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풀숨 2022. 7. 26. 10:38

우리는 세상에 만연한 악과 고통을 바라보면서 우리 스스로의 무력감에 빠져 공중에 대고 불평한다. 세상이 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가, 하고 말이다. 그러면서 악과 고통을 근거로 해서 무신론자가 되기도 하고 또는 그 반대로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았다고 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능력으로 악과 고통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존주의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모두 그냥 내던져진 존재일 뿐이기에 그냥 그런 세상에 던져진 것뿐이다. 적어도 악과 고통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느껴진다.

 

악에 대한 기존의 이해

    무엇보다 크리스찬으로서 우리는 악과 고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나님께서는 왜 세상에 악을 허용하셨을까?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고통받는 것을 즐기시는 것일까? 여러가지 다양한 물음이 떠오른다.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안 계시기 때문에 이런 것은 아닐까? 크리스찬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 이레니우스, 라이프니쯔와 같은  오래전 크리스찬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많은 신학자들이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나름의 설명을 제시하였으며 심지어 존 힉과 같은 종교철학자들도 관심을 가지고 나름의 설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뭔가 깔끔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여러가지 다양한 설명이 제시된다는 사실만 봐도 이 문제는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이 문제는 뒤로 나중으로 놓여진다. 지금은 잘 모르지만 나중에 마지막 때가 되어 모든 것이 분명하게 될 때에는 알게 되겠지, 하고 후퇴해 버린다. 아마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것에 대해 우리가 생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은 지극히 작기 때문에 더 많은 초월적 지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때가 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 문제를 이해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과 악의 관계에 대한 문제, 특별히 “의롭고 선하시며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악을 허용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학문 분야를 신정론이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신정론을 다루었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문제를 입구에서 바라보았다. 즉, 선하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는 세상에 어떻게 악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하여 그 시작점을 항상 고민해 왔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어서 출구에서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 그것을 고민해 보면 이 문제에 대해 뭔가 다른 통찰과 이해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논의된 신정론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처럼 악 자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악 자체는 비존재이며 선의 결핍으로 이해하였으며 실제적인 악보다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악을 주로 다루었다. 다른 하나는 이레니우스나 라이프니쯔처럼 악을 인간의 영적 성장을 위한 과정에 필요한 수단으로 이해하는 시도이다. 모든 신정론은 하나님을 악의 창시자로 주장하지 않는다. 악은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왜 악을 허용하셨는가 하는 점이다. 심지어 과정철학에 기반한 과정신학이나 열린 신론의 경우에는 하나님조차 악을 어떻게 하실 수 없으며 하나님도 악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을 악의 창시자로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른 한편에서는 신정론 자체를 거부한다. 악의 존재는 하나님을 부정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능하시며 사랑이 넘치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 세계에 악을 허용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악이 불가능하든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든지 둘 중에 하나만 참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악은 실재하므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런데 과연 악의 존재는 하나님의 비존재를 증명하는 것인가? 악이 실재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존재하지 않아야만 하는 것인가?

    결론을 먼저 말하면, 이 문제는 인간들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인간과 자연 밖의 것을 탐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에 묶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무리 이성을 사용하여  초자연적인 것을 탐구한다고 하여도 그것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자연을 연구해서 초자연에 대해서 참인 진리를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뭔가 알아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확인할 기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것이고 각 의견이 나름 일리는 있지만 결정적으로 확실하다고 인정받을 방법은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창조주에 대한 증거라며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하지만, 다른 사람은 자연의 고통을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창조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동일한 자연에서 완전히 상반된 주장들이 나온다. 자연으로부터 초자연적인 진리를 연역할 수도 없고 귀납적으로 추론할 수도 없다. 모두 다 각자 가지고 있는 전제에 따라 해석한 자기 나름의 주장일 뿐이다. 악에 대한 문제도 동일한 것이다.

