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적 문맥으로 본 욥기
이재연
서론
욥기는 구약 성경에서 아주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주된 이유는 욥기의 주인공인 욥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과 욥의 생존 연대가 아브라함과 거의 동시대이고 욥기의 내용이 고난과 고통으로 가득 하기 때문이다. 욥기의 장르는 지혜 문학에 속하고 욥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화는 시적인 표현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욥기에 대한 이해는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예를 들어, 욥에 대항하는 엘리후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나누어져서 매우 긍정적 또는 매우 부정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욥기의 핵심 주제가 무엇인지, 욥기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성경적인지 알아보고 욥기의 가르침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의 배경에 언약신학을 놓음으로써 개혁주의 신학에 기반한 판단이 되도록 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욥기의 내용이 언약들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언약신학을 배경으로 할 수 있는지 먼저 알아보고, 언약신학을 배경으로 할 경우에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본론
일반적으로 욥기는 고난에 대하여 성도의 인내와 유익을 권면하는 책이라고 이해된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성도들이 욥기를 읽고자 하지 않는 이유가 된다. 누구라도 고난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욥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내용을 보면 마음 속에서 우선적으로 거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욥기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욥기를 정경에 포함시켜서 주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읽고 교훈을 얻으라는 것인데 이러한 잘못된 이유 때문에 읽지 않고자 한다면 욥기에 대한 이해가 뭔가 잘못된 것이라는 방증일 것이다.
우선 먼저 욥기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살펴보면, 롱맨과 달러드는 『최신 구약 개론』에서 욥기는 ‘고난과 관련하여 지혜의 근원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책이라고 보았고, 또는 돌시는 『구약의 문학적 구조』에서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주제를 욥기의 문학적 구조를 토대로 파악하기도 하였고, 박영선 목사는 『욥기 설교』에서 고난이 기계적인 인과응보적 법칙의 결과가 아니며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며 결국 축복을 위해 고난의 길을 허락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기도 하였다. 또한 언약신학을 바탕으로 구약성경 전체를 개괄한 클라인은 『언약과 성경』에서 욥기를 포함한 지혜서들은 어떻게 해야 언약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는지, 언약의 길을 가르쳐 준다고 이해하였다. 이 경우에 잠언이나 전도서는 직접적으로 지혜를 가르쳐 주므로 쉽게 언약의 길과 연결할 수 있지만 욥기는 지혜의 내용이 쉽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세부적인 고찰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지혜의 내용을 파악할 방법론이 필요한데 우리는 언약신학을 토대로 욥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따라서 언약신학에 대해서 기본적인 이해가 선행되고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욥기를 조명하여 욥기가 개혁주의 신학의 전제가 되는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어떠한 지혜를 주는지 알고자 한다.
언약신학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행위언약과 은혜언약, 이렇게 두 종류의 언약이 있다고 확인하였다 (마이클 호튼의 『언약 신학』, 전정구의 『하나님 나라와 언약적 관점으로 보는 성경 신학』, 또는 벨쳐의 『The Fulfillment of the Promises of God』, 또는 워터스, 리드, 뮤더가 편집한 『성경적신학적역사적 관점에서 본 언약신학』을 참고하라). 행위언약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 무흠한 상태로 있던 때에 하나님이 아담 및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류와 맺은 언약으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과 그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저주 또는 반대로 명령 준수에 따른 영원한 생명을 맹세하는 언약이고, 은혜언약은 아담이 타락한 후에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맺은 모든 언약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언약이다. 그래서 은혜언약은 아담에게 주신 원시복음(primitive gospel)을 포함하여,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그리고 새 언약으로 정리된다. 그러므로 불신자는 행위언약에 의해 심판을 받으며 신자는 은혜언약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
욥기를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먼저 욥기에 행위언약 또는 은혜언약을 기반으로 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고 또한 언약의 행위를 권면하고 있는지 추적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이 발견되면 욥기가 지혜서로서 가르치는 언약의 길이 은혜언약의 길과 같은지 살펴보는 것이며 성경의 다른 책들, 특별히 은혜언약의 정점인 신약 성경과 어떠한 연관성을 갖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욥기는 1장과 2장의 프롤로그와 42장의 에필로그 이외의 모든 장들이 시적 표현의 대화이다. 먼저 욥과 세 친구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과의 대화(3장에서 31장까지)와 엘리후의 주장(32장부터 37장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욥의 대화(38장에서 41장까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욥의 주장과 세 친구의 주장, 엘리후의 주장과 하나님의 말씀들이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되는지 살펴봄으로써 욥기를 파악하도록 한다.
