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풀숨 2023. 3. 26. 20:41

잃었다가 찾아진 것에 대하여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개의 비유가 나오는데 모두 잃었다가 다시 찾은 것에 대한 비유들이다. 한 마리 양, 한 드라크마, 그리고 한 아들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이야기이며, 그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동일한 주제를 다룬다. 바로 잃었다가 다시 찾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주제이다.

    그런데 이 비유들은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흔히 겪는 일인 Lost & Found, 즉 분실물 찾기를 통해서 아주 심오한 진리를 감동적으로 전달해 준다. 우리 대부분은 비 오는 날에 밖에 나갔다가 지하철이나 버스 또는 학교나 카페 등에 우산을 잃어버리고 집에 오는 경험을 몇 차례 했을 것이고, 또는 자신이 아주 아끼는 펜을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잃어버리고는 너무도 아쉬워 한 경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잃어버린 것이 내게 너무도 소중한 것이면 우리는 어떻게든 그것을 다시 찾으려고 노력했던 경험도 있을 것이다. 지하철 역이나 버스 종착지에 가서 물어보기도 하고 또는 방 안이나 도서관을 샅샅이 뒤지며 잃어버린 펜을 찾기도 한다. 잃어버리기 전에는 몰랐지만 잃고 난 후에 이러한 찾는 행위를 통해서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알게 되기도 한다.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세 비유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의 이처럼 흔한 일을 통해서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데,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것은 하나님께도 중요한 일이며 하나님은 반드시 다시 찾으신다는 것이다. 다만 세 비유들은 조금씩 차이가 있으며, 따라서 세 비유를 하나의 세트로 해서 이해해야 하기에 누가복음의 기록자인 누가는 이 비유들이 하나의 세트임을 알고 15장에 전부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각 비유들의 차이점

    먼저 한 드라크마에 대한 비유에서 한 드라크마를 경제적 가치로만 따지면 노동자의 하루 일당 정도이니 별로 큰돈이 아니다. 로마 지역에서의 데나리온이나 그리스 지역에서의 드라크마는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 현재의 가치로 따지면 대략 15 만원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10 개의 드라크마에서 1 개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하나의 세트에서 하나의 요소이기 때문에 비록 1 개라 할지라도 큰 가치를 갖게 된 것이다. 이는 그 당시에 10개의 드라크마를 한 세트로 해서 만들어진 악세사리로써 결혼에 대한 증표로 신랑이 신부에게 주었던 것이기에 더욱 특별한 가치를 갖게 된다. 그래서 비유 속의 여인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열심히 찾았던 것이고 또 찾고 나서는 한 드라크마의 경제적 가치보다 아마도 훨씬 더 돈이 드는 잔치를 열었던 것이다. 결국 이 비유에서 다른 두 개의 비유와 다른 점은, 어떤 것이 그 자체로는 별로 큰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인이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큰 가치를 갖게 된 것을 잃어버린 경우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100 마리의 양 중에서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린 비유 역시 잃었다가 다시 찾는 것에 대해서는 한 드라크마와 동일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 비유가 다른 두 비유와 다른 점은 이 비유는 많은 것들 중에서 하나라 할지라도 결코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준다는 점이다. 사실 100 마리 중에서 한 마리가 없어졌다는 것 그 자체를 놓고 보면, 겨우 1%에 해당한다. 전체에 큰 영향을 주는 분량이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는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을 들판에 그냥 두고 찾으러 나섰다. 그리고 찾고 나서는 다시 찾았다는 기쁨을 나누기 위해 이웃들과 잔치를 열었다. 결국 이 비유는 그 많은 전체 중에서 단 하나라 할지라도 소중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탕자의 비유에서는 드라크마나 양과는 달리 잃은 것 자체, 곧 탕자에 많은 비중이 실려 있다. 그래서 탕자의 이야기가 주요 내용이다. 이전의 두 비유들에서는 주인이나 목자의 행동에 대한 내용만 나오지만, 탕자의 비유에서는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마지막 부분에 조금 나올 뿐이며 거의 대부분 탕자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 비유는 다른 두 비유와는 달리 잃게 된 과정과 잃은 바 된 사람의 심경 변화를 보여주면서 잃었다가 다시 찾아진 사람의 마음을 그의 아버지의 마음과 함께 드러낸다. 초점이 잃은 것에게 있다.

