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풀숨 2023. 1. 20. 11:42

개혁주의 예정론를 옹호하며

 

이재연

 

요즘 유투브에서 방송된 홀리컴뱃은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 꽤 흥미로운 점들을 시사한다. 대부분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역을 하는 분들이 각자의 신학적 그리고 신앙적 견해를 밝히며 논쟁하면서 판정단의 심사에 따라서 탈락자를 정하고 마지막까지 남는 분이 우승하는 방식을 따르기 때문에 예능적 요소도 있어서 시청하는 재미도 주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복음이 선포된다면 반가운 일이다. 그러한 점에서 홀리컴뱃은 좋은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몇 편의 시리즈로 방송된 홀리컴뱃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는 예정론인 것 같다. 수백 개의 댓글도 달리고 토론 시간도 길게 할당되었으며 또 사람들의 의견이 다양하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예전부터 예정론에 대한 논쟁은 항상 그래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곳에서든 누가 논쟁에 참여하든 여러 의견들이 대립했고 뜨겁게 논쟁했다. 그리고 나의 기억으로는 이 논쟁들이 별로 유쾌하지 못했고 결과도 항상 찝찝했다. 결론은 대부분 감정 폭발로 끝났다. 이러한 과거의 경험들과 현재의 홀리컴뱃 토론을 보면서 한 가지 확신이 드는 것은 예정론 논쟁에 대해서 반드시 먼저 짚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예정론 – 또는 칼빈의 예정론이나 이중예정론이라고도 하며 – 교리에 대해서 너무도 심각한 오해의 선입견이 만연해 있으며, 이 오해를 바탕으로 불필요하게 소모적인 비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개혁주의 예정론은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든다는 비판이다.

 

개혁주의 예정론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에 대한 가르침을 성경 안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한 교리이다. 대표적으로 에베소서 1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예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수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 물론 초대교부들로부터 시작된 견해들을 포함하여 – 하나의 교리로 정립한 것이다. 따라서 이 교리는 무엇보다도 개혁주의 신학의 전제와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비록 교리 자체는 몇 개의 문장으로 진술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진술이 결정되기까지 선결되는 전제들이 있으므로 그 전제들을 먼저 알고 교리를 파악해야 개혁주의에서 주장하는 예정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개혁주의 신학의 예정론의 전제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예정은 운명론이나 결정론의 결정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로보트처럼 다루시지 않으며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신다. 이것을 부정하는 신학자는 단 한 명도 없다.
  2. 예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3. 예정의 전제적 상황은 사람의 타락이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은 이미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한 상황에서 일어난다. 여기서 사람의 타락은 역사적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하나님의 의지적인 미리 아심에 의해 알게 된 타락이다.
  4. 예정의 실현은 사람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다.
  5. 예정론의 결과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결론이어야 한다.

 

이러한 전제를 먼저 이해하고 이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는 도르트 신경을 보자. 칼빈(1509~1564) 이후 불과 50여년이 지나서 1618 년에 진술된 도르트 신경은 이렇게 고백한다. 그리고 이 고백은 1648년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으로 이어진다:

 

선택은 하나님의 불변하는 목적이며 이 목적에 의해 하나님은 다음의 것들을 실행하신다: 세상의 기초가 놓여지기 이전에, 순전한 은혜에 의해, 하나님의 의지의 자유롭고 선한 기쁨에 따라서, 하나님은 전체 인류 중에서 일정 부분의 특정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해 주시기로 선택하셨다. 그들은 원래의 순수함으로부터 자신들의 잘못에 의해 죄와 멸망으로 떨어진 자들이었다. 그러한 선택된 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거나 더 뭔가를 받을 만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공통의 비참함에 놓여 있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을 하셨으니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영원 전부터 중보자로, 모든 택자들의 머리로, 그들의 구원의 토대로 임명하셨다. (첫 번째 교리의 제7항)

그러나 일부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서 선택 받지 못했거나 지나침을 받게 되었다 – 즉, 하나님의 전적인 자유, 최고의 의로움, 책망받을 수 없고 불변하는 선한 기쁨의 기초 위에서 하나님은 다음의 결정을 내리셨다: 하나님의 공의를 전시하기 위하여 그들의 불신앙과 다른 죄들로 인해서 공통의 비참함에 있는 그들을 스스로의 잘못에 의해 자신들을 내던진 상태로 그대로 두시며, 그들에게 구원하는 믿음과 회심의 은혜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결국 정죄와 영원한 형벌을 받게 하신다 (그들 자신의 길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고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아래에 두시며). 그리고 이것이 유기의 결정이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신성모독적 생각!)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죄의 두려운, 책망받을 수 없는, 의로운 심판자와 보응자로 만드는 것이다. (제15항)