첫째, 세 친구와 엘리후의 주장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고난은 죄의 형벌이며 고난을 당하는 것은 죄를 범했다는 증거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위치할 자리가 없고 죄의 형벌로서의 고난은 법칙처럼 적용되므로, 역으로 고난은 죄의 증거임이 법칙처럼 알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주장은 은혜언약을 철저히 배제하고 죄와 죄의 결과를 규정하는 행위언약을 기계적인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오해한 것이다. 김성진은 “욥기 해석에 있어 엘리바스 비전(욥기 4:12~21)의 중요성”에서 엘리바스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에게 속아서 인과응보적 법칙을 주장한다고 보았다. 다른 친구들은 엘리바스를 따라서 근본적으로 동일한 주장을 하는 것이며 인과응보적 법칙의 증거로서 조상들로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나 창조 세계로부터 관찰할 수 있는 현상 등을 추가하여 주장했다. 따라서 엘리후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와는 달리 우리는 엘리후의 주장도 세 친구들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데, 그 근본 이유는 엘리후의 주장 역시 은혜언약에 대한 이해를 전혀 포함하지 않으며 행위언약에만 기초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다만 엘리후의 주장에는 세 친구들과는 다르게 창조에 대한 장문의 언급이 들어있는데, 그는 기계적 인과응보의 법칙이 창조 시부터 시작되었음을 주장하기 위하여 창조를 언급한 것이며,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말을 끊고 등장하셔서 창조에 대해 다시 언급하신다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세 친구들과 엘리후의 주장에서는 은혜언약에 대한 내용을 전혀 발견할 수 없고 법칙처럼 적용되는 죄의 형벌로서의 고난과 또한 역시 법칙처럼 적용되는 회개에 대한 주장만이 드러난다. 이 관점에서는 행위자로서의 욥의 행위에 따라서 고난과 복이 법칙처럼 적용되는 것이며 심지어 회개도 고난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둘째, 욥의 주장은 두 가지 내용이 뒤섞여 있다. 죄로 인한 고난의 가능성과 죄와 무관한 고난의 가능성이다. 욥기의 프롤로그인 1장에 욥은 완전한 사람이라는 판정이 이미 전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욥은 자신이 고난받는 것에 대해서 세 친구들과 논쟁하며 죄와의 관련성 (예: 9:2~3; 14:4), 이유 불문 (욥은 고난의 이유에 대해 계속해서 하나님께 여쭙고 싶다는 표현을 한다. 예: 10:2), 그리고 부당함 (예: 6:10) 등을 뒤섞어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는 마침내는 자신의 의로움을 욥기 31장에서 길게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을 분석해 보면, 욥은 처음에는 은혜언약의 핵심인 대속적 의에 대해서 희미하게 인식하며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논쟁을 통해서 점점 대속적 의에 대해 확신을 가졌고 마침내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었다고 본다 (욥은 자기의 자녀들이 잔치를 열어 먹고 마시고 놀면서 혹시 죄를 범하였을까 하여 속죄의 번제를 드리는 내용이 욥기 1: 4~5 말씀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욥기 19:25~26 말씀을 통해 욥은 대속자를 기대하며 또한 영원한 삶을 기대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6:19 말씀에서는 중보자에 대한 기대를 드러낸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그 어떠한 인간도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완전한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욥이 마침내 31장에서 자신의 완전한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힘입어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파편들을 종합해 보면 욥은 처음에는 확신을 가지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러한 기대를 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세 친구들이 인과응보적 법칙에 따른 고난을 주장했을 때 그 주장을 거부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다른 근거들은 6:10; 7:21; 10:5~7, 15; 23:10; 27:5~6; 28:28 말씀들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법칙이 아니라 인격적인 분으로 인식하는 근거, 곧 언약주로서 인식하는 근거는 7:14, 17~18; 10:15; 16:19; 23:16~17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욥은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모두 알았지만 이 두 언약들 사이에서 처음에는 대속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가 점차 은혜언약을 확신하기 시작했고 결국 욥 19:25~26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고백처럼 대속적 의, 즉 은혜언약과 그에 따른 삶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했다고 보여진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욥기가 지혜서로서 지혜의 근원뿐만 아니라 지혜의 내용도 가르쳐 주는 책이어야 하기 때문인데, 욥기가 모든 지혜서들과 마찬가지로 지혜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준다는 데에는 의문이 없으나 지혜의 내용은 고난에 대한 인내와 그 결과로서 주어지는 축복이라고 하기에는 욥이 하나님을 향하여 보이는 자세에서 고난에 대한 인내만을 보여주지는 않으므로 지혜의 내용이 고난에 대한 