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풀숨 2023. 2. 8. 22:30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재연

 

1. 서론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흔하고 쉬운 주제는 사랑일 것이다. 수많은 문학 작품들과 노래들과 우리의 경험이 그렇다고 말하며, 또한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혹은 무엇을 사랑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더욱 그렇다. 가족이든지 또는 여자친구나 남자친구를 사랑하고 심지어 어느 아이돌 그룹의 멤버나 꽃미남 배우를 최애라고 하며 다양한 조공을 바치고 콘서트나 팬미팅에 가서 ‘사랑해요’ 하고 고백하기도 한다. 사랑은 이런 것인가? 한국의 아이돌 그룹인 BTS는 Fake Love라는 노래를 통해서 사랑에 대해 물음표를 던졌었다. 그들이 가짜 사랑이라고 정의한 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에게 나를 맞추는 삶이었다. “널 위해 슬퍼도 기쁜 척하고, 아파도 강한 척하며, 예쁜 거짓을 빚어내, 날 지워 너의 인형이 되려 하는” 사랑을 가짜 사랑이라고 했다. 그들은 가짜 사랑에 대해 노래함으로써 사람들이 진짜 사랑에 대해 고민하도록 했다.

    기독교에서도 사랑은 가장 큰 주제 중에 하나이다. 특히 요한일서 4장에는 전체 21구절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31번이나 나온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무엇인가? 요한일서 4장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그래서 첫째는 사랑이란 무엇인가와, 둘째는 진짜 사랑을 배우는 방법과, 마지막으로는 진짜 사랑이 우리의 현실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알아보자. 이러한 고찰을 통해서 기독교의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 무엇이 다르며 또 우리는 어떻게 기독교의 사랑을 배울 수 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2. 본론

    내가 생각해서 원하는 대로 상대에게 하는 것이 사랑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는 것이 사랑일까? 뭔가 그것도 아닐 것 같다. 또는 무조건 용서해 주는 것이 사랑일까? 이러한 것들은 사랑이 드러나는 모습의 예일 뿐이다. 보다 더 근본적인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사랑이란 인간이 혼자 있는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이루는 연합”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런가 하면, 인도의 명상가이자 런던의 “선데이 타임스”가 뽑은 20세기를 빛낸 1000 명의 위인 중 한 명인 오쇼 라즈니쉬는 사랑이란 아무런 조건 없이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런데 그가 정의하는 ‘자기’는 “자신이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깊은 침착함과 고요가 내면에 자리 잡는다”가 되는 자기이다. 뭔가 귀에 솔깃하긴 하다. 이 사랑이 맞는 것일까? 결코 아니다. 왜 아닌가 하면, 우리 크리스천은 ‘자기 자신’을 이 사람이 말하는 존재로 정의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내어주는 것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외에도 사랑에 대한 다양한 정의들이 있다. 하지만 비관적이든 긍정적이든 세상이 가르치는 사랑에는 하나님이 없다. 세상은 하나님을 거부하기 때문에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 없는 사랑, 즉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 사랑이 참 사랑이 될 수 있을까? 창조주를 거부하고 부정하며 창조주는 없다고 믿는 세상은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하겠지만, 창조주가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믿는 크리스천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2.1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가르쳐 주는 사랑은 대표적으로 사랑의 사도인 요한 사도를 통해서 기록되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3년을 넘게 생활하면서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고 눈으로 확인한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가 요한일서 4장에 기록한 사랑은 자기를 내어주어 상대의 자리에 서는 것이란 진리이다. 이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 가운데 전시되었기에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에 대한 이 정의는 인도의 명상가가 했던 말과 비슷하다. 그러나 다른점은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상대의 자리에 서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이며,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자기’라는 존재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는 것인데 우리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부터 파생된 존재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사랑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데 삼위일체가 바로 그런 의미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세상의 다른 모든 신들과 다르며, 그 결정적인 차이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유일하지만 삼위일체의 하나님이고 세상의 최고 신은 다 일원론적(monistic)인 신이라는 점에서 드러난다. 이 차이는 따라서 결정적인 결과를 낳게 되는데, 사랑은 반드시 동등한 대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아니면 사랑을 참되게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삼위일체를 조금 풀어서 설명하면 “Three persons in one essence”라고 한다. 그리고 또 달리 설명하는 표현이 Perichoresis (페리코레시스)이다. 이 단어는 강강수월래와 같이 서로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도는 춤, 즉 윤무(輪舞)를 의미한다. 자아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 모를 만큼 계속 돌고 도는 춤인데 이 춤을 통해서 삼위일체, 즉 ‘세 분이시지만 한 하나님’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마치 그 모습은 끊임없이 서로가 자기를 내어주고 서로의 자리에 서는 것과 같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명제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사랑을 존재 자체에 가지고 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기 때문에 유일한 참 사랑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성자 하나님께서 자기를 내어주어 예수님으로 사람이 되어서 오셨고, 피조물인 우리의 자리에 서셨으며,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의 모든 것을 감내하심으로써, 이 사랑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고 증명되었다.

