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우고 예수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님을 시험함이더라.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가장 나이 많은 사람으로 시작하여 마지막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님과 그 가운데 섰던 여자만 남았더라. (요 8:2~9)
이 사건에는 네 명의 주체가 등장한다. 예수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간음한 여인, 그리고 군중. 이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이 가장 불쌍하게 여기신 사람은 누구였을까? 아마도 대부분 간음하다가 잡혀서 끌려온 여인이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녀는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가 살아났으니 가장 큰 현실적 은혜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면, 가장 나이 많은 사람들이 가장 큰 은혜를 받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하면 은혜의 시작은 죄에 대한 깨달음에서 오는데 가장 나이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자신들의 죄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와 은혜를 구할 수 있지만,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지 않고 권리를 요구한다. 의인으로서 받을 대가를 요구한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의인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고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따라서 사람이 스스로 의인이라고 간주하는 것일 뿐이지 진정한 의인은 아니기에 이것을 깨닫는 사람에게 은혜의 문이 열린다.
그런데 왜 나이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깨닫게 되었을까. 인생의 날이 많으면 많을수록 죄도 많아지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하루를 더 산 만큼 죄를 더 범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빠져 있다. 사람의 본성 자체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멀리하려고만 하기에 그렇다. 이 악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무시하고 사람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며 이 악에 기대어 호흡하는 모든 순간이 다 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루를 더 산 만큼 더 죄를 범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안다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는 있어도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수는 없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거부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이 이러한 상태에 빠져 있어도 자기가 이런 상태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죄성의 무서움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께는 전적으로 가능한 것처럼, 하나님은 사람의 이러한 상태를 뚫고 들어오셔서 사람이 스스로를 성찰하도록 만드신다. 그때에야 사람은 자기가 죄인임을 일시적으로라도 알게 된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이러한 측면에서는 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고 죄에 대한 인식이 영혼의 뿌리까지 내려가게 되면 그는 돌이켜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고 변하게 된다.
그런데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느낀 점 중에 하나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여간해서는 변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랜 시간 동안 생각이 굳어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새로운 생각이나 새로운 결심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는데 실제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경우가 너무도 많았다. 그래서 나이 많은 사람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청년 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더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힘들었다. 어쩌면 요즘 흔히 말하는 ‘꼰대’ 어른도 이러한 점을 지지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면, 나이가 많을수록 양심에 찔리는 순간을 더 많이 경험할 수 있으며, 따라서 청년에 비해서 나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기회가 더 많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더 많은 기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이 많은 사람들은 쉽게 변화되지 않은 것인가 하는 점을 고민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요한복음 8장의 본문을 묵상하면서 새롭게 깨달은 점이다. 그동안에는 현상적으로 나이 많은 사람들은 거의 변화되지 않으므로 그들과의 성경공부나 영적 훈련은 별로 소용이 없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내가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양심에 찔리는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믿음과 결합되지 않기에 그는 그 경험이 일시적인 것으로 끝나고 마는 경우가 절대적으로 대부분이라서 그는 변화되지 않는다는 결론이다. 그 경험이 그들의 믿음과 결합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살아온 세월 만큼 오랫 동안 그들이 보아온 한 상황 때문일 것이다. 