍성하고 깊은 의미를 가지며 종말에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 나무와 그에 대한 명령은 우리에게 걸림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의 지혜와 경륜의 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표상이 되어야 한다. 선악과 나무에 대한 명령에 실패한 아담의 죄책과 모든 사람의 죄과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감당하심으로써 선악과 나무를 넘어서 이제 생명 나무로 우리를 인도하셨음을 깊이 깨닫고 기뻐해야 마땅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하나님이 이러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과연 이러하다면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상속자로서 어떠한 통치 –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는 통치를 해야 하는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을 지성적으로만 아는 데서 머무르지 않고 우리의 전존재가 하나님을 닮은 자녀이며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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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뵐게요
이재이
툭 던져진 한 마디
듣는 사람이 있든 없든
스스로의 다짐처럼 낡은 담요처럼
문턱을 넘지 못하고 쌓인다
빵 부스러기를 먹다
사람이 다가서면 날아오르는
비둘기 발자국처럼
사람과 적당한 거리 유지하며
사람이 던져주는 먹이에 의지해 산다
우리 입술에 사는 비둘기가 여럿 있다
언제 밥 한번 먹어요
다시 연락할게요
내일 뵐게요
반복되고 겹치다가
점이 지워지듯 사라지면
마지막 남은 이
문간에 널브러진 다짐을 묶어
문 밖 가문비나무에 노란 띠로 달아놓는다
그러면 빵 부스러기 찾아
모여드는 비둘기의 체온을 위해서
내일은 그렇게 던져지듯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