    이제 우리 사람 차원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보자. 우리 차원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가장 기초적인 것은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존재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은 원래적인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닮도록 파생된 존재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담겨 있고 우리는 존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의존하며 닮아가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 있는 경우에만 우리 존재의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게 되며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자 하는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되었고, 이 자기중심성 때문에 우리에게 담긴 하나님의 사랑은 오염되고 훼손되어 많이 비뚤어진 사랑이 되었다. 단적인 예가 인간의 사랑 중에 가장 숭고하다는 어머니의 사랑마저도 오직 자기 자녀에게만 향하는 사랑이 되었으며 자기 자녀들 안에서도 더 사랑하는 자녀가 있고 소외되는 자녀가 있으며 사랑으로 인해 오히려 상처를 준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안에 들어가야 페리코레시스를 알게 되고 느끼며 참된 사랑을 받고 사랑하게 되는 상황에 놓였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기를 내어주어 상대의 자리에 서는 것이다. 그래야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하고 또 비뚤어진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참 사랑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랑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드러난 사랑으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는 말씀과 같다. 하나님의 사랑이 말에서, 행동에서, 삶에서, 생명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이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이 가르쳐 준다.

 

2.2 사랑을 배우는 방법

    어떻게 해야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며 배우고 또 사랑할 수 있을까? 먼저 세상은 어떻게 말하는지 BTS를 통해 살펴본다. BTS가 몇 년 전에 앨범을 내면서 그 주제를 Love Yourself로 했고, 그 앨범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수많은 BTS 팬들이 자기자신을 사랑하게 되었고 새로운 삶을 산다고 고백하는 장면을 유튜브 영상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리더 RM은 유엔 연설에서 “저는 김남준입니다. 단점도 많고 두려움도 많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였는지, 내가 누구이고 싶은지를 모두 포함해 나를 사랑하세요”라고 했다. 그의 연설은 전 세계의 수많은 청년들의 호응을 얻었고 심지어 미국의 많은 학교들에서는 학생들이 그의 연설문을 수업 시간에 다시 읽어보고 토론하기도 했다고 한다. RM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는 것을 통해서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니 먼저 자신을 사랑하라는 조언은 결코 잘못된 말이 아니다. 그의 말은 Fake Love는 나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에게 맞추는 것이므로 True Love는 내가 내 자신의 음성을 듣고 내가 좋아하는 것 또는 원하는 것을 충실하게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이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방법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듯싶다. 물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고 ‘나’라는 존재에 초점을 맞추며 또 나를 드러내서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당당하게 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참 사랑인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해서 받는 방법이라고 가르쳐 준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거듭난 우리는 계속 사랑을 받아서 성장하여 그 사랑이 나 자신을 사랑하게 하고 또 더욱 넘쳐서 다른 사람에게로 향하게 한다고 가르쳐 준다. 그래서 만일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참 사랑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고 가능한 사랑이기에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심지어 그 사랑이 지금도 계속 우리에게 부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랑이 잘 안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의 거듭남 때부터 이미 나에게 부어졌고 그 후에도 계속 부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사랑을 잘 배우지 못하고 어렵게 느껴진다. 왜일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고 명확하다.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를 제대로 올바르게 나누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교제에 서투른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주도권을 내가 갖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내가 교제를 이끌어 가기를 원해서 사귐의 대상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내가 주도권을 갖고 교제하고자 한다. 우리가 거듭났음에도 여전히 육신적 생각인 자기중심적 생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교제의 주도권을 갖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 중심적인 생각으로 바꿔서 하나님께 주도권을 드리고 나는 배우고 순종하며, 마치 어린 자녀가 아버지를 따르듯이 따라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이 사랑을 배울 수 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쌍방향의 사귐이 아니라 일방적인 사귐을 가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직접 보이지는 않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 없이 나 자신을 중심으로 일방적인 관계를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과 음성과 마음과 반응을 신경쓰지 않고 오직 나로부터 하나님께로 가는 일방적인 것만을 교제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도 않고 묵상하지도 않으면서도 기도하고 이루어지면 좋아하는 것으로 끝내버리거나 또는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평하며 끝내버린다. 이러한 관계는 결코 사귀는 사이가 아니다. 사귀는 사이에서는 마음의 교류가 있어야 한다. 서로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한다. 나의 마음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마음도 나에게 중요하고, 나의 말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말도 나에게 중요하며, 나의 반응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반응도 나에게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마음을 알려고 노력하며 하나님의 반응에 집중해서 하나님이 나랑 어떻게 사귀고 계시는지 알아야 진정한 교제를 이룰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성경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해야 하는 이유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 없이 하나님의 마음과 의도를 알 수 없으며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며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알아야 나의 상황과 환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제대로 된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내가 주도적이거나 나의 일방적인 교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마음과 반응에 집중해서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교제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진실하고 참된 교제가 가능하고 하나님을 배우며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눌 때에 우리는 정직하고 솔직해야 한다. 나 자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를 향해서도 솔직해야 한다. 만일 죄를 범하였으면 솔직하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죄에서 벗어나길 먼저 노력해야 하고, 또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뭔가를 했으면 하나님 아버지께 자랑하기도 해야 한다. 교만 섞인 자랑이 아니라 아주 어린 자녀가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과 같은 자랑은 오히려 우리를 솔직하게 만든다.