 

도르트 신경의 고백처럼, 즉 스스로의 잘못에 의해 죄와 멸망으로 떨어진 모든 사람 중에서 일부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해 주시기로 선택하셨다는 고백처럼 하나님의 선택의 전제는 사람의 타락이다. 그리고 선택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선한 기쁨이다. 사람의 그 무엇을 보시고 그 사람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즉 요 1:13 말씀처럼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한 기쁨에 따라서 선택하셨다. 그리고 이 선택은 결정론의 결정처럼 강제로 로보트처럼 프로그램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을 그냥 무작위적으로 ‘넌 천국, 넌 지옥’ 하듯이 선택하셨고 그대로 프로그램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예정은 운명론이나 결정론의 결정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시고 자유의지를 인정하신다. 개혁주의 신학은 곧 언약신학이라는 말과 같이, 하나님이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담을 언약의 상대로 인정하셨다는 것이고 또한 아담도 인격적 자유의지를 가지고 언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약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개혁주의 신학의 토대를 놓는 것과 같다. 언약이란 언약을 맺는 쌍방 모두 인격적이고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서 서로가 서로에게 결속하기를 맹세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택과 유기가 예정되었다고 해서 사람이 죄를 범하도록 프로그램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으로 생각해야 한다. 언약을 지켜야 했던 사람이 자유의지로 언약을 어김으로써 죄를 범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상태에 빠졌고,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일부의 사람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셨고 나머지 사람은 그대로 유기하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만일 사람이 자유의지로 죄를 범하는 것을 하나님이 막으셨다면 사람은 자유의지가 없는 것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사람의 타락을 모르셨다거나 사람의 타락이 하나님의 능력 밖의 일이라서 하나님이 막으실 수 없으셨다는 것도 아니다. 사람의 타락도 하나님의 영역 안에 있었다. 이것을 표현하는 단어가 ‘허용’이다. 비록 칼빈은 ‘허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 표현은 하나님이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강제적 결정의 실행이 아니었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을 창세 전에 의지적으로 ‘허용’하셨으며 – 강조는 ‘의지적으로’에 있어야 한다 – 따라서 아담은 역사 가운데 실제로 타락했다. 그리고 이제 모든 사람이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 ‘허용’이라는 표현은 때로는 하나님이 마지못해 사람의 타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더욱 강하게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사람의 타락도 ‘예정’되었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지만, 예정은 결코 운명론이나 결정론의 결정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타락을 예정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사람을 강제로 결정해서 타락시켰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래서 아담은 분명히 자신의 자유의지로 죄를 범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의지 밖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어야 하므로, 아담의 타락에 대해 우리로서는 이해와 표현 상의 한계를 지닌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허용’이란 단어로 표현하기도 하겠지만,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는 그냥 ‘예정’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차이로 인해서 대체로 개혁주의 신학자는 ‘타락 후 예정’이라는 용어를 지지하고 다른 일부 개혁주의 신학자는 ‘타락 전 예정’이라는 용어를 지지함으로써, 선택과 예정 자체는 논리적으로 무엇보다도 아담의 타락을 전제로 하는 것임을 강조하고자 하였거나 또는 논리적으로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아담의 타락도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음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어쩌면 차라리 ‘아담의 타락에 대한 허용적 예정’ 또는 ‘의지적 허용’이라는 표현과 ‘타락 후 예정’이라는 용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것이 오해를 줄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는 합신대 조직신학 교수인 이승구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칼빈은 ‘타락 후 예정’을 주장하였다. (https://kirs.kr/data/calvin/calvin158.pdf 참고)

 

 