그의 변화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는 아마도 처음에는 변화해 보려고 꽤 노력했을 것이지만 혼자서 잘 되지 않았을 것이고 몇 번 반복되다 보니, 나이 들고 이제는 패배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양심에 찔리고 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래 봤자 결국에는 도루묵일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변화를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러한 기회 자체에 대해서도 무디어져서 아주 잠시잠깐 그러려니 하다가 원래대로 돌아가고 마는 것은 아닐까 한다. 따라서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처방이 필요한데, 그것은 먼저 영적 지도자가 그의 처음 생각을 이끌어 최종적인 변화까지 끌고 나갈 수 있어야 하고 또 영적 공동체가 그의 변화를 함께 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결국 변화되지 못했으며, 그가 그러한 경험을 몇 번 거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패배주의적인 생각에 빠져서 어떠한 변화에도 소망을 잃고 말았던 것은 아닐까 하고 진단해 본다. 그리고 이 진단이 정확하다면, 영적 지도자와 영적 공동체라는 처방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영적 지도자와 영적 공동체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영적으로 하나 되어 서로 연결된 공동체이며, 또 그 공동체 안에서 영적인 성장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성령님의 사람을 의미한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는 대부분 어떤 은혜를 받고 새로운 결심을 할 때에 혼자서 해보려고 하는데 이런 상황을 깨트리고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하도록 하며, 또한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서로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 각자의 영적 성장까지도 혼자이지만 함께 하는 성장이 되도록 서로 권면하고 자극을 받고 가르치고 배워서 공동체 안에서의 나로서 성장하게 된다.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고아로서 혼자 자란 아이와 사랑이 넘치는 대가족에서 자란 아이의 차이와 비슷할 것이다. 전적으로 혼자서 영적으로 성장하려고 하면 처음에는 뭔가 되는 것 같다가도 금새 포기하게 된다. 영적 성장은 자신의 본성을 거슬러 이루는 것이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도 모르겠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누구나 막막하고 어렵다고만 느껴지기에 그렇게 된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영적 공동체와 영적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이 영적 공동체 안에서는, 양심에 찔린 것을 고백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고, 또한 변화되고 싶은 소망을 나누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 두렵지 않다. 모두가 성령님 안에서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예수님으로 옷 입고 있는 것처럼 또한 나는 너로 옷 입고 있고 너는 나로 옷 입고 있기에 나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고 너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므로 부끄럽지 않고 안타까움이 되며 서로 품어 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공동체 안에서는 누구나 서로 고백하며 도움을 청하며 함께 성장하기를 소망한다. 성령님이 공동체 안에서 모든 모임들을 주관하시고 사랑의 끈으로 묶어주셔서 서로가 서로를 자신보다 먼저 생각하며 모두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자 한다.
이러한 영적 공동체 안에서 영적 지도자를 따라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순종하면 변화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영적 공동체는 이러한 공동체여야 하고 영적 지도자는 이러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항상 기도하며 살펴야 한다. 이러한 공동체가 아니면 결국은 아무런 소망이 없다. 교회에서 모이더라도 항상 혼자인 것과 마찬가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큰 모순인가. 교회란 성도의 영적 연결과 모임인데, 교회로 모였으나 항상 혼자인 것과 같다는 말은… 이 모순을 깨트려야 소망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무엇보다도 먼저 제대로 된 영적 공동체를 이루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전적으로 성령님께 의존하며 성령님께서 하나 되게 만드시는 사랑의 끈으로 묶여 있으려고 애를 써야 한다. 누구든지 먼저 시작할 수 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등을 따지지 말고 누구라도 먼저 이러한 영적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며 노력해야 한다. 나이 많은 사람은 결코 변화되지 않는다는 말은 그 사람의 잘못 이전에 우리의 잘못이다. 우리가 영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면 그 사람도 변화되었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잘못 이전에 나의 잘못이다. 내가 먼저 영적 공동체를 이루려고 했더라면 우리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교회 전체가 변화되지는 않았더라도 성령님 안에서 영적 소통을 하며 영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러한 공동체를 향한 소망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다. 이 소망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자. 기도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항상 업드려 기도하며 간구해 보자. 하나님께서 새해에는 이루시리라.
'신앙과 위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교적 교회 (0) | 2022.02.26 |
---|---|
아브라함 언약의 체결 의식 (0) | 2022.02.08 |
교회 = 영적 공동체 (0) | 2022.01.06 |
결국 문제는 어떻게 사는가이다 (0) | 2021.12.23 |
일의 본질적 중요성 (0) | 2021.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