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명령이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기록에서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교회에 주신 마지막 명령이 선교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선교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양한 방법으로 선교를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교회가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다고 해서 또는 선교단체를 많이 후원한다고 해서 그 교회가 선교를 잘하고 많이 하는 교회일까? 그리고 교회가 선교팀을 운영하며 선교에 대해 교육하며 선교를 위해 헌신된 마음을 갖는 것이 선교를 잘하는 것일까? 우리는 과거에 선교에 대해 이러한 자세를 취해 왔다. 그래서 어느 교회는 선교단체 몇 개를 후원하고 있다더라 또는 어느 교회는 지금까지 선교사를 몇 명을 파송했다더라 하며 이렇게 선교하는 교회라는 것을 ‘자랑’했다. 그리고 그런 교회의 교인들은 자기들에 예수님의 명령을 잘 지키는 교회, 곧 선교하는 교회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말씀부터 뭔가 조금 다른 것 같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8~20).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명령에 해당하는 부분은 굵은 글씨체 부분이며 명령을 받은 사람은 모든 제자들이다. 또한 이 명령문을 분석하면 직접적인 명령어는 ‘제자를 삼으라’는 동사이고 나머지 동사처럼 보이는 ‘가서’, ‘주고’, ‘지키게 하라’는 분사이어서 ‘제자를 삼으라’는 동사를 수식한다. 그리고 ‘가서’의 의미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머물고 있는 장소인 예루살렘에서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씀에 나온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은 점진적인 개념이라기 보다는 동시적인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예루살렘에서 전도를 다 마치면 그 다음에 온 유대로 가서 전도하고 또 그 다음에는 사마리아로 가고 그리고나서 땅 끝까지 가서 전도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어디서든 머무는 곳과 물리적으로 가야 하는 모든 곳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 나오는 ‘가서’라는 단어는, 원문에 수동태 분사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성령님에 의해서 ‘감을 당해서’ 또는 ‘보냄을 받아서’의 의미로 보아야 하고, 지리적으로 어느 특정한 곳만으로 가라는 의미보다는 ‘머무는 곳이 어디든 세상으로 들어가서’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은 어디에 있든 세상으로 들어가서 – 다시 말해서, 너희끼리만 살지 말고 – 예수님의 대사가 되어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며 예수님을 증거하라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선교적 교회란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고 선교단체를 많이 후원하는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 보다 먼저는, 모든 교인이 자기들의 삶의 자리에서 세상을 향하여 예수님의 대사 곧,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교회가 바로 선교적 교회인 것이다. 이러한 교회가 하나님의 능력과 은사를 받아서 선교사도 파송하고 선교단체도 후원하면서, 세상의 모든 곳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아 예수님의 자녀로 살며 예수님을 증거하여 선교의 지평을 더욱 넓히는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작은 일에 충성할 때에 더 큰 일이 주어지는 것이지 자기 일도 못하는데 큰 일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선교적 교회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정의한다면, 그러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가장 기초적인 필요조건은 바로 교회가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교회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확립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이다. 또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의 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일꾼도 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일에 투입되어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결과를 얻는 일꾼으로 일하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교회는 구원의 확신이 충만한 모임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려는 몸부림이 충만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 몸부림이 예수님에 대한 증거가 되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각 개인의 몸부림을 통해서도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몸부림을 통해서도 예수님은 증거를 받는다.
모든 교회가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 함은 너무도 마땅한 일이다. 교회에 대한 정의 상, 교회는 선교적 교회일 수밖에 없다. 그저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것으로 또는 선교단체를 후원한다는 것으로 선교적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먼저 교회 자체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교회는 선교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또는 우리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단체를 후원하므로 선교적인 교회라는 생각은 뭔가 초점이 잘못 맞춰진 것이다. 우리 교회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고 있으므로 선교적인 교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적 교회라는 말은 이중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먼저는 교회 자체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공동체가 된다는 의미이고, 그리고 또한 복음을 모르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님을 증거하거나 또는 그러한 사람을 도와서 함께 한다는 의미이다. 첫번째 의미를 지키지 않는데 두번째 의미를 지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첫번째 없이 두번째만을 지키는 것은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복음은 전파되겠지만 교회에는 아무 유익이 없다. 오히려 자기 만족에 의해 교만이 싹틀 가능성이 더 크다. 따라서 교회는 먼저 첫번째 의미에서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 하고 또한 두번째 의미도 힘이 닿는대로 애써야 한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전하며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에 보낸 편지들은 바로 이러한 권면을 포함하였다. 교회는 먼저 예수님을 증거하는 공동체가 되고 또한 힘이 닿는대로 기도와 물질로 바울의 선교팀을 돕고 또 다른 교회들을 도우라는 권면이다.
2000년대 초에 일어난 일로 기억한다. 어느 대형교회 앞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교회 주차장이 좁다 보니 어느 교인이 차를 골목에 주차했었다. 다른 차가 지나갈 여유를 주지 못하고 주차하다 보니 연락처 쪽지만 차 유리에 놓고서 급하게 예배에 들어갔다. 조금 지나서 핸드폰으로 연락이 왔다. 이웃 사람이 지나가야 하니까 차를 좀 빼달라는 연락이었다. 그런데 이 교인이 말하길, 지금은 예배 중이니 나중에 예배 끝나고 빼주겠다고 하며 핸드폰을 끊었다는 것이다. 이 순간에, 제사를 드리러 성전에 가는 도중이라도 이웃과 화해할 일이 생각나거든 먼저 이웃과 화해하고 제사를 드리라는 주님의 말씀은 이 교인에 의해 철저히 무시되었고 예배는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단어가 되고 말았다. 벌써 10여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지금은 나아졌을까 싶다.
우리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했다고 해서 또는 선교사나 선교단체를 후원하고 있다고 해서 선교적 사명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그것보다 먼저 우리 교회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어 서로 돌보며 화합하고 있는지,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서 온 맘 다해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자. 이것이 선교이며 기초이다. 부족하면 하나님께 구하자.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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