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풀숨 2024. 8. 18. 03:12

이재연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면서 악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사랑이 넘치시는 분인데 어떻게 이 세상에 이렇게 악과 고통과 슬픔이 많은가 하고 질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많은 철학자들과 신학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여러가지 다양한 대답들을 들려주기도 하였으나 그 어느것도 완전한 대답이 될 수는 없었다. 사람이 아무리 천재라 해도 또는 천상의 메시지를 들었다고 하더라도 악에 대한 완전한 설명을 해줄 수는 없고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이 초월적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완전히 알 방법은 없다. 따라서 이 글 역시 완전한 해답을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여 악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더하고자 한다.

 

    악의 본질에 대해서 크게 세 가지 견해가 제기되어 왔다. 첫째는, 아우구스티누스 – 또는 어거스틴의 주장으로 악은 선의 결핍 또는 부재라고 하였다. 둘째는, 이레니우스나 라이프니쯔의 주장으로 악은 더 큰 선을 위하여 사람의 성장의 과정에 필요한 수단이라고 하였다 – 가장 단순하게 요약하면 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견해는 모두 악은 독립적이지 않고 선에 대비되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악은 선에 대해 독립적인 것으로서 악도 선과 동일한 위치를 차지하며 따라서 하나님도 악을 어떻게 할 수 없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러한 세 가지 견해 중에서 마지막 견해는 크리스천으로서 고려할 가치가 없다. 악이 선에 대해 독립적이고 하나님도 악을 어떻게 할 수 없다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분이 아니고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이 영원히 고통 가운데 산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견해를 따르기도 하겠지만 크리스천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주장이다.

   

    먼저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간단히 살펴 보면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악은 선의 결핍 또는 부재라고 이해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는 악의 질적 차이를 설명할 수 없고 또한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악 이외의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악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악은 선이 없는 것이면 없는 상태에서 더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즉 작은 악과 크고 더 위중한 악은 불가능하고 악은 그냥 하나의 악일 뿐이므로, 실제로 우리가 겪고 느끼는 악은 다양한 질적 차이를 보인다는 점을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악은 선의 결핍이므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악은 쉽게 설명이 되는데 우리가 겪는 실제적이고 물리적 악에 대해서 선이 결핍되었다고 해서 평생 고통과 슬픔 가운데 산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레니우스나 라이프니쯔의 견해를 살펴 보면 역시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인간의 성장 과정에 필요한 수단으로서의 악은 목적과 결과를 위해 과정이 희생되어야 하는 구조, 다시 말해서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이 일시적으로 필요하다는 구조를 지니고 있기에 여기에서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먼저 악의 실제적 물리적 발현은 일시적일 수 있지만 악 자체는 영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영원히 성장해야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영원한 성장을 위해서는 악도 영원히 존재해야만 한다. 비록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악은 일시적일 수 있지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악은 영원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인간의 성장을 위해서 수천 만명이 학살당하고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단지 인간의 성장을 위해서 인간의 욕심에 따른 이러한 학살이 일어나야 할 만큼 악이 필요한 것일까 하는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악은 무엇일까? 악의 본질은 무엇일까? 아우구스티누스나 이레니우스 역시 성경말씀에 기초하여 악에 대해 자신들의 견해를 정리하였지만 상기한 바와 같은 문제들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성경말씀을 기초로 해서 해답을 찾아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에 대해 로마서1~ 3장 말씀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성경말씀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악은 선을 거부하는 , 선에 대한 거부라는 결론이다. 악을 이렇게 정의하면 악의 본질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악과 의지의 관계성이다. 태초에 세상은 선하게 창조되었으며 악이 존재하지 않았다. 악은 악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선을 거부하려는 의지가 사람에게 생겨났고 비로소 악이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선을 거부하는 의지가 얼마나 강하고 극렬한지에 따라서 악의 크기가 결정된다. 그리고 그 의지로 인해서 고통과 슬픔이 따라온다. 왜냐하면 그 의지 때문에 심판이 필요하게 되었고 심판의 결과가 바로 고통과 슬픔이기 때문이다.

