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교회답다는 표지는 무엇일까. 우리가 교회에 속한지 수십 년이 되었지만 그리고 한국 교회가 이제 백 년도 훌쩍 넘겼지만, 과연 교회가 무엇인지 얼마나 알며 또 얼마나 교회다운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말만 많고 탈만 많은 집단으로 변해가는 교회를 지켜보면서 왜 교회가 이렇게 되었나 하고 한탄하는 사람도 있고, 어떻게든 교회를 다시 세워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쉽지 않아 보인다. 교회에 모이는 사람의 수는 점점 더 줄어들고 더욱이 코로나 때문에 모이기 어려운 시기에 아예 교회를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이 더 늘어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교회가 세상의 다양한 공동체들, 회사나 동호회나 정치 집단이나 사회 모임 또는 사교 클럽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살펴보고 따라서 왜 교회가 필요할 수밖에 없는지 생각해서 우리의 모습이 과연 성경적인지 성찰해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 한다. 물론 가장 다른 점은 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세상의 공동체엔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어느 공동체에 그리스도가 계심과 안 계심은 우리의 실제적인 삶의 영역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아무 차이가 없다면 이것은 분명히 우리의 잘못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히 그 둘이 다르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먼저 세상의 공동체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우리가 세상의 공동체에서 일원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요즘에는 심지어 가족 사이에서도 가치가 없는 가족은 거의 가족으로 취급되지 않을 정도이다. 능력이 됐든, 돈을 벌어 오든, 지식이 풍부하든, 인맥이 많든, 뭐든지 간에 공동체에 도움이 된다는 가치를 증명해야 인정받고 공동체에서 살아남는다. 그렇지 않으면 떨쳐지거나 도태되고 투명인간으로 취급 받는다. 그래서 가치를 증명하는 수단으로서,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서려고 한다. 문제가 생겨서 누군가를 잘라내야 한다면 나보다는 못한 다른 누군가를 잘라내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거기에 시기와 질투가 더해지고 파당이 생기면 겉으로는 문제 없는 것처럼 보여도 속에서는 끝없는 투쟁의 연속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다. 그러면서도 선한 공동체이자 도덕적인 공동체로 보여지기 위해서 적절하게 호의를 용인함으로써 경쟁을 감춘다.
그러나 교회는 정반대이다. 교회는 가치가 없는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기는 공동체이다. 만일 교회라고 하면서 능력 있고 돈 있고 뛰어난 사람만이 대접받고, 허물 있고 가난하며 그저그런 사람은 따돌림을 당하는 공동체라면 그것은 결코 교회가 아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고전 12:20~25). 또한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다 (고전 1:27~29).
그러므로 허물 많고 연약하며 어리석고 부족한 사람들, 곧 부패하고 더럽고 천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어서 모인 공동체가 교회이며, 따라서 아무도 자랑할 수 없고 또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못하다고 하여 우쭐댈 수 없으며, 자기보다 못하게 보이는 사람이 있거든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 더욱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며 하나님께서 더욱 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인 줄 알고 그와 더불어 더욱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가 교회이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라고 하면서 어떻게 했는가.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나타나면 은근히 따돌리고 상대해 주지 않으며 ‘저런 사람이 왜 교회에 왔는지 모르겠어’라는 핀잔을 주지 않았던가. 교회는 오히려 그런 사람의 모임인데 거꾸로 그런 사람을 쫓아내려고 압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던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낸 내용 중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롬 15:5~7).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에는 그 어떤 조건도 없다. 그저 서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교회가 영적 공동체인 이유는 육신과 물질을 따라서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성령님을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여 하나 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는 육신을 따라서 판단하지 않는다. 영의 새로움을 따라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육신은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서로 소통할 때에는 성령님 아래 하나가 되어 영적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이며 서로서로가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비록 육신으로는 여전히 허물 많고 부패한 상태이며 삐죽삐죽 악한 생각들이 드러나지만 이 육신을 뛰어넘는 영적 연결이 이루어졌으므로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며 함께 미래를 꿈꾸게 된다. 이 육신을 완전히 소멸하고 영적 교제가 완전해지는 그날을 소망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는 우리의 약함과 천함과 미련함을 감추지 않아도 된다. 자랑할 것이 아니므로 굳이 떠들고 다닐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슨 엄청난 비밀이라고 되는 것처럼 꽁꽁 숨길 필요도 없다. 우리 교회는 우리의 그런 것들을 서로 용납하면서도 평안을 누리는 공동체이다. 다만 실제 지역 교회에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사탄의 종자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약함을 고백할 때에 주의하며 지혜롭게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에서 언제 어느 모임에서 누구와 교제를 나누며 이런 고백을 해도 되는지 알 수 있다. 성령님께서 그 모임에 함께 하시며 우리 모두를 연결해 주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백이 부끄럽기는 하지만 두렵지는 않다.
이 세상의 공동체에서 갈등은 필연이다. 우리 모두가 자기중심적인 주장과 가치 체계를 가지고 서로를 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공동체인 교회에서 갈등은 더 이상 필연이 아니다. 영적 생명으로 연결된 공동체에서는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아니라 타인중심적인 사고가 먼저 오기 때문이다. 나의 필요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먼저 살피는 사랑으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동체를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 안에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어야 한다. 우리의 육신을 따라서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으로 포용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말씀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에게 이것은 쉽지가 않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는 까닭이다. 성령님을 따라서 속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우리의 눈을 따라서 겉모습만을 바라보며 이리저리 우리의 주관적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는 삶을 평생동안 살아왔는데 어느 한 순간 순식간에 바뀔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부터 깨뜨려야 한다. 계속해서 훈련해서 성령님을 따라서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볼 때에도 겉모습의 추악함을 따라서 절망하지 않고 속사람을 발견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의 새로움을 따라서 소망을 가져야 한다. 이게 먼저다. 그래서 기도로 시작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기에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나와 같은 사람도 받아주셔서 새롭게 하신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베푸셨음을 깨닫고, 이제 다른 사람을 볼 때에도 그의 속사람을 발견하려고 해야 한다. 겉사람은 나나 그나 모두 허물 많고 어리석고 추할 뿐이지만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고 새사람이 되었으니 새사람으로 인정하고 새사람을 발견하려고 해야 한다. 그래서 새사람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하나 되게 하심으로 묶여진 공동체임을 증명해야 영적인 공동체이다.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공동체이다. 허물과 못남으로 인한 그 어떤 두려움도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과 영적 성장이 가능한 공동체이다. ‘행여 저 사람이 나를 판단해서 더러운 사람이라고 낙인 찍으면 어떻게 하지’ 하는 두려움이 없고, 서로의 추함을 오히려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기회로 여기는 공동체이다.
새해에는 교회다운 교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나 자신부터 바뀌어서 이런 공동체를 꿈꾸고 싶다. 쉬운 길은 아니지만 성령님의 능력과 인도하심과 하나 되게 하심이 분명하므로 순종을 배우며 이 길을 가보고 싶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의 그림자의 어두움이 아니라 빛의 밝음을 따라서 나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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