 

악에 대해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기

    이제 악과 고통의 문제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싶다. 입구에서만 바라보지 말고 출구에서 바라보면 뭔가 다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지금까지 대부분 악과 고통의 문제를 입구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아주 다양한 주장들이 제시되었지만, 출구에서 바라보면 훨씬 단순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악이 현재의 세상에 실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이 악과 고통의 문제에서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것과 그렇지 않다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우리에게 합리적인 것일까? 입구가 아니라 출구에서 보면 – 만일 출구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 당연히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것이 무조건 더 좋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끝장내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악의 문제에서 출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악은 영원할 것이며 자연과 인간은 영원히 고통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아마도 무신론자들은 이것을 감수하겠다고 할 것이다.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이며 인간은 그런 세상에 내던져진 것일 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만일 출구가 있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할까? 그냥 악과 고통이 너무도 끔찍해서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함이 전부일까 아니면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악과 고통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부자이고 건강하며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지라도 악과 고통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악과 고통의 문제를 출구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오직 두 개밖에는 없다. 악이 그 자체로 영원하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악을 끝장내고 악과 고통이 없는 세상이 미래에 나타든지, 이 둘 중에 하나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악과 고통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 심지어 무신론자들도 세상의 악과 고통을 바라보며 한탄하며 악과 고통이 없는 세상이 왔으면 정말 좋겠다고 말한다. 비록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말은 한다. 그러한 말이 그냥 하는 말인지 아니면 그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희망인지 그들 자신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증거라고 한다. 우리가 악과 고통의 문제를 출구에서 바라보면 우리 모두는 한 가지를 바라게 된다. 악과 고통이 반드시 끝나는 때가 올 것이라고 바란다. 악과 고통을 끝장낼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초월적인 존재, 곧 하나님뿐이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바라고 있다. 그리고 이 바람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며 언젠가 악과 고통을 끝장내실 것이라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악과 고통이 아무리 넘친다고 하더라도 희망을 갖고 인내하자. 하나님께서 언젠가 반드시 악과 고통을 없애실 것이다.

   이렇게 출구에서 바라보면 입구에 대한 생각도 조금 바뀐다. 만일 악과 고통이 영원하다면, 그것은, 만일 시작이 있다면, 처음부터 악과 고통이 존재했던지 아니면 세상이 곧 악과 고통이든지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악에는 어떤 목적도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그냥 악인 것이며 인간과 자연이 존재하지 않으면 악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에게 고통이기에 악이라고 명명된 것뿐이며 선과 악에 대한 궁극적 기준이 없다. 여기에서 불합리가 발생한다. 악은 영원한데 시공간에 묶인 인간과 자연에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서, 하나님께서 악과 고통을 언젠가 끝내실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악과 고통을 통제하실 수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허용하신 이유와 목적이 반드시 존재한다. 비록 지금 우리는 그것을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중에는 분명히 알게 될 것이며 우리 모두 충분히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악과 고통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힘을 갖게 되고 악과 고통에 짓눌려 살지 않게 되기에 서로를 위로하며 서로를 포용할 수 있게 된다.

 

결론

    이제 결론을 내려보면, 악과 고통에 대해 입구에서 바라보면 마치 미궁에 빠진 듯한 생각을 갖게 된다. 아주 다양한 주장들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도 명쾌하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초월적이며 초자연적인 것을 인간이 자기자신과 자연을 탐구하며 그것에 대해 결론을 내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을 출구에서 바라보면 매우 단순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모두가 악과 고통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만큼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바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이므로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언젠가 악과 고통을 반드시 끝내실 것이다. 그러므로 악과 고통에 대해 입구에서만 바라보며 의심에 찬 질문들만 던져놓지 말고 이제는 출구에서 바라보며 확신과 위로와 평안을 누려야 한다. 악과 고통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악과 고통에 대해서 입구에서만 바라보지 말고 출구를 향하여 생각해 보자. 그 어떤 무신론자라도 악과 고통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바람이 이루어지기 위한 유일한 희망은 오직 초월적인 존재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희망 없이 살든지 아니면 희망을 가지고 초월자를 바라보든지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 무엇을 진정 바라는지 마음 속 깊이 생각해 보기를 우리 모두에게 권면한다……

'신앙과 위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잃었다가 찾아진 것에 대하여  (1) 2023.03.26
사랑이란 무엇인가  (0) 2023.02.08
꼰대 목사  (0) 2022.03.27
선교적 교회  (0) 2022.02.26
아브라함 언약의 체결 의식  (0) 2022.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