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신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후 13:5)
성도는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져야 하는가 아니면 절대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인가.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게 보낸 서신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우리는 스스로 확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직하게 자신에 대해 생각하면 정말 그런지 자신이 없다.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고 또한 때로 악한 생각들이 자신을 사로잡는 것을 볼 때에 스스로 구원을 받았는지 또는 정말 믿음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이러한 생각을 우리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확하다. 그래서 청교도 목회자들은 교구의 신자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목회 상담의 사역에 힘을 쏟았다는 기록이 많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사람들이 잘못된 확신을 갖지 않도록 경계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과연 구원의 확신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구원의 확신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구원의 확신은 어디서 오는가
구원의 확신이 어디서 오는지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 성령님으로부터 온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절대 아니다. 내가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도 내가 만들어 낼 수 없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구원의 확신도 주어지는 것이며, 다만 성도는 그것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가르쳐준 진리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을 보고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성령님을 통해 연합하시기 때문이다. 이 연합은 결혼과 같이 언약에 의한 연합이기에 결코 깨어질 수 없다. 결혼하면 부부는 한 몸이 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와의 연합도 한 몸이 되는 것이며 이 세상 그 무엇도 이 연합을 깨트릴 수 없다. 하나님이 보증하고 계시기 때문에 사망이나 높음이나 환난이나 그 무엇도 이 연합에 끼어들 수 없고 이 연합을 깨트릴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연합이 어떻게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준다는 것인가. 그것은 이 연합으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게 되고 그 생명은 반드시 우리의 삶에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선행을 하는 것 이전에 존재 자체가 바뀌는 열매를 먼저 맺는다. 우선은 죄를 싫어하게 된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우리도 싫어하게 된다. 현실의 삶에서 우리는 죄를 싫어하면서도 죄를 짓는 모순을 경험하며 절망하기도 하지만 이 절망 자체가 역설적으로 증거가 되며,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예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즐기던 것을 이제는 싫어하고 점차 멀리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 고민하게 된다. 이 단계가 지나면 선행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한편으로는 모순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고민이 열매 맺는 선행이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선행은 나의 옛 자아가 죽고나서 새 자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 때에 내 삶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며, 이 모든 선행은 내가 스스로 인지하면서, 이로써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는 줄 확증하게 되는 것이다.
잘못된 확신에 대한 위험은 무엇인가
그러나 순서가 바뀌어서, 선행만을 생각한다면, 선행은 구원의 확신을 위한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착한 일을 했으므로 구원받은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를 착각의 늪에 가두는 것이다. 또는 찬송을 부르거나 기도 중에 눈물을 흘리며 감격한 것도 구원의 확신을 위한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나의 옛 자아가 죽지 않고, 즉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지 않은 상태에서도 나는 나의 목적을 위해서 선행할 수 있으며, 나의 안위와 보증과 안심을 위해서 나 스스로 무언가에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착각 속에서 나 스스로는 마치 구원을 받은 것처럼 확신을 가질 수도 있으나 이것은 나 스스로의 속임이자 기만이다. 특별히 기독교가 부흥하는 시대에는 분위기나 상황에 휩싸여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착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경적 확신과 거짓 확신에 대해서 목록을 만들어서 조목조목 설명하며 거짓 확신을 경계하였다.
구원의 확신이 얼마나 피상적이며 거짓된 착각 속에서 올 수도 있는지 명확하게 알고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예전에 내가 섬기던 교회에서 성경공부 시간에 구원의 확신을 주제로 공부할 때에 이렇게 질문하며 나누었던 적이 있었다.
“구원의 확신이 있나요?” “예”
“그럼 그 구원의 확신이 당신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나요?” “… …”
요즘에는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무조건 ‘나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아주 많다고 느껴진다. 아주 예전에는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다고 하면 조금 교만한 사람인 것으로 간주되다가 언제부터인가는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잘못된 것처럼 취급되기 시작했고 이제는 거의 모두가 무조건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대답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구원의 확신이 아직 없다고 하면 다른 사람의 눈치도 좀 보이는 것 같고 뭔가 큰 잘못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해서 애매하게 억지로라도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하는 분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태도와 권면은 명확하다. 스스로 깊이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모든 종교개혁자들과 그 후예들은 성도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며 살도록 목회 사역에 열심을 내며 권면했다. 특별히 시간을 내어서 구원의 확신 문제로 고민하는 성도들과 상담하며 그들이 구원이 어떻게 주어지며, 구원의 확신이 어떻게 오는지 알도록 돕고 설명해주고 그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도록 도왔다. 이러한 노력과 수고가 실천 신학이라는 것으로 열매 맺기도 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언제나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기를 원했고 그 삶은 그들이 온전하게 되는 것(고후 13:9)이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성도는 이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기 때문이다. 다만 온전하게 되는 것이 단번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여정에서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옛 자아의 습성을 이겨내고 새 자아를 통해서 내 삶에서 온전히 발현되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때때로 죄를 짓기도 한다. 그러나 온전하게 되는 것은 성도의 삶의 목표이다. 비록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완전하게 성취할 수는 없을지라도 한순간도 멈출 수 없는 목표이며,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이루어내는 기쁨이고,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만들어 가시는 은혜이다.
구원의 확신은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로부터 성령님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했는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다.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나의 삶의 목표가 바뀌는 것이며, 그래서 나의 삶이 바뀌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특별히 교회 밖에서의 삶 – 이웃과 회사 동료와 친구들을 섬기며 사랑하는 삶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을 확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 내가 어떠한 상태에 있든지 무조건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은혜와 지혜가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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