 

세 비유들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이처럼 조금씩 다른 세 개의 비유를 하나의 세트로 해서 살펴보면, 잃었다가 다시 찾은 것에 대한 비유를 전체적이며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핵심의 첫째는 분실물 자체의 가치보다 잃어버린 자의 마음, 둘째는 다시 찾아진 것 또는 다시 찾아진 사람의 마음,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잃어버린 자와 찾아진 자가 다시 결합했을 때 둘의 마음이 어떠할지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첫째 내용에 주로 관심을 기울여 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에 주인의 열심과 은혜를 조명하며 다시 찾아진 자로서 우리는 주인-목자-아버지에게 감사드려야 한다는 식으로 마친다. 이러한 방향에서 이 비유들을 보면 ‘주인-목자-아버지가 열심히 찾아주셔서 너무도 감사하고 좋은 일이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하며 더 이상 깊게 들어가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모두 살펴야 잃었다가 다시 찾은 것에 대한 비유들 모두를 전 영역에서 이해하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살펴보기에 전에 먼저 반드시 보아야 할 성경구절이 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말씀인데 눅 15:24, 32두 번 나온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 말씀을 보면, 잃은 것은 죽은 것과 같고, 다시 찾은 것 또는 얻은 것은 다시 살아난 것과 같다. 즉, 잃었다는 표현을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두고 이 비유들을 보아야 한다.

    결국 이 말씀을 통해서 보면, 이 비유들에서 뭔가를 잃었다는 것은 그냥 잃었으니 어디엔가 잘 있겠지, 또는 누가 발견하면 잘 쓰면 되지 하는 마음이 아니라 이제 그 특별히 소중했던 것은 완전히 나랑은 상관이 없고 내게서 영원히 떠난 것이어서 다시는 볼 수도 없겠구나 하는 마음이었다는 것이다. 풍족한 상황에서 뭔가 하나 없어졌다고 해서 크게 타격을 입는 것도 아닌 그런 상황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풍족하더라도 그것 하나가 없으면 너무도 신경 쓰이고 마음이 아픈 상황을 묘사한 것이며, 그래서 주인은 소중하지만 잃어버린 것을 아주 열심히 찾았다. 그냥 열심히 찾았던 것이 아니라 아주 아주 열심히 찾았다. 이 열심에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포함된다. 주인은 자기 목숨을 다해서 열심히 찾았고 그래서 다시 그것을 찾았을 때에는 동네 사람들을 불러서 잔치를 벌이며 함께 기뻐하자고 동네방네 초청했다.