 

    악을 이렇게 정의함으로써 악이 실제적으로 성장의 과정에 필요한 것이기도 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악이 거부될수록 선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물론 악이 선을 드러낸다고 해서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악은 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을 통해 선이 드러나기에 성장의 과정에서 어느 정도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악을 보면서 그에 대비되는 선을 보게 되고 또한 악으로 인한 고통을 통해 선을 곰곰이 생각할 기회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한계를 갖는다. 우리는 선에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다가가야 선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 달빛을 보면서 햇빛에 대해 깨달을 수는 있지만 직접 햇빛을 보면서 해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과 같다.

 

    또한 악은 선에 대한 거부이므로 악은 마침내 사라질 수 있다. 선을 거부하려는 의지가 없어지고 오직 선을 향한 의지만 가득하면 악은 사라지게 된다. 악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고 우리 모두가 새로운 존재로의 완성이 이루어지면 우리 안에는 오직 선을 향한 의지만 가득하게 되고 세상에서 악은 영원히 사라진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며 창조의 목적에 맞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악을 허용하셨는가 하는 질문은 하나님께서는 거부당하는 수모를 감당하셨는가 하는 질문으로 바뀌게 된다. 하나님은 선이시기에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곧 선을 거부하는 것이며, 악은 의지와 결합되어야 가능한 것이기에 오직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에게만 악이 가능하다. 천사와 인간이다. 그래서 천사와 인간에게만 ‘타락’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하나님께서 거부당하는 수모를 감당하신 이유는 – 이제 천사는 논외로 하고 – 인간을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이자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하시겠다고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 수모를 감당하시지 않기 위해서 인간이 선을 거부한 순간 심판과 함께 인간을 없애버리시고 창조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다른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그 두번째 인간은 분명히 하나님께 여쭐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단 한 번 잘못했다고 없애버리는 사랑인가요? 그들은 그 사랑을 기대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거부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기꺼이 그 수모를 당하셨으며 인간을 사랑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직접 인간이 되어 인간의 모든 죄값을 대신 다 치르시고 인간의 편에 서시기로 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은혜를 베푸셔서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창조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이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되는 영광을 베풀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수모를 기꺼이 감당하셨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온 우주에 명확하게 드러났다. 이제 인간은 그 어떤 이유로도 변명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인간 스스로 선을 거부하여 악이 우주에 들어오게 했으며 그에 따른 심판으로 인해 온 우주가 고통과 슬픔에 빠지게 했으며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조차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더 악해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들이 온 우주에 항상 언제나 존재하며 하나님의 신격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고 하나님은 선이시기에 선은 항상 우리의 눈앞에 드러나 있음에도 선을 거부하는 의지는 나날이 더욱 깊어지게 되고 그에 따라 더 악해질 수밖에 없다. 마지막 날에 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그렇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악을 만드셨다고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을 악의 창시자라고 주장하여 자신들의 악에 대한 면죄부를 얻으려는 심리가 작용한 결과이다. 자신들의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기고 자신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악을 만드셨기 때문에 자기들이 악하게 된 것이지 하나님이 악을 만드시지 않았다면 자기들은 결코 악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항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것에 대해서도 명확하다. 하나님은 결코 악의 창시자가 될 수 없다. 악은 선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의미는 오직 하나님만 선 그 자체이시기에 악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말과 같다. 따라서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거부해야만 악의 창시자가 될 수 있는데 이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시므로 완전하신 하나님께 자기부정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악의 본질에 대해서 조금 더 명확하다. 선을 거부하는 또는 선에 대한 거부가 바로 악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이시므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바로 악이다. 악을 이렇게 정의하면 악에 대한 이해가 보다 더 성경에 맞게 이루어진다. 로마서 1~3장의 말씀들이 명확해진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는 진정한 소망이 생긴다. 악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반드시 사라진다. 고통도 슬픔도 사망도 사라지고 오직 선만이 영원히 함께 할 것이며 기쁨과 화평과 즐거움만이 영원할 것이다. 고통과 슬픔이 없어서 기쁨과 즐거움이 진정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참으로 어리석은 주장이다. ‘영원’이라는 삶을 살아보지 못한 우리가 영원한 기쁨을 판단하며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은 무한대의 시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원은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이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원이기에 그 영원에서 기쁨은 날마다 가능한 기쁨이고 지금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수천, 수만 배 더 크게 느껴지는 기쁨이 될 것이다.

 

참조: https://comfortye.tistory.com/134악과 고통에 대하여라는 글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