    사랑은 지식이 아니라 삶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이 방법을 머리로는 깨닫게 되어도 실제로는 잘 되지 않는다. 부단한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의 자기중심성은 쉽게 깨어지지 않기 때문에 머리로 아는 것이 삶에서 행동으로 드러나려면 먼저 하나님의 사랑에 푹 젖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자기중심성을 완전히 깨트려야 한다. 그리고나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부단히 노력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러니 처음에 잘 안 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음미하며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실천해 보고 또 하루에 십 분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들을 끊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온전히 배우지 못하며 우리의 삶에서 드러내지 못한다.

 

2.3 사랑의 역할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두려움에 대한 것인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현실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두려움이다. 악과 고통이 있는 세상에서 3차원 시공간에 갇힌 제한된 존재로 사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두려움을 마주하게 된다. 상황과 환경과 기타 여러 조건들이 만나면 두려움이 우리에게 덮친다. 두려움이 두려움인 이유는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미래를 알 수 없기에 우리는 우리의 상상으로 악과 고통으로 가득 찬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극대화시키면서 두려움을 갖는다. 이 두려움은 심지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덮쳤다. 열왕기에 기록된 엘리야 선지자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갈멜산에서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서 물에 푹 적셔진 제단이 불타는 기적을 체험하며 바알의 선지자 수백 명을 다 이기고 모두 죽였다. 그러나 불과 하루쯤 지나서 북 이스라엘 왕국의 왕후인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리라는 말을 듣고 갑자기 두려움에 휩싸여 광야로 도망하여 숨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천사를 통해 먹을 것을 보내 주시면서 회복시켜 주시고 다시 돌아오게 하셔야 했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선교 여행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7:5 기록처럼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라고 고백했다. 그가 처음 마케도니아로 들어간 것이 밤에 하나님이 주신 환상을 보았기 때문이었는데, 그 마케도니아에서 그는 두려움을 느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두려움은 임하기도 한다.

    특별히 사도 요한이 말하는 바와 같이, 마치 심판이 임한 것처럼 극심한 고통과 환난이 덮치면 두려움을 갖게 된다. 미래는 더욱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상상이 극대화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고백하였다. 우리가 일시적으로 두려움에 휩싸일 수는 있지만 결국 하나님의 사랑은 이 두려움을 없애주며 담대하게 해 준다고 고백하며 성도들을 권면하고 위로하였다. 로마 제국으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았던 시대를 살았던 사도 요한이 인생의 말년에 이렇게 고백한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그 어떠한 외부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이 잠시 우리에게 임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를 넘어뜨릴 수는 없으니,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 주시고 돌보아 주셔서 우리를 두려움에서 건져내신다.

    현대에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는 우리의 삶도 어쩌면 엘리야나 바울이나 요한 사도와 비슷한 면을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비록 극심한 박해는 없을지라도 하루는 담대하며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가 그 다음날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금방이라도 세상을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한다고 느낄 만큼 외롭고 두려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두려움 때문에 당황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도 단 한 번의 기도만으로도 우리는 평안을 회복하게 된다.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평안이 우리를 감싸주어 하나님 안에서 든든하게 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며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아시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사랑을 깨닫고 두려움을 극복하게 된다. 온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곧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자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사야서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는 말씀이다. 또한 로마서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뭔가 두려움이 임하거든 그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기도하면서 직시하면 극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반드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 줄 것이다.

 

3. 결론

    사도 요한은 서신서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는데,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는 요한 사도는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 가장 방대한 기록을 남긴 사도이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였고,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 주었으며,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현실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알게 하였다.

    삼위일체이기에 존재 자체가 사랑이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 보여주신 사랑이란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신을 내어주어 상대의 자리에 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이 되어 오셔서 사람으로 살면서 우리의 모든 의를 이루시고 마지막에는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감당하셨다.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 사랑을 먼저 알고 이 사랑을 받아야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체험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사랑을 통해서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또 교회와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닮아가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런데 교제가 결코 쉽지 않다. 그 이유는 내가 교제의 주도권을 가지려고 하든지 또는 쌍방향의 교제가 아니라 일방향으로 내가 원하는 것만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제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 마음을 살피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도 반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반응은 솔직하고 정직해야 한다. 나의 상황과 처지와 필요를 말씀드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살펴보면서 하나님과 쌍방향의 교제를 나누어야 하고, 만일 죄를 범하였으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닮아가며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배울 수 있다. 다른 방법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이 큰 사랑을 배우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지라도 참으로 연약한 우리는 때때로 두려움에 휩싸일 때가 있다. 그러나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더 가까이 그리고 더 깊이 알며 사랑하며 함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가르쳐 준 것처럼 우리는 사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참 사랑을 배우며 우리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현실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사랑은 그 현실마저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볼 수 있게 하며 나 자신을 사랑하고 또 교회를 사랑하며 결국엔 교회를 너머 이웃을 사랑하게 할 것이다. 그 삶이 얼마나 즐겁고 멋지고 아름다울지 예수님을 통해서 기대하며 우리의 본모습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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