따라서 개혁주의 신학자가 말하길 하나님이 아담의 타락을 예정하셨다고 한다면 그 의미는 하나님이 아담의 타락을 강제로 무조건 결정하셔서 아담이 타락하도록 로보트처럼 프로그램해 놓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 인격적 존재로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타락하도록 미리 정하셨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기 때문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것이 모순처럼 느껴져서 다른 방식으로 예정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예를 들어, 하나님은 사람이 어떻게 결정할지 예지하시고 그 결과 그렇게 되도록 예정하셨다는 예정론이 있다. 개혁주의 신학이 그러한 다른 예정론을 거부하는 이유는 그 예정론은 하나님을 사람에게 조건화 시켜서, 사람이 자유의지로 결정하기 전까지는 논리적으로 하나님도 알 수가 없고 따라서 하나님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다는 이론이 되기 때문이다. 또는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은 구원의 방법이지 개인에 대한 예정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예지적 예정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구원의 방법만 예정하셨고 사람이 그 구원의 방법을 선택할지 아닐지에 따라서 구원받음이 결정되는 것이고, 결국 사람의 선택이 결정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은 그 사람의 종말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주의가 성경에 따라서 이해하는 하나님은 자충족하시며 자존하시며 절대적으로 독립적이시다 – 독립적이시라는 의미는 그 무엇과도 관계를 갖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삶과 지식과 판단과 능력을 위해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으시며 종속되지 않으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창조세계가 필요하기 때문에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자유롭고 기쁜 뜻에 의해 창조세계를 창조하시고 사람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사람처럼 낮아지신다고 할지라도 그건 하나님으로서 낮아지신 것이지 하나님이기를 포기하면서 낮아지신 것이 아니다. 낮아지심의 대표적인 예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사람으로서 단 한순간에도 하나님이 아니신 적이 없으시다. 다만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오셨다. 이렇게 예수님은 또한 사람으로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사시면서 우리와 교제를 나누셨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초를 바탕으로 개혁주의 신학은 자신의 예정론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예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차원 – 자충족하시고 자존하시고 독립적인 하나님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우리는 결코 예정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다 알 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 말은 우리는 예정을 우리의 차원으로 끌어내려서 이해하려고 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내용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예정을 사람의 차원으로 끌어내려서 마치 사람의 능력 안에서 예정을 이해하고 그 실현이 사람의 영역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처럼 생각하면 필연적으로 예정에 대해서 오해하게 된다. 오히려 예정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으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내용만을 토대로 해서 예정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예정이 사람의 역사 안에서 실제적으로 실현될 때에는 사람의 차원인 사람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의 인격과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기에 로보트처럼 프로그램해서 일방적이고 강제적으로 무조건 예정이 이루어지게 하시지 않고, 사람이 자유의지로 예정을 이루도록 하신다. 하나님의 차원이 사람의 차원으로 투영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될 수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성육신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결과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인격과 자유의지가 무시되거나 배제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예정을 이루신 이후에야 우리는 알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과 사람의 자유의지를 동일한 차원에 놓고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예정이 강조되면 사람의 자유의지는 무시되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또는 사람의 자유의지가 강조되면 예정이 무시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도 강조하면서 사람의 자유의지도 강조한다. 다만 하나님의 예정이 사람의 차원에서 어떻게 실현되는지 그 구체적인 방식을 우리의 지성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정이 사람의 역사 안에서 실현될 때에는 사람의 인격과 자유의지가 존중되는 방식으로 실현되기 때문에 – 우리는 이것을 제1원인과 제2원인으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언제나 제1원인이시며 사람은 제2원인이다 –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소망하고 고대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예정을 구원과 관련하는 것으로 한정하지 않고 사람의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해서 생각하는 신학자도 있다. 그것을 ‘하나님의 작정’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또는 예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 점심에 내가 무엇을 먹을지 미리 예정하셨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 역시 내가 메뉴를 선택해서 먹었을 때에야 비로소 바로 그 메뉴가 하나님의 예정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이 내가 무조건 오늘 그 메뉴를 강제적으로 먹도록 프로그램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결코 사람의 인격적 자유의지를 배제하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구원으로 선택된 사람인가 아닌가’ 하고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은 닿을 수 없는 무지의 영역을 홀로 헤엄치는 것과 같다. 내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선택이 예정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믿으려고 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에는 믿음과 회개에 대한 권면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게 된다. 사람이 인격적인 존재로서 자유의지가 배제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예정이 이루어져서 사망과 멸망만이 남아있는 우리를 은혜로 구원해 주셨으니, 에베소서 1장 6, 12, 14절에서 강조하는 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고 선택과 예정과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칼빈과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요점이다. 오직 은혜의 선택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선택과 예정을 개혁주의 구원론의 주요 교리로 포함시켰다. 그래서 예정론에 대한 이해와 토론의 결론이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으로 정해지지 않으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이 선택과 예정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 것은 우리가 그것을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으므로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비록 우리가 이해할 수 없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제 예정이라는 단어를 만나거든 은혜로 바꿔놓고 이해하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마음 깊은 곳에서 저절로 터져나올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악의 본질  (0) 2024.08.18
언약적 문맥으로 본 욥기  (2) 2023.01.23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종말  (0) 2022.04.15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0) 2021.10.23
산상수훈의 구조와 요점  (2) 2021.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