    이 기쁜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은 이렇게 기쁜 마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제부터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보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찾아진 것의 마음이며 찾아진 후에 주인-목자-아버지의 마음과 찾아진 것의 마음이 더욱 친밀해졌고 돈독해졌다는 진리이다. 그냥 단순히 ‘다시 찾아주셔서 감사하고 좋구나’ 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인-목자-아버지와 드라크마-양-아들이 어떻게 새로운 삶으로 나아갔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너무도 당연히 알 수 있지만 별로 고민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 있는데, 다시 찾아진 것들이 어디로 찾아지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게 원래의 주인에게 찾아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열심히 찾다가 마침내 찾아낸 주인-목자-아버지에게 찾아진 것들은 어떤 의미가 되는 것인가. 먼저 주인-목자-아버지는 그것을 잃기 전보다 훨씬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소중하게 대하고 소중하게 관리할 것이란 사실이다. 다시 찾아진 것은 주인-목자-아버지의 품 속에서 훨씬 더 엄청난 관심과 배려와 사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우리의 일상에서 그렇게 경험함으로써 이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면 찾아진 것의 마음도 주인-목자-아버지에게 훨씬 더 기울어지게 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저 많은 것들 중에 하나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특별한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체험하며 주인-목자-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고 그 사랑에 합당하게 변화를 만들게 된다. 자기가 뭔가 잘 나서 주인이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소중하게 생각해 주기 때문에 소중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탕자의 비유에서 이것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주인에게 다시 찾아졌다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과 같은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으니, 곧 새 생명이 시작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새 생명이 활동하는 터전은 어디인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맨 처음 외쳤던 말씀이 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씀이었다. 천국, 곧 The Kingdom of Heaven(하늘의 나라), 또는 The Kingdom of God(하나님의 나라)이 예수님이 선포하시려는 주제였고 핵심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서 사도들은 천국 복음 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고 했다. 그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아주 많은 다양한 비유를 말씀하셨고 또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사셨다가 하나님께서 원하신 죽음으로 죽으셨다. 그랬기 때문에 부활하셨고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셨으며 자기를 통해서 죄인들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셨다. 잃었다가 다시 찾은 것들에 대한 비유들도 이러한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주인-목자-아버지에게 다시 찾아졌다는 것은 주인의 품에 다시 속해졌다는 것이며 이것은 곧 하나님 나라로 들어갔다는 말씀과 동일하다. 우리 주님이 Lost & Found 비유를 주신 이유는 다시 찾았을 때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 들어간 우리의 기쁨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성경 본문에서는 주인이 잃었던 것을 찾고 나서 잔치를 열어서 이웃들과 기뻐하는 것으로 설명되었다. 그 잔치에서 주인공은 당연히 주인이다. 그런데 주인은 첫번째 주인공이지만 잃었다가 다시 찾아진 것 또한 주인공이다. 이 둘이 이웃들과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하길, 잃었다가 다시 찾은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과 같은 것이라고 했는데, 이제 그 새 생명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새 생명이다. 주인이 훨씬 더 소중하게 생각하게 된 새 생명이고 찾아진 것 스스로 생각했을 때에도 훨씬 더 소중해진 새 생명인 것이다. 그리고 주인과 함께 새 생명을 살게 된 사람은 이제 둘이서 함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찾아졌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뜻이며 앞으로 영원히 주인과 함께 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주인-목자-아버지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 속에서!

    그래서 교회는 이렇게 정의될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님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공동체이다. 다만 구원받았으나 아직 육체를 입고 있다는 현실적 상황 때문에 많은 제약과 연약함이 있고, 또 현실적으로 지역교회에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도 함께 있다는 한계가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렇게 정의될 수 있다. 그 한계와 제약과 연약함이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서 완전히 제거되고 교회의 본질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때가 올 것이라고 하나님은 가르쳐 주셨으니,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 각자의 위치에서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다시 찾아진 것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고민을 하도록 찾아진 것이다.

 

결론

    세 비유들을 이렇게 종합적으로 한 세트로 살펴보면, 우리는 이 세 개의 비유들을 통해서 단순히 다시 찾아진 기쁨 또는 감사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된다. 주인-목자-아버지의 열심과 사랑을 통해서 다시 찾아졌다는 것은 처음엔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가져오겠지만 그것이 끝이 될 수 없다. 이제 다시 찾아졌다는 것은 새 생명을 얻었다는 것과 같으며 새로 얻은 이 생명은 반드시 주인-목자-아버지의 열심과 사랑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한다. 이 새로운 생명의 삶은 더 이상 혼자의 삶이 아니라 주인-목자-아버지의 품 속에서, 즉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자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이며 더욱 소중한 삶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찾아진 자들로서 이 새로운 생명의 삶, 하나님 나라의 삶을 누려야 한다. 어떠한 삶이 하나님 나라의 삶인지 고민하며 하나님께서 그 삶을 이끌어 주시고 동행하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것에 대한 비유들에서 우리는 주인-목자-아버지의 마음뿐만 아니라 다시 찾아진 양-드라크마-아들의 마음도 살펴야 하며, 다시 찾아진 후에 주인-목자-아버지와 양-드라크마-아들이 함께 하는 삶이 얼마나 소중하며 즐거우며 새로운 삶이 될 것이지 고민해야 한다. 이 세 가지 모두를 전체로 이해하는 것이 잃었다가 다시 찾은 것에 대한 비유들이 가르쳐 주고 싶은 진리이다.

    우리가 잃은 바 되었다가 다시 찾아진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새 생명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는 삶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주님이 우리의 머리이시자 맏 형님으로서 그리고 구원자로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시며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실제적인 영향을 주고 계신다. 이것을 깨닫고 느끼고 경험하지 못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잃어버린 상태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찾아졌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새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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