인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내용이 바로 은혜언약의 길을 따르라는 교훈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야 지혜서로서의 욥기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셋째, 욥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38 장에서 41 장까지 기록되어 있으며 우주 창조와 창조 세계의 돌봄으로 요약되는데, 특히 땅에서 가장 강력한 베헤못이 있을지라도 그리고 바다와 공중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인 리워야단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온 세상을 돌보시며 특별히 사람을 돌보신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시편 8편과 비교해 보면 둘 다 창조와 구원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계속되는 돌보심은 구원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창조의 목적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증거이며 창조는 생명나무로 표현된 것처럼 영원한 삶이라는 종말을 지향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반드시 은혜언약을 통과해야만 하기 때문에 욥기의 하나님의 말씀은 은혜언약을 가리키고 있으며, 욥은 창조와 보전 및 돌보심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중에라도 은혜언약을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욥이 중보자로서 세 친구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그들의 허물이 용서되는 경험을 하나님의 돌보심과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창조와 관련하여 욥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욥을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라 욥을 창조의 권능의 자리와 돌봄의 다스리심의 권좌로 초대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욥이 세 친구들과 엘리후의 주장을 끝끝내 거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욥은 친구들과는 다르게 은혜언약을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었고 그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는 은혜언약이 약속한 대속적 의에 대해서 아직 온전히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때때로 흔들리기도 했지만 결코 대속적 의에 대한 소망을 버릴 수 없었고 결국 확신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 마침내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욥이 옳다고 확인해 주셨다. 그리고 욥에게 두 배나 되는 복을 더하여 주셔서 건강을 되찾고 더욱 큰 부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런데 자녀들은 고난을 받기 전과 동일하게 10명을 주셨는데, 이에 대하여 여러 주석들은 욥의 고난 과정에서 죽은 자녀들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여전히 천상에서 삶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위클리프 주석, 매튜 헨리 주석, 옥스포드 주석, 그리고 카일&델리취 주석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결국 욥은 자녀들도 두 배로 받은 셈이 된다. 이처럼 하나님은 욥의 믿음을 확증해 주셨고 믿음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를 더욱 성장하게 해 주셨다.
믿음의 성장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일어난다. 믿음은 믿음의 대상과 믿음의 내용으로 세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욥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해 더욱 큰 신뢰를 갖게 되었고, 믿음의 내용이 더욱 확장되며 깊어지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직접 경험하며 알게 되었고, 또한 희미하게 알았던 은혜언약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았고 멀리서나마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아브라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날을 볼 것을 기대했던 것과 같다 (요 8:56). 따라서 욥기가 지혜서로서 단순히 지혜의 근원이 무엇인지 또는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지를 가르쳐 주는 책뿐만 아니라 지혜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함께 가르쳐 주는 책이다. 사람이 자기의 의를 이루기 위한 인과응보적이고 율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도록 대속적 은혜의 사고를 가르쳐 주며, 율법에 대해서 표면적, 형식적, 문자적인 순종이 아니라 은혜적, 복음적 순종이 참된 순종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순종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 가르침으로 인해서 욥기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교훈이 된다. 이스라엘이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자기의 의로 삼으려고 하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며 율법은 모세보다 더 뛰어난 선지자인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임을 깨닫게 한다 (갈 3:24). 그리고 선지서들에서 약속된 이스라엘의 회복은 은혜언약을 기초로 한 욥의 회복을 기억하게 한다.
