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5장에 기록된 내용으로,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언약 체결식에 대한 기록은 한가지 의아한 점을 던지고 있다. 이 의식에는 소, 양, 염소, 그리고 비둘기가 사용되었는데, 소와 양과 염소는 그 중간이 둘로 쪼개어져서 서로 마주보도록 배열되었으나 비둘기는 전혀 쪼개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비둘기도 쪼개어져야 했는데 아브라함이 자의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애초부터 비둘기는 쪼개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지점에서 아브라함의 잘못을 주장하며 그 증거로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방 나라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해야 한다는 말씀을 제시한다. 아브라함이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후손들이 종살이를 하게 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는 점은 왜 집비둘기와 산비둘기가 필요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냥 비둘기 두 마리를 사용하지 않고 콕 집어서 집비둘기와 산비둘기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은 아마도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해야 한다는 말씀에 대한 이유를 찾아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은 명백한 잘못이기에 그에 대한 벌로서 후손의 종살이가 선언되었다는 해석이 아니라, 후손의 종살이는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것이므로 벌을 받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찾다가 유일하게 생각할 만한 것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았다는 점밖에는 없어서 그렇게 해석하게 된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게 된 배경에는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시라서 아브라함이 벌을 받게 되었다는 가정적 근거도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무엇이 올바른 해석인지 알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이 정말 아브라함의 잘못인지 그리고 그의 후손들이 이방 나라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는 것이 아브라함의 잘못으로 인한 형벌인지에 대해 성경적인 해석을 해야 한다.
먼저 성경에는 이 언약을 체결하는 의식에 대해서 그 의미를 세세하게 설명한 기록이 없다. 이것은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언약 체결 의식에 대한 공통적인 상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래서 고대 근동 지역에서 행해지던 의식들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실제로 주전 2000 년 경에 국제적인 조약 또는 개인 간의 계약을 맺을 때에 행해지던 의식에 대한 성경 외적인 기록이 존재한다는 것이 고고학적 발견에 의해 밝혀졌다. 그 대표적인 예가 히타이트 조약이다. 히타이트 대왕과 근처 지역의 왕 사이에 맺어진 조약에서 조약 체결 의식을 어떻게 진행했는지 기록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성경 외적 자료에 비둘기를 둘로 쪼개어 의식을 치르는 예가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마크-앙드레 델라레이의 연구에 의하면, 고대 근동 지역인 수메르에서 조약 체결을 하는 의식에서 비둘기를 사용하는 예가 있다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그 시대의 수메르 지역인 갈대아 우르 출신이므로 이러한 조약 체결 의식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동물들을 사용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조약 체결 의식에 소나 양이나 염소처럼 죽이고 쪼개는 이유는 만일 조약을 위반하면 소나 양이나 염소처럼 반드시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의미를 전시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큰 동물들과 함께 비둘기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비둘기를 소나 양처럼 죽이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비둘기를 살려두었다가 의식의 마지막에 비둘기를 날려보내 신전으로 가서 신에게 조약의 체결을 알리기 위한 용도였다. 신 앞에서 공증을 받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또한 고대 근동의 조약 체결 의식의 순서 중에 하나는 조약의 낭독 및 조약의 사본을 보관하는 일이었다. 조약을 공표하고 조약의 당사자들이 각자 자기의 신전에 조약의 사본을 보관하여 조약이 영원한 것이자 신의 공증을 받은 조약임을 천명하였다.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즉 죽이지 않은 이유가 고대 근동에서 조약을 체결할 때 비둘기를 사용한 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비둘기를 신전으로 날려보낼 필요는 없었다. 고대 근동에서는 조약에 대한 공증인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신에게 조약 체결에 대해 알려했으나, 아브라함의 경우에 있어서는 언약의 당사자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비둘기들은 다른 의미를 가져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산비둘기와 집비둘기가 필요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즉, 신전으로 날려보낼 것이 아니라 세상에 공표하기 위하여 산으로 대표되는 자연과 집으로 대표되는 사람들에게 언약 체결에 대해 알리기 위해서, 즉 온 세상에 이 언약에 대해 공표하기 위해서 산비둘기와 집비둘기가 필요했다는 추측이다.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만을 지나갔다는 말씀과 고대 근동의 조약 체결 의식의 예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은 결코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도에 합당하게 언약 체결 의식을 준비했다. 참고할 만한 다른 기록은, 유대교 외경인 ‘아브라함의 묵시록’에는 아브라함이 비둘기들을 죽이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이는 비둘기들이 아브라함을 하늘로 데려가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방 나라에서 400 년 동안이나 종살이를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먼저 이 기간이 400 년이어야 했던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가나안 땅에 죄악이 충만하여 심판의 때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려면 무조건 그들은 다른 장소에서 400 년 동안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그 다른 장소가 이방 나라인 이집트였어야 했고 그곳에는 이미 왕국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들이 이집트에서 빌붙어 사는 동안에는 학대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약속의 땅인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세상 왕국에서는 고통과 핍박과 환난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만일 그들이 이집트로 대표되는 세상 왕국에서 잘 먹고 편안하게 잘 살고 있었다면 그들이 하나님 나라로 선택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들, 곧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이 아니라 이 세상의 나라에서 이방인의 통치를 받고 살면, 처음 얼마동안에는 괜찮을 수 있으나 결국에는 고통과 환난과 핍박을 당할 수밖에 없으며, 약속의 땅을 동경하며 그 땅에 들어가기를 소망하게 된다. 그래서 베드로도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나와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마치 세례/침례를 받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 것이다.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건너간 것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종살이로부터 해방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종살이를 했던 것은 이러한 신학적인 의미를 깨닫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었던 것이지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성경적이다. 이러한 해석은 또한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시며 형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라는 편견을 벗어나게 한다.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며, 따라서 구약의 하나님도 사랑과 은혜가 넘치시는 분이시다. 아브라함이 실수로 작은 잘못을 했다면 그 자리에서 고쳐주시면 될 일을 가지고 그의 후손들에게 수백 년 동안 종살이를 시키실 분이라는 생각이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또한 후손들의 종살이가 형벌이라면 그들이 괴롭힘을 당할수록 더욱 더 번성하게 되었다(출 1:12)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자손의 수가 더욱 늘어났다는 것은 구약적 관점에서 보면 아주 큰 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이 아기 시절에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다시 유대 땅으로 돌아오게 된 것을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고 해방된 것과 비교한 마태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결론적으로 정리하면, 아브라함이 집비둘기와 산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었다고 추론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던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훨씬 더 성경적이며 또한 그 시대의 시대적 상황에도 더 잘 부합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 하는 벌을 받게 되었다는 해석은 별로 타당하지 않다고 하겠다. 그들의 종살이와 학대당함은 사탄의 세력 아래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받게 될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기억하셔서 번성하게 하시고 견디게 하시며 마침내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내셨다. 따라서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라는 편견을 벗어버리고 구약의 하나님도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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