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고 슬픈 뉴스 기사
지난 11월 2일에 포털 사이트 다음의 뉴스란에 이런 기사가 떴다. 불교계가 개신교계를 향해서 발표한 성명서에 대한 기사인데, 개신교 신자들이 불교 사찰에 불을 지르지 못하도록 개신교단의 지도자들이 막아달라는 내용이었다 (https://news.v.daum.net/v/20201102194833486). 이 기사를 보고 처음엔 내 눈을 의심했고 기사의 사실성을 의심했을 정도로 충격이었다.
몇 주 전에 지인과 나눈 대화를 소개하면 이렇다. 내 지인의 친한 친구 A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해서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어서 내 지인이 그 A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데 차마 복음을 전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용인 즉슨, 그 A의 오빠가 수 년 전에 어떤 사람과 법정 다툼을 벌였는데 상대방이 개신교인이었고 그의 교회 사람들이 법정에 몰려들어와서 A의 오빠에게 욕설과 비방을 일삼으며 개신교인이라면 치를 떨게 만든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내 지인의 친구인 A도 개신교인이라면 무조건 반감을 갖고 대하고 있어서 복음을 전하기가 정말 어렵고, 친구 관계까지 상할까 봐 조심스럽다는 것이었다.
그 때 내 지인에게 그 얘기를 들으면서 지인의 친구가 너무도 안타까워 눈물이 났는데, 이번에 다음 뉴스에 난 기사를 보면서 너무도 안타까워 고개를 들지 못하겠고 마음이 먹먹하니 부끄러웠다. 도대체 왜 개신교인들의 사랑은 선택적인 사랑인 것일까. 교회 안에서는 서로 심장이라도 빼어 줄 것처럼 정답고 살갑게 구는 사람들이 밖에 나가면 이웃에게 악을 행하고도 뻔뻔하게 구는 것일까… 내 주위의 지인들로부터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크리스찬으로서 어떻게 행동하고 있나 하는 반성이 들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도대체 왜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주변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것일까 하는 고민도 했던 차에 이번 기사를 보고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성경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바리새인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그들은 기댈 데 없는 과부의 재산을 빼앗는 사람들이었다. 입으로는 참으로 진실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길게 기도하며 채소의 십일조까지도 드리고 금식도 했지만 행동으로는 이웃의 재산을 갈취했다. 그들은 분명 자기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행동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은 귀담아 듣되 그들의 행동은 따라하지 말라고 하셨을까 싶다. 그들은 위선자였으며 필요한 때에만 상황에 맞는 행동을 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행동의 바탕에는 선민 의식이 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잘못된 크리스찬들의 머리 속에는 동일한 선민 의식이 있는 것 같다. 자기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해도 다 하나님을 위한 일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고, 따라서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별로 신경쓸 필요가 없고 오히려 떳떳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그러한 크리스찬들은 이단 종파에 소속된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이 이단 종파에 소속되었든 아니면 정통 개신교단에 소속되었든, 중요한 것은 교단을 막론하고 그러한 선민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특별하게 선택된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데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선택되었다’는 의식이 아니라 그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하는 점이다. 성경은 기록하기를, 이집트의 바로 왕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선택된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일을 열심히 했으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편에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낸 일에 쓰임을 받았다. 그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선택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떠한 일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판단과 결정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항상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한 일이다. 사랑과 공의와 신실하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역시 사랑과 공의와 신실함이 배어 있는 일이며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도록 하는 일이다. 소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웃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해를 끼치는 일이 결코 하나님의 일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너무도 자명하다.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다고 해도 그 일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하여도 결코 그럴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심판은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일이지 사람이 임의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지어 다른 종교를 믿는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낸다고 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사도들 중에 어느 누구도 그러한 일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며칠 동안이나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어느 귀신들린 소녀를 향해서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 오히려 귀신으로부터 놓이게 되는 은혜를 베풀었다. 로마의 이교도인들에게도 아무런 물리적 피해를 입히지 않고 오히려 친절하고도 간절하게 호소하며 하나님을 가르쳐 주었다. 어느 사도도 전도 여행을 하며 이교도의 지역에 들어가서 폭력을 행사하거나 해를 끼치지 않았다. 사도들은 오히려 폭력을 당했고 물리적, 경제적, 육체적 모든 피해를 입고도 이교도들을 저주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확신의 선민 의식에 가득차서 그러한 일을 벌이는 것은 하나님과는 전적으로 무관한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욕심을 채우며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것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그 ‘선택되었다’는 의식 때문이다. ‘선택되었다’는 의식은 아무래도 사람을 특별하게 만든다. 그것도 어떤 위대하고 대단한 존재에 의해 선택을 받았다는 의식은 더욱 더 그렇다. 어쩌면 이러한 선민 의식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해도 다 용납이 되고, 비록 일은 자기가 하지만 하나님을 대리해서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아주 크다. 오직 선민 의식 하나 때문에 이렇게 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선택된 사람들, 예를 들어 사도들을 보면,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며 공의의 하나님이며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드렸다. 그 어떠한 이유 때문이든 이웃에게 피해를 입히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은 피해를 당하는 쪽을 택했었다. 이교도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사도들을 핍박했을 때에도 그 핍박을 당하기만 하였다.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였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일부러 소출의 일부를 수확하지 않고 그들에게 허락했던 것처럼, 무지해서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당하여 줌으로써 폭력의 부당함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참된 공의를 알게 했던 것이다. 그 이상을 넘어서는 것, 즉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심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일하였던 것이다. 사도들이 오히려 가장 경계했던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웃이나 교인들에게 해를 끼치며 악을 행하는 기독교인들이었다.
우리가 참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우리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지 우리가 그 무엇이라도 잘난 것이 있어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반항하며 무시하며 거짓을 일삼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과 은혜에 힘입어 우리 이웃에게, 그가 어떠한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 한,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섬겨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도 모두 다른 종교 – 그것이 이방 종교이든 샤머니즘이든 심지어 무교라는 종교든 – 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을 명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셨던 마음으로 우리도 우리 이웃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이다. 그래서 다른 종교를 믿는 이웃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향해 부끄러운 짓을 하지 말고, 안타깝고 측은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자.
진정으로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은, 자기가 마치 하나님을 대리하는 심판자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이웃에게 베푸는 사람이다. 이웃을 위해 필요하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 은혜와 사랑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께 영광드리도록 자기 의를 버린 사람이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변화되어, 이런 부끄러운 기사를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