그러므로 욥기에 대한 언약신학적 이해는 욥기를 새 언약 안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하도록 만들어서 욥기를 단순히 구약 성경 속에 위치시키지 않고 신약 성경과 연결되도록 한다. 신약 시대에도 성도들이 겪는 고난으로 단순히 인내와 연결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새 언약의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안식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으로 연결시킨다. 따라서 욥기는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지혜서로서 기능하며 새 언약의 길이 결국에는 하나님에 의해 영광의 길이 될 것이라는 위로를 준다. 행위언약이 아니라 은혜언약을 바라봐야 하며, 고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한다는 교훈을 통해서 새 언약의 길을 걷도록 한다.
결론
욥기는 지혜서로서 지혜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책이다. 그런데 대부분 학자들은 욥기가 가르쳐 주는 지혜의 내용에 대해서는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파악하지 않고, 상식적인 선에서 고난에 대해 인내를 권면하는 내용 정도로 이해하고 만다. 그러나 욥의 인내는 그냥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고 그는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인데 언약신학은 그가 가졌던 소망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이 소망에 따라서 그의 믿음은 성장할 수 있었다.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믿음의 내용에 따라서 더욱 깊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인격적인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시기를 원하시며 (고전 1:9), 그 교제에는 반드시 진리의 내용이 따라야 한다. 대속적 의에 대한 소망은 욥이 마침내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고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욥과 친구들은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 논쟁한 것이 아니라 의의 근원에 대해서 논쟁했던 것이다. 친구들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룬 의에 대해 주장하였기 때문에 고난은 죄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욥은 대속적 의와 복음적 순종에 대해서 주장했기에 고난은 반드시 죄의 결과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고난은 이 대립을 촉발시킨 소재였고 하나님은 욥에게 이 진리를 가르쳐 주시며 더 깊은 교제를 갖기 원하셨다. 믿음은 믿음의 대상과 믿음의 내용이 모두 충족되어야 한다. 믿음의 대상이 인격적이신 분이 아니면 그 믿음은 그저 환상일 뿐이며 믿음의 내용이 없으면 그 믿음은 맹신이 될 뿐이다. 하나님을 향한 욥의 믿음은 고난에 대해 친구들과의 대립을 통해서 그 내용이 은혜언약을 향하여 보다 더 확장되며 깊어지게 되었다. 대속적 의와 복음적 순종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며 이것은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날들을 바라보며 기뻐했던 것과 동일하다.
언약신학은 욥기를 이렇게 파악하도록 인도하는데, 그 이유는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대립은 마치 욥의 친구들과 욥의 대립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모든 결과는 반드시 행위적 원인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기계적인 인과응보의 사상은 인격적이시고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초월적일 뿐인 이신론적 하나님을 만들고 말았는데, 이것은 행위언약을 왜곡한 결과이며 은혜언약을 철저히 배제한 결과이다. 심지어 대속적 의미를 갖는 번제(욥 1:5)조차도 죄값을 해결하는 수단으로만 인식될 뿐이었다. 그러나 욥은 비록 처음에는 희미하게 은혜언약을 알고 있었지만 논쟁을 통해 점차 은혜언약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대속적 의와 복음적 순종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욥이 옳다는 것을 확인해 주셨다.
그러므로 욥기를 언약신학에 기반하여 이해하는 것은 성경 전체와, 특별히 신약 성경과도 연결된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게 한다. 이것은 욥기를 단순히 구약 성경의 한 부분으로 위치하지 않고 욥기가 성경 전체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며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현대의 크리스찬에게도 복음적인 의미를 준다는 것을 알게 한다. 따라서 욥기는 지혜서로서 지혜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지혜의 내용에 대해서도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책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오늘날 교회에서도 욥기를 가르치며 함께 